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사이에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 정체성에 관한 책을 2권 읽었다. 그것은 에스테 빌라의 『길들이는 여자들 길들여진 남자들』과 이 책『나는 나』이다. 둘 다 저자가 여성이다 물론 이 책은 얀베르크의 구술을 바탕으로 그녀의 친구 데사이가 기록하긴 했지만, 얀과 데사이 모두 여성이므로 저자가 여성이라는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이 책 자체만도 시선을 끌지만, 앞의 책과 비교하면서 읽는 것은 더 흥미로웠다. 물론 의도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다른 관점으로 쓰여진 책이라 그런지 자연히 비교가 되었다.
어려운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 읽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똑같은 소리,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숨 푹푹 쉬는 듯한 어조로) 자신의 출신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과 비애를 표현한 부분이 너무 많고, 때로는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얀이 충분히 비애를 느낄 수 있다고 이해하는 면이 강했지만 자신의 상황을 자신의 출신에 의한 자기외적인 요인에만 있는 듯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듣자니, 약간 짜증이 났다.
물론 얀의 주변에서 정성껏 계속적으로 그녀의 자존감을 일깨워주고, 그러한 불우한 출신과 환경이 그녀의 잘못이 아님을 느끼도록 한 인물이 없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안타까운 점은 있으나, 지나치게 자신을 ‘보육원 출신, 엄마는 창녀...’라는 틀 속에 가두고 있는 점은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자신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음에도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만든 틀 속에서 헤맸던 것은 아쉬웠다.
얀은 그녀의 남편과 충분히 동등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틀 속에 갇힌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더욱 자신을 억누르기에 바빴고, 자신의 정당한 의견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 그것을 그녀의 불우한 출신에 대한 것으로만 돌리기에는 동정은 가지만, 좋게 보이진 않았다.
자신의 자존감을 잃고 감정을 억누르는 것으로 가장 고통 받은 이는 당연히 얀이다. 하지만 그것이 쌓이면 어지간히 이해심이 많지 않는 주변 사람이라면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나또한 동정보다는 답답함이 더 컸다. 이 답답함이 이 책이 잘 읽히지 않게 하는 주요인이기도 하다.
물론 현명하고 이해심 많은 남편이라면 그것을(틀 속에 갇힌 아내의 행동, 생각) 보듬고, 그녀가 부정적인 틀을 깨는 것을 도우고, 자존감을 일깨우고, 또한 배려해야 한다. 하지만 얀의 남편 볼프강은 남편으로서 평균이하의 남자였다. 그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틀 속에 가두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폭력과 바람까지 피웠다. 그러한 점은 충분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책은 볼프강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단지 조연일 뿐이다. 주인공은 얀이다. 그래서 얀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내가 볼 때 얀과 볼프강 사이의 부부관계의 깨어짐은 볼프강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얀도 그에 못지 않은 책임이 있어 보인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고 힘들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숨김으로써 개선의 여지를 없앴고, 안 그래도 평균이하의 남편의 이해와 배려를 더욱 멀게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솔직히 그다지 멋져 보이지 않았다. 영화처럼 마지막에 극적인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을 보면 전남편이 잘 나가는 정치인 출신이었고, 얀은 불우한 환경출신이었다는 것. 즉 출신의 문제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부부관계가 깨어지는 과정, 그녀가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속의 내용을 들추어 내다보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그녀의 행동과 말 사고방식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시도를 어느 정도 하다보니 너무 길어져 진이 빠져 그만두었다. 그래서 하나하나 내용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야기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얀은 한마디로 극과 극을 오가고 있어 보인다. 한쪽은 자신의 자존감이 무참히 찌그러져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출신의 문제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근본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출신의 문제를 핑계로 자신을 그다지 높게 보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과거의 잃어버린 자존감을 만회하려는 듯이 (과격한) 여성운동가(?)가 있는 곳이다. 그녀는 과거 오랫동안 너무 한 쪽에 쏠린 상황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리 판단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그래서 그녀가 여성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하기에는 아직 벅차 보인다. 물론 그녀가 처음부터 의도하고 그런 것(강의, 조언)은 아니다. 여성센터 같은 곳에서 일하다가 여성 관련 주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안하고 억압된 심리가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얀의 강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짧게 책에서 언급된 것들로 판단한다면 그녀의 강의는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치료받는 과정에서 다른 중독자를 치료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타인보다 자신의 치료가 더 시급하다. 그녀 스스로가 불완전한 상태임에도 여성에 대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의 남편의 지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그녀도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녀는 그 강의를 통해 그녀 스스로는 긍정적인 효과를 본 것 같다.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무언가를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강의를 듣는 또 다른 여성들이다. 누구에게나 이런저런 감정들이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철학이 확고하지 않은 사람은 누군가가 선동하고 특정한 점을 부각시킨다면 그 자신도 그것에 동화되어 진실을 왜곡하거나 사실보다 다소 과장되게 특정한 부분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얀의 강의는 본인외에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지 않다.
얀의 얘기 중에 귀기울일만한 것도 있긴 하지만, 다소 이중적인 모습도 제법 보인다. 거기에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포함한다. 볼프강이 다른 여자와 관계한 것을 두고 ‘불륜’(책속에서 불륜이란 단어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길게 늘여 놓았다)이라 표현했다면 얀이 차후에 만난 마틴과의 관계는 애틋한 멜로 드라마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로의 이성 파트너를 대해서 간섭하지 말자는 개방결혼을 먼저 제의한 것도 얀이다. 물론 마틴과의 성적인 관계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남편이 먼저 배신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내가 볼 때는 둘 다 똑같은 불륜’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자신의 사랑을 애틋하게 표현하고자,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변명처럼 들렸다. 그녀 또한 남편과 정리를 한 후 또 다른 남자를 만나야 했다. 물론 볼프강의 불륜파트너 숫자가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았지만, 그 숫자가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쓰레기를 많이 버린 것이 훨씬 나쁘지만, 아무리 작은 양이라도 쓰레기는 쓰레기다.
볼프강을 옹호할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지만 볼프강이 이책의 저자였다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다. ‘밖에서의 치열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집에서만은 편안함과 나의 일을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아내와의 대화를 원했다. 하지만 아내는 항상 어둡고 집에서 너부러져 꾸미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한 아내의 모습에서 그 어떤 편안함도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그즈음에 A라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적어도 가식적일지언정 내게 편안함과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우리는 점점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
이 가상 스토리를 꺼낸 것은 볼프강의 불륜을 이해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얀이 나중에 남편의 불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자신의 불륜에 대해서는 미화하려고만 하는 것이 이중적이고 미성숙한 한 인간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웠기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여성운동가(?)로서 큰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 나름대로의 활동을 한 듯 같다. 하지만 여성운동’이라는 구호 자체가 차별을 부추긴다. 더구나 그 대표자는 일반적인 여성을 대변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인물이 많아 보인다. 오히려 그 주제(여성운동)를 통해서 자신의 조금은 극단적인 철학을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주입하려 하거나 자신의 활동욕구를 그런 식으로 표출함으로써 자기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운동이 아니라 ‘인권운동’을 해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활동이어야 한다. 과거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여성의 인격과 대우는 남성에 비해 많은 차별이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엔 인권운동이 아닌 여성운동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그런 여성운동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여성운동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내세워 또 다른 불평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그건 진정 필요했던 과거의 여성운동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비판했던 남녀차별의 원흉인 나쁜 남자들의 행태를 나쁜 여자들이 바통을 이어 받는 꼴이다. 인권은 남녀 모두에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여성부라는 기관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회약자를 위한‘인권부’혹은 그런 의미를 담은 다른 이름이 적당하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그 기관을 없애는 게 낫다. 아무튼 국가기관이 남녀차별을 부추기는 행태가 정치인들의 수준인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누가 정답이고 아니고를 분별할 수는 없다. 그리고 분별할 필요도 없다. 각자가 생각하는 정답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과 뒤섞여 사는 세상 속에서 산다면 근본적인 굳건한 자기철학도 중요하지만 그와 아울러 타인과 소통하고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 유연함과 융통성도 발휘해야한다. 얀은 그녀 스스로가 자기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빈센트를 만나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다. 그녀도 점차 안정을 찾아 극단적인 자세에서 점차 유연함을 발휘 정도의 여유를 찾아가는 듯 해 보인다. 다행이라 여겨진다. 이 책의 원작이 쓰여진 시점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아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책의 후반부는 그렇게 절반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우리는 극과 극을 유연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뭉쳐 있는 중립지대를 포함해서 극과 극의 사고방식인 사람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극단적일 필요는 없다. 단지 ‘그런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이해할 정도면 된다. 인간은 남성, 여성, 혹은 좌익, 우익으로 양분하는 어리석음을 발휘하지 않아야 한다. 우울할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다. 억지기쁨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자기감정을 이해할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컨트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면 된다. 그리고 이왕이면 자기감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구하고자하는 의지를 보이면 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무언가 큰 게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마무리는 조용했다. 그러나 얀은 물질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듯하지만 정신적으로 풍족해 보이는 일상적인 여유를 찾은 느낌이다. 이 책의 대부분 내용은 흥미를 끌만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와 닿지는 않았다. 그나마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삶의 일상적인 행복을 보여준 것은 잔잔한 여운을 주었다.
[후기]『나는 나][유디트 얀베르크 구술, 엘리자베트 데사이 지음]
『(유디트 얀베르크의 자기발견!) 나는 나』
- 유디트 얀베르크 구술, 엘리자베트 데사이 지음, 평점 80점, 글쓰는시점 : 2007-2-5-월.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사이에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 정체성에 관한 책을 2권 읽었다. 그것은 에스테 빌라의 『길들이는 여자들 길들여진 남자들』과 이 책『나는 나』이다. 둘 다 저자가 여성이다 물론 이 책은 얀베르크의 구술을 바탕으로 그녀의 친구 데사이가 기록하긴 했지만, 얀과 데사이 모두 여성이므로 저자가 여성이라는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이 책 자체만도 시선을 끌지만, 앞의 책과 비교하면서 읽는 것은 더 흥미로웠다. 물론 의도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다른 관점으로 쓰여진 책이라 그런지 자연히 비교가 되었다.
어려운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 읽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똑같은 소리,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숨 푹푹 쉬는 듯한 어조로) 자신의 출신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과 비애를 표현한 부분이 너무 많고, 때로는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얀이 충분히 비애를 느낄 수 있다고 이해하는 면이 강했지만 자신의 상황을 자신의 출신에 의한 자기외적인 요인에만 있는 듯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듣자니, 약간 짜증이 났다.
물론 얀의 주변에서 정성껏 계속적으로 그녀의 자존감을 일깨워주고, 그러한 불우한 출신과 환경이 그녀의 잘못이 아님을 느끼도록 한 인물이 없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안타까운 점은 있으나, 지나치게 자신을 ‘보육원 출신, 엄마는 창녀...’라는 틀 속에 가두고 있는 점은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자신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음에도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만든 틀 속에서 헤맸던 것은 아쉬웠다.
얀은 그녀의 남편과 충분히 동등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틀 속에 갇힌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더욱 자신을 억누르기에 바빴고, 자신의 정당한 의견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 그것을 그녀의 불우한 출신에 대한 것으로만 돌리기에는 동정은 가지만, 좋게 보이진 않았다.
자신의 자존감을 잃고 감정을 억누르는 것으로 가장 고통 받은 이는 당연히 얀이다. 하지만 그것이 쌓이면 어지간히 이해심이 많지 않는 주변 사람이라면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나또한 동정보다는 답답함이 더 컸다. 이 답답함이 이 책이 잘 읽히지 않게 하는 주요인이기도 하다.
물론 현명하고 이해심 많은 남편이라면 그것을(틀 속에 갇힌 아내의 행동, 생각) 보듬고, 그녀가 부정적인 틀을 깨는 것을 도우고, 자존감을 일깨우고, 또한 배려해야 한다. 하지만 얀의 남편 볼프강은 남편으로서 평균이하의 남자였다. 그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틀 속에 가두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폭력과 바람까지 피웠다. 그러한 점은 충분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책은 볼프강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단지 조연일 뿐이다. 주인공은 얀이다. 그래서 얀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내가 볼 때 얀과 볼프강 사이의 부부관계의 깨어짐은 볼프강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얀도 그에 못지 않은 책임이 있어 보인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고 힘들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숨김으로써 개선의 여지를 없앴고, 안 그래도 평균이하의 남편의 이해와 배려를 더욱 멀게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솔직히 그다지 멋져 보이지 않았다. 영화처럼 마지막에 극적인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을 보면 전남편이 잘 나가는 정치인 출신이었고, 얀은 불우한 환경출신이었다는 것. 즉 출신의 문제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부부관계가 깨어지는 과정, 그녀가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속의 내용을 들추어 내다보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그녀의 행동과 말 사고방식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시도를 어느 정도 하다보니 너무 길어져 진이 빠져 그만두었다. 그래서 하나하나 내용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야기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얀은 한마디로 극과 극을 오가고 있어 보인다. 한쪽은 자신의 자존감이 무참히 찌그러져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출신의 문제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근본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출신의 문제를 핑계로 자신을 그다지 높게 보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과거의 잃어버린 자존감을 만회하려는 듯이 (과격한) 여성운동가(?)가 있는 곳이다. 그녀는 과거 오랫동안 너무 한 쪽에 쏠린 상황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리 판단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그래서 그녀가 여성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하기에는 아직 벅차 보인다. 물론 그녀가 처음부터 의도하고 그런 것(강의, 조언)은 아니다. 여성센터 같은 곳에서 일하다가 여성 관련 주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안하고 억압된 심리가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얀의 강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짧게 책에서 언급된 것들로 판단한다면 그녀의 강의는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치료받는 과정에서 다른 중독자를 치료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타인보다 자신의 치료가 더 시급하다. 그녀 스스로가 불완전한 상태임에도 여성에 대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의 남편의 지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그녀도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녀는 그 강의를 통해 그녀 스스로는 긍정적인 효과를 본 것 같다.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무언가를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강의를 듣는 또 다른 여성들이다. 누구에게나 이런저런 감정들이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철학이 확고하지 않은 사람은 누군가가 선동하고 특정한 점을 부각시킨다면 그 자신도 그것에 동화되어 진실을 왜곡하거나 사실보다 다소 과장되게 특정한 부분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얀의 강의는 본인외에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지 않다.
얀의 얘기 중에 귀기울일만한 것도 있긴 하지만, 다소 이중적인 모습도 제법 보인다. 거기에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포함한다. 볼프강이 다른 여자와 관계한 것을 두고 ‘불륜’(책속에서 불륜이란 단어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길게 늘여 놓았다)이라 표현했다면 얀이 차후에 만난 마틴과의 관계는 애틋한 멜로 드라마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로의 이성 파트너를 대해서 간섭하지 말자는 개방결혼을 먼저 제의한 것도 얀이다. 물론 마틴과의 성적인 관계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남편이 먼저 배신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내가 볼 때는 둘 다 똑같은 불륜’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자신의 사랑을 애틋하게 표현하고자,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변명처럼 들렸다. 그녀 또한 남편과 정리를 한 후 또 다른 남자를 만나야 했다. 물론 볼프강의 불륜파트너 숫자가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았지만, 그 숫자가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쓰레기를 많이 버린 것이 훨씬 나쁘지만, 아무리 작은 양이라도 쓰레기는 쓰레기다.
볼프강을 옹호할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지만 볼프강이 이책의 저자였다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다. ‘밖에서의 치열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집에서만은 편안함과 나의 일을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아내와의 대화를 원했다. 하지만 아내는 항상 어둡고 집에서 너부러져 꾸미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한 아내의 모습에서 그 어떤 편안함도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그즈음에 A라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적어도 가식적일지언정 내게 편안함과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우리는 점점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
이 가상 스토리를 꺼낸 것은 볼프강의 불륜을 이해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얀이 나중에 남편의 불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자신의 불륜에 대해서는 미화하려고만 하는 것이 이중적이고 미성숙한 한 인간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웠기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여성운동가(?)로서 큰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 나름대로의 활동을 한 듯 같다. 하지만 여성운동’이라는 구호 자체가 차별을 부추긴다. 더구나 그 대표자는 일반적인 여성을 대변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인물이 많아 보인다. 오히려 그 주제(여성운동)를 통해서 자신의 조금은 극단적인 철학을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주입하려 하거나 자신의 활동욕구를 그런 식으로 표출함으로써 자기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운동이 아니라 ‘인권운동’을 해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활동이어야 한다. 과거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여성의 인격과 대우는 남성에 비해 많은 차별이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엔 인권운동이 아닌 여성운동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그런 여성운동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여성운동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내세워 또 다른 불평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그건 진정 필요했던 과거의 여성운동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비판했던 남녀차별의 원흉인 나쁜 남자들의 행태를 나쁜 여자들이 바통을 이어 받는 꼴이다. 인권은 남녀 모두에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여성부라는 기관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회약자를 위한‘인권부’혹은 그런 의미를 담은 다른 이름이 적당하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그 기관을 없애는 게 낫다. 아무튼 국가기관이 남녀차별을 부추기는 행태가 정치인들의 수준인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누가 정답이고 아니고를 분별할 수는 없다. 그리고 분별할 필요도 없다. 각자가 생각하는 정답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과 뒤섞여 사는 세상 속에서 산다면 근본적인 굳건한 자기철학도 중요하지만 그와 아울러 타인과 소통하고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 유연함과 융통성도 발휘해야한다. 얀은 그녀 스스로가 자기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빈센트를 만나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다. 그녀도 점차 안정을 찾아 극단적인 자세에서 점차 유연함을 발휘 정도의 여유를 찾아가는 듯 해 보인다. 다행이라 여겨진다. 이 책의 원작이 쓰여진 시점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아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책의 후반부는 그렇게 절반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우리는 극과 극을 유연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뭉쳐 있는 중립지대를 포함해서 극과 극의 사고방식인 사람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극단적일 필요는 없다. 단지 ‘그런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이해할 정도면 된다. 인간은 남성, 여성, 혹은 좌익, 우익으로 양분하는 어리석음을 발휘하지 않아야 한다. 우울할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다. 억지기쁨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자기감정을 이해할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컨트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면 된다. 그리고 이왕이면 자기감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구하고자하는 의지를 보이면 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무언가 큰 게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마무리는 조용했다. 그러나 얀은 물질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듯하지만 정신적으로 풍족해 보이는 일상적인 여유를 찾은 느낌이다. 이 책의 대부분 내용은 흥미를 끌만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와 닿지는 않았다. 그나마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삶의 일상적인 행복을 보여준 것은 잔잔한 여운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