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
이지아
정확한 날짜와 시간 자세한 경의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난 500번 버스의 육중한 몸을 안고 죽었다. 그 버스 차번호는 기억할 수 없지만 노선 번호가 500번인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내 눈에 찍힌 500이라는 숫자의 사진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왜 이 버스를 타고 다니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날 죽음으로 인도한 운전사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 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뿐이다.
난 이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무척이나 즐겁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늘 똑같은 것 같지만 늘 나름대로의 변화를 추고하고 있다. 그것은 지진 같이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조금씩 퍼지는 엷은 미소처럼 오랫동안 지켜보아야 알 수 있는 미세한 움직임이다. 그건 더운 날 한줄기의 시원한 바람을 코로 들이키고 몸 속을 정화시키는 상쾌함 같다.
그리고 버스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출퇴근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문을 열기 위해 이용하는데 그때가 되면 동시에 여러 사람들과 한 몸이 되기도 한다. 한 몸이 되면서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기도 한다.
오늘도 영선이가 세탁한지 오래되 반질반질한 교복을 입고 버스에 올랐다. 그녀는 이제 열일곱살이 된 고등학생이다. 그녀는 지금 중풍으로 몸 저 누운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언제나 건강한 정신으로 자신을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는 그녀지만 그녀는 요즘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 학교를 그만두고 술집을 나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돈을 벌게되면 그것으로 어머니의 치료비도 댈 수 있고, 자신도 지금보다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녀를 말리려고 나름대로 그녀를 설득했지만 그녀는 점점 생활고와 고된 하루 하루로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그녀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 '정말 지겨워. 어쩌면 엄마가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안돼! 그런 생각하면 안돼.' 그녀는 한숨을 쉰다. 그녀의 한숨을 따라 마음속의 한도 따라 나오는 듯 하다.
그녀가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영선이가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 할머니가 커다란 봇짐을 들고 버스에 힘겹게 올랐다. 그녀는 지금 집에서 만든 반찬을 팔기 위해 근처 시장으로 가는 중이다. 사업에 실패한 하나있던 아들이 자살하고 혼자 남겨진 손자를 위해 그녀는 오늘도 시장으로 행상을 나가는 것이다. 난 그녀의 짐이 가볍게 느껴지도록 도와 주었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나의 부모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난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아버지의 얼굴도. 그건 상당히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은 바람처럼 곳 사라져버린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맑다. 마침 장마가 끝난 무렵이어서 하늘도 무척이나 푸르고 화사한 빛으로 뽐내고 있다. 이런 날씨가 되면 난 천국을 생각한다. 천국의 하늘은 인간들의 사용하는 하늘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천국의 하늘에도 한 개의 태양이 존재하고 자유로운 방랑자 같은 구름이 있을까? 그리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곧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난 왜 천국도 지옥도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버스를 타고 다닐까? 어쩌면 아직 하늘에서 나를 천국에 보내야 할지 아님 지옥에 보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당연한 생각이지만 난 지옥에 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혹 지었을 죄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괜시리 마음이 무거워 진다. 나에겐 아직 저승사자도 오지 않았다. 도대체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살아 있을 때만 격을 줄 알았는데… 인간의 삶이 이렇게 고단하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내 얼굴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내 뇌 속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은 살아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 이 느낌을 들었을 때 난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을 즐길 만큼 죽음에 익숙해져 있다.
출근시간도 한참이나 지난 오전 10시경에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버스에 올랐다. 그다지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여학생인데 눈은 벌개져 있고, 머리는 한참동안이나 감지 않은 듯 기름기가 흘렀다. 그리고 교복의 칼라엔 거뭇한 때가 묻어 있었다.
난 여학생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갔다. 여학생의 몸에선 땀 냄새와 더불어 쉰 냄새까지 풍겼다. 그녀는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몸 군데군데엔 시퍼런 멍 자국도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학교에 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끔 이런 아이들을 보긴 했지만 이 소녀만큼 절망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 아이는 오늘 또 지각했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친구들과는 그만큼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난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어깨를 들썩여 본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때가 낀 손톱을 내려다보고 있다. 소녀의 손안에는 오백 원짜리 동전이 들려 있고, 그것을 쉴새없이 만지작거리면서 머릿속을 하얗게 비우고 있었다. 소녀는 차라리 쇼윈도의 마네킹이 부러웠다. 언제나 웃고 있는 마네킹. 그녀도 마네킹처럼 웃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웃을 수 없다. 그녀는 더 이상 희망을 키울 수 없다. 그녀의 정신은 육체만큼이나 병들어 괴사하고 있었다.
갑자기 버스가 귀를 째는 소리를 내며 급정거를 했다. 그 바람에 땀에 절은 동전이 소녀의 손에서 빠져나가 도르르 굴러갔다. 동전은 옆 창가에 앉은 한 남학생의 발치에서 몇 번인가 파르르 떨다가 멈췄다. 그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단정하고 건강한 미소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도 지금 학교에 가는 중이다. 그가 동전을 집어 들어 소녀에게 다가왔다.
"저기 이거 떨어뜨리셨네요."
소녀가 남학생을 올려보며 동전을 받았다. 그러다 자신의 초라한 꼴에 부끄러움이 들어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소녀의 목소리는 어두운 밤 좁은 방안에서 울리는 속삭임처럼 사각거리며 입술을 통해서 공중으로 흩어지다가 다시 모여 남학생의 귓가에서 그에게 마법을 부렸다. 난 순간적으로 남자의 얼굴을 스치는 표정을 읽었다. 눈치가 빠른지, 그도 소녀의 외모에서 풍기는 그녀의 아픔을 읽어버렸다.
남학생은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소녀는 남자를 몰래 흘깃 훔쳐보았다. 그녀의 마음이 왠지 모를 설래임으로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후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자신의 학교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언제까지나 있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남학생은 그 보다 두 정거장 떨어진 한 대학가에서 내렸다.
밤거리의 시내는 각색의 욕망의 물결로 넘실거렸다. 나도 한때 이런 곳에서 몸을 뒹굴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난 거대한 꿈을 머금은 충실한 젊은 이었을 것이다. 그런 꿈이 채 날개도 펴기 전에 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난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친구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을까? 부모에게는 믿음직한 아들이었을까? 사회적으로 난 촉망받는 인재였을까?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난 어두운 버스 안에서 혼자 앉아 있다. 하늘에는 작은 별들이 드문드문 박혀있고. 둥근 보름달에서 나오는 빛으로 난 샤워를 하며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낸다. 딱히 일을 해서 고단한 것은 아니지만 매 시간을 새로운 생각을 하며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 고된 노동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버스를 타는 것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나는 이런 케케묵은 질문이 싫었다. 그저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인간은 한치의 미래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매 시간을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가끔은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하늘의 상태를 보고 날씨를 점치는 원시적인 감각에 지나지 않기에 그리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것은 산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저주는 아닌 것 같다. 난 이미 죽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못하지만 내가 내일 어떻게 될지 난 알지 못한다. 난 아직 영적인 존재의 계시조차 받지 못했다. 이렇게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을 떠돌아다닐지 아님 지금이라도 당장 천국이든 지옥이든 악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끌려가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또 왜 있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이 버스에 치어 죽었고, 또 날 죽게 한 기사의 얼굴이 보고 싶어 그런 것이다 라고 추측만 할 뿐 그것이 정말 나의 바램인지 잘 알 수 없다.
난 가끔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이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행복한 사람은 이 인간세계가 천국일 것이고 불행한 사람은 이곳이 지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난 행복한가, 불행한가. 난 과연 어디에 속한 존재인가. 그리고 난 무엇을 위해 지금 이곳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하는 것일까? 한 낮 형체도 없는 영혼 주제에…
사방이 어둡고 고요하다. 버스 창 밖으로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나뭇잎들이 밤바람에 사르락 거리며 살을 비비고 있다. 난 가만히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아 본다. 그리고 내가 살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기억들이 조각조각 나뉘어 퍼즐을 연상케 한다. 그나마 그 퍼즐조각들이 대부분 분실된 뒤여서 그 단편의 조각들마저 그 진실성을 의심케 한다. 어쩌면 살았을 때 꿈에서 본 것일 수도 있고 죽은 뒤에 버스 안이나 창 밖에서 본 장면들이 마치 내가 행한 일인 양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서 혹은 뜨고서 한없이 존재의 이유를 갈구하는 사이 어느새 첫차가 움직일 시간이 되었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아래서 기사들이 분주하게 새벽을 가르고 있다. 기사들은 자판기 커피로 졸음을 몰아내고 저마다 운전 중에 있었던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를 꺼내놓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운전 중에 있었던 사소한 말다툼이나 술 취한 승객의 당황스런 행동(종점에 와서도 깨어나지 않는다든가, 자기가 마신 술과 안주를 차 바닥에 쏟아내는 행위 등이다.)그리고 낯선 이성의 유혹 등이다.
드디어 첫차가 차고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난 어느 때처럼 운전석 뒤에 앉았다. 이맘 때가 되면 항상 마음이 설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유도 없이 또 그럴 리가 없는데 머리가 무겁다. 간밤에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한 탓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내 안에서 내가 깨닫지 못하는 다른 생각들이 내 의식 속에서 부리를 내리려 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소녀는 오늘도 지각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모습이 조금 다르다. 손톱에 때도 없고 머리도 감았다. 남학생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소녀는 창 밖의 시시껄렁한 풍경을 그저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다 소녀는 창문으로 비춰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남자의 모습을 쳐다보던 여학생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소녀의 표정은 오를 수 없는 산을 경외와 아쉬움으로 바라보는 산악인 같았다. 그녀는 이내 한 숨을 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누구하나 마음대로 좋아할 수 없는 상황이 한심스러웠다. 이곳에 탄 사람들의 표정은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몇몇은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마음에 더 깊은 자격지심을 심어 놓고 있었다. 버스도 학교도 그리고 집도 그녀가 평안히 있을 곳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쳐지고 있었다. 그저 한없이 자신의 무릎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 신을 원망하는 것조차 힘에 겨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남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는 초상화 속의 예수의 얼굴 같이 편안하고 따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쁜 놈."
딱히 그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는 나도 잘 몰랐지만 난 그가 몹시 미워 졌다. 그가 단지 소녀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살아서 내가 지어야 할 표정을 짓고 있다는 다소 엉뚱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현재 그가 지니고 있는 훌륭한 환경과 거기에 좋은 성격까지 갖춘 그의 넉넉함에 질투가 났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난 저놈이 점점 싫어지고 있었다. 놈이 싫어서 일까. 놈이 싫은 그 크기만큼 소녀에 대한 연민과 동정은 그 만큼 커져가고 있었다.
난 가만히 소녀에게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난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곁에 있고 또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난 그것이 아쉬웠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라면 난 그녀의 아픔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또 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안아주지 못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행색은 점점 정갈해져 갔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와 그는 항상 버스에서 만나게 된다. 버스에서 만나지 못하는 날은 그가 버스를 타지 않은 날 뿐이다. 벌써 열흘째 그들은 버스에서 거의 날마다 만나고 있다. 이제 남자도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혹시 소녀가 일찍 버스를 타러 나오지만 그가 탄 버스를 타기 위해 일부러 정류장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난 제발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우연은 길에서 만 원짜리 지패 열 장을 백미터 사이에 두고 줍는 것보다 희박하다.
소녀는 오늘도 버스 안에서 창문에 비친 남자의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떨구고 남자를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떨군다. 난 차라리 그녀가 용기를 내어 r에게 고백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만일 그렇게 해서 남자에게 yes든 no든 대답을 들으면 그녀의 이런 안타까운 외 사랑은 끝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남자에게 yes라는 대답을 들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버스에서 만난 나이 어린 소녀가 갑자기 고백을 해온다면 그 누가 당황하지 않을까?
버스가 한 시장 앞에서 멈추어 서자 할머니 한 분이 짐을 한 가득 양손에 든 채 버스에 올랐다. 할머니가 올라서자 남자가 일어날 차비를 한다. 할머니는 눈치를 채고 앞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인데도 남학생 자리로 갔다.
"고마워요."
할머니가 짐을 발치에 두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짧게 말했다.
남자는 잠시 할머니 옆에 서 있다가 자리를 옮겼다. 바로 소녀가 앉은자리다. 난 자리에서 눌렸던 스프링이 튕겨지듯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숨을 멈추고 그 둘을 지켜보았다. 소녀가 손가락으로 쉴 새없이 가방 끈을 만지작거린다. 얼굴도 벌개져 있다. 남자가 창 밖의 풍경을 보다가 소녀를 여탕을 훔쳐보는 소년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렇게 한 정거장이 지나도록 사진에 갇힌 두 영혼처럼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을 걸어 이 바보 같은 놈아."
난 답답한 마음에 그 놈 옆으로 가서 말을 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조금 있으면 그녀가 내려야 할 곳에 다다른다. 난 마음이 조급해 졌다. 차를 조금 흔들어서 놈이 소녀위로 넘어지게 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면 최소한 죄송하다는 말을 할 것이 아닌가. 처음에 나눈 대화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어떤 대화로 이어지는 열쇠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방 주세요."
소녀가 남자에게 가방을 들어 주겠다며 작고 여린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그는 말을 하고서 또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도 뭔가 말을 붙여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입을 붙어버린 동상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긴 느닷없이 말을 붙였다가 혹 치안 취급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안 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내릴 곳에 다다르자 소녀는 남자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일어났다. 난 아주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다. 난 나에게 너무나 화가 났다. 그 순간에 내가 어떤 행동을 취했다면, 그들은 지금쯤 내일을 기약하며 웃으며 헤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소녀는 더 이상 지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어쩌면 사춘기의 풋사랑을 해볼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는데…
다음날 남자는 조금 이른 시간에 버스를 탔다. 몇 정거장 더 가서 소녀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소녀가 버스에 오르자 남자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은다. 난 그 미소가 무슨 뜻인지 무척 궁금했다. 그 소녀가 반가워서, 아니면 자신을 좋아하는 것에대한 확증을 확보해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소녀가 우스운 것인지.
"뭐야! 오늘은 지각 안했네."
막 버스에 오른 몇몇의 아이들이 갑자기 소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이들 중 한 명이 소녀의 머리칼을 흩트리며 산발을 만들어 놓았다. 소녀는 얼굴이 상기될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야! 너 요즘 누구 사귀냐?"
한 아이가 소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물었다.
"그러게 맨 날 머리도 안 감고 다녔는데. 누가 너 같은 애랑 사귀냐? 그 새끼 정말 눈도 없다. 이딴 애를 쪽팔리지도 않나?"
아이들의 서슴없는 험한 말과 행동이 오가고 사람들은 그들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듯 모른 척 창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섣불리 아이들을 건드렸다가 괜한 불똥을 맞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남자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얼굴을 창문에 박고 있었다.
"야! 너 어제 내가 남으라고 했는데 왜 그냥 갔어? 반항하는 거냐?"
그녀들은 소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가, 밀었다가 하면서 그녀의 자존심을 뭉게 놓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소녀의 머리는 배구공쯤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야! 무슨 말 좀 해봐 짜증나게 하고 있어. 너 내려."
그 중에서 리더 인 듯한 한 아이가 소녀에게 말했다. 그녀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다른 장소로 옮기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너 내말이 안들려? 내리라니까."
소녀는 여전히 대답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너 여기서 개망신 당하고 싶냐?"
아이들의 거친 위협이 우박처럼 쏟아 붓고 있는 동안 소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죽은 자의 얼굴도 그녀보다 표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죽이고 있었다. 그것만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들에게 핍박당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이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들이 소녀의 머리를 창문에 박고 있는 소리다.
"너 계속 열받게 하지 응?"
그녀들에게 둘러 쌓인 소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소리를 짐작으로 소녀가 당하고 있을 모욕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모습이 보인다. 소녀의 상실되어 가는 자아 그리고 생각 없는 아이들의 행동 그녀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인지 아닌지 모르고 있다. 개중에는 자신의 행동이 터프하고 멋있다고 생각되는 아이도 있다. 그 반면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친구도 있지만 그녀도 자신의 친구들이 두렵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면 친구들보다도 더 소녀를 괴롭혀야 한다.
그녀들은 욕을 하면서 그녀의 따귀나 머리 등을 때리고 그녀의 발 위에 올라서서 그녀의 발등을 짓이겨 놓는다. 명찰의 핀으로 소녀의 팔 등을 찌르는 아이도 있다. 소녀는 아프다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소녀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인형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형은 팔이 잘려 나가고 머리가 잘려 나가고 눈이 파여져도 여전히 웃는 표정 그대로 그녀들을 보고 있다. 소녀도 그 인형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녀들은 단지 인형을 상대로 놀고 있는 것뿐이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면 '그냥'이라는 대답을 할 뿐이다.
아이들과 소녀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난 버스가 멈춰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운전사도 보이지 않는다. 버스는 어느 파출소 앞에 멈춰서 있다. 이윽고 버스 안으로 순경들이 탑승했다.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버스 안에 가득히 울렸다.
"너희들 뭐하냐?"
순경 중 한 사람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이 중 리더가 거친 말투로 말했다. 아이들은 모두가 황당하다는 듯이 순경과 버스 운전사를 바라봤다.
"너희들 내려. 그리고 학생도 잠시 내려."
순경이 아이들을 헤집고 들어서며 말했다. 아이들이 흩어지면서 소녀의 모습이 들어 났다. 소녀는 머리가 헝크러지고 하얀 상의에 뻘건 피가 묻어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 혀를 찼다. 남자는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난 혹 소녀가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 곁에 바짝 붙었다. 순경 중 한 사람이 그녀의 부축했다. 그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어이구'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버스를 내리려던 소녀가 갑자기 울음을 쏟았다. 내리려고 일어나던 중에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순경이 그녀를 들쳐업었다.
"어! 왜이래? 119에 전화해 119"
깜짝 놀란 순경이 그녀를 들쳐 업으며 동료에게 소리쳤다. 아이들도 그 모습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나도 함께 버스에서 내려 그녀를 살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난 아직 한번도 버스에서 내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은 무서워."
파출소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을 무렵 한 아주머니가 탄식을 섞어 토해냈다.
그녀들은 그 무서움이 바로 멋과 동일시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들이 자신들을 무서워 하면 자신은 그 만큼 멋있어 지고 사람들은 그 만큼 잘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포는 즐기는 것이 될 수 있지만 두려움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의 차이를 그녀들이 깨닫기엔 너무 이른 것인가?
난 운전사 뒤 자석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처음 이 버스를 타던 때를 생각했다. 그 이전에는 난 그녀를 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가 전학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럴 수도 있고 평소 다른 버스를 이용하다가 남자를 계기로 이 버스를 탔는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눈에 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보고서도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루에 수십 명이 버스를 이용하고 난 그들을 전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난 뒤를 돌아 남자를 봤다. 남자는 처음에 버스에 올랐던 소녀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난 그의 생각을 알아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지금 만큼은 그가 밉지 않다. 만일 누군가를 미워해야 한다면 그건 나일 것이다. 난 소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왜? 왜 그랬을까? 난 좌석 위에 발을 올리고 무릎을 감싸안은 채 강가에 뒹구는 하찮은 자갈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소녀는 더 이상 무심하고 잔인했던 버스에 타지 않는다. 남자는 가끔 버스에 올랐지만 그역시 손이 잘린 화가의 얼굴처럼 침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삼일이 지나자 먹구름이 지나간 하늘처럼 그의 얼굴은 평온을 되찾아 갔다.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소녀는 자신의 청순한 자태를 보여주지 않았다 가끔 소녀를 사라지게 한 다른 소녀들을 볼 수 있었다. 난 그녀들이 버스에 오를 때마다 가까이서 그녀들의 얼굴을 살피곤 했었다. 그녀들의 기억 속에선 소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나 역시 이젠 소녀의 모습이 내 전생의 기억처럼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따금 스치는 바람처럼 그녀의 상실된 창백한 얼굴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때가 지나면 애를 써도 그녀의 얼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앟는 저만큼의 기억이 되어 버린다. 방관자와 가해자만이 남은 버스…무심한 검은 바퀴는 검은 아스팔트 위를 잔인하게 밟고 지나간다. 소녀의 정갈한 자태는 그 안에서 창자가 터지고 골이 부수어 지고 목이 돌아간다. 그리고 검은 바퀴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져 간다. 그러면 더 이상 소녀의 존재는 보이지 않고 난 사라져 가는 소녀의 육신을 버스에 올라서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소녀는 기억할까? 버스 안에서 그녀를 보았던 무수한 눈동자를 그 눈동자를 가진 허연 얼굴과 그 얼굴에 담긴 잔인한 표정을…그들의 눈동자는 소녀를 향해 있었지만 얼굴은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고 그녀의 여린 몸뚱이를 난타하고 있었다.
창 밖의 풍경은 이젠 나에게 아무런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나의 시선은 창 밖을 향해 있지만 뇌 속에서 그것을 읽지 못하고 있고 오르고 내리는 인파의 물결에도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난 이제 말 그대로 산송장이 되어 버스 안에서 멀거니 앉아 있다. 그리고 가여운 소녀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지 이유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난 내 머릿속을 비우고 있었다. 아니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내 머릿속이 비워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마음속도 비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썰물과 밀물의 자연스런 현상보다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다. 그래서 내 두려움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뒷문으로 가서 섰다. 내 앞에는 한 아주머니가 작은 손가방으로 들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버스가 육중한 몸체를 멈추고 핑크 프로이드의 소세지 기계로 빨려 들어가는 소년소녀의 몸체를 받는 기계처럼 메마른 문이 커다랗게 울부짖으며 열렸다. 난 한 걸음을 내딛고 잠시 멈추었다가 마저 걸음을 내딛었다. 등뒤로 버스는 그 무심함을 다시 들어내며 빠른 걸음으로 내 곁을 떠나갔다. 난 버스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그러다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는 작은 바람을 느꼈다. 난 갑작스러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보았다.
소녀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정갈한 생 머리에 고은 미소가 내 눈앞에서 나에게 마법을 걸고 있다. 그녀가 나에게 손을 내민다. 난 자석에 이끌리는 하찮은 쇠붙이처럼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창문 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