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3.28]타인의 삶

김애지200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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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28]타인의 삶

박제된 삶을 살던 비밀경찰, 비즐로에게는 시대를 초월한 '자기 주체'가 필요했다. 타인의 공간 곳곳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일, 흥미진진하지만, 자기 삶을 버리는 순간이었다. 매춘녀와 쾌락을 즐기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본능 이외의 제 감정은 즐길 줄도 모르는 사람-비즐로는 애초에 채워질 수 없는 것에 목말라했다. 

 

예술가는 어느 때고 그랬듯이, 현실이 좀먹을 수 없는 삶의 견고한 진수를 보여준다. 영혼을 표현하는 즐거움 이외에 다른 어떤 추상도개입되어서는 안된다. 비난하며 현실과 타협하더라도 그것은 오래 갈 수 없다. 껍데기만 가지고서라도 예술을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nein 이다. 뼈에 사무치는 대답은 크리스타에게 들어야 할 것이다. 내 정체의 일부이기도 한 사람을 배신한 후에 남은 것은 껍데기 뿐이다. 이미 정신은 현실에 유린되었다. 자살하기 이전, 타자기의 위치를 알려주던 순간에 '크리스타'는 죽고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비즐로는 작가 드라이만의 삶을 훔쳐 보는 가운데 혼란을 느꼈다. 타인의 삶을 도청하는 일도 결국은 '나'의 영역을 벗어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드라이만과 같이 제 여자와 제 사상을 미치도록 사랑해 본 적이 없다. 육체로만 나누는 사랑에 허무함은 더해갔고, 돈 몇 푼 더 쥐어주고 매춘녀와 즐기는 시간을 늘여봤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하며 자기를 채워가는 기쁨은 맛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박제의 삶을 경멸하고 싶었을 뿐이다. 현실을 거스르는 선택이었지만, 자율성을 찾는 순간에 계약은 언제든 파기 가능하다. 오히려 몇 배로 남는 장사인가? 치뤄야 할 대가는 처절했지만,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H.G.W. 라는 이름이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영화의 끝 쯤이 되면, 이름은 계속 등장한다. 그제서야 제 세계를 찾은 것이다. 동독이라는 국가가 장벽을 허물고 진정한 세계를 완성할 즈음에 H.G.W.의 삶도 함께 그 의미를 더했고, 드라이만은 고마운 이름 앞으로 책을 바쳤다.

 

편지를 검열하고, 배달하는 비즐로의 삶은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언제쯤 고고한 '나'만의 세계가 세워질까 거기에 안달이 났을 뿐이다. 하지만, 이 조급함마저도 중심을 찾는 작업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타인의 삶을 통해 내 삶의 지향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책임없이 이름이 불리워지길 바라지 않는다. 요즘 세상은 하루가 멀다 하고 다들 먹고 살기에 유리한 직업을 찾느라 바쁘다. 현실이 변하는 속도는 이제 거의 광(狂)적으로 변해 광속(光速)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기 주체를 세우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박제의 삶을 살다 보면, 허무함의 끝은 어디로 내달릴지 모를 일이다. 고맙게도 인간에게는 눈이 있다. 내 시야가 곧장 나의 삶으로 향할 수는 없어도 타인의 삶을 볼 수 있기에 더욱 처절한 자아찾기를 감행할 수 있다. 눈에 비춰지는 현실이 아름답지 않고 모두 그렇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해도 우리는, 언제고 그 상(像)이 가치로운 내 삶에 투영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내 삶의 주인이 되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이 영화를 비바람 불던 날에, -삶이 빈 껍데기만 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한 날에- 선물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