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위인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기 쉽다. 김구는 이 고정관념에 잘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명문가계 출신도 아니었고, 특이한 재주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교육 배경 또한 스스로가 염려할 정도로 초라했다. 그러나 백범 김구는 민족 최대 위기였던 일제 강점기에 상해임시정부를 이끌었고 근,현대를 잇는 정치가로서 우리나라 민족주의 완성자로 불리고 있다. 다중지능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그저 남보다 신체운도적인 측면이 다소 뛰어나 보일뿐이다. 그러나 몇 년, 몇 십년뒤에는 복잡다단하고 유래 없이 힘든 사회적 상황 속에서 한 정부를 이끌어가는 탁월한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한다. 그는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성장시키고 활용하여 그렇게 된 것일까?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는 가난했지만 집안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구김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5살 때 이웃 동네의 부잣집 아이들에게 아무 이유없이 매질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5세의 김구에게는 ‘나’라는 의식이 급겨히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횡포를 부리는 자들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에 굴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이기도 했다. 성장과장을 볼 때 어린 김구는 ‘나’에 대해‘존중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족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17세 처음 응시했던 과거 현장이 부정부태로 얼룩진 것을 목겨하고 실의에 빠져있던 청년 김구는 우연히 동학과 만나게 된다. 동학이 표방하는 평등주의야말로 자신의 한을 풀 수 있는 사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김구의 인간친화지능은 동학 활동을 하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 단시간에 많은 신도들을 모드면서 김구는 불과 18세의 나에에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접주로 임명 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동학 농민군이 궐기할 때 황해도 해주 지방의 선봉장을 맡게 된다. 김구의 이러한 군사적 통솔력은 강한 신체적 힘과 기술 등을 구사할 수 있게 뒷받침하는 신체운동지능과 다른 사람의 용기를 북돋우고 이끌 수 있는 인간친화지능의 조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무렵 김구는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 고능선을 만나게 된다. 고능선의 청에 따라 그의 집을 방문한 청년 김구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김구로 하여금 ‘나’에서 벗어나‘민족’과 ‘나라’를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그때까지 가문과 자신의 피맺힌 한만을 생각하던 김구에게 ‘나’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고능선의 가르침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능선을 통한 ‘더 큰 자아’와의 만남은 이후 김구의 생애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김구는 고능선 선생의 권유로 일제에 대항해서 ‘의병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의병 운동을 준비하던 김구는 어느날 치하포라는 작은 어촌 여관에서 일본군 밀정 씨치다를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된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을 응징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면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구는 한 사람쯤은 맨손으로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타고난 신체적인 힘과 자신감이 있었다.
쓰치다 살해 이후 만기출옥을 하고 교육 및 농민운동을 전개해 왔던 김구에게 3.1운동은 상하이로 망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구는 3.1운동의 정신에 공감했지만, 자신과 같이 몸으로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입지가 더욱 난처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 총독부의 탄압이 예상되었던 것이다. 결국 김구는 상하이로 망명할 것을 결심했다.
김구는 상하이 망명은 부득이한 선택이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도립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상하이에는 안창호 등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모여 만든 임시 정부라는 조직이 있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해서 독립을 향한 고난의 역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후 20여년 가까운 세월을 이국땅 이곳저곳을 헤매며 하나의 신념, 해방된 조국을 지향하는 삶을 살았고, 그의 행적은 오늘날의 후손에게 자랑스로운 역사로 남아있게 되었다.
* 민족 지도자 백범은 ‘자기를 보는 눈’ 즉, 자기인식 능력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 즉, 자기통제 또는 조절 능력이 출중하고, 현재의 시련과 고난을 미래를 위한 자산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자기 동기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자아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하여 개인적 자아를 보편, 민족적 자아로 확대시켰는데, 이처럼 확장된 자아는 위대한 민족 지도자 백버을 형성한 토대가 되었다.
민족 지도자 백범 김구의 다중지능 프로필
민족 지도자 백범 김구의 다중지능 프로필
-개인적 자아의 보편적, 민족적 자아로의 확대-
(류숙희, 다중지능연구소 연구실장, 서울대 교육학 박사)
일반적으로 위인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기 쉽다. 김구는 이 고정관념에 잘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명문가계 출신도 아니었고, 특이한 재주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교육 배경 또한 스스로가 염려할 정도로 초라했다. 그러나 백범 김구는 민족 최대 위기였던 일제 강점기에 상해임시정부를 이끌었고 근,현대를 잇는 정치가로서 우리나라 민족주의 완성자로 불리고 있다. 다중지능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그저 남보다 신체운도적인 측면이 다소 뛰어나 보일뿐이다. 그러나 몇 년, 몇 십년뒤에는 복잡다단하고 유래 없이 힘든 사회적 상황 속에서 한 정부를 이끌어가는 탁월한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한다. 그는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성장시키고 활용하여 그렇게 된 것일까?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는 가난했지만 집안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구김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5살 때 이웃 동네의 부잣집 아이들에게 아무 이유없이 매질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5세의 김구에게는 ‘나’라는 의식이 급겨히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횡포를 부리는 자들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에 굴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이기도 했다. 성장과장을 볼 때 어린 김구는 ‘나’에 대해‘존중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족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17세 처음 응시했던 과거 현장이 부정부태로 얼룩진 것을 목겨하고 실의에 빠져있던 청년 김구는 우연히 동학과 만나게 된다. 동학이 표방하는 평등주의야말로 자신의 한을 풀 수 있는 사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김구의 인간친화지능은 동학 활동을 하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 단시간에 많은 신도들을 모드면서 김구는 불과 18세의 나에에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접주로 임명 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동학 농민군이 궐기할 때 황해도 해주 지방의 선봉장을 맡게 된다. 김구의 이러한 군사적 통솔력은 강한 신체적 힘과 기술 등을 구사할 수 있게 뒷받침하는 신체운동지능과 다른 사람의 용기를 북돋우고 이끌 수 있는 인간친화지능의 조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무렵 김구는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 고능선을 만나게 된다. 고능선의 청에 따라 그의 집을 방문한 청년 김구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김구로 하여금 ‘나’에서 벗어나‘민족’과 ‘나라’를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그때까지 가문과 자신의 피맺힌 한만을 생각하던 김구에게 ‘나’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고능선의 가르침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능선을 통한 ‘더 큰 자아’와의 만남은 이후 김구의 생애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김구는 고능선 선생의 권유로 일제에 대항해서 ‘의병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의병 운동을 준비하던 김구는 어느날 치하포라는 작은 어촌 여관에서 일본군 밀정 씨치다를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된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을 응징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면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구는 한 사람쯤은 맨손으로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타고난 신체적인 힘과 자신감이 있었다.
쓰치다 살해 이후 만기출옥을 하고 교육 및 농민운동을 전개해 왔던 김구에게 3.1운동은 상하이로 망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구는 3.1운동의 정신에 공감했지만, 자신과 같이 몸으로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입지가 더욱 난처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 총독부의 탄압이 예상되었던 것이다. 결국 김구는 상하이로 망명할 것을 결심했다.
김구는 상하이 망명은 부득이한 선택이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도립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상하이에는 안창호 등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모여 만든 임시 정부라는 조직이 있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해서 독립을 향한 고난의 역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후 20여년 가까운 세월을 이국땅 이곳저곳을 헤매며 하나의 신념, 해방된 조국을 지향하는 삶을 살았고, 그의 행적은 오늘날의 후손에게 자랑스로운 역사로 남아있게 되었다.
* 민족 지도자 백범은 ‘자기를 보는 눈’ 즉, 자기인식 능력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 즉, 자기통제 또는 조절 능력이 출중하고, 현재의 시련과 고난을 미래를 위한 자산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자기 동기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자아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하여 개인적 자아를 보편, 민족적 자아로 확대시켰는데, 이처럼 확장된 자아는 위대한 민족 지도자 백버을 형성한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