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우리는 모두 자본과 권력의 노예다.

추원일200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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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1

 

  현재 우리나라에는 크고 작은 결혼정보업체가 400여개로 추산될 정도로 성황이다.사랑보다는 조건을,소중한 인연보다는 합리적이거나 물질적 선택이 선호되는 결혼 풍속도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회원은 고졸,대졸 일반,전문직 등 3가지로 분류되는데,전문직 회원은 가입조건이 더 까다롭다. 전문직 회원은 이른바 ‘사’자 직업이나 고위 공무원,교수,최고경영자(CEO) 등이었고,전문직이어도 32세를 넘긴 여성은 전문직 자격을 박탈당한 채 대졸 일반으로 분류됐다.
사회 저변에 짙게 깔려있는 학력의 벽도 엄청나다.자신이 만날 수 있는 남성 또는 여성이 어느 정도 외모에,연소득이 얼마쯤이고,세칭 일류대인지 아닌지,재산상태는 어떤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신분과 몸값도 정해졌다는 뜻이다.

 

                                                            -쿠키사회 2006.4.23

 

풍경2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으로, 겨우 한살을 더 먹었을 뿐이지만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항상 길게 웨이브진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던 것에서 귀밑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로 잘라야 했고, 생전 입어보지 못한 교복을 맞춰야 했다. 스타킹과 양말은 언제나 검정색을 신어야 하고, 교복 위에 입는 외투도 검정색이나 어두운 갈색계통이 아니면 입지 못한다. 옷차림도 옷차림이지만, 뭣보다 확연히 달라진 학교분위기 낯설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입학후 며칠, 동생의 담임선생님은 "배치고사 성적 5등내의 아이들에게만 반장선거 후보자격을 주겠다" 에 덧붙여 "중학교부터는 성적이 교실게시판에 공개될 거니까 공부열심히 하자"고 했단다. '학주'가 몽둥이를 들고 선도부원들과 교문을 지키는 풍경도 낯설 수 밖에 없는 모습이다.

 

풍경 3

 

   시의 이해 -에반스 프리차드 문학박사 저- 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운율, 음조, 비유를 이해하라. 그리고 두가지 질문을 하라. 첫째, 대상의 예술적 표현도. 둘째, 대상의 중요도. 첫째는 시의 완성도 측정이며, 둘째는 시의 중요도의 판단이다.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시의 위대함이 쉽게 판별된다. 시의 완성도를 시의 완성도를 가로축에 놓고 중요도를 세로축에 놓으면 그 시의 위대함은 완성도와 중요도의 영역이다. 바이런의 시는 중요도는 높지만 완성도는 겨우 보통을 넘는다. 반면 세익스피어의 14행시는 두가지 면에서 모두 높다고 볼 수 있다. 고로 매우 범위가 넓으므로 실로 위대한 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시를 읽는 동안 이 평가 방법을 연습하도록 해라. 이러한 방법으로 시를 평가하는 능력이 길러지면 시를 통해 얻는 기쁨과 이해도 깊어질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中 

 

   불쑥, 통계를 들이대면 이상할 테지만, 어쨌든 국민일보의 2003년 7월 25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 해 한국에서 하루평균 36명이 자살을 했고, 이는 시간당 1.5명이 목숨을 끊은 꼴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성적비관으로 목숨을 끊은 청소년은 모두 276명으로, 거의 하루 한명의 생명이 사라져간 꼴이다. 그런가 하면 2002년의 어느날에는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남자아이가 "바다 속의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기고서 베란다 가스배관에 목을 매어 자살했고, 과학고를 자퇴한뒤 4수를 하고도 서울대에 가지 못한 수험생이 서울대 근처 여관방에서 음독자살을 하기도 했으며, 어느해 어느 곳에선 수능을 앞둔 여학생이 "어차피 4년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다"며 살충제를 먹고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2003년의 한국은 그러할 진데, 2007년의 한국은 무사할까, 모를 일이다.

 

 

   이런 청소년자살, 이른바 "성적비관자살"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새삼스런 일일뿐더러, 사실은 죽음이란게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매일 저녁 9시 뉴스는 어느 곳에서 교통사고로 누군가, 방화사건으로 몇명이, 성적비관자살로 사망했다, 와 같은 소식을 잘도 전해준다. 그것은 가슴아프고 끔찍한 사건이긴 해도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반복되는 사건인 까닭에, 안타까움의 감정보다는 저녁 식사 시간의 얘깃거리로써 '소비'된다. 고통이란 대개 개별적이고 일회적이어서 타인과 공유되기 힘든 이유로, 인간이 언제나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그것이 어제나 오늘이나 익숙하게 들어온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그렇지만 이들의 죽음은 '타인'의 문제가 아니며, '일상사'로 치부될 만한 수준의 것들도 아니다. 세상을 등진 그 역시 평범한 집안의 자식이었고, 학생이었으므로, 사망자 명단에 그의 이름대신 나의 이름을 넣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수능을 불과 240여일 앞둔 내 또래의 일이고, 앞으로 입시경쟁에 복무하게 될 형제 자매의 일이며, 어쩌면 우리 자식의 일이될지, 알 수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모든 타인의 죽음은, 곧 우리의 문제는 이 사회가 '학벌사회'라는 사실이다. 학벌은 이 나라의 사회적 불평등의 근거이다. 그런 점에서 계급이나 신분이라는 단어로 비할 수도 있겠지만 계급과 개인간의 관계는 비교적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학벌은 선천적 요인이 아닌 '후천적'인 현상이란 점에서 꼭 들어맞는 비유같지도 않다. 다시 말해 학벌이란 세계 어느 곳의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한국적 현상이다. 생각하면 고등학교 졸업자의 80%이상이 대학에 졸업하여 대학이 더이상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보통교육기관' 으로 의무교육화 된 나라가 지구상에 한국밖에 없으니, 당연하다고 하겠다. 모든 사회는 경쟁에 의한 차별을 통해 발전해나가므로, 학벌이 사회적 불평등의 근거라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쟁에 의한 차별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 전체의 생산적인 발전을 이끌어 내야하는데, 학벌은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 즉 교육의 파탄이라는 점에서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다.이 나라에서 학벌이 존재함으로써 야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교육의 파탄이다. 즉 학벌사회에서 '교육'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입시교육만이 존재한다. 교육이란 입시교육이며, 입시교육이 교육을 대신한다. 공교육을 통해서 사회적 신분이 결정되므로, 학습은 노동으로, 나아가 생존투쟁이 되었다.  

 

 

  교육은 인간성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은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이는 인간만이 자연에 없는 '문화'라는 존재양식을 가지고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즉 오직 교육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다워 질 수있다. 또한 교육은 그렇게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인간성을 실현하기도 하지만 한 사람을 바로 그 사람이 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은 자연에 맡겨진 다른 피조물처럼 완성된 존재가 아니기에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한 사람은 고유한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편적인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교육이 전인교육이고, 개별적인 고유한 개성을 끌어올리는 교육이 전문교육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교육체제는 철저히 수능에 종속된 교육, 수능을 위한 입시교육으로써 전인교육도 전문교육도 해내지 못하는 '입시교육'일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육이 시험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일진데, 인간성이 수단화된 이런 교육은 정말로 비참한 주객전도이며 교육의 무덤이다.

 

 

  전인교육의 첫번째 목표는 철학교육, 말과 언어를 다루는 교육이다. 이는 생각함을 가르치는 것으로 스스로 생각함, 돌이켜 생각함, 더불어 생각함을 목표로 한다. '앎'은 단순히 어떤 것을 경험한 지식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그러한 까닭,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함으로써 언제나 '물음'을 전제로 하며, 그렇게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물은 나에 의해 이해되고 규정된다. 그리고 그로인해 나는 사물의 주인이 되고, 사물로 가득찬 세계의 주인이 되고,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즉 그러한 앎으로 나는 자유함을 얻는다. 또한 앎은 언제나 스스로의 삶속에서 검증되어야 하는 까닭에 돌이켜 생각되어져야 하며, 나의 삶이란 결국 너와 나의 만남인 까닭에 앎이란 언제나 너와 나의 삶 속에서 더불어 생각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며, 돌이켜 생각하고, 더불어 생각되지 않는 앎이란 언제나 외부세계에 대한 노예적 굴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입시교육에서의 학습은 언제나 오지선다 객관식의 정답을 고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앎에 대한 물음은 없으므로, '생각함'은 없다. 누군가가 말했듯, 천재는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답에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답을 알려고 하기 보다는 모든 답에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거기에 교육의 목적과 인간의 자유함이 있다. 수능시험이나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수능은 모든 답을 알아야 하는 시험인 반면, 바칼로레아는 답이 없기에 어려운 시험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입시가 치러질 수도 없으며, 누구도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정해진 정답도 없고 정해진 평가도 없는,따라서 확립된 점수체제가 없는 상황속에서 결정지어지는 사회적 신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인교육의 두 번째 목표는 도덕교육이다. 도덕교육은 결국 선의 추구를 가르치는 교육이지만, 지금의 도덕교과서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인간은 자연속에서 미완성의 존재인 까닭에 스스로를 형성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그래야만 하는 존재이고, 그 과정이 바로 교육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스스로에 의해서 형성되어가는 스스로의 모습이 바로 도덕교육이 추구하는 선이다. 즉 도덕교육이란, 내가 어떠한 존재이고, 무엇을 원하며 어떤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한국의 입시교육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자가 이루어야 할 모습이 이미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문대에 합격하여 적당한 봉급과 적당한 사회적 신분을 누리며 여유로운 소비생활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적당한'삶으로써, 이미 '성공한 삶' '행복한 삶'의 모범답안으로써 제시되어 있다. 그것이 최고의 선이며, 누구에게나 추구되어야 할 스스로의 모습이다. 자신의 주체성은 없다. 주체란, 스스로의 존재가 스스로에게 물어진다는 것, 나의 존재가 나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인데, 이미 추구되어야 할 이상적 나의 모습이 주어졌는데 어떻게 주체적 삶이란게 가능하단 말인가.  남은 것은 제시된 모범답안을 향해 달려가는 것 뿐이다. 누구나 사회적 귀족이 되기 위해 서울대를 지망하고, 의치한약대를 지망하며, 고시를 친다. 9급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이 몇백대 일이라는 웃지못할 소식을 듣게되고,  어떻게 자기의 삶을 평안하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청춘을 양산한다. 그렇게 추구되는 나의 모습은 내가 스스로 정립한 내가 아니기에 내 삶이 아니며, 오직 권력과 자본을 쥔 지배세력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복무하는 삶일 뿐이다.

 

 

  전인교육의 세 번째 목표는 예술교육이다. 예술교육이란 결국 아름다움의 향유를 가르치는 것으로써, 감수성의 교육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정신적인 존재이므로, 아름다움을 즐길줄 아는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활동은 존재하는 것을 소재로 하여 존재하지 않는 형식을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창조하는 행위로써, 인간의 모든 활동중 가장 창조적인 행위이며, 자유로운 행위이다. 그러나 교육의 수단인 시험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버린 한국의 입시교육에서 예술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리가 없다. 생각해보면, 음악교육이라고 해봐야 교과서에 실린 노래를 부르고, 시험에 나올 음악사나 악곡의 종류등 이론적 지식을 기계적으로 암기할 뿐으로, 차라리 노래방을 가는 것이 음악교육을 위해 나을 지경이다. 음악교육은 음악사나 악보의 형식을 알기위해 존재하는 과목이 아니다. 악기로 소리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음악이라는 예술을 향유하는 능력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낭만파가 어떻고 연원이 어떻고 작곡의 형식에 대해서 시험을 치면서도 정작 클래식음악을 즐길줄 아는 학생은 없다. 미술과목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없고 역시 각종 피상적인 지식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면서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교육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상류층의 고급스런 취미생활일 뿐,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사치스럽고 낯선 이야기일 뿐이다. 문학교육 이라고 해서 뭐가 다른가. 문학교육은 고전문학이고 현대문학이고, 해석을 강요받고 답으로 고르는 연습을 한다. 문학이란 결국 작가와 독자의 정신적 만남으로, 가장 개별적이고 자유스러운 정신활동인데, 어떻게 고정적인 해석과 답이 있을 수 있는가. 물론 한 작품에 대해 모든 사람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석을 고정시켜 놓고 답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또한 그것은 작품을 감상하라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써, 배우는 학생에게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에 젖어들게 하기 위해 시를 읽고 소설을 읽기 위함이 아니라, 작품을 비교하고 해석하게 한다. 이것은 문학의 목표에도, 예술교육의 목표에도 어긋나는 저급한 행위이다. 이렇게 정신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향유할줄 모르게 하는, 오히려 예술을 혐오하게 만들 뿐인 교육은 오직 육체적 쾌락과 물질적 가치만 중시하는 인간을 양산한다. 결혼 상대자의 성격과 인간됨과, 취미와 개성이 아닌 학벌과 집안과 직업과 외모를 기준으로, 심지어 그것을 수치화하여 결혼하는 세태를 보며, 우리는 놀라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따위 교육체제 아래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 나이를 먹어갈 수록, 그 나이를 쳐먹도록 내가 원하는게 뭔지 모르는 인간, 물질적 욕막과 육체적 쾌락에 대한 동경만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예술과 정신적 가치를 향유할 줄 모르는 수준낮은 인간, 수능과 고시와 공무원 시험에 목숨을 거는 인간, 결혼 배후자의 사회적 신분만을 바라보는 인간. 놀라울게 없다. 요즘 한창 말이 많은 학교폭력과 청소년 성범죄, 이러한 인간성 파탄의 결과는 당연하다. 모든 것이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입시교육의 탓이다. 이런 인간들이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살아가고, 운영하고, 지배한다. 보편적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전인교육이 이러할 진데, 개성적 주체성을 위한 전문교육은 말할 것도 없다.  전문교육은 결국은, 가치와 진로의 다양성을 인정함을 전제로 한다. 정말, 말할 것도 없다.

 

 

  형편없는 입시교육의 목표는 물론 대학입학이 아니라 명문대 입학이고, 명문대 입학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의 획득이다. 당연히, 학문의 발전과 가르침을 위해 존재하는 대학은 취업훈련소이자 학문 백화점이 될 수밖에 없다. 아 물론, 대학이 대학이라는 단어로 규정되는 까닭에, 명목상 학문의 가르침과 발전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 실질적은 목표는 사회적 신분의 획득과 취업이다.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은 교육제도 아래에서 양산된 졸업자들은 학문을 하면서도 우리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지 못하고, 외래 학문을 화려하게 수입해와 가르치는 교수가 된다. 또한 자신의 진로를 사회적 신분의 획득으로 잡은 학생들은 의치한약대생,사범대생 교대생등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고시의 길로 접어든다.

 

 

  교육이 사회적 신분과 권력획득의 수단이 된 역사는 조선시대부터 시작하여, 일제시대와 해방이후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지금까지 변한 것이 없다. 요컨대 이 나라의 교육은 단 한번도 평등한 인간의 자기실현의 기관이었던 적이 없었다. 조선시대에 학문이 과거를 통한 권력취득의 도구로써 순수하게 추구되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일제는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교육이라는 좁은 출구를 통해 배출시켰다. 즉 그들은 교육을 출세의 수단, 다시 말해 권력획득의 수단으로 만들고 시험을 교육과정의 최종 목적이 되게 함으로써 국민들을 왜곡된 교육열과 시험경쟁의 노예로 만들어, 사회적 자각과 저항의지의 표출을 봉쇄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한 출세라는 환상과 그에 따른 극단적인 입시경쟁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사회적 모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고 사회변혁을 향한 욕구가 표출되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아주었던 안전장치였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시대나 오늘 날이나, 과거 시험이나 수능이나, 변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교육이 사회적 신분과 권력과 자본 획득의 수단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학벌을 제거하지 않고서 교육의 개선을 이야기하지 말기 바란다. 고교비평준화 한다고 해서, 수능시험을 개선한다고 해서, 학생대 교사의 비율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내린다고 해서, 공교육 만으로 수능을 준비할 수 있도록 자본과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서, 교육이 본래적 위치를 찾을 수는 없다. 교육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다른 것의 수단일 수 없으며, 고로 학벌이 타파되어 입시교육이 타파되기 전에는 고교비평준화를 통해 입시가 그만큼 더 치열하고 일찍 다가올 뿐이며, 고등학교조차 서열 지어질 것이다. 공교육 정상화 노력을 아무리 해봤자, 사교육을 막을 순 없을 것이다. 공교육 본래의 목적이 모두를 위한 교육이고, 사교육은 본래적으로 나만을 위한, 나만의 '명문대'합격을 위한 것이기에, 절대 사라질 수 없다. 우리는 무엇보다 더이상 교육의 파탄을 막기위해,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아닌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기위해 학벌에 의한 사회적 차별을 타파해야 한다.

 

 

끝으로, 글을 쓰게 해준 책중에서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학벌사회-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김상봉)/한길사

 

우리가 학생이라면 학벌타파를 모든 학생운동의 중심에 놓지 않으면 안 된다. 학벌문제에 관한 한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보수적이고 반동적이기 까지 한 집단이 학생 집단 특히 대학생 집단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학벌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 정당이 학벌문제를 가장 핵심적인 교육개혁과 사회개혁의 과제로 설정하기에 이르도록, 유독 이땅의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학벌문제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학벌문제를 외면하고 다른 문제에만 매달려왔다.   - 중략 -

 

학벌이란 이 땅의 거의 모든 대학생들에게 하나의 트라우마, 곧 정신적 상처이다. 대다수 학생들이 학벌경쟁의 패배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비상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드문 법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자 정당을 애써 외면하고 부르주아 정치가에게 열광하면서 자기의 상처를 잊고 대리만족을 느끼듯이, 대학생들 역시 학벌문제를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인 것처럼 애써 외면하면서 학생운동의 과제를 언제나 자기로부터 소외된 곳에서 찾아왔던 것이다.  - 중략 -

 

오직 문제를 문제라고 인정하고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싸울 때, 우리는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청년 학생들이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학벌차별에 저항하고 우리 자신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무엇이 부끄러워 입사원서의 이력서에 학력란을 없애라고 요구하지 못하는 것인가? 뒤에서는 혼자 미래에 대한 불안에 전전긍긍하면서 왜 함께 뭉쳐 당당하게 부당한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싸우지 못하는가? 그것은 물론 열등감 때문이다. 열등감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자기 비하의 감정이 우리의 말을 빼앗고 우리의 의지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 중략 -

 

 언제까지 노예로 살것인가? 이 땅에서 긍지 높은 자유인으로, 이 나라의 떳떳한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열등감의 누더기를 팽개치고 일어나라! 이 나라는 그대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