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다. 감독이 어떠한 화법으로 전달했느냐에 천착함으로써그 영화를 낱낱이 분석하고 해부하려 하는 자체가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어서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에는 어떤 기록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영화라는 자체가 '타인의 시공간을 훔쳐보는' 속성을 가진 까닭에 라몬의 숭고한 결정에 대해 고요함을 지키는 것이 그와 그를 사랑하고 지켜보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씨 인사이드 Mar Adentro / The Sea Inside, 2004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바다로, 저 바다로그리고 저 무중력의 심연으로꿈이 이루어지고두 의지가 합쳐져소원을 이루는 그 곳으로우리 둘의 시선이 만나는 그 곳 이 시와 함께 그의 마음이 창문을 넘고 산골짜기를 지나고 들판 위를 날아가 깊은 물살을 안은 채 출렁이는 그 애증의 고요한 바다 위를 달리는 장면에 이르면 , 모든 사고와 생각이 순식간에 정지한 채 그의 간절한 염원이 심장을 파고 들며 절절히 전해진다. 생명력 넘치고 똑똑하면서도 현명한 사람, 라몬. 그는 '산다'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기에 자신의 넘치는 생명력을 가둬 놓는 것에 대해 더 힘겨워 했다. 형수의 말을 빌자면 '입만 살아있는' 주교와는 틀리기에꿈틀대는 강한 영혼과 자유로운 자아를 가둬둔다는 것이 그에겐 정말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지적이면서도 우아한 자태의 그녀, 훌리아.감정을 절제해 온 사람만이 가진 그 침묵하는 듯 하면서도 바르르 떨리는 입술과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맑고 총명한 눈빛의 그녀- 하지만 그녀 역시 언젠가는 육체라는 가장 큰 재산을 잃어버리게 될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기에 라몬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소망한다. 그녀는 라몬이 28년간 써왔던 시와 그의 과거사진을 통해 그를 알아가고, 바라보며 소통하고, 공감하며 그를 사랑하게 된다.라몬 역시 자신이 살아있음에 대해 처음으로 감사하며 그녀를 사랑한다. 그 두사람의 소원이 숭고한 죽음이라고 표현된 임에 대해 감히 그 누가 비난하거나 제재할 수 있을까. 결국, 같이 죽고자하는 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훌리아를 '사랑'하는 남편은 그녀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전망좋고 잘 꾸며진 곳에 고이 모셔둔다. 가장 불행한 것은, 이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자기만족을 위한 것인지그 남편 혹은 제도가 알지 못하는 데에 있다.살아있지만 이미 살아있지 않은 그녀를 그런 공간에 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삶에 감금시켜둔 그 남편의 마음은 이 정의하는 또 다른 형태의 이겠지만 훌리아가 정작 원했던 것은 그러한 사랑이 아니었음을 남편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정작 그 남편보다 훨씬 어리석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여인, 로사는 라몬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하고도 아름다운 결정을 한다.그녀의 순수한 마음은 에 대해 그다지 복잡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의 염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자신의 사랑'에 대한 욕망을 희생시킴으로써 결국 그녀의 사랑을 완성한다. "당신은 왜 죽으려고 하나요?" 결코 도망칠 수 없기에 웃으면서 우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며 활짝 웃던 라몬 삼페드로.그가 법정에 앉아서 모든 사태를 지켜보며 지었던 저 묵묵한 표정과 눈빛.그것들이 말해주는 수만가지의 생각과 감정들. '생명체으로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라고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한 사람의 삶이란 것은 결코 고립된 채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다른 자아들과의 교집합이며 공통분모를 안고 있는 것 이기에,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의무' 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삶이, 그 영혼의 울타리 안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가 절절히 자각했을 때그가 삶을 '그만 둘' 권리 또한 전적으로 그에게 달린 것임을,그것을 사랑이라는 명제로 구속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을이 위대한 영화는 바다를 가르는 바람처럼 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우리에게 속삭여준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단 자신의 영혼과 의지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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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다.
감독이 어떠한 화법으로 전달했느냐에 천착함으로써
그 영화를 낱낱이 분석하고 해부하려 하는 자체가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에는
어떤 기록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영화라는 자체가
'타인의 시공간을 훔쳐보는' 속성을 가진 까닭에
라몬의 숭고한 결정에 대해 고요함을 지키는 것이
그와 그를 사랑하고 지켜보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씨 인사이드
Mar Adentro / The Sea Inside, 2004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바다로, 저 바다로
그리고 저 무중력의 심연으로
꿈이 이루어지고
두 의지가 합쳐져
소원을 이루는 그 곳으로
우리 둘의 시선이 만나는 그 곳
이 시와 함께 그의 마음이
창문을 넘고 산골짜기를 지나고 들판 위를 날아가
깊은 물살을 안은 채 출렁이는
그 애증의 고요한 바다 위를 달리는 장면에 이르면 ,
모든 사고와 생각이 순식간에 정지한 채
그의 간절한 염원이 심장을 파고 들며 절절히 전해진다.
생명력 넘치고 똑똑하면서도 현명한 사람, 라몬.
그는 '산다'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기에
자신의 넘치는 생명력을 가둬 놓는 것에 대해 더 힘겨워 했다.
형수의 말을 빌자면 '입만 살아있는' 주교와는 틀리기에
꿈틀대는 강한 영혼과 자유로운 자아를 가둬둔다는 것이
그에겐 정말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지적이면서도 우아한 자태의 그녀, 훌리아.
감정을 절제해 온 사람만이 가진
그 침묵하는 듯 하면서도 바르르 떨리는 입술과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맑고 총명한 눈빛의 그녀-
하지만 그녀 역시 언젠가는 육체라는 가장 큰 재산을
잃어버리게 될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기에
라몬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소망한다.
그녀는 라몬이 28년간 써왔던 시와 그의 과거사진을 통해
그를 알아가고, 바라보며 소통하고, 공감하며 그를 사랑하게 된다.
라몬 역시 자신이 살아있음에 대해 처음으로 감사하며
그녀를 사랑한다.
그 두사람의 소원이 숭고한 죽음이라고 표현된 임에
대해 감히 그 누가 비난하거나 제재할 수 있을까.
결국, 같이 죽고자하는 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훌리아를 '사랑'하는 남편은 그녀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전망좋고 잘 꾸며진 곳에 고이 모셔둔다.
가장 불행한 것은,
이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자기만족을 위한 것인지
그 남편 혹은 제도가 알지 못하는 데에 있다.
살아있지만 이미 살아있지 않은 그녀를
그런 공간에 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삶에 감금시켜둔
그 남편의 마음은 이 정의하는 또 다른 형태의
이겠지만 훌리아가 정작 원했던 것은
그러한 사랑이 아니었음을
남편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정작 그 남편보다 훨씬 어리석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여인,
로사는 라몬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하고도 아름다운 결정을 한다.
그녀의 순수한 마음은
에 대해 그다지 복잡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의 염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자신의 사랑'에 대한 욕망을 희생시킴으로써
결국 그녀의 사랑을 완성한다.
"당신은 왜 죽으려고 하나요?"
결코 도망칠 수 없기에 웃으면서 우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며
활짝 웃던 라몬 삼페드로.
그가 법정에 앉아서 모든 사태를 지켜보며 지었던
저 묵묵한 표정과 눈빛.
그것들이 말해주는 수만가지의 생각과 감정들.
'생명체으로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라고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란 것은 결코 고립된 채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다른 자아들과의 교집합이며 공통분모를 안고 있는 것
이기에,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의무' 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삶이,
그 영혼의 울타리 안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가 절절히 자각했을 때
그가 삶을 '그만 둘' 권리 또한 전적으로 그에게 달린 것임을,
그것을 사랑이라는 명제로 구속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을
이 위대한 영화는
바다를 가르는 바람처럼 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우리에게 속삭여준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단 자신의 영혼과 의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