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자와 방랑자

유형원200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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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자와 방랑자

문명의 수레바퀴를 굴린 주체는 안정성을 지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 증거는 선사시대 인류의 성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동물은 일정한 발정기간 동안만 짝짓기를 한다. 그러나 괴상하게도, 오직 인간만은 시도때도없이 섹스를 하곤 하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발육기간이 10년이 넘는 특수한 생물학적 조건 때문에 원활한 자녀양육을 위한 부부간 공동생활의 유지가 필요했고, 그러한 유지를 위해 인류가 진화학적으로 선택한 방법이 '지속적인 섹스'였던 것이다.

 

그 덕분에 패턴화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도식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모든 인간정신의 발현이 이루어진 것이다. 곧 결혼을 바탕으로 한 정착생활로부터 문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스러운 점은, 인류가 '지속적 섹스에 기반한 가정생활 영위'에 수백만년간 길들여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수컷(?)들은 그러한 패턴화된 삶을 거부하고 다른 암컷 짝을 찾아 끊임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점이다. 즉 세상에는 아직도 많은 바람둥이들이 존재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람둥이들은 씨뿌릴 기회를 많이 갖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일정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이 끈끈한 결속력을 보이며 자연선택의 경쟁세계에서 살아남아 우위를 점했다. 방랑자적 기질을 가진 개체의 자식들은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는 도태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문명이 성립한 이후에는, 꼭 수컷이 암컷과 자식을 보호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다 안전한 환경 속에서, '씨를 뿌릴'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었던 '방랑자' 족속들은 사회 속에서 거대한 구성비율을 잠식할 수 있었다. 즉 문명의 주체인 '정착자' 들이 일구어놓은 문명의 열매를, 정작 '방랑자' 들이 따먹는 패러독스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착자' 부류는 주로 모든 종류의 질서체계를 옹호하고 안정된 규범화 상태를 지향하는 특징을 지닌다. 행정가, 법률가, 보수적 정치인, 가부장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이 부류에 속한다. 반면 '방랑자' 부류는 답답한 규범질서, 도식화된 사고, 지나치게 경직된 시스템 등에 반대하는 경향을 지닌다. 아나키스트, 회의주의자, 비관적 철학사조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 부류에 속한다.

 

사회 안정기에는 '정착자'들이, 사회 변동기에는 '방랑자'들이 사회를 주도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 두 집단간의 변증법적 발전이 인류의 역사를 써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