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산림육성이 대규모 홍수를 막았다

파란하늘200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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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2학년때인 1961년에 5.16 혁명이 일어났다. 그 당시 나는 부산 가야동에 살았는데 우리집은 전형적인 도시 영세민이었다.  

 

당시 농촌이나 도시나 할 것 없이 취사 및 난방용 연료는 火木이었다. 시골 부자집은 앞마당에 집채만한 짚더미를 쌓아놓고 취사용 땔감으로 쓰지만 뒤뜰에는 한달구지 정도의 장작을 쌓아놓고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난방용으로 사용한다.  

 

도시에서는 짚을 쌓아둘 수 없어 장작만을 땔감으로 쓴다. 도시의 부자집은 장작을 트럭으로 사와서 뒤뜰 처마밑이나 마루밑에 쌓아두고 사용하지만 영세민들은 장작가게나 제재소에서 그날그날 사용할 장작이나 각목을 사와서 집에서 도끼로 쪼개 쓰곤했다.  

 

도시 영세민인 우리집은 장작을 사 쓸 정도로 넉넉하지 못해 땔감을 구해 오는 일은 때때로 나의 몫이었다. 나는 마대를 둘러메고 동네 뒷골목이나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나무토막을 주워 오곤했다.  

 

지금은 지천에 깔린 것이 나무토막이지만 당시는 나무토막 한마대 구하려면 하루종일 도시를 헤매야 했다. 때때로 인근산에 올라가 갈비도 긁어오고 나뭇가지를 꺾어 오곤 했다.. 단군이래로 땔감이 화목이었기에 깊은 산골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대 5.16 혁명이 일어나고 얼마후 입산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나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갈 수 없었다. 그후 혁명정부에서 19공탄을 개발해 1차적으로 도시의 땔감문제를 해결하더니 점차 시골까지 확대되어 전국의 땔감이 화목에서 연탄으로 빠뀐 것이다.  

 

황장엽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남한에 와서 가장 인상깊게 느낀게 무어냐고 물어니 대학입시때 고교 선배들이 대학 정문앞에서 후배들을 격려하는 것과 산림녹화가 잘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오늘날 땔감이 화목에서 연탄, 기름, 도시가스로 바뀌어 모든 산이 울울창창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다. 봉건시대 군왕은 치산치수만 잘해도 후궁을 수천명을 두더라도 聖君으로 추앙받았다.  

 

敎育을 百年之計라 하고 育木을 十年之計라 하는 것에 견주어 보면 박 대통령은 최소한 10년후를 생각하는 지도자임에는 틀림없다. 만일 아직까지 땔감이 연탄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고층 아파트나 고층 빌딩문화는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다.  

 

국토면적의 67%가 산지인 우리 나라는 지세가 험하고 산지의 약 66%가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황폐하기 쉽고 비옥도가 낮다. 뿐만 아니라 연평균 강우량의 약 2/3가 여름철에 집중되는데다 겨울은 길어 나무가 자라는 데 좋은 조건이 아니다.  

 

인구증가에 따라 식량의 추가공급을 위해 전답이 더 필요해지고 이 때문에 산에 불을 놓고 태우는 개간과정이 산림을 파괴했다. 산림은 건축자재와 취사와 난방과 농업용자재의 공급원이므로 일단 산간에 인가가 들어서고 취락이 형성되면 계속적으로 산은 황폐해 졌다.  

 

산에 나무가 줄어들면 조금만 비가 와도 홍수가 되어 토사가 밀렸고, 하상(河床)은 논보다 높아져 큰비만 오면 제방이 터지고 전답이 매몰되며 조금만 가물어도 하천에 물이 흐르지 않아 한발(旱魃)피해가 확대되고 약한 바람에도 황토먼지가 뿌옇게 날리며 산속에는 새와 짐승들이 사라지고 시내에 물고기들이 종적을 감추는 등 생태계 파괴로 이어진다.  

 

1990년 현재 우리나라 산림의 나이별 구조를 보면 우리나라 산림의 65%가 ‘II 영급(齡級)’ 곧 20년생 미만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산림의 대부분이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심어진 어린 나무라는 뜻이다. 30년생인 ‘III 영급’ 나무는 1960년대에 심어진 것으로 전체 산림의 22.7%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나무는 일부 산간오지만 제외하고 모두 1960년대 이후의 산림녹화 운동기간 동안에 심어졌음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국토의 산지녹화에 완전 성공하여 산은 나무로 가득차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조림성공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식량기구(FAO)는 독일, 영국, 뉴질랜드 그리고 한국을 세계 4대 조림성공국으로 발표했다.  

 

독일, 영국, 뉴질랜드는 나무를 벌채한 만큼 꾸준히 조림을 하고 가꾸어서 계속 잘 유지하고 있는 경우이지만, 전국규모의 황폐화로부터 다시 산림을 완전히 복구한 나라는 한국이 초유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치산녹화에 대한 통치자의 지속적 관심은 개인적인 포한(抱恨) 내지 포원(抱寃)으로 소급된다. 대구 사범 3학년 때인 1934년에 금강산으로 수학여행하면서 남겼던 박 대통령의 시가 이를 증언한다.“금강산 일만이천봉, 너는 세계의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삼엄(森嚴)함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데 다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가 없구나.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희(正熙) 씀 -  

 

청년시절에 품었던 박정희의 포원은 집권하자 이를 해원(解寃)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5천년 역사의 가난을 벗겠다는 그의 정치공약은 가난의 현장인 국토를 겨냥했고 거기에 산림을 수복하겠다는 강한 정책적 지향이 포함된 것이었다.  

 

인류의 근대화 2백여년 역사에서 산업근대화(industrial modernization)에 이어 생태근대화(ecological modernization)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산업근대화는 환경파괴로 이어져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한국의 산업근대화도 환경파괴를 가져왔음은 구미경우와 다를 바 없지만 불행중다행으로 산림녹화에 성공함으로써 환경보존 내지 생태근대화라는 미래적 가치를 미리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산림의 가치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시장편익(市場便益)보다 단연 ‘비시장편익’에 있다. 비시장편익은 산림자원이 제공하는 공익적 서비스로서, 거주환경이 도시화되고 공해가 커질수록 점점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산림의 비시장적 편익은 (1) 국토보전적 가치, (2) 생활환경 보전적 가치, (3) 교육,문화적 가치, (4) 보건,휴양 공간적 가치이다. 생태근대화의 대표적 방법은 치산녹화만한 것이 없다. 생명의 근원이고 생태의 보고인 산림은 잘 관리하면 영속적 이용이 가능한 재생산 자원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도끼를 적절한 시기에 산림에 넣는다면 재목(材木)을 이루 다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할 것이다. 이렇게 산 사람을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 유감없도록 나라의 살림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통치자가 먼저 해야 할 일”이라 했는데 박 대통령은 바로 맹자의 가르침을 실현한 위정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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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대통령의  산림육성에  대한  집념과  열정 >>

 

미국의 한 하원 의원이 지난 1997년 여름 특별기로 북한을 방문한 후 바로 공해를 거쳐 한국 땅에 진입하면서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왔군” 이라는 탄성을 발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가 탄성을 내뱉은 이유는 더욱 주목을 끌었다. 얼핏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쪽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한국 영토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들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남북한 간에 천양지차인 산림 녹화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산하는 온통 붉은 빛을 띤 반면 남한은 녹색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킬 때만 하더라도 남북한 사정은 정반대였다.
한국의 산이 오늘의 북한처럼 벌거벗은 상태에서 푸른 옷을 입게 된 것은 불과 20년 안팎의 일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1984년 임업 통계 요람’에 따르면 남한 전체 임목 면적의 84%가 20년생 이하, 즉 나무 10그루 중 8그루 이상이 박정희 시대에 심어진 것이다. 그래서 유엔은 한국을 이스라엘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녹화 사업 성공 국가로 꼽고 있다.

산림 녹화에 대한 박정희의 의지는 1964년 12월에 서독 방문을 마치고 산림 관계자들에게 한 오기 서린 말 속에 배어 있다.
“산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는 유럽에 안 간다.”
경제 개발 자금을 얻기 위해 잔뜩 기대를 걸었던 서독 방문에게서 기대이하의 차관을 약속받은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는 이후 다시는 유럽을 방문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경제 고문으로 서독 방문 때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씨는 “박대통령은 서독의 정돈된 농촌과 푸른 산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 저렇게 될 수 있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집권 초의 박정희는 산림 녹화 의욕에 비해 경험이 못미쳤던 듯하다. 녹화 촉진 임시조치법(1963년 2월부터 1964년 12월까지의 한시법)을 마련하여 공무원, 학생, 병역 미필자들을 나무심기 사방 사업에 투입하는 등 강력한 산림 보호 시책을 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농산물 증산을 위해 개간 촉진법(1962년 2월)을 시행, 산지 야산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산림 녹화에 아이디어가 많았던 대통령)

어쩌면 이 시기에 박대통령의 머리는 수출과 산업화 등으로 가득 차 있어 산림녹화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는지 모른다. 박정희가 산림 녹화에 다소 소홀했음을 인정하는 듯한 대목은 1973년 1월 16일 손수익(한국경제사회연구원 회장) 경기지사를 산림청장으로 임명하면서 던진 ‘당부의 말씀’에서 어렴풋이 확인된다.
“고속도로, 공업화, 새마을 운동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치산 녹화가 잘 안되고 있어. 임자가 맡아 치산 녹화를 이룩해 봐.”

손 청장은 5년 8개월 간 재임하면서 집무실 입구에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 라고 써붙여 놓고 제1차 치산 녹화 10개년 계획(1973-82년)을 진두 지휘, 예정보다 4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했다. 손씨가 1996년 9월에 산림청이 주관한 ’치산 녹화 현지 순례‘에서 밝힌 회고담이다.

“1975년 박 대통령의 경기, 경북 연두 순시 때 수원에서 대구까지 대통령 전용차에 동승했습니다. 가시는 동안 경부고속도로 양편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150분 동안 무려 50건, 3분마다 한 건꼴로 지시했습니다. 받아 적느라 손이 저릴 정도였지요.”

임도(산불 진화나 병충해 방지 작업 등을 위해 만든 산길)을 횡으로 내도록 한 이른바 ‘추풍령식 조림’도 “큰비가 올 때 한꺼번에 흘러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볼 때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 같아 보기에도 좋다“는 박정희의 아이디어였다. 1977년부터 11월 첫째 토요일이 육림일로 지정된 것 역시 그 해 식목일에 박정희가 ”가을에는 자기가 심은 나무가 잘 자라는지 반드시 확인하라“고 지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박정희의 산림 보호 열성은 수천 년 이어온 한우들의 식성까지 바꿔놓았다. 농림장관과 초대 농수산부 장관을 지낸 김보현 씨의 증언이다.
“1972년 여름 경제 동향 보고 회의 때 박 대통령께서 ‘소에게 끓인 여물을 먹이느라 땔감이 많이 들어가니 생품을 먹이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고 합디다. 실험 결과 끓여 주는 것보다 영양가가 높게 나왔어요. 그 때부터 전국적으로 소에게 생풀 먹이기 운동을 벌였지요.”

1973년부터 벌어진 농가 아궁이 개량 사업, 1975년부터 나무와 수자원 보호를 위해 취해진 낙엽 채취 금지령도 그의 지시였다. 연탄 사용을 장려한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을 지낸 김의원씨는 “무연탄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탄광에서 인근 철도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우선적으로 닦았다”고 회고했다.

조립사업과 함께 진행된 사방 사업은 당시 산림 녹화의 핵심 사업이었다. 영일지구 사방 사업은 박정희 시대 가장 특기할 만한 국토 개조 사업이다.

1971년 9월 17일 우수 새마을 시찰자 이 곳을 지나면 박정희가 “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다 보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이 곳”이라며 완전 복구를 지시함에 따라 1973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1977년까지 총 공사비 38억 2,800만 원, 연인원 360만 명이 투입돼 황폐지 4,538ha를 녹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소요된 묘목만 2,400만 그루, 돌과 뗏장은 각 230만 개에 달했다.

일에 대한 초인적 열정으로 주위를 사로잡았던 박정희의 특징은 여기서도 그대로 발휘됐다. 당시 경북 도청 산림국장을 지낸 박상현 씨의 증언을 들어 보자.
“1975년 4월 17일 그 날은 폭풍우가 엄청나게 몰아쳤어요. 그런데 박대통령께서 해병대 지프를 가져오게 해 현지로 가자는 거에요. 영일 군청에서 브리핑 장소까지 헬기로 2-3분이면 되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지요. 폭 3m 미만의 비포장 도로를 기어가다시피 하는 동안 김수학 경북지사는 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혀 피멍이 들고 난리인데도 굳이 현장을 보시겠다니........”



(대통령의 ‘산불 담화문’)

박대통령은 곡강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주변 플라타너스 10여 그루가 2-3m 높이로 잘려 나간 것을 발견했다. 전봇대를 세우면서 전깃줄에 닿을 위험이 있다며 잘라 버린 것이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김 지사에게 “저거 누가 잘랐어? 20년-30년 걸려야 저런 나무 하나를 키워 내는데 그래 3만원짜리 전봇대 때문에 그걸 잘라냈단 말이야. 당장 조치해 보고하시오” 라는 불호령이 떨어 졌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열정이 아니었던들 일제가 1907년부터 50차례나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화전 정리 사업도 산림 녹화에 한몫 했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펼쳐진 이 사업은 공비 소탕 작전 하듯 군용 헬기까지 동원, 강원 경북 충북 등 깊은 산간 지방에 흩어져 있던 30여만 가구를 정리했다.
당시 강원도 철원, 화천군 산림과장을 지낸 김금철씨는 “화전 부락에 들어 갔다가 술 취한 화전민이 낫을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혼비백산해 도망간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전남 승주, 경북 상주 등지에서 대형 산불이 잇따르자 1978년 4월 ‘산불 예방에 관한 대통령 특별 담화문’을 발표한 것 역시 박정희의 산림 녹화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은 산불 담화문의 일부이다.

‘......... 산불을 낸 사람은 규모의 대소를 불문하고 처벌하도록 하는 동시에 산불이 발생한 지역의 군수 등 각급 행정 책임자를 엄중 문책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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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푸르른 계절이 되었다. 푸른 산을 볼 때면 나는 朴正熙 대통령이 생각난다. 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산에 나무 심는 일을 매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참 일에 열정을 불태우던 젊은 副理事官 시절, 새마을 擔當官으로 있던 나에게 東大本山에 砂防事業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東大本山은 月城郡 外東面과 蔚州郡 農所面 사이에 있는 큰 산이다 . 도꾜에서 비행기를 타고 우리나라 상공으로 들어오다 보면 이 산이 제일 먼저 눈에 잡힌다. 지금이야 녹화가 잘되어 푸르르지만 당시에는 헐벗은 민둥산이었다. 이 민둥산이 울창한 일본의 산을 내려다보며 날아온 방문객에게 처음 비춰지는 한국의 산이라는 사실을, 박대통령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방사업의 設計者 겸 현장감독이 되어야 했다. 현지에 가보니 동대본산은 정말 악산 이었다. 몇 년간 사방사업을 했지만 거듭 실패했다고 한다. 비가 오면 흙이 곤죽이 되어 무너져 버리는 특수토질이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방법, 저 방법 생각하다가 부산 의 어떤 토목과 교수로부터 자문을 구했더니 一般 砂防方式으로는 안되고 ‘特殊砂防工法’을 써야한다고 했다. 鐵筋을 넣어 콘크리트 수로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대로 해 보았다. 정말 대성공이었다.

청와대에 결과보고를 했더니 대통령이 주재하는 經濟動向報告會에 참석해 그 내용을 직접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나무가 꽤 자라난 일년 뒤에는 전국의 시장, 군수를 현장에 모아 녹화교육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실적이 있어서인지 ‘第1次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莫重한 과제가 내게 맡겨졌다. 워낙 농림부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던 내무부가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두어 달 밤낮없이 매달려 계획을 만들었더니 關係長官會議에서 計劃立案者가 직접 보고하라는 대통령지시가 떨어졌다. 보고날자가 잡혀졌다. 차트사를 붙잡고 보고 전날 밤 한 숨 안자고 일을 했지만 보고시간 10시에 임박해서야 겨우 차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차트를 들러메고 청와대 회의장에 도착하니 보고시간은 이미 10분이나 지나 있었고 박대통령을 위시해서 총리, 장관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낭패스럽던 생각을 하면 몇십년 지난 지금도 등에 식은 땀이 난다. 당황스러운 속에서도 심호흡을 하고 보고를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녹화10개년 계획의 기본방향으로 國民造林, 速成造林, 經濟造林의 세 원칙을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훔쳐보니 대통령의 눈빛이 빛나며 고개를 끄덕이고 계신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휴- 하고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준비한대로 찬찬히 브리핑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보고 중간 중간 대통령은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하셨다. 하나같이 산림녹화에 대한 熱情과 執念이 느껴지는 말씀들이었다. 師團長 시절의 에피소드도 이야기하셨다. 部隊 巡視 길에 플라타나스 가지를 지팡이 삼아 꺾어 짚고 다니다가 무심코 거꾸로 꽂아놓고 歸隊하셨던 모양이다. 나중에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다보니 거꾸로 꽂힌 지팡이에서 싹이 돋았더란다. 나무의 생명력에 감탄을 했다 하시며 파안대소를 하셨다. 그때 웃으시는 대통령 입안에 덧니를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 地方局長으로 승진한 다음에는 대통령을 자주 뵐 기회가 있었다. 매달 한번씩 청와대에서 새마을 國務會議가 열렸는데 이때 유일한 안건인 새마을사업 추진상황을 主務局長으로서 보고 드리곤 했었다. 모두 합해 21번 보고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대통령이 새마을 사업에 대해 가졌던 열정은 잘 알려진 바이지만 , 매 회의마다 그 분이 우리 농촌과 국토에 대해 가졌던 뜨거운 애정, 빈곤했던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한에 가까운 처절한 심정, 그리고 貧困을 克服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하려는 결연한 집념에 숙연해지곤 했다.

그뒤 나는 전남지사를 거쳐 行政首席이 되었다. 1979년 1월 3일에서 10월 26일 돌아가시기까지 열달 동안 바로 옆에서 대통령을 모셨다. 이 시절에는 대통령과 首席秘書官들과의 저녁 회식 자리가 잦았다. 그전에는 잘해야 한달에 한번 정도 만찬이 있었는데, 이 시절에는 매주 한번 이상이 될 정도였다.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외로우셔서 그러셨으리라 짐작한다. 朴大統領은 저녁에 곁들여 飯酒를 드시곤 했다. 막걸리 아니면 양주였다. 막걸리도 특별한 것이 아니고 고향군에서 만든 일반 막걸리였고, 양주는 시바스 리갈이 고작이었다. 반주를 드시면서 옛 이야기도 자주하셨다. 그러다가 가끔 흥이 나시면 “비탁” 칵테일을 만들어 돌리시곤 했다. 비탁이란 맥주 한병을 탁주 한주전자에 섞은 朴大統領 秘藏의 칵테일이다. 비탁 칵테일을 “調製”하시는 대통령에게 옆에 앉았던 내가 “조제는 제가 하지요”하니까 “어이, 이 사람, 이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당신은 配合比率을 모르지 않나”하시면서 젓갈로 비탁을 휘휘 저으시고는 우리들에게 비탁 칵테일의 사연을 들려주셨다.

일제하 대통령이 聞慶국민학교 선생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젊은 선생들이 ‘기린 비루’를 마시고 쉽기는 한데 워낙 박봉이라 마음놓고 마실 형편은 못되었다 한다. 그래서 추렴한 돈으로 비루(맥주) 두어 병을 사 탁주 한말에 부어 함께 돌려 마시곤 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구미 상모리에 대농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지주 집에서 모내기를 할 때면 온 동네사람이 모두가 품앗이를 했다 한다. 이 때 마을 아이들과 함께 박대통령도 따라 가곤 했었는데 그 때 지주 집에서 주던 밥과 반찬 맛이 어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호박 잎에 얹혀진 ‘자반고등어’ 한 토막이 그렇게 맛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통령이 마음속에 간직한 가난한 시절에 대한 한과 어떻게 해서든 가난을 극복하려는 무서운 집념 이 상대적으로 안영하게 성장한 나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오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뒤로 나도 비탁 칵테일을 몇번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해도 박대통령 이 만들어 주시던 그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살게 된 탓에 내 입맛이 변한 것인지, 배합비율의 비결을 몰라서인지, 아니면 그 둘 다 인지 알수 없다.

※편집자 주. 고건 전 총리가 서울특별시장 재직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회상하면서 쓰신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