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년에 걸쳐 4개 도시에서 6개의 언어로 완성했다고 하는 이 영화의 작품평이나 감독의 의도는 잘 모른다. 그리고 인간의 교만과 타락의 결과이자 언어 분리의 근원인 '바벨'을 이 영화의 제목으로 삼은 정확한 의도도 알지 못한다.
“영화의 힘은 보편적이며,
인간의 정서는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는 감독의 말을 생각해 볼 때 이 영화의 제목은 언어의 분리가 영혼의 소통에 장애가 될 수 없음을 반어적으로 상징한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내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이야기를 통해 심연을 진동하는 울림을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간직한 부부는 여행 중에 사고를 당해 일행으로부터 버림 받아 이국에서 고통당하며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이들을 방치한다. 아들의 결혼과 미래를 위해 타국에서 16년간 보모생활을 한 어머니는 순간의 선택 - 어떤 의미에서는 강요 당한 선택 - 으로 인생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눈물 흘리고, 남미의 사막에 버려진 어린 아이들은 탈진하여 고통받는다. 소리와 말을 빼앗긴 소녀는 소외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쌓은 벽에 갇혀 왜곡된 사랑을 갈구한다. 염소를 치며 자칼로 부터 가축을 보호하려던 호기심 많은 소년은 죽고, 결혼한 친구의 어머니를 국경 너머로 모셔드리기 위해 운전대를 잡은 청년은 도망하여 사라진다.
왜일까? 이 영화는 리얼리즘을 표방하여 인생의 비극을 보여주려하는 것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고달픈 굴레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지루할 뿐 아니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영화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가치있는 것인가? 이 영화를 본 사람 중 몇몇은 내 말을 듣고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거대한 사랑을 보았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차마 오래 잡지 못하던 아내는 죽음의 문턱에서 결국 인생의 절반을 함께할 사랑을 되찾았고, 젖먹이 때 부터 손수 키운 피부색 마저 다른 아이들을 사랑하여 결국 미래를 포기한 한 보모는 절망의 끝에서 친아들로 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소리를 잃은 소녀는 세상으로 부터 버림 받았던 것인가? 그녀의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가 보이지 않고 베란다의 문이 열린 채 커튼이 날리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마음 속으로 그녀를 향해 '죽으면 안되, 죽어서는 안된다.' 라고 수도 없이 외쳤었다. 결국 베란다에서 아버지는 딸을 안아주고 소녀는 눈물을 터뜨린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위험할 정도로 금기의 피치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결국 극도의 긴장을 형언하기 힘든 감동으로 해소해낸 감독의 역량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클라이 막스, 사막에서 잃어버린 두 아이는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가녀린 목숨을 구원받았다. 이 두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몰렸던 여인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타국의 낙후된 마을에서 피부색과 언어와 사고가 모두 다른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생명을 구하게 되며, 국가는 이 생명을 위해 이데올로기조차 포기한다.
그 뿐 아니라 영화의 엔딩크레딧에서 감독은
'To my Children,
Maria Eladia and Eliseo
...the brightest lights in the darkest night.'
라는 헌사를 통해 자녀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사랑마저 확증하고있다. 참으로 선언할 만한 헌사이며, 자녀에게 부끄럼 없이 바칠 만한 사랑이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지 않고 이 글을 읽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미안함이 앞선다. 타인의 주관과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진지한 감상을 방해할 수 있음을 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와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론 즐거운 대화에 동참하길 바란다.
[Review]Babel
2007년 2월의 끝에 만난 기묘한 드라마.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곧장 이 영화의 리뷰를 쓰는 나는
'Alejandro Gonzalez Inarritu(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라는 길고도 생소한 이름의 감독이 선사한 영화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2년에 걸쳐 4개 도시에서 6개의 언어로 완성했다고 하는 이 영화의 작품평이나 감독의 의도는 잘 모른다. 그리고 인간의 교만과 타락의 결과이자 언어 분리의 근원인 '바벨'을 이 영화의 제목으로 삼은 정확한 의도도 알지 못한다.
“영화의 힘은 보편적이며,
인간의 정서는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는 감독의 말을 생각해 볼 때 이 영화의 제목은 언어의 분리가 영혼의 소통에 장애가 될 수 없음을 반어적으로 상징한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내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이야기를 통해 심연을 진동하는 울림을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간직한 부부는 여행 중에 사고를 당해 일행으로부터 버림 받아 이국에서 고통당하며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이들을 방치한다. 아들의 결혼과 미래를 위해 타국에서 16년간 보모생활을 한 어머니는 순간의 선택 - 어떤 의미에서는 강요 당한 선택 - 으로 인생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눈물 흘리고, 남미의 사막에 버려진 어린 아이들은 탈진하여 고통받는다. 소리와 말을 빼앗긴 소녀는 소외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쌓은 벽에 갇혀 왜곡된 사랑을 갈구한다. 염소를 치며 자칼로 부터 가축을 보호하려던 호기심 많은 소년은 죽고, 결혼한 친구의 어머니를 국경 너머로 모셔드리기 위해 운전대를 잡은 청년은 도망하여 사라진다.
왜일까? 이 영화는 리얼리즘을 표방하여 인생의 비극을 보여주려하는 것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고달픈 굴레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지루할 뿐 아니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영화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가치있는 것인가? 이 영화를 본 사람 중 몇몇은 내 말을 듣고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거대한 사랑을 보았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차마 오래 잡지 못하던 아내는 죽음의 문턱에서 결국 인생의 절반을 함께할 사랑을 되찾았고, 젖먹이 때 부터 손수 키운 피부색 마저 다른 아이들을 사랑하여 결국 미래를 포기한 한 보모는 절망의 끝에서 친아들로 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소리를 잃은 소녀는 세상으로 부터 버림 받았던 것인가? 그녀의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가 보이지 않고 베란다의 문이 열린 채 커튼이 날리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마음 속으로 그녀를 향해 '죽으면 안되, 죽어서는 안된다.' 라고 수도 없이 외쳤었다. 결국 베란다에서 아버지는 딸을 안아주고 소녀는 눈물을 터뜨린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위험할 정도로 금기의 피치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결국 극도의 긴장을 형언하기 힘든 감동으로 해소해낸 감독의 역량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클라이 막스, 사막에서 잃어버린 두 아이는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가녀린 목숨을 구원받았다. 이 두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몰렸던 여인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타국의 낙후된 마을에서 피부색과 언어와 사고가 모두 다른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생명을 구하게 되며, 국가는 이 생명을 위해 이데올로기조차 포기한다.
그 뿐 아니라 영화의 엔딩크레딧에서 감독은
'To my Children,
Maria Eladia and Eliseo
...the brightest lights in the darkest night.'
라는 헌사를 통해 자녀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사랑마저 확증하고있다. 참으로 선언할 만한 헌사이며, 자녀에게 부끄럼 없이 바칠 만한 사랑이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지 않고 이 글을 읽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미안함이 앞선다. 타인의 주관과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진지한 감상을 방해할 수 있음을 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와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론 즐거운 대화에 동참하길 바란다.
길고 지루한 리뷰를 지양하려 노력하는 나를 힘들게한,
긴 이름을 가진 멕시칸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며.
2007.02.20. Tue
Jeong Chi Y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