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花 이야기 매화. 꽃말; 인내 와 고결. 원산지; 중국. (장미과) Rosaceae 개화기;1∼3 월 6∼7 월에 황록색 열매 꽃이 피었을 때는 매화나무 열매 맺혔을 때는 매실 나무. 조선 말기에 가인(歌人) 안민영(安玟英)이가 스승 박효관(朴孝寬)이 가꾼 매화를 보고 연 조 시를 지어 읊어 극찬했던 매화는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고아한 여인처럼 의연한 모습으로 설한을 이겨낸다. 하얀 잔설이 지기도 전에 한 잎 두 잎 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영혼이사로 잡힌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사군자라 하였다. 그 중에 매화를 일순으로 정한 이유는 칼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절개를 보이며 벌 나비도 찾지 않는 이른봄인데도 신비스런 교태와 향기로 피어 오히려 고독을 사치로 여기는 기상과 함부로 번성치 않는 희소(喜笑)함, 그리고 나이가 들어 해 묵을수록 나무의 굴곡이 아름답고 꽃봉오리가 다소곳이 오므라져 피는 모습이 더욱 단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고(孤高)한 자태에 비견할 또 하나의 매력은 그향기에 있다.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로 마음을 가다듬어야만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러기에 매화 향은 귀로 듣는 향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꽃이 피었을 때도 온갖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그 열매 또한 중한 역할을 한다. 옛날 위나라 때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안휘 성 매산 이라 하는 곳을 지나야 했다. 군사들이 지치고 갈증이 심하여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이때 조조가 군졸들에게 말하기를 이 산을 넘으면 매실나무 숲이 있으니 거기서 매실을 따먹고 갈증을 해소하자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물론 산 너머에는 처음부터 매실나무가 없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게 되자 입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덜었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매실의 맛은 신맛으로 구연산과 사과산이 많아 성인병의 원인이 되는 유산을 억제시키고 해독을 시켜준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옛 선조 들은 매실을 여러 모양의 약재로 사용했다 잘 익은 열매를 연기에 쬐어가며 까맣게 말린 것을 '오매'라 하는데, 이것을 구충제나 해열제로 처방했으며 설사나 이질에도 특효약이었다. 그리고 배 멀미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매실의 씨를 볶아서 가루로 빻아 먹으면 강장효과는 물론이거니와 눈도 맑게 한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는 '우매보시' 라 하여 소금물에 초절임 한 매실을 도시락에서부터 최고급 요리상에 이르기까지 사용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매화가 피었을까? 충남 부여에 실리라 하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이씨 선조가 중국 사절단으로 갔다가 설중매를 갖고 들어와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꽃이 한 겨울인 12월∼1월에 피었으므로 길하다 하였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제105호로 정하고 한때는 영예를 안았던 매화가 1964년 겨울 극심한 혹한을 못 이겨 죽게 되자,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추위가 풀린 후 그 뿌리에서 새순이 돋아나 다시 희망을 안겨 주었다. 설중매라고도 하고 동매 라고도 하는 이 꽃은 봄이 오기도 전에 눈 속에서 핀다하여 이런 이름을 가졌었다. 백가지 꽃의 우두머리라 하여 백화괴(白樺魁) 또는 화형(花兄) 이라고도 했던 이 꽃이 중국 당나라 때 문학이 한창 번성할 무렵에는 곳곳마다 만발하게 피었다. 그러나 문학이 쇠퇴하면서부터는 매화도 볼 수 없었다한다. 그만큼 시인이나 묵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므로 호문목(好文木)이라는 별명도 있었던 것이다. 한때 모란을 국화로 정했던 중국은 모란이 너무 화려하다는 이유로 탈락시키고 추위에 강한 매화가 혁명적 정신에 부합한다하여 새로이 매화를 국화로 정했다. 매화의 본고장은 중국장성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추정하고있다. 그러나 신라시대에 불교를 전하러왔던 모례라 하는 여인이 화상(和尙)과의 인연을 두고 써놓았던 글 속에 매화가 등장한다. 그리고 285년에 일본에 귀화(歸化)해 천자문과 논어로 그들에게 문자를 가르쳤던 백제인 왕인 박사가 읊었던 시에도 매화가 등장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도 백제의 옛 고향 영암에서만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을 뿐 이에 대한 자료는 오히려 일본측이 소장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여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음이 아쉽다.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토종 매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무관심 속에 멸종되었다는 사실도 씁쓸할 따름이다. 매화의 전설옛날 중국 산동 지방에 용래(龍來)라 하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과 약혼 한지 3일만에 약혼녀가 급환으로 죽었다. 이에 용래는 슬픔을 못 이겨 매일마다 그녀의 무덤에 엎드려 울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약혼녀의 무덤가에 한 그루 나무가 자라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꽃피는 모습이 용래의 눈물처럼 방울방울 맺혔다가 못다 핀 약혼녀의 모습처럼 다소곳이 피는 것이 아닌가. 용래는 그 꽃나무가 필시 약혼녀의 넋이라 생각하고 자기 집 마당으로 옮겨 심었다. 그리고 평생을 그 나무만 바라보며 가꾸다가 나이 들어 용래도 생을 마쳤다. 그 후에는 매화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우는데, 용래는 죽어서도 그 곁을 떠날 수 없음인지 한 마리 휘파람 새가되어 늘 매화나무 가지에 날아들기를 거듭한다.11
梅花 이야기
梅花 이야기
매화. 꽃말; 인내 와 고결.
원산지; 중국. (장미과) Rosaceae
개화기;1∼3 월 6∼7 월에 황록색 열매
꽃이 피었을 때는 매화나무
열매 맺혔을 때는 매실 나무.
조선 말기에 가인(歌人) 안민영(安玟英)이가
스승 박효관(朴孝寬)이 가꾼 매화를 보고
연 조 시를 지어 읊어 극찬했던
매화는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고아한 여인처럼
의연한 모습으로 설한을 이겨낸다.
하얀 잔설이 지기도 전에 한 잎 두 잎 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영혼이사로 잡힌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사군자라 하였다.
그 중에 매화를 일순으로 정한 이유는
칼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절개를 보이며
벌 나비도 찾지 않는 이른봄인데도
신비스런 교태와 향기로 피어 오히려
고독을 사치로 여기는 기상과 함부로 번성치 않는 희소(喜笑)함,
그리고 나이가 들어 해 묵을수록 나무의 굴곡이 아름답고
꽃봉오리가 다소곳이 오므라져 피는 모습이 더욱 단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고(孤高)한 자태에 비견할 또 하나의 매력은 그향기에 있다.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로
마음을 가다듬어야만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러기에 매화 향은 귀로 듣는 향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꽃이 피었을 때도 온갖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그 열매 또한 중한 역할을 한다.
옛날 위나라 때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안휘 성 매산 이라 하는 곳을 지나야 했다.
군사들이 지치고 갈증이 심하여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이때 조조가 군졸들에게 말하기를
이 산을 넘으면 매실나무 숲이 있으니
거기서 매실을 따먹고 갈증을 해소하자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물론 산 너머에는 처음부터 매실나무가 없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게 되자
입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덜었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매실의 맛은 신맛으로 구연산과 사과산이 많아
성인병의 원인이 되는 유산을 억제시키고 해독을 시켜준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옛 선조 들은 매실을 여러 모양의 약재로 사용했다
잘 익은 열매를 연기에 쬐어가며 까맣게 말린 것을 '오매'라 하는데,
이것을 구충제나 해열제로 처방했으며
설사나 이질에도 특효약이었다.
그리고 배 멀미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매실의 씨를 볶아서 가루로 빻아 먹으면
강장효과는 물론이거니와 눈도 맑게 한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는 '우매보시' 라 하여 소금물에 초절임 한 매실을
도시락에서부터 최고급 요리상에 이르기까지 사용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매화가 피었을까?
충남 부여에 실리라 하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이씨 선조가 중국 사절단으로 갔다가
설중매를 갖고 들어와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꽃이 한 겨울인 12월∼1월에 피었으므로 길하다 하였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제105호로 정하고
한때는 영예를 안았던 매화가 1964년 겨울
극심한 혹한을 못 이겨 죽게 되자,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추위가 풀린 후 그 뿌리에서 새순이 돋아나
다시 희망을 안겨 주었다.
설중매라고도 하고 동매 라고도 하는 이 꽃은
봄이 오기도 전에 눈 속에서 핀다하여 이런 이름을 가졌었다.
백가지 꽃의 우두머리라 하여 백화괴(白樺魁)
또는 화형(花兄) 이라고도 했던 이 꽃이
중국 당나라 때 문학이 한창 번성할 무렵에는
곳곳마다 만발하게 피었다.
그러나 문학이 쇠퇴하면서부터는 매화도 볼 수 없었다한다.
그만큼 시인이나 묵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므로
호문목(好文木)이라는 별명도 있었던 것이다.
한때 모란을 국화로 정했던 중국은
모란이 너무 화려하다는 이유로 탈락시키고
추위에 강한 매화가 혁명적 정신에 부합한다하여
새로이 매화를 국화로 정했다.
매화의 본고장은 중국장성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추정하고있다.
그러나 신라시대에 불교를 전하러왔던 모례라 하는 여인이
화상(和尙)과의 인연을 두고 써놓았던 글 속에 매화가 등장한다.
그리고 285년에 일본에 귀화(歸化)해
천자문과 논어로 그들에게 문자를 가르쳤던
백제인 왕인 박사가 읊었던 시에도 매화가 등장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도 백제의 옛 고향 영암에서만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을 뿐 이에 대한 자료는
오히려 일본측이 소장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여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음이 아쉽다.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토종 매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무관심 속에 멸종되었다는 사실도 씁쓸할 따름이다.
매화의 전설
옛날 중국 산동 지방에 용래(龍來)라 하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과 약혼 한지 3일만에
약혼녀가 급환으로 죽었다.
이에 용래는 슬픔을 못 이겨 매일마다
그녀의 무덤에 엎드려 울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약혼녀의 무덤가에
한 그루 나무가 자라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꽃피는 모습이
용래의 눈물처럼 방울방울 맺혔다가
못다 핀 약혼녀의 모습처럼 다소곳이 피는 것이 아닌가.
용래는 그 꽃나무가 필시 약혼녀의 넋이라 생각하고
자기 집 마당으로 옮겨 심었다.
그리고 평생을 그 나무만 바라보며 가꾸다가
나이 들어 용래도 생을 마쳤다.
그 후에는 매화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우는데,
용래는 죽어서도 그 곁을 떠날 수 없음인지
한 마리 휘파람 새가되어
늘 매화나무 가지에 날아들기를 거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