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들을 '정신대'라는 말로 불러왔다. '정신대'는 전시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특별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 등을 지칭한 일반명사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1943년 이후엔 여자정신대 혹은 여자근로정 신대에한정해서 쓰이는 경향이 나타나다가 마침내 1944년 8월에 이르러 여자정신대근로령이 내려지게 된다.
이후부터 정신대란 말은 전쟁 노동력으로 동원된 여자에 한해서 쓰이게 된다. '여자정신근로령'에 의거하여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는 남성들의 전쟁 동원으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원래 다른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치루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집단적 성행위 장소인 군대 위안소-위안소는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감금해 두고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오로지 정욕만을 채우는 곳이었다.-를 제도화하고 식민지와 점령지에 있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전선으로 수송, 체계적으로 성노예의 역할을 강요했다. 강제 동원된 여인들은 위안소에 배치되어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야 했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고 불리어졌다. 하지만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은 강제성보다는 자발성을 내포하고 있어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국제적으로는 '성노예' 또는 '성폭력 피해자'라는 표현이 쓰이는데,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면을 잘 표현하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현재 이들을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매스컴을 통해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한 용어인 '정신대'는 이름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의미로 썼던 '정신대'라는 용어는 일제 식민지 시기인 1940년대의 신문기사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여자들에게 '정신대'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자근로정신대'를 의미했다. '여자근로정신대' 중에서 다수의 여자들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위안부'로 이용되었기에 '정신대'와 '위안부'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쓰이게 되었으나 정확히 따지면 같은 의미가 아닌 것이다.
일제 시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들은 모두 2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에서 대다수가 사망했으며 1992년부터 한국 정부에 신고하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은 2000년 12월까지 모두 158명에 불과하다. 이중에서도 돌아가신 분이 40 명 가량이고 실제로 생존해 있는 분은 정부의 통계에 들어 있지 않은 분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141명 정도이다. 이들 중 아홉 분의 할머니가 현재 사회복지법인 <나눔의 집>에서 공동으로 살고 계신다.
아래는 위안부에대한 일본측의 이야기입니다.
1990. 6. 6 시미즈 츠타오 노동성 직업 안전국장군위안부 업무는 국가 업무와 무관 민간업자들이 한 일로 실태 조사는 어려움 1991. 4. 24 오노마사야키 주일대사관 참사관정신대 강제연행 사실없음 보상문제는 65년 한-일 청구권 협상 체결로 종결 1994. 5. 6 나가노시게토 법상종군 위안부는 당시의 공창 미국과 영국도 위안부를 두었음 1994.12. 22 무라야마토미이치 수상개인보상 불가 종군 위안부 정책, 국제법 위반 아님 경찰청 조사결과, 해당자료없음 1996. 5. 30 이타카키다다시 자민당 참의원 의원종군 위안부, 역사적 사실이 아님 1996. 6. 5 오쿠노세이스케 자민당 의원위안부는 성행위에 스스로 참여한 것으로 국가와 무관 1996. 6. 6 이타카키다다시 자민당 참의원 의원 위안부는 공창제도, 국가의 강제 연행 사실 없음 前 일본군 '위안부' 김상희(73)와 면담한 자리에서 1996. 7. 1 오쿠노세이스케 자민당의원위안소는 업자가 운영 1996. 7. 18 이타카키다다시 자민당 참의원 의원군대위안부, 강제 연행만 한 것은 아님 남경사건 희생자 20만명, 근거없음 1996. 9. 20 사쿠라우치 요시오 자민련 중의원장군대위안부 강제 모집, 도와야만했던 전쟁의 배경위에서 생각해야 1996. 9. 23 와타누키다미스케 전 건설성장관종군 간호부는 있었으나 군대위안부는 없었음 남경사건 희생자 20만명, 근거없음 1997. 1. 15 에토다카미 자민당중의원일본관헌의(일본군위안부) 강제연행 사실 근거 없음 1997. 1. 25 가지야마 세이로쿠 관방장관당시 공창제도는 당연, 일부는 징집된 경우도 있음 1997. 2. 4 니시무라신고 신진당 중의원에토다카미 중의원과 가지야마 관방장관이 한 말은 사실임 1997. 2. 6 시마무라요시노부종군 위안부들, 일본군에 봉사한 일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 일본군 아닌 매춘중개업자들이 모집 모집 역할도 대부분 한국인이나 중국인 1997. 2. 6 나카가와 쇼이치 농림수산상강제 연행이 분명치 않으므로 교과서에 싣는 것은 부당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투표??
지금 CNN에서 일본의 위안부 사건 관련 문제에 대해서
사과를 해야 한다 / 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문제에 대해서
투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과를 해야하는 당연한 문제에 대해서 왜 80%가 넘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에 투표 한 것일까요?
이것은 일본 네티즌들이 몰아서 투표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참여하시고 싶으시다면 아래의 사이트에서
남자분 밑에 투표할수 있는곳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참여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느쪽이든 자신의 생각으로
참여하시는 것이니깐요.
http://edition.cnn.com/2007/WORLD/asiapcf/03/04/japan.sexslaves.ap/index.html
혹시 위안부가 무엇일지 모르시는 분들은 아래의 내용을 보십시오.
일본군 위안부'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들을 '정신대'라는 말로 불러왔다. '정신대'는 전시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특별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 등을
지칭한 일반명사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1943년 이후엔 여자정신대 혹은 여자근로정
신대에한정해서 쓰이는 경향이 나타나다가 마침내 1944년 8월에 이르러 여자정신대근로령이 내려지게
된다.
이후부터 정신대란 말은 전쟁 노동력으로 동원된 여자에 한해서 쓰이게 된다. '여자정신근로령'에 의거하여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는 남성들의 전쟁 동원으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원래 다른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치루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집단적 성행위 장소인 군대 위안소-위안소는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감금해 두고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오로지 정욕만을 채우는 곳이었다.-를 제도화하고 식민지와 점령지에 있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전선으로 수송, 체계적으로 성노예의 역할을 강요했다. 강제 동원된 여인들은 위안소에 배치되어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야 했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고 불리어졌다. 하지만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은 강제성보다는 자발성을 내포하고 있어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국제적으로는 '성노예' 또는 '성폭력 피해자'라는 표현이 쓰이는데,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면을 잘 표현하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현재 이들을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매스컴을 통해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한 용어인 '정신대'는 이름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의미로 썼던 '정신대'라는 용어는 일제 식민지 시기인 1940년대의 신문기사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여자들에게 '정신대'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자근로정신대'를 의미했다. '여자근로정신대' 중에서 다수의 여자들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위안부'로 이용되었기에 '정신대'와 '위안부'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쓰이게 되었으나 정확히 따지면 같은 의미가 아닌 것이다.
일제 시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들은 모두 2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에서 대다수가 사망했으며 1992년부터 한국 정부에 신고하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은 2000년 12월까지 모두 158명에 불과하다. 이중에서도 돌아가신 분이 40 명 가량이고 실제로 생존해 있는 분은 정부의 통계에 들어 있지 않은 분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141명 정도이다. 이들 중 아홉 분의 할머니가 현재 사회복지법인 <나눔의 집>에서 공동으로 살고 계신다.
아래는 위안부에대한 일본측의 이야기입니다.
1990. 6. 6 시미즈 츠타오
노동성 직업 안전국장군위안부 업무는 국가 업무와 무관
민간업자들이 한 일로 실태 조사는 어려움 1991. 4. 24 오노마사야키
주일대사관 참사관정신대 강제연행 사실없음
보상문제는 65년 한-일 청구권 협상 체결로 종결 1994. 5. 6 나가노시게토
법상종군 위안부는 당시의 공창
미국과 영국도 위안부를 두었음 1994.12. 22 무라야마토미이치
수상개인보상 불가
종군 위안부 정책, 국제법 위반 아님
경찰청 조사결과, 해당자료없음 1996. 5. 30 이타카키다다시
자민당 참의원 의원종군 위안부, 역사적 사실이 아님 1996. 6. 5 오쿠노세이스케
자민당 의원위안부는 성행위에 스스로 참여한 것으로
국가와 무관 1996. 6. 6 이타카키다다시
자민당 참의원 의원 위안부는 공창제도, 국가의 강제 연행 사실 없음
前 일본군 '위안부' 김상희(73)와 면담한 자리에서 1996. 7. 1 오쿠노세이스케
자민당의원위안소는 업자가 운영 1996. 7. 18 이타카키다다시
자민당 참의원 의원군대위안부, 강제 연행만 한 것은 아님
남경사건 희생자 20만명, 근거없음 1996. 9. 20 사쿠라우치 요시오
자민련 중의원장군대위안부 강제 모집, 도와야만했던 전쟁의
배경위에서 생각해야 1996. 9. 23 와타누키다미스케
전 건설성장관종군 간호부는 있었으나 군대위안부는 없었음
남경사건 희생자 20만명, 근거없음 1997. 1. 15 에토다카미
자민당중의원일본관헌의(일본군위안부) 강제연행 사실
근거 없음 1997. 1. 25 가지야마 세이로쿠
관방장관당시 공창제도는 당연, 일부는 징집된 경우도 있음 1997. 2. 4 니시무라신고
신진당 중의원에토다카미 중의원과 가지야마 관방장관이
한 말은 사실임 1997. 2. 6 시마무라요시노부종군 위안부들, 일본군에 봉사한 일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
일본군 아닌 매춘중개업자들이 모집
모집 역할도 대부분 한국인이나 중국인 1997. 2. 6 나카가와 쇼이치
농림수산상강제 연행이 분명치 않으므로 교과서에 싣는 것은
부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