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와인 출생 연도의 비밀

이현정200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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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와인 출생 연도의 비밀

'보르도 97 빈티지는 썩 좋지않다', '이탈리아는 토스카나, 피에몬테 모두 97빈티지가 뛰어나다' 등은 와인을 마시면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표현이다. 불어로 '밀레짐(Milesime)'이라고도 하는 '빈티지'는 와인에 사용된 포도의 수확 연도를 기준으로 라벨에 표기된다. 예를 들어 2000 빈티지라고 하면 2000년에 수확된 포도가 사용된 와인을 말하는 것. 호주나 칠레 같은 남반구의 경우, 전년에 재배하기 시작해 다음해 2~3월에 수확하기 때문에 포도를 재배한 해가 아닌 수확한 해를 빈티지로 표시한다.

빈티지는 그해의 특성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말해주기 때문에 이를 토앻 와인읠 품질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다. 어떤 해는 서늘하고 어떤 해는 잎사귀가 탈 듯이 뜨겁고 어떤 해엔 수확기에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해마다 변덕스러운 기후는 포도 생육에 큰 영향을 주는데, 프랑스 보르도를 포함한 서유럽의 경우 빈티지가 좋은 해는 봄부터 7,8월까지 햇볕이 풍부하고 수확기 초기에 평균보다 높은 온도가 유지되는 해다. 반면 빈티지가 안 좋은 해는 거의 일정하게 서늘하거나 평균 이하로 햇볕이 적으면서 습한 해를 말한다. 이처럼 빈티지별로 와인의 품질이 달라 질 수 밖에 없지만 요즘 포도 재배자들은 여름철에 아직 덜 익은 포도를 쳐냄으로써 일부만 농축된 포도로 만들거나, 늦게 혹은 빨리 수확하는 등 빈티지가 안 좋은 해에도 양질의 포도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실제로 1987년 이탈리아 피에몬테에서의 수확기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빈티지가 안좋은 해로 평가되었지만 일부 와이너리는 폭우 전에 수확을 끝내서 양질의 포도를 얻을 수 있었다.

점차 기계 수확이 늘고 양조 기술도 발달해서 빈티지를 따지는 것이 의미 없어 보이는데도 빈티지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빈티지가 좋은 해의 와인은 뛰어난 밸런스와 에이징 포텐셜(Aging Potential: 장기 숙성능력)등으로 전체적인 품질이 탁월하기 때문. 에이징 포텐셜이 높은 와인은 장기간 숙성이 가능하고 시간이 지나야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일부 와이너리는 빈티지가 안 좋은 해에 와인을 전혀 만들지 않거나 최고 등급의 와인 생산을 포기함으로써 품질과 명성을 지키기도 한다. 하지만 장기 보관을 하지 않고 오늘 저녁 즐겁게 마실 와인을 찾는다면 빈티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미국과 호주 같은 신세계 와인을 즐기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 신세계는 유럽에 비해 기후의 변화가 급격하지 않다. 품질에 미치는 영향이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논 빈티지(Non Vintage) 샴페인처럼 최근 해의 와인들을 서로 블렌딩하는 유럽의 테이블 와인(Table Wine), 미국의 저그 와인(Jug Wine), 호주의 캐스크 와인(Cask Wine)은 라벨에 빈티지 표시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해마다 기후 변화가 심한 편인 유럽의 고급 와인을 구입하려면 빈티지를 고려하는 것이 한 방법인데, 이런 정보는 빈티지 차트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세계적인 와인 전문지나 평론가들이 와인 생산지의 빈티지를 평가해 발표한 결과를 참고하면 와인을 선택하기가 한결 수월해지는 것. 단, 빈티지 차트의 정보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참고 사항을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빈티지 차트를 봄녀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빈티지에 따른 와인의 가격 차이. 예를 들어 빈티지가 좋은 해로 평가도니 보르도 2000년의 샤토 라피트 로칠드(Chateau Lafite Rothschild)는 시중가가 140만원 정도이지만 빈티지가 안 좋았던 보르도 1997년 라피트 로칠드는 45만원 정도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빈티지와 관련된 현명한 구입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한다. 빈티지가 좋은 해라면 그리 유명하지 않은 와인이나 세컨드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 실속 있는 구입 요령. 전체적인 빈티지가 좋으면 와인간의 품질 차이는 그리 크지 않고 스타일의 차이만 드러나기 때문에 유명하지 않은 와인이어도 품질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빈티지가 안 좋을 때는 되도록 검증을 받은 뛰어난 와인 생산자의 와인을 골라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재배 기술이나 양조 기술 같은 품질 관리와 노하우의 차이가 커지고, 이 차이는 고스란히 와인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보르도 엉 프리뮈르(En Primeur: 와인 선물시장)에 다녀온 와인 관계자 대부분은 2005 빈티지가 사상 최고의 빈티지(Great Vintage)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보르도에서는 매년 빈티지가 훌륭하다고 발표하지만 사실 과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 역시 지금까지 보르도의 어떤 빈티지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평한 바 있다. 단적인 예로 브르도 2005년 레드 품종은 평균보다 높은 타닌 함량에 과즙의 농축도 또한 상당히 높다. 예외적으로 자연적인 알코올의 레벨 또한 높으면서 놀라울 정도의 신선함, 살아 있는 산도 등을 지녔다고 평하면서 여태까지 볼 수 있었던 보르도 빈티지와는 다를 것으로 예상했다. 2005 보르도 빈티지에 대한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하겠지만, 그 맛을 궁금해하며 3년 뒤를 기다리는 것 또한 와인 애호가들에겐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