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민화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처용문배이다. 당시의 처용문배는 전하지 않고, 조선 초기인 1493년(성종 24) 에 간행된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상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민화의 시작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민화의 역사는 우리의 궁금증에 비해 남아 있는 자료가 극히 미약하다. 18세기 이후의 상황은 어느 정도 밝힐 수 있겠지만,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윤곽조차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막막하다. 18세기 이전에는 남아 있는 작품이 드문데다 기록 또한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민화의 역사가 18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비록 직접 관련된 자료는 아니지만, 이미 고구려고분벽화를 비롯하여 오랜 세월동안 도자기, 불화, 판화 등 여러 미술에서 민화의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민화는 기본적으로 신분사회의 산물이다. 민화란 말 자체에 이미 피지배계층인 민간의 그림이란 뜻이 담겨있다. 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민화 역사의 시작은 신분사회가 형성된 시기부터 잡아야 할 것이다. 어떤 연구자는 선사시대 암각화(바위그림)를 민화의 시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암각화는 회화의 시원이지 민화의 시작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아직 신분제도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어떠한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각화는 우리나라 회화 및 조각 전체의 시원이지, 민화의 시작은 아닌 것이다.
고구려의 신분차별을 확인할 수 있는 안악3호분의 묘주도이다. 높은 신분을 크게, 낮은 신분을 작게 그려 이루어진 피라밋 구도는 당시 신분사회의 엄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신분제도가 정립된 시기는 언제인가? 바로 삼국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기록을 일일이 펼쳐보지 않아도, 이미 그림 속에서도 충분히 신분차별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안악3호분의 묘주도를 보면, 묘주는 크게 그렸지만 그를 시중드는 사람들은 직급에 따라 점점 크기를 작게 나타내었다. 이렇게 형성된 피라밋 구도는 이러한 신분의 위계질서가 표현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 시기에 신분차별이 엄격하였음을 의미한다. 민화는 이러한 신분제도가 발달한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화려한 조형의 안악3호분에 비하여 소략하고 빈약하기까지 한 매산리사신총(수렵총) 묘주도는 고구려시대 민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묘주도인 매산리사신총(梅山里四神塚)의 묘주도를 보자. 이 묘주도는 안악3호분(安岳3號墳)의 묘주도에 비하며 화풍이 매우 소략하다. 안악3호분은 왕의 무덤으로까지 추정될 만큼 시각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있지만, 매산리사신총의 묘주도는 시각적으로 매우 빈약하다. 이러한 조형적인 차이는 고구려시대의 궁중회화 또는 귀족회화와 민간회화의 차이를 시사하여 준다. 그렇지만 매산리사신총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의 무덤인지 고고학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단지 민화의 가능성을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5세기. (도판출처 : 국보 회화편)
부분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도판출처 : 꿈과 사랑) 단지 제재가 같다는 이유로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가 민화 수렵도의 기원이자 민화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매우 소박한 추론이다. 민화의 수렵도에는 몽고인이 등장하고 있어 무용총 수렵도보다는 고려시대 공민왕이 그린 수렵도나 원나라 수렵도의 전통을 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무용총의 수렵도 또한 민간의 회화임을 입증하기 어렵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민화의 시원으로 보자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는 민화의 호렵도와 수렵도가 제재로 볼 때 서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재가 유사하다고 같은 성격의 민화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지 제재가 같다는 이유로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가 민화 수렵도의 기원이자 민화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매우 소박한 추론이다. 무용총 수렵도가 민화의 기원이 되려면, 이 벽화가 민간화가가 그렸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고 아울러 5세기에 제작된 이 제재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19세기 민화로 전해졌는지에 대한 논중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용총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의 귀족 무덤이고, 민화 호렵도는 고려의 왕인 공민왕이 그렸다는 수렵도나 원나라 수렵도의 전통을 계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민화의 수렵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고구려인이 아니라 원나라, 즉 몽고인이기 때문이다. 제재는 비슷하지만, 수요층 또는 작가가 민간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조선시대에도 궁중회화와 민화는 제재상 상통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궁중에 설치된 그림에 백성 '민(民)'자를 붙여, 민화로 분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매산리사신총도 화풍상으로 볼 때 그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고, 이 고분이 누구 또는 어떤 신분의 무덤이냐가 밝혀짐에 따라 민화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한 시대가 늦은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보다 확실한 민화의 등장을 볼 수 있다. 바로 신라인들이 귀신을 쫒기 위해 집의 대문 위 붙인 처용문배이다. 헌강왕은 용왕을 달래기 위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을 어여쁜 신라의 여인과 혼인시켜 경주에 살게한다. 어느날 처용이 밤늦게 놀다 집에 들어와 보니 자신의 아내를 역신이 겁탈하고 있던 것이다. 이를 본 처용은 넓은 아량으로 역신을 용서하였는데, 이에 감동을 받은 역신은 문 앞에 처용그림을 붙여 놓으면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신라인들은 집집마다 처용의 그림을 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처용문배이다.
우리의 민화에 해당하는 중국 민간연화의 시작은 잡귀를 쫒기 위해 대문 앞에 붙이는 문신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새해에 문에 붙이는 그림을 문배라 하였다. 산둥성 웨이팡 량자부.(정병모 사진 2007)
그런데 처용을 민화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두가지다.
첫째, 동아시아 민간회화의 시작은 대부분 세시풍속과 관련이 깊다. 중국의 민간연화학자들은 처용문배와 유사한 문신(門神)을 민간회화의 시원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음력설에 해당하는 춘절에 잡귀를 쫒고 복을 불러들이기 대문에 문신을 붙였다. 이러한 풍속은 한나라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단절없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민화인 민간연화는 이러한 문신이 그 근간을 이루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이다. 베트남에서도 정월 초하루에 그림을 그려 문에 붙이고 선물로 주고 받는데, 이를 테트화라 한다. 이 테트화가 베트남 민화의 주류를 이룬다. 새해에 문에 그림을 붙이는 문배의 전통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 조선으로 전해졌다.
둘째, 처용그림을 궁중에만 붙인 것이 아니라 일반 가옥에도 붙였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 사람들은 너도나도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 위에 붙였고, 그 뒤 신라에는 나쁜 귀신과 질병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 너도나도라는 것은 처용문배가 백성들이 선호한 그림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처용문배는 민화임에 틀림없다. 고구려고분벽화에서는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면, 통일신라의 처용문배에서는 민화의 진정한 시작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사항이 기록으로만 전하고 실물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700여년 뒤인 1493년(성종 24)에 성현이 지은 [악학궤범]에 처용의 가면 그림이 실려있어, 처용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처용은 삼국유사의 내용대로 부드러운 인상에 너그러운 웃음을 띠고 있어 신라시대의 처용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우리 민화의 시작은 용왕의 아들인 처용의 너그러운 웃음에서 시작되었다. @ 정병모
민화의 시작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민화와 상상력 27
본격적인 민화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처용문배이다. 당시의 처용문배는 전하지 않고, 조선 초기인 1493년(성종 24) 에 간행된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상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민화의 시작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민화의 역사는 우리의 궁금증에 비해 남아 있는 자료가 극히 미약하다. 18세기 이후의 상황은 어느 정도 밝힐 수 있겠지만,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윤곽조차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막막하다. 18세기 이전에는 남아 있는 작품이 드문데다 기록 또한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민화의 역사가 18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비록 직접 관련된 자료는 아니지만, 이미 고구려고분벽화를 비롯하여 오랜 세월동안 도자기, 불화, 판화 등 여러 미술에서 민화의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민화는 기본적으로 신분사회의 산물이다. 민화란 말 자체에 이미 피지배계층인 민간의 그림이란 뜻이 담겨있다. 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민화 역사의 시작은 신분사회가 형성된 시기부터 잡아야 할 것이다. 어떤 연구자는 선사시대 암각화(바위그림)를 민화의 시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암각화는 회화의 시원이지 민화의 시작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아직 신분제도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어떠한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각화는 우리나라 회화 및 조각 전체의 시원이지, 민화의 시작은 아닌 것이다.
고구려의 신분차별을 확인할 수 있는 안악3호분의 묘주도이다. 높은 신분을 크게, 낮은 신분을 작게 그려 이루어진 피라밋 구도는 당시 신분사회의 엄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신분제도가 정립된 시기는 언제인가? 바로 삼국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기록을 일일이 펼쳐보지 않아도, 이미 그림 속에서도 충분히 신분차별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안악3호분의 묘주도를 보면, 묘주는 크게 그렸지만 그를 시중드는 사람들은 직급에 따라 점점 크기를 작게 나타내었다. 이렇게 형성된 피라밋 구도는 이러한 신분의 위계질서가 표현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 시기에 신분차별이 엄격하였음을 의미한다. 민화는 이러한 신분제도가 발달한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또 다른 묘주도인 매산리사신총(梅山里四神塚)의 묘주도를 보자. 이 묘주도는 안악3호분(安岳3號墳)의 묘주도에 비하며 화풍이 매우 소략하다. 안악3호분은 왕의 무덤으로까지 추정될 만큼 시각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있지만, 매산리사신총의 묘주도는 시각적으로 매우 빈약하다. 이러한 조형적인 차이는 고구려시대의 궁중회화 또는 귀족회화와 민간회화의 차이를 시사하여 준다. 그렇지만 매산리사신총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의 무덤인지 고고학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단지 민화의 가능성을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5세기. (도판출처 : 국보 회화편)
부분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도판출처 : 꿈과 사랑) 단지 제재가 같다는 이유로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가 민화 수렵도의 기원이자 민화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매우 소박한 추론이다. 민화의 수렵도에는 몽고인이 등장하고 있어 무용총 수렵도보다는 고려시대 공민왕이 그린 수렵도나 원나라 수렵도의 전통을 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무용총의 수렵도 또한 민간의 회화임을 입증하기 어렵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민화의 시원으로 보자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는 민화의 호렵도와 수렵도가 제재로 볼 때 서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재가 유사하다고 같은 성격의 민화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지 제재가 같다는 이유로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가 민화 수렵도의 기원이자 민화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매우 소박한 추론이다. 무용총 수렵도가 민화의 기원이 되려면, 이 벽화가 민간화가가 그렸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고 아울러 5세기에 제작된 이 제재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19세기 민화로 전해졌는지에 대한 논중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용총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의 귀족 무덤이고, 민화 호렵도는 고려의 왕인 공민왕이 그렸다는 수렵도나 원나라 수렵도의 전통을 계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민화의 수렵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고구려인이 아니라 원나라, 즉 몽고인이기 때문이다. 제재는 비슷하지만, 수요층 또는 작가가 민간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조선시대에도 궁중회화와 민화는 제재상 상통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궁중에 설치된 그림에 백성 '민(民)'자를 붙여, 민화로 분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매산리사신총도 화풍상으로 볼 때 그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고, 이 고분이 누구 또는 어떤 신분의 무덤이냐가 밝혀짐에 따라 민화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한 시대가 늦은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보다 확실한 민화의 등장을 볼 수 있다. 바로 신라인들이 귀신을 쫒기 위해 집의 대문 위 붙인 처용문배이다. 헌강왕은 용왕을 달래기 위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을 어여쁜 신라의 여인과 혼인시켜 경주에 살게한다. 어느날 처용이 밤늦게 놀다 집에 들어와 보니 자신의 아내를 역신이 겁탈하고 있던 것이다. 이를 본 처용은 넓은 아량으로 역신을 용서하였는데, 이에 감동을 받은 역신은 문 앞에 처용그림을 붙여 놓으면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신라인들은 집집마다 처용의 그림을 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처용문배이다.
우리의 민화에 해당하는 중국 민간연화의 시작은 잡귀를 쫒기 위해 대문 앞에 붙이는 문신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새해에 문에 붙이는 그림을 문배라 하였다. 산둥성 웨이팡 량자부.(정병모 사진 2007)
그런데 처용을 민화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두가지다.
첫째, 동아시아 민간회화의 시작은 대부분 세시풍속과 관련이 깊다. 중국의 민간연화학자들은 처용문배와 유사한 문신(門神)을 민간회화의 시원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음력설에 해당하는 춘절에 잡귀를 쫒고 복을 불러들이기 대문에 문신을 붙였다. 이러한 풍속은 한나라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단절없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민화인 민간연화는 이러한 문신이 그 근간을 이루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이다. 베트남에서도 정월 초하루에 그림을 그려 문에 붙이고 선물로 주고 받는데, 이를 테트화라 한다. 이 테트화가 베트남 민화의 주류를 이룬다. 새해에 문에 그림을 붙이는 문배의 전통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 조선으로 전해졌다.
둘째, 처용그림을 궁중에만 붙인 것이 아니라 일반 가옥에도 붙였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 사람들은 너도나도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 위에 붙였고, 그 뒤 신라에는 나쁜 귀신과 질병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 너도나도라는 것은 처용문배가 백성들이 선호한 그림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처용문배는 민화임에 틀림없다. 고구려고분벽화에서는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면, 통일신라의 처용문배에서는 민화의 진정한 시작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사항이 기록으로만 전하고 실물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700여년 뒤인 1493년(성종 24)에 성현이 지은 [악학궤범]에 처용의 가면 그림이 실려있어, 처용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처용은 삼국유사의 내용대로 부드러운 인상에 너그러운 웃음을 띠고 있어 신라시대의 처용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우리 민화의 시작은 용왕의 아들인 처용의 너그러운 웃음에서 시작되었다. @ 정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