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인장사를 기술하는데 있어서도 위나라(魏)에서 통치목적으로 보내온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과 진나라(晉)에서 예(穢)에 보낸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과 고구려에 보내온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을 맨 앞자리에 제시하고 있다.
그의 풀이를 보면 이 인장들은 변방의 이민족을 예속하고 그 신물로 준 만이인(蠻夷印)의 일종이라고 한다.
위솔선한백장을 예로 들면 인문의 솔선은 잘 다스려야 된다는 통치목적을 말하며, 한은 부족국가명이고, 백장은 인구수에 의한 부족장을 말하는 것으로 인구 수에 따라 읍장(邑長), 백장(佰長), 천장(仟長)으로 나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계속해서 ‘이 인장은 진(晉)이 예(穢)의 지배 통치자에게 권력을 승인하는 믿음의 표시물로 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예의 부족이 영일까지 내려와 지배했음을 시사하는 유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과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에 대해 그는 ‘시대는 위진시대지만 인제와 각풍은 한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 조선왕실의 인장 도록)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 조선왕실의 인장 도록)
치욕의 한국인장사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김교수의 주장대로 이 인장들은 중국이 변방의 이민족들에게 준 만이인의 일종이라면, 왜 우리 인장사(印章史)를 여기서부터 살펴야 하는 것인가?
역사는 유물과 함께 기록을 통해 쓰여 진다. 삼국의 인장사는 , 등에도 그 기록이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치욕의 인장부터 다루는 저의도 궁금하고, 중국의 인장을 놓고 우리 인장사를 다룬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다.
김양동 교수는 진에서 고구려에 보내진 인장에 대해서는 앞의 두 인장과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김 교수는 앞의 인장이 위나라나 진나라가 예의 통치자에게 권력을 승인하는 믿음의 표시물로 준 것이라고 풀이했다. 즉 이 인장들은 예(穢)의 유물이 아니라 위나 진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했다.
객관성 상실한 역사 해석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앞의 두 인장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는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에 대해서는 ‘인영이 남아있는 확실한 고구려 인장’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진과 고구려의 대외 교섭관계를 실물로서 증명하는 이 인장의 장법상 특징은 진(晉)과 고(高)자를 크게 하여 균형을 맞춘 것이 눈에 띄며, 한, 위, 진 시대를 일관했던 인전(印篆) 곧 한 대의 무전(繆篆)을 전형으로 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것은 고구려가 수준 높은 문자 문화를 가졌음을 확인시켜주는 실증이라 할 수 있겠다’고 덧붙였다.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같은 형식의 인장을 두고 앞의 두 인장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예나라에 하사한 것’으로 해석하고, 뒤의 인장에 대해서는 ‘진나라와 고구려의 대외 교섭관계를 증명’하는 인장이라고 풀이한 부분이다.
유물에 대한 해석이 풀이할 때마다 달라진다면 그 해석은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 조선왕실의 인장 도록)
진부여솔선백장(晋夫餘率善佰長).
이 인장은‘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 등의 유물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으며,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과 함께 변방의 이민족을 예속하고 그 신물로 준 만이인(蠻夷印)의 일종이다.
진고구려솔선백장은 서진(西晉) 인장
김 교수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만약 고구려에서 만든 인장이라면 굳이 진나라의 ‘진(晉)’자가 고구려의 ‘고(高)’자보다 앞에 들어가도록 만들었을 리는 없다.
진나라(265-419)가 활동했을 시점의 고구려는 수준 높은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한 시점이었다.
고구려는 개국 당시부터 천자(天子)를 선언하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표방했다. 고구려는 무려 705년 동안이나 독자적인 왕호(태왕)·연호·천제의식을 가져왔다. 독자적인 연호를 씀으로써 내외에 황제국임을 선언하고, 동맹이라는 천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인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인장은 고구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나라에서 자의적으로 보내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즉 고구려의 인장이 아니라 진나라의 인장이라는 점이다. 동진(東晋)이 413년 고구려 장수왕을 책봉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봐서 더욱 그렇다.
물론 이런 책봉은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내린 것이지 고구려가 그 체제에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으려면, 책봉을 받은 이후 고구려의 자율성이 중국에 의해 침해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조금도 예속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 역사가 말해준다.
晉 인장으로 高 문자 비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나라로부터 받은 인장을 통해 고구려의 문자문화 운운하는 김양동 교수의 분석은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현재 토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구려 인장 ‘고구려동읍백호봉인(高句麗東邑百戶俸印)’을 볼 때도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은 고구려 인장으로 보기 어렵다.
고구려동읍백호봉인은 진흙을 구워서 만들었으며, 손잡이 부분은 형식화된 동물문양을 빚어 올렸고, 앞뒤 다리 사이로 끈을 매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국내성에서 출토된 청동인장 중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는 것이 토지박물관의 설명이다.
진고구려솔선백장은 이 인장과 인문구성 등의 형식에서부터 사뭇 다르며, 문자체에서도 한전체에 가깝다.
반면 고구려동읍백호봉인은 광개토대왕비문체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내몽고 적봉시 파림좌기 석방자촌에서 수습된(1978년) 서진대 인장인 ‘진부여솔선백장(晋夫餘率善佰長, 내몽고상경성박물관 소장)’의 경우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 등의 유물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다. 이 인장은 청동제의 정방형이며 손잡이는 말(馬鈕) 모양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서진은 고구려와 예맥, 부여에게 모두 인장을 보낸 것이 된다.
이 같은 결과를 놓고 볼 때 김양동 교수가 고구려 인장으로 인정하고, 분석한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은 서진의 인장임이 분명해진다.
결국 김양동 교수는 서진(西晉)의 인장을 놓고 고구려 문화를 풀이한 셈이 된다. 잘못된 자료를 통해 분석한 결과 역시 잘못될 수밖에 없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한국 인장사 다시 써야 한다. - 4회
< 문화평론가 김사민씨가 묵가 잡지에 기고한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한국 인장사 다시 써야 한다. - 4회
4. 중국에서 보내온 것이 우리 인장인가?
그런데 김양동 교수는 사대성은 한국인장사 전반에 걸쳐 있다.
삼국시대의 인장사를 기술하는데 있어서도 위나라(魏)에서 통치목적으로 보내온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과 진나라(晉)에서 예(穢)에 보낸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과 고구려에 보내온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을 맨 앞자리에 제시하고 있다.
그의 풀이를 보면 이 인장들은 변방의 이민족을 예속하고 그 신물로 준 만이인(蠻夷印)의 일종이라고 한다.
위솔선한백장을 예로 들면 인문의 솔선은 잘 다스려야 된다는 통치목적을 말하며, 한은 부족국가명이고, 백장은 인구수에 의한 부족장을 말하는 것으로 인구 수에 따라 읍장(邑長), 백장(佰長), 천장(仟長)으로 나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계속해서 ‘이 인장은 진(晉)이 예(穢)의 지배 통치자에게 권력을 승인하는 믿음의 표시물로 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예의 부족이 영일까지 내려와 지배했음을 시사하는 유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과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에 대해 그는 ‘시대는 위진시대지만 인제와 각풍은 한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 조선왕실의 인장 도록)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 조선왕실의 인장 도록)
치욕의 한국인장사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김교수의 주장대로 이 인장들은 중국이 변방의 이민족들에게 준 만이인의 일종이라면, 왜 우리 인장사(印章史)를 여기서부터 살펴야 하는 것인가?
역사는 유물과 함께 기록을 통해 쓰여 진다. 삼국의 인장사는 , 등에도 그 기록이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치욕의 인장부터 다루는 저의도 궁금하고, 중국의 인장을 놓고 우리 인장사를 다룬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다.
김양동 교수는 진에서 고구려에 보내진 인장에 대해서는 앞의 두 인장과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김 교수는 앞의 인장이 위나라나 진나라가 예의 통치자에게 권력을 승인하는 믿음의 표시물로 준 것이라고 풀이했다. 즉 이 인장들은 예(穢)의 유물이 아니라 위나 진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했다.
객관성 상실한 역사 해석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앞의 두 인장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는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에 대해서는 ‘인영이 남아있는 확실한 고구려 인장’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진과 고구려의 대외 교섭관계를 실물로서 증명하는 이 인장의 장법상 특징은 진(晉)과 고(高)자를 크게 하여 균형을 맞춘 것이 눈에 띄며, 한, 위, 진 시대를 일관했던 인전(印篆) 곧 한 대의 무전(繆篆)을 전형으로 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것은 고구려가 수준 높은 문자 문화를 가졌음을 확인시켜주는 실증이라 할 수 있겠다’고 덧붙였다.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같은 형식의 인장을 두고 앞의 두 인장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예나라에 하사한 것’으로 해석하고, 뒤의 인장에 대해서는 ‘진나라와 고구려의 대외 교섭관계를 증명’하는 인장이라고 풀이한 부분이다.
유물에 대한 해석이 풀이할 때마다 달라진다면 그 해석은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 조선왕실의 인장 도록)
진부여솔선백장(晋夫餘率善佰長).
이 인장은‘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 등의 유물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으며,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과 함께 변방의 이민족을 예속하고 그 신물로 준 만이인(蠻夷印)의 일종이다.
진고구려솔선백장은 서진(西晉) 인장
김 교수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만약 고구려에서 만든 인장이라면 굳이 진나라의 ‘진(晉)’자가 고구려의 ‘고(高)’자보다 앞에 들어가도록 만들었을 리는 없다.
진나라(265-419)가 활동했을 시점의 고구려는 수준 높은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한 시점이었다.
고구려는 개국 당시부터 천자(天子)를 선언하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표방했다. 고구려는 무려 705년 동안이나 독자적인 왕호(태왕)·연호·천제의식을 가져왔다. 독자적인 연호를 씀으로써 내외에 황제국임을 선언하고, 동맹이라는 천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인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인장은 고구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나라에서 자의적으로 보내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즉 고구려의 인장이 아니라 진나라의 인장이라는 점이다. 동진(東晋)이 413년 고구려 장수왕을 책봉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봐서 더욱 그렇다.
물론 이런 책봉은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내린 것이지 고구려가 그 체제에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으려면, 책봉을 받은 이후 고구려의 자율성이 중국에 의해 침해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조금도 예속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 역사가 말해준다.
晉 인장으로 高 문자 비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나라로부터 받은 인장을 통해 고구려의 문자문화 운운하는 김양동 교수의 분석은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현재 토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구려 인장 ‘고구려동읍백호봉인(高句麗東邑百戶俸印)’을 볼 때도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은 고구려 인장으로 보기 어렵다.
고구려동읍백호봉인은 진흙을 구워서 만들었으며, 손잡이 부분은 형식화된 동물문양을 빚어 올렸고, 앞뒤 다리 사이로 끈을 매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국내성에서 출토된 청동인장 중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는 것이 토지박물관의 설명이다.
진고구려솔선백장은 이 인장과 인문구성 등의 형식에서부터 사뭇 다르며, 문자체에서도 한전체에 가깝다.
반면 고구려동읍백호봉인은 광개토대왕비문체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내몽고 적봉시 파림좌기 석방자촌에서 수습된(1978년) 서진대 인장인 ‘진부여솔선백장(晋夫餘率善佰長, 내몽고상경성박물관 소장)’의 경우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 등의 유물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다. 이 인장은 청동제의 정방형이며 손잡이는 말(馬鈕) 모양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서진은 고구려와 예맥, 부여에게 모두 인장을 보낸 것이 된다.
이 같은 결과를 놓고 볼 때 김양동 교수가 고구려 인장으로 인정하고, 분석한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은 서진의 인장임이 분명해진다.
결국 김양동 교수는 서진(西晉)의 인장을 놓고 고구려 문화를 풀이한 셈이 된다. 잘못된 자료를 통해 분석한 결과 역시 잘못될 수밖에 없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토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구려 인장
고구려동읍백호봉인(高句麗東邑百戶俸印)
고구려동읍백호봉인(高句麗東邑百戶俸印) 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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