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여기서 ‘한(漢) 무제가 B.C 108년 고조선을 정벌하고 설치한 낙랑군은 313년까지 420여 년간 존속하였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한자를 비롯한 한 대 문화의 선진문물은 한반도 문화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증거로도 사용되었던 낙랑(樂浪) 봉니를 그 근거로 들었다.
그런데 낙랑의 봉니를 우리 인장사의 맨 앞자리에 놓고 그것을 통해 우리 인장사를 서술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낙랑군은 한 무제가 고조선을 평정한 후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북한 지역을 중국사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하다. 고조선 수도에 한(漢)나라의 식민 통치기관인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했는데, 그 자리가 현재의 평양 일대라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다.
일제가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낙랑의 봉니
식민사관의 근거로 활용
‘낙랑군=평양’ 설(說)은 1913년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식민사학의 대표적인 잔재다.
그런데 김양동 교수는 또한 낙랑의 봉니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따져보지도 않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한대의 무전으로 단정 근엄하여 포만감 있고 혼후(渾厚)한 풍격을 지닌 표준적인 인풍’이라고 칭송하며 ‘낙랑의 인장은 한반도 인제의 도입 시기에 있었던 형식의 제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시대의 권력상징과 지배구조를 비롯하여 문자생활의 유형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보고 있다.
봉니는 행정기관에서 문서나 물건을 보낼 때 진흙으로 봉하고, 거기에 인장을 찍어 신용을 보장하는데 사용되던 것이다. 일제시대 평양일대에서 수습된 봉니는 대략 200여개로 대부분 낙랑군현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과거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조선사를 신화로 돌리고, 중국 식민지인 한사군 설치를 한국사의 출발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 증거로 봉니를 제시했다.
그런데 만약 낙랑의 봉니가 일제시대에 위조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낙랑의 봉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위조가능성이 제기되었고, 학계에서는 상당한 연구 성과까지 제시된 마당이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봉니의 조작가능성을 지적했다.
정인보 선생의 문제제기
봉니는 발견 당시부터 위조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사학자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다. 그는 봉니의 보존상태가 너무 좋고, 서체가 비슷하며, 발견된 사례가 너무 많다는 점을 들어 조작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설사 위조품이 아니라하더라도 봉니는 받는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통례이므로 낙랑군현의 봉니가 나온 평양지역은 결코 낙랑군현이 설치된 곳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봉니는 글을 받은 사람이 봉한 것을 열면 부서지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것은 글을 받은 군현의 수령이 봉니를 열면 부서져 버리기 때문이다. 2천여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봉니가 그 형태가 완전하고, 인영(印影)이 갓 찍은 것처럼 선명하다는 것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문의 글씨가 한사람의 솜씨처럼 같다는 점도 의심스럽다.
인문은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런데 낙랑의 봉니는 한결같이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로 볼 때 이곳에 수집된 봉니는 고의로 조작했거나 이 지역 사람들이 돈벌이 목적으로 만들어 비싼 값으로 판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식민사관 기초한 인장사
1921년 조선총독부는 낙랑태수장이란 봉니가 출토되었다는 지역을 정밀조사 했으나 단 한 점의 봉니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총독부는 그 다음해인 1922년 낙랑태수장이란 봉니를 150원의 고가로 매입했고, 1934년 낙랑대윤장이란 봉니를 100원에 사들였다. 해방 전에 봉니를 위조하던 자들의 고백에 의하면 일제 골동상들과 봉니 위조자들이 수많은 봉니를 위조해서 팔았다고 한다.
결국 김양동 교수는 그간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제 식민사관에 기초한 채 한국의 인장사를 기술했다.
만약 그가 의도적으로 민족사에 기초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무시했다면 그 의도를 밝혀야 할 것이고, 그런 것들을 몰랐다면 교수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인장사 다시 써야 한다. - 3회
< 문화평론가 김사민씨가 묵가 잡지에 기고한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한국 인장사 다시 써야 한다. - 3회
3. 낙랑이 우리 민족사인가?
김양동 교수는 낙랑의 인장을 한국 인장 전각사의 맨 앞자리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여기서 ‘한(漢) 무제가 B.C 108년 고조선을 정벌하고 설치한 낙랑군은 313년까지 420여 년간 존속하였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한자를 비롯한 한 대 문화의 선진문물은 한반도 문화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증거로도 사용되었던 낙랑(樂浪) 봉니를 그 근거로 들었다.
그런데 낙랑의 봉니를 우리 인장사의 맨 앞자리에 놓고 그것을 통해 우리 인장사를 서술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낙랑군은 한 무제가 고조선을 평정한 후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북한 지역을 중국사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하다. 고조선 수도에 한(漢)나라의 식민 통치기관인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했는데, 그 자리가 현재의 평양 일대라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다.
일제가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낙랑의 봉니
식민사관의 근거로 활용
‘낙랑군=평양’ 설(說)은 1913년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식민사학의 대표적인 잔재다.
그런데 김양동 교수는 또한 낙랑의 봉니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따져보지도 않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한대의 무전으로 단정 근엄하여 포만감 있고 혼후(渾厚)한 풍격을 지닌 표준적인 인풍’이라고 칭송하며 ‘낙랑의 인장은 한반도 인제의 도입 시기에 있었던 형식의 제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시대의 권력상징과 지배구조를 비롯하여 문자생활의 유형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보고 있다.
봉니는 행정기관에서 문서나 물건을 보낼 때 진흙으로 봉하고, 거기에 인장을 찍어 신용을 보장하는데 사용되던 것이다. 일제시대 평양일대에서 수습된 봉니는 대략 200여개로 대부분 낙랑군현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과거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조선사를 신화로 돌리고, 중국 식민지인 한사군 설치를 한국사의 출발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 증거로 봉니를 제시했다.
그런데 만약 낙랑의 봉니가 일제시대에 위조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낙랑의 봉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위조가능성이 제기되었고, 학계에서는 상당한 연구 성과까지 제시된 마당이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봉니의 조작가능성을 지적했다.
정인보 선생의 문제제기
봉니는 발견 당시부터 위조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사학자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다. 그는 봉니의 보존상태가 너무 좋고, 서체가 비슷하며, 발견된 사례가 너무 많다는 점을 들어 조작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설사 위조품이 아니라하더라도 봉니는 받는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통례이므로 낙랑군현의 봉니가 나온 평양지역은 결코 낙랑군현이 설치된 곳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봉니는 글을 받은 사람이 봉한 것을 열면 부서지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것은 글을 받은 군현의 수령이 봉니를 열면 부서져 버리기 때문이다. 2천여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봉니가 그 형태가 완전하고, 인영(印影)이 갓 찍은 것처럼 선명하다는 것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문의 글씨가 한사람의 솜씨처럼 같다는 점도 의심스럽다.
인문은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런데 낙랑의 봉니는 한결같이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로 볼 때 이곳에 수집된 봉니는 고의로 조작했거나 이 지역 사람들이 돈벌이 목적으로 만들어 비싼 값으로 판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식민사관 기초한 인장사
1921년 조선총독부는 낙랑태수장이란 봉니가 출토되었다는 지역을 정밀조사 했으나 단 한 점의 봉니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총독부는 그 다음해인 1922년 낙랑태수장이란 봉니를 150원의 고가로 매입했고, 1934년 낙랑대윤장이란 봉니를 100원에 사들였다. 해방 전에 봉니를 위조하던 자들의 고백에 의하면 일제 골동상들과 봉니 위조자들이 수많은 봉니를 위조해서 팔았다고 한다.
결국 김양동 교수는 그간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제 식민사관에 기초한 채 한국의 인장사를 기술했다.
만약 그가 의도적으로 민족사에 기초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무시했다면 그 의도를 밝혀야 할 것이고, 그런 것들을 몰랐다면 교수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평양 일대의 무덤들이
중국식과는 여러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평양=낙랑설을 부인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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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중국에서 보내온 것이 우리 인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