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성탄절 오전 서울에 있는 한 병원에서 86세의 할아버지 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신문마다 사진이 두 장씩 들어간 그 분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한 장은 사진은 돌아가신 장기려 박사님의 얼굴이었고 다른 한 장은 북에 두고 온 아내 김봉숙 여사의 노년의 얼굴이었다.
어느 날 친구 한 분이 장박사에게
‘재혼하지 않을거냐’ 고 물었다.
그러자 장박사는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 목사님이 백년해로하라고 했으니 백 년 이후에나 생각해보자.’ 고 받아 넘겼다.
성산 장기려 박사는 북녘 땅에 두고 온 다섯 남매와 아내를 못 잊어 45년간을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장기려 박사 :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평양도립병원장 및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는 의사가 된 동기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金鳳淑)과 5남매를 북한에 남겨 두고 차남 가용(家鏞)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이듬해부터 부산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하였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靑十字) 의료보험조합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전간 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를 설립하여 그 치료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의료활동 외에도 부산대학교·가톨릭대학교·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19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였다.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을 받았다. 1991년에는 미국의 친지로부터 북한에 가족이 살아 있다는 소식 아래 아내의 편지와 가족 사진을 받은 뒤 재회를 기다렸으나 지병인 당뇨병으로 운명하였다. 1975년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집 한 채가 없어, 고신대학 의료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준 20여 평 관사가 전부일 정도로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였다.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