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생폼사, 멋대로 살기

윤자영2007.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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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생폼사, 멋대로 살기


 

아직 이삼십대라면 청춘인데. 많은 사람들은 이미 중년이 된 것 처럼 행동한다.

끊임없이 꿈꾸고 직접 부딪혀 보기도 하고  거침없이 깨져보기도 하면서 즐길 일들이 가득한 세상인데도 말이다. 누가 우리들의 나이에 도식을 부여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 뿐인 인생 제대로 살기 위해선 제멋대로 살아볼 '용기'라는 이름의 주사를 찔러주고 싶을 정도다. 물론 요새처럼 각박한 세상, 일거리 없는 세상에서 '한량'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미간을 찌푸리고 젊음을 낭비하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이 일이 아니면 다른 일을 해보면 된다. 그러다 아니면 되돌아 오면 된다.

정말 대책없이 들리겠지만 '까짓껏' 이 악물고 덤비면 세상의 문은 의외로 쉽게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꿈 같은 얘기 한다고 하겠지만 마음 속에 꿈을 꾸는 일을 게을리 해선 안된다. 하지만 작은것에 충성하라는 성경의 지적처럼 내게 다가온 일과 만남에 있어선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언제 다가올 지 모르는 행운을 내것으로 삼을 수 있다. 마치 퍼즐을 맞추듯 모든 일들이 척척 맞아 떨어질 것이다.

 

"니가 몇살인데, 미쳤구나..."

명심하자!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다. 남들의 시선따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만 된다. 무조건 성공신화를 꿈꾸어서도 안된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고 성공이란 단어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실패와 좌절, 노력이라는 과정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와 장소가 있다. 하지만 꿈꾸는 사람에게선 빛이 빛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게되고,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리게 된다. 모든 일에 사랑과 성실로 하라는 성서의 지적처럼만 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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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일본

20살 대학입학과 동시에 자퇴. 누구나 원하던 대학신입생. 하지만 나는 남들과 똑같이 살기보단 '세계'라는 꿈을 꾸어보았다. 가까운 나라 일본. 오전수업이 마치면 매일같이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면 당장 생활비는 물론, 일본어 실력도 향상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제약은 장벽을 깨기 쉽지 않았다. 우선 집앞에 있던 중화요리집을 목표물로 삼았다. 그리고 매일 6시 정해진 시간에 찾아갔다. 하지만 늘 거절을 당했다. 그러던 하루, 한국요리사 자격증을 들고 찾아가서 오늘 하루 무료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 쳤다. 한국어로 된 자격증을 보시던 아저씨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이게 무슨 필요가 있냐고 하셨지만 무료로 일을 하겠다고 한 나의 마지막 말에 귀가 솔깃하였는지 허락해주셨고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설거지는 전자동이라 어렵진 않았다. 

 

그런 생활 중에서도 일부를 떼어 새벽 2시부터 4시까지는 학교 공부를 보충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매일 아침 일곱시에 눈을 떴으니 매일같이 고작 3시간이 나의 꿀같은 수면시간이었다. 또한 매주일은 일찍같이 교회에 나가 봉사를 하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신앙심이 깊었는지 아르바이트에서 번 수입의 일부를 봉헌하며 지냈는데 교회목사님께서 그것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해태 일본지사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렇게 내 하루하루는 빡빡한 스케줄로 채워져 갔다. 9시부터 12시까지 수업을 듣고 1시부터 5시까지 해태지사,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중화요릿집. 2시부터 4시까지 보충학습. 물론 부모님은 모르셨다. 하지만 이미 나는 성인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스스로 해보고 싶었다. 그런 빡센 경험을 해보니 이후의 삶은 누워서 떡먹기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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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호주

아르바이트덕에 돈이 꽤 모였다. 다행히 귀국할 때는 친척분들 선물까지 준비할 수 있었다. 돌아오기 며칠 전이었다. 일본어를 마스터했으니 자부심은 말로 할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뭔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뤘다는 성취감이라고 할까. 그러나 기쁨은 잠시, 친한 친구의 집에서 나는 또한번 말할 수 없는 좌절을 경험했다. 누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친구네 숙소는 외국인들이 함께 모여살던 기숙사였는데. 도무지 말이 안통하는 것이었다. 나름 본인들도 일본어를 배우러 온 듯 보였지만 영어가 마치 최고의 언어라도 된다는 듯이 미끄덩하게 굴려가며 말하는데...그 순간. 그 영어라는 장벽이 얼마나 높아만 보였는지. 이왕 공부한 김에 영어도 배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고, 나는 내친 김에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한 학기도 마무리 하지 않고 자퇴를 한 내 이력을 보더니 비자 주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분명 솟아날 구명은 있다는 게 내 신조이며, 꼭 가야겠다는 신념 하나만으로 찾던 중 결국 호주로 어학연수를 갈 수 있었다. 어학연수의 매력은 너무나 많지만, 우선 가장 값진 것은 뭐니뭐니해도 또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하며 외국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고 학습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미 목적 달성! 하지만 웃고 떠들기만 한다고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을 늘 잘 판단하고 긴장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역시 룸메이트 일본인 친구 덕에 일본어는 하루하루 느는 반면, 영어는 제자리걸음이었다. 하루는 안되겠구나 싶어 무조건 동전을 들고 공중전화박스로 향해 나갔다. 랜덤으로 아무 번호나 눌러 실례하면서 한마디라도 주절거리자. 그것이 내 목표였는데 수없이 반복하던중 너무나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중년부부는 나를 만나러 그 공중전화 박스까지 나와주셨고, 그 이후로 그분들은 나를 데리고 여행은 물론, 파티에도 초대해 주시는 등 딸자식처럼 돌봐주시고 아껴주셨다. 사실 우리의 인생길에는 때론 천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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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26살, 사회인으로

21살 짧은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마치고 돌아오자 한국은 IMF가 시작되었다. 실업자가 속출하고 거리로 나앉는 사람들로 서울역 일대는 연이은 뉴스거리가 되곤 했었다. 자살이 빈번히 발생하고 사회는 실의와 허망한 표정으로 가득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황을 누리던, 당시 주식이 하늘로 치솟던 대기업이 있었는데 나는 당당히 그 회사의 직원으로 뽑힐 수 있었다. 3차례나 되는 면접관과 마주하며 나는 실력과 진실을 보여드렸고, 4년제 졸업이상이라는 기준을 무시하고 막내로 열심히 일해달라는 부장님의 한 마디로 합격하였다. 내가 맡은 일은 영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는 일이었다. 사회생활과 동시에 나는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리라 결심했다. 내가 가진 실력을 좀 더 개발하려 노력했고, 더욱더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하루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프로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곤 하였다. 새벽 영어학원은 필수였고, 회식자리 및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최선을 다했다. 사회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관계 속의 노하우"였다. 각 사람들의 태도와 성향을 재빨리 읽어낼 줄 아는 능력 그리고 조화롭게 맞춰나갈 수 있는 스킬. 물론 그 두가지를 배우기 위해 또 수많은 우여곡절이 따르는 노릇이지만. 그것조차 인생이니만큼 즐겁게 매맞고 지나간다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던 어느날, 멋진 커리어우먼의 모습은 멀리 저멀리 사라져 가고 점점 도태되는 듯한 느낌과 더이상 새로울 것이없는 매너리즘에, 동갑내기 신참이 일년후 그 잘난 졸업장이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대리로 승진되는 것에 분노한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분명 정체된 내 삶의 쇼크였다. 내 모습은 너무나 초라해 보였고 내 미래역시 비굴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안 FM에서 나오는 한 마디의 멘트가 나를 찔렀다. 공자는 서른을 가리켜 뜻을 이루는 나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립(以立)' 나의 즉흥적인 성격에도 문제는 있지만,(나는 모든 순간 드는 생각에 늘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다. 그것이 내 운명의 소리일 수 있기 때문에.)나는 그 순간 야간 입시학원으로 향했고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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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 다시 대학생으로.

"공부는 진짜 하고 싶을때 해야돼, 그래야 맛을 알아." 항상 낙천적이었던 내 고등학교 주일학교 선생님이자 친구의 아버님께서 분반공부를 할 때 말씀해 주신 한마디를 내가 다시 생각해낼 줄이야. 꿈의 대학이었던 곳에 입학하며 더없이 행복했던 날, 한참 어린 동생들 틈에서 조용히 숨죽여서 공부하던 날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어느 현인의 문장을 수첩 가장자리에 새겨넣고 캠퍼스를 누비며 나는 나의 가능성을,  나의 자유의지를 100% 발휘할 수 있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인생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을 하듯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멋진 스케치를 그려 두어야 한다. 평소 두서너가지의 일을 벌려놓아야 마음이 편한 성미탓에 나의 대학시절 또한 한 가지 일로 만족하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일을 벌리곤 했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때부터 3학년 봄경 까지는 미디어 다음 통신원으로 그리고 나서 바로 3학년 1학기때는 신월동에 있는 방과후 교실의 선생님으로 이중 살림을 꾸려왔다. 유명 인사와의 인터뷰는 물론, 사회의 부조리를 두 눈으로 목격하는 등, 그야말로 내 대학생활 4년은 그 누구보다 멋졌으며 자유로웠고, 열정적이었다. 열정은 모델이 될 수 있다. 열정에선 힘이 느껴지며, 그 열정은 또다른 누구에게 전염되는 성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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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졸업 그리고 이탈리아.

4학년 여름 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냉정과 열정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피렌체 두오모가 보이는 언덕에 섰을 때,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또 다른 바람이다. 내 인생의 바람. 나는 그 순간 이후로 이탈리아를 꿈꾸기 시작했다. 꿈은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편협한 시각안에 살았음을 유럽의 한 땅에 서서 느낄 수 있었다. 토익성적 만점을 받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 않아도, 면접에서 남을 누르기 위해 살을 빼고 성형을 하지 않아도, 혼기에 꼭 결혼을 하지 않아도, 그럴싸한 차를 타지 않아도, 출신학교를 묻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서 나는 또다른 십년을 준비할 것이다. 당당하고 신나게. 자유롭고 멋진 젊음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