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자립을 꿈꾸는 여성 가장 모임을 도와주세요

노원나눔의집2007.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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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자립을 꿈꾸는 여성 가장 모임을 도와주세요


노원나눔의집 부설 노원자활후견기관에서 일하고 여성가장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남편을 사별 또는 이혼 후 아이들과 힘겹게 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유기농 반찬가게 "장똑또기"를 만들어 경제적 자립공동체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제 막 시작이라 매우 어렵습니다. 이분들에게 희망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윤아무개 누님(37세)

 

윤누님은 ‘사고’가 있기 전까지는 남편과 9살, 7살짜리 아들 둘과 구로구 개봉동에서 단란하게 살았습니다. 집도 있었습니다. 융자를 “많이” 끼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윤 누님 가족 소유의 28평짜리 빌라였습니다. “아이들 다 클 때까지” 그 빌라에서 살자고 남편과 말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틀어진 것은 작년 11월이었습니다. 남편이 잠자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윤 누님은 아직도 사인을 모릅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던 윤 누님은 당장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막막했지만 일을 시작했습니다. 악세사리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못지 않게 윤 누님을 괴롭힌 것은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였습니다. 아빠가 없으니까 아이들이 동네 아이들로부터 자꾸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7월에 이 곳 상계동으로 이사왔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누가 물어보면 “아빠는 돈 벌러 외국으로 갔다”고 대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사 오면서 빌라를 팔았습니다. 융자를 갚고, 남은 돈으로 다세대주택에 전세를 얻었습니다. 면담 동안 내내 윤 누님을 눈물을 흘렸습니다. 초등학교 1, 3학년인 아이들은 복지기관을 통해 후원을 받아서, 오후에는 학원에 갑니다. 윤 누님이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아이들이 돌아오는 시간과 대충 일치합니다.

 

최 아무개(28세)

 

최씨는 2003년에 결혼하고 나서 1년만에 이혼했습니다. 지금은 네 살짜리 아들과 모자복지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혼한 이후에는 생계가 막막해서 생활정보지를 뒤지다가, ‘유아 관련 색칠하는 일’이 있다길래 가봤더니 책 파는 일이었습니다. 첫 한달 월급이 20만원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있는 화장품 판매직을 했는데, 거기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여기도 월급이 간신히 40만원을 넘겼습니다. 작년 4월부터 1년 동안 을지로에 있는 단추공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습니다. 단추를 손으로 매만지는 수작업을 했습니다. 한달 월급은 약 70만원 정도. 정규직으로 들어오라는 제안도 있었는데, 그냥 일용직으로 일했습니다. 정규직이 되면 수입이 잡혀서, ‘수급자’ 자격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곳에서 일을 하다가 “재고가 안 맞으면 물어내라고 자꾸 강요해서”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성수동에 있는 여성 인력 회사에 회원을 가입해서 일을 받았습니다. 연 회비 5만원, 월 3만원을 내면 일자리를 알선해줍니다. 그래서 알게 된 책 제본 회사에서도 오래 일했습니다. ‘오공본드’를 써서 책을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하루 일당은 단추 공장 보다 좋았지만, 항상 일자리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달에 일하는 날이 10일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머리가 자꾸 어지럽습니다.

최씨가 일하는 동안, 아들인 진문(가명)이는 어린이집에 맡깁니다. 얼마전에 진문이가 친구랑 다투다가 “너는 아빠도 없잖아”라는 얘기를 듣고는 울음을 터뜨렸답니다고 들었습니다. 진문이가 자꾸 아빠를 찾습니다. 얼마 전에 다가구 빌라를 신청했습니다. “전세집으로 이사 가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것”이 꿈입니다.

 

윤아무개(52세)

윤 누님은 지금 고 1인 딸과 친정어머니와 함께 주공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결혼 경제적으로 무능력했습니다. 윤 누님이 식당이나 옷가게를 하면서 가계를 꾸렸습니다. 그나마 남편과 갈라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남편의 ‘외도’였습니다. 1991년에 이혼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장사를 하던 윤 누님은 아는 사람이 갈비가게를 같이 하자고 해서 1996년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곧 금융위기가 닥쳤습니다. “바로 손님이 없어졌”습니다. 가게가 “망하”고 나서, 지하상가에서 악세사리를 팔았습니다. 1999년에 근로복지공단에서 모자가정을 위해서 전세금을 대출해줘서, 건어물 가게를 열었습니다. 이자를 매달 30만원씩 냈지만, 장사는 조금씩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3년 지나니까, 손해는 안 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형편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딸이 다니는 중학교에서 등록금을 면제시켜주겠다는 말이 나왔지만, 거절했습니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같이 사는 친정어머니가 폐암에 걸렸습니다. 수술비만 2천5백만원 나왔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의 전세금도 6년 기한을 마치고 빠졌습니다.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이번에는 오히려 이쪽에서 동사무소에 먼저 찾아갔습니다. 수급자 신청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도 빚이 5천만원입니다. 은행 대출 이자는 어떻게 갚는데, 사채 이자는 엄두도 못냅니다. 어머니도 아직 항암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나마 딸이 공부를 곧잘 합니다. 딸의 급식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두 달 전에는 딸의 담임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급식비 지원을 받았습니다. 딸은 뒤늦게 그걸 알아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딸에게 어머니는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딸이 똑똑해서 공부는 잘 하는데, 논술이 걱정입니다. 딸은 친구들 참고서와 문제집을 복사해서 씁니다. 딸도 이제는 “돈도 없는데, 굳이 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윤 누님은 밤에는 호프집에서 닭을 튀겼습니다. 저녁 6시부터 새벽1시까지 하면 한달에 70만원 정도 받습니다. 기관지가 약해서 그런지, 가슴이 너무 아파서 요즘에는 일을 잠시 쉬고 있습니다. 그는 “밤에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저 같은 경우는 도저히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박아무개(29세)

박 아무개씨는 월계동 임대아파트에서 5살 난 딸과 80세의 할머니와 함께 삽니다. 2001년에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져서 이듬해에 이혼했습니다. 아이가 7개월일 때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산 할머니와 함께 삽니다. 박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박씨의 돌을 전후해서 각각 사고와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혼을 한 다음에는 옷 공장에서 공원으로 일하거나 대형 할인매장에서 물건 진열하는 일을 했습니다. 각각 월 수입은 70만원, 85만원 정도였습니다. 남편은 재혼을 해서 애도 낳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요즘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딸은 아빠를 찾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딸에게 “아빠 죽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게 차라리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그 말을 고쳐주지 않습니다. 가끔 친구 부부와 만나면 딸이 친구 남편에게 매달리면서 좋아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나마 딸은 할머니가 봐주는데, 할머니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걱정입니다.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아기는 누가 봐줄지 “막막”합니다. 이곳 자활후견기관에서 하는 일이 좋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독립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