[연재소설]지구인이면 OK-3:이 남자, 외계인?!

박가애2007.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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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은 냉장고를 열었다.
그러나 우유도, 달걀도, 죽을 끓인다 해도 죽에 넣을만한 야채 한조각 보이지 않았다.

'아, 일하느라 장을 보지 않은지 한참 되었구나.'

가은은 다시 방문을 열고 백치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나,요, 시장, 봐,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그대로, 있어요. 빨리, 올, 게요. 알,았죠?"

"참, 여기, 텔,레,비,전, 켜, 놓고, 갈, 테니까, 보고 있어요. "

알아 들은 건지 못알아 들은 건지 남자는 연신 웃고만 있었다.

식료품을 살 수 있는 작은 시장은 전철역 근처에 있었고,
가은의 집에서 역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바삐 발걸음을 옮기며, 가은은 생각했다.

'라파엘의 그림 속 인물이 현실에 나타난다면 저렇게 아름다울까.'

상처난 얼굴이지만 천사 같다고,
마치 어둠의 세력과 전쟁을 치르다 실수로 기억을 잃고 지구에 떨어져버린 천사 미카엘 같다고, 가은은 생각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르네상스의 화가 라파엘의 그림을

가은은 참 좋아했다.
그 그림을 선물한 아저씨는 아버지의 십년지기였다.
딸이 없는 그는, 외국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가은에게 이런 저런 신기한 이국의 선물을

자주 안기곤 했고, 어린 가은을 그를 선물 아저씨라 부르며 무척 따랐었다.
그런 사람이 아버지를 배신했고, 가은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 후,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가은에게 호감을 표시해오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당장 다음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 된 가은에게 연애는 사치로 여겨졌고,
돌아오지 않을 사랑과 믿음 따위,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현성,
몇 백 명은 모여 있던 학교 축제에서, 가은을 위한 곡이라며,
기타로 아름다운 자작곡을 연주해 결국 가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아이,
가장 사랑하는 기타에 가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밤늦도록 가은에게 전화 연주를 들려주던 그 아이...

고아로 자라, 아르바이트로 학비며 생활비를 마련하던 현성에게,
가은의 아버지는 몰래 학비를 대주기도 하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현성은, 반드시 성공해서 은혜를 갚을 거라고,
너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했다.

처음 집안에 일이 닥쳤을 때만 해도 현성은,
걱정 말라고, 언제까지라도 내가 네 곁에 있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집이 넘어가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쓰러지시자,
마침내 그는 가은은 떠나고 말았다.

'네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 돌아오겠다'

는 메시지 하나만을 남기고..

일년 후쯤, 그가 미국 보스턴에 있는 버클리 음대에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막강한 재력을 가진 누군가가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오겠다는 현성의 말을, 가은은 믿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떠나버렸으니까..

그녀가 좋아했던 선물 아저씨도,
절대로 우리 가은이 혼자 두고 가진 않을 거라시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녀가 걱정없이 살던 시절의 친구들과, 현성마저도..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끔 꿈을 꾸며 흘리는 눈물이야 깨고 나서 잊으면 그만이었다.

어려서부터 동정심이 많고 마음이 여린 아이였던 가은은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도 벗어 줘버리던 아이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허튼 짓은 할 수 없었다.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 곳인지를, 그녀는 이제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변해버린 가은이,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국적도 모르는 남자를 위해 나는 듯이 시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남자인데,
자칫 혹 덩어리 하나를 떠안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가은은 싫지 않았다.

식료품은 가능한 좋은 것들로 골랐다.
예전 가은의 어머니가 하셨듯이 최고로 신선한 유기농 재료들을 살 순 없었고,
동네 시장엔 그런 물건들도 없었지만,
그러나 가은이 애용하던 떨이 코너가 아니라
제대로 된 물건을 파는 곳에서 쌀이며 당근이며 우유를 샀다.

"아유, 우리 깍쟁이 아가씨가 오늘은 왠일이야?
이거 안사가? 유통기한 이틀 남은 건데, 하나 더 붙여 반값이야."

계산대의 아주머니가 우유 한 병을 집어들며 물었지만,

"오늘은 필요 없어요."

하고 가은은 웃어 보였다.

"어머나, 아가씨 웃으니까 너무 이쁘네. 늘 화난 사람처럼 하고 다니더니만,
젊은 아가씨가 그렇게 웃으니 얼마나 좋아.
가게 안이 다 환해지네. 복사꽃 같애."

빈 말이라도, 기뻤다.

'내가 늘 찡그리고 다녔던가...'

가은은 계산을 하며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기쁘게 웃어본 기억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내가 좀, 각박하게 살긴 했구나.
그래서 저 사람이 내 눈 앞에 나타났나?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천사같은 사람이...'

방에서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가은은 얼굴엔 다시금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배고프겠구나, 그 사람. 얼른 가야지.'

옷깃을 여미며 가은은 다시 오르막길을 빠르게 올랐다.

"나 왔어요. 배 고프죠?"

새시로 된 현관문을 열고 주방 싱크대 위에 물건을 놓은 다음 가은은 방문을 열었다.

"어서, 와요."

남자가, 가은을 돌아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에요? 어떻게 갑자기 우리말을...?
그리고, 그 머리, 머리 색깔이...!"

나갈 때까지만 해도 분명 밤색이던 남자의 머리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와중에도 문득 어젯밤 그의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물들었던 기억이 났다.
늦은 밤이었고 피곤해서 잘못 본 것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당신 말대로 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깐, 당신의 마음이 들렸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다른 건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나요."

남자의 미소는 여전히 해맑은 것이었지만, 분명 아까와는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이, 이 머리는, 머리 색깔은 어떻게 된 거에요? 아까까진 분명히..."

가은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 그러네요. 지금 내 머리카락 색깔은 당신과도 저 사람들과도 다르군요.
그게 당신을 놀라게 했나요?"

자신의 머리카락과 가은의 머리카락, 그리고 텔레비전을 번갈아보며 남자는 물었다.

"그럼, 이렇게..."

남자는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밤색이 되는 것이 아닌가!

가은은 너무 놀라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난 자잘한 상처들도 어느새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다, 당신, 누구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가은은 물었다.

"말했지만, 어쩐 일인지, 다른 기억이 없어요.
깨어나 보니 이 방 안이었고, 울고 있는 당신을 처음 보았어요."

"아..."

간 밤의 꿈이 기억나, 가은은 살짝 볼을 붉혔다.

'잠결에 눈물을 닦아주던 따뜻한 손은, 저 사람의 것이었구나...'

가은이 가물거리는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남자가 다시 말했다.

"내 머리카락 색깔이 왜 당신과 다른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것이 당신을 놀라게 한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다는 건 알아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남자는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가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을 못하던 사람이 잠시 텔레비젼을 본 것만으로 말을 하고,
머리를 흔드니 머리카락 색깔이 변하다니...!

"그런데 나, 배가 고파요."

남자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 네, 네.."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온갖 생각을 접으며, 가은은 방문을 열고 싱크대 앞에 섰다.

'어쨌든 우리나라 말을 저렇게 잘하니, 죽을 끓이면 되겠지.'

당근을 씻어 잘게 다지던 가은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저 남자, 외계인...?!'

그 순간, 스스로 떠올린 생각이 너무 황당하고 놀라워,

가은은 그만 집게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앗! 아야..."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남자가 방 안에서 달려나왔다.

"아, 피가 나네요. 아프겠다...

잠시만, 손을 이리 줘 봐요."

남자는 피가 흐르는 가은의 오른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얼결에 남자에게 손을 잡힌 가은의 얼굴은 시월의 홍시처럼 붉어졌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고왔다.
흰 이마, 반듯하고 가지런한 눈썹, 바비 인형처럼 길게 드리워진 부드러운 속눈썹,
높은 콧날과, 새빨간 입술..
마치, 가장 아름다운 동양여성과 가장 아름다운 서양남성이 만나,
유리 온실 안에서만 고이고이 키워낸 사람 같았다.

그에겐 짧은 가은의 셔츠와 바지 때문에 조금은 우스운 모양새였지만,
남자를 바라보는 가은의 가슴은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제 됐어요."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뜨며 남자가 말했다.

"네?"

가은은 되물으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손가락엔 출혈이 멈추었고, 베인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어이 없는 표정으로, 가은은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당신 정말..."

'외계인' 이라는 단어가 목까지 차올랐지만,
아침햇살보다 눈부시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가은은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