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침의 그 일정하면서도 세밀한 움직임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무서운 기세로 손목시계를 노려본다. 시계란 놈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초침이 시계의 ‘5’를 지나칠 때 쯤 분침은 초침 몰래 반 발짝 앞으로 나아가서 새침한 계집애처럼 가만히 시침을 뚝 떼고 있다. 그러다 초침이 열심히 ‘9’ 근처에 다다르면 분침은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아예 나머지 반 발짝 앞으로 더 나가가 미리 도착해가지고 초침이 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먼저 도착해서 초침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편히 오라고 초침을 응원해주는 것인지, 아님 빨리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쉬고 싶어서 요령을 피우고 더딘 초침을 구박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자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시침과 비교해서 분침이란 녀석은 참 성격이 급하다는 것이다.
문득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지금 내 꼴이 마치 분침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난 지금 약속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연락도 없이 약속시간에 늦는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다. 한 삼분쯤 지났을까. 그 삼분쯤의 시간을 마치 삼년, 삼십년이 지난 것처럼 애가 타면서 애꿎은 시계에게 시간은 왜 이렇게 굼뜨게 흐르는 거냐고 닦달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저 급해빠진 분침 녀석이 내게 참 성격 급하다고 빈정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내 이것에 대해서 변명을 하라면 할 말은 많다. 거짓말을 하나도 보태지 않고 난 삼분이 아니라 삼년 전부터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별은 불현듯 찾아왔었다. 그때는 안일한 생각으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이별을 작별을 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서야 그 그리움과 죄책감의 무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우연히 다시 만날 인연이 아니라면 반드시 찾아낼 거라고. 그 다짐을 가슴 깊은 곳에 문신으로 새기고 살아간 것이 어느덧 삼년이나 흘러버렸다. 하지만 나름대로 나 자신을 위해 바빴다는 것이 핑계라면 핑계일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아있다면 잘 살고 있는지 무얼 하고 살고 있는지 아무런 소식도 모른 채 마냥 그리워만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무래도 언젠간 만날 인연이었을까. 그러던 중 우연찮은 기회로 그녀와 연락이 닿았고, 그저 만나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그 길로 곧장 약속을 정하고 그녀가 살고 있는 곳까지 찾아 온 것이다.
그렇기에 내겐 삼분의 시간이 그 무엇보다도 애절하다. 드라마나 라디오에서 슬픈 사랑 사연이 소개될 때, 잊을만하면 나오는 ‘그 몇 분의 시간이 제겐 수백, 수천 년이 흘러가는 것처럼 하염없이 길었습니다.’ 따위에 진부한 말들이, 길고 뾰족한 바늘처럼 가슴을 푹 찔러왔다. 정말 그 진부한 표현 말고는 심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시계에 머물러있던 시선을 핸드폰으로 옮긴다.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하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통화버튼을 누르는 대신 슬라이드를 닫았다. 몇 분 늦는다고 바로 전화부터 하면 속 좁게 보일 것 같기도 했고 - 속 좁고 급하게 보이는 것은 분침만으로 충분하다. - 지금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연락도 없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보다 설레고 가슴 졸이는 일이 또 있을까. 길 보퉁이를 돌아오는 사람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마다 고개를 쑥 내밀어 지켜보면서 혹시 내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닐까 기대하고. 역시나 그 사람이 아님에 실망도 하고. 올 시간이 넘었는데 오지 않으면 혹시 오다가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닐까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빙빙 맴돌면서 발을 동동 굴러보는. 세상 가장 잔인하면서도 설레고, 행복한 고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냥 기분이 설레어졌다. 결국 그녀가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핸드폰은 주머니에 집어넣어버렸다.
「2번 출구에서 나
오면 공중전화가
하나 보일거야. 거
기서 기다리고 있
어 금방 갈게-」
금방 오겠다는 그녀의 말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도 조금씩 비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어느새 젖은 어께와 머리칼을 툭툭 털어내고서 한 발자국 물러나 아예 부스 맨 구석에 몸을 기대버리고는 문을 닫았다. 공기가 눅눅하긴 했지만 제법 아늑했다. 언제였던가. 공중전화란 것이 이렇게도 친근하게 느껴졌던 적이. 핸드폰이 생기고 나서는 거의 잊고 살았었다. 그 전에도 그저 한쪽 벽면이 없는 푸르스름한 네모나고 기다란 부스 안에 연약해 보이는 쇠사슬에 묶여진 전화번호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무거워 보이는 수화기에 잘 눌려지지도 않는 버튼이 달린, 멍청하고 볼품없이 크기만 한 전화기가 있는 그리 좋지만은 않은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헌데, 지금은 영화에서나 나올듯한 여닫이문이 달린 빨간 철제 부스에 전화기도 귀족풍의 아담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신기했다. 요즘에도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하긴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쓰기 편하고 세련되게 바뀌어가는 것일 것이다. 길을 걷다가 이런 공중전화를 보면 한번쯤은 사용해보고 싶기도 할 것이고.
피차 공중전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 잊고 살고 있는 다른 무언가도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그 나름대로 지새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하고 변한 후에 마주 할 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변하고 있을 것이고, 이 공중전화처럼 이미 마주친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 그 모습이 좋은 모습이든 나쁜 모습이든.
혹시 그녀가 왔을까 부스 너머로 시선을 던져본다. 낯선 풍경 속에 눈에 익은 우산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 부스는 큰 도로와 주택가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맞닿아있는 삼거리의 정 중앙에 우두커니 서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서 그런지 차도는 차들이 점령을 하고 있었고, 주택가로 향하는 우산들로 거리도 분주했다.
빨간 체크무늬 우산. 검은 우산. 어린아이가 쓰고 있는 노란 병아리 우산. 검은 우산 구름이 그려진 하늘색 우산. 검은 우산. 검은 우산…….
지리도 모르는 전혀 처음 와보는 곳이라 그런지 그런 일상적인 모습도 낯설게 보였다. 나도 이 전화 부스도 갑자기 작아지는 것 같았지만 저 수많은 우산들 중에 하나는 분명 그녀가 쓰고 내게로 오고 있겠지 라고 머릿속으로 되뇌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다시 시계를 봤다. 초침은 그 사이 시계를 부지런하게 열댓 번이나 더 돌고 있었다. 전화를 해볼까 하고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잡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동전 몇 개를 집었다. 마침 지하철을 타고 거슬러 받은 잔돈이 얼마 남아있었다. 공중전화 안에서 핸드폰이라니. 뭔가 꼴이 우스워보였다.
수화기를 들자 수화 또는 카드를 넣어주십시오 라는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멘트가 들려왔다. 동전을 집어넣을 때 마다 철그렁- 거리며 고맙다고 하기에 혼자 중얼거리듯이 ‘녀석, 고맙기는.’ 하며 차근차근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낯설다. 그동안 통화는 많이 했었는데. 공중전화라 그런가보다.
“나야. 어디쯤이야?”
“아, 거의 다 와가. 놀랐잖아. 핸드폰 내버려두고 왠거야?”
“그냥, 오랜만에 공중전화 써보고 싶어서. 얼른 와. 나 우산도 없고, 춥다.” 라고 했더니.
“사내새끼가 징징거리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라고 한다.
당연히. 미치도록 보고 싶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수화기 너머로 킬킬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그럼 잘 찾아봐. 나는 너 보이는데에-”
고개를 돌려 부스 너머로 천천히 시선을 넘겼다.
비 내리는 거리. 바삐 움직이는 수십 개의 우산들 중에 단 하나의 우산이 나를 향해 멈춰서 있었다. 유리창이 뽀얗게 김이 서려서 흐릿했지만, 분명 단 하나. 나를 향해 있는 모습만큼은 확실했다.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딱 열 발자국. 그 건너에 그녀가 서있었다.
삼년만의 재회. 그 것 하나만으로 얼마나 간절했던가.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는 순간을. 그리고 지금 그렇게 열망했던 순간이 다가왔다. 설마 꿈은 아닐까. 이 수화기를 놓아버리면 눈앞에 그녀가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져버릴까 두려워졌다. 꿈이라면 딱 이 순간 시간이 멈춰서 영원히 깨지 않기를. 아니 제발 이 순간이 현실이기를.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꽉 움켜잡았다.
한걸음, 한걸음. 그녀도 핸드폰을 놓지 않은 채 걸어와 바로 한걸음 앞에 섰다. 서로 마주보고 그녀도 나도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너무나 많아서 어떤 말부터 꺼내야하는지. 아무래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그런 말들은 아무 것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지금 내가 그녀를 찾아왔고. 내 앞에 이렇게 그녀가 서있다는 것만이 전부일 것이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하나도 안 변했다야-”
“그러게……. 너도, 하나도 변한게 없네.”
마지막 한걸음을 내딛어 그녀를 와랑 감싸 안았다. 비 내리는 공중전화 아래에서의 재회. 아마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장 설레었던 만남으로 기억될 것이다.
“많이 보고 싶었어.”
이 한마디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말 밖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녀를 더 꽉 안았다. 귓가에 스치는 차분한 숨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단편) 공중전화 아래에서…
째깍…….
째깍…….
째깍…….
초침의 그 일정하면서도 세밀한 움직임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무서운 기세로 손목시계를 노려본다. 시계란 놈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초침이 시계의 ‘5’를 지나칠 때 쯤 분침은 초침 몰래 반 발짝 앞으로 나아가서 새침한 계집애처럼 가만히 시침을 뚝 떼고 있다. 그러다 초침이 열심히 ‘9’ 근처에 다다르면 분침은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아예 나머지 반 발짝 앞으로 더 나가가 미리 도착해가지고 초침이 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먼저 도착해서 초침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편히 오라고 초침을 응원해주는 것인지, 아님 빨리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쉬고 싶어서 요령을 피우고 더딘 초침을 구박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자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시침과 비교해서 분침이란 녀석은 참 성격이 급하다는 것이다.
문득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지금 내 꼴이 마치 분침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난 지금 약속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연락도 없이 약속시간에 늦는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다. 한 삼분쯤 지났을까. 그 삼분쯤의 시간을 마치 삼년, 삼십년이 지난 것처럼 애가 타면서 애꿎은 시계에게 시간은 왜 이렇게 굼뜨게 흐르는 거냐고 닦달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저 급해빠진 분침 녀석이 내게 참 성격 급하다고 빈정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내 이것에 대해서 변명을 하라면 할 말은 많다. 거짓말을 하나도 보태지 않고 난 삼분이 아니라 삼년 전부터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별은 불현듯 찾아왔었다. 그때는 안일한 생각으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이별을 작별을 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서야 그 그리움과 죄책감의 무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우연히 다시 만날 인연이 아니라면 반드시 찾아낼 거라고. 그 다짐을 가슴 깊은 곳에 문신으로 새기고 살아간 것이 어느덧 삼년이나 흘러버렸다. 하지만 나름대로 나 자신을 위해 바빴다는 것이 핑계라면 핑계일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아있다면 잘 살고 있는지 무얼 하고 살고 있는지 아무런 소식도 모른 채 마냥 그리워만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무래도 언젠간 만날 인연이었을까. 그러던 중 우연찮은 기회로 그녀와 연락이 닿았고, 그저 만나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그 길로 곧장 약속을 정하고 그녀가 살고 있는 곳까지 찾아 온 것이다.
그렇기에 내겐 삼분의 시간이 그 무엇보다도 애절하다. 드라마나 라디오에서 슬픈 사랑 사연이 소개될 때, 잊을만하면 나오는 ‘그 몇 분의 시간이 제겐 수백, 수천 년이 흘러가는 것처럼 하염없이 길었습니다.’ 따위에 진부한 말들이, 길고 뾰족한 바늘처럼 가슴을 푹 찔러왔다. 정말 그 진부한 표현 말고는 심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시계에 머물러있던 시선을 핸드폰으로 옮긴다.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하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통화버튼을 누르는 대신 슬라이드를 닫았다. 몇 분 늦는다고 바로 전화부터 하면 속 좁게 보일 것 같기도 했고 - 속 좁고 급하게 보이는 것은 분침만으로 충분하다. - 지금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연락도 없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보다 설레고 가슴 졸이는 일이 또 있을까. 길 보퉁이를 돌아오는 사람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마다 고개를 쑥 내밀어 지켜보면서 혹시 내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닐까 기대하고. 역시나 그 사람이 아님에 실망도 하고. 올 시간이 넘었는데 오지 않으면 혹시 오다가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닐까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빙빙 맴돌면서 발을 동동 굴러보는. 세상 가장 잔인하면서도 설레고, 행복한 고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냥 기분이 설레어졌다. 결국 그녀가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핸드폰은 주머니에 집어넣어버렸다.
「2번 출구에서 나
오면 공중전화가
하나 보일거야. 거
기서 기다리고 있
어 금방 갈게-」
금방 오겠다는 그녀의 말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도 조금씩 비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어느새 젖은 어께와 머리칼을 툭툭 털어내고서 한 발자국 물러나 아예 부스 맨 구석에 몸을 기대버리고는 문을 닫았다. 공기가 눅눅하긴 했지만 제법 아늑했다. 언제였던가. 공중전화란 것이 이렇게도 친근하게 느껴졌던 적이. 핸드폰이 생기고 나서는 거의 잊고 살았었다. 그 전에도 그저 한쪽 벽면이 없는 푸르스름한 네모나고 기다란 부스 안에 연약해 보이는 쇠사슬에 묶여진 전화번호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무거워 보이는 수화기에 잘 눌려지지도 않는 버튼이 달린, 멍청하고 볼품없이 크기만 한 전화기가 있는 그리 좋지만은 않은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헌데, 지금은 영화에서나 나올듯한 여닫이문이 달린 빨간 철제 부스에 전화기도 귀족풍의 아담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신기했다. 요즘에도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하긴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쓰기 편하고 세련되게 바뀌어가는 것일 것이다. 길을 걷다가 이런 공중전화를 보면 한번쯤은 사용해보고 싶기도 할 것이고.
피차 공중전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 잊고 살고 있는 다른 무언가도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그 나름대로 지새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하고 변한 후에 마주 할 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변하고 있을 것이고, 이 공중전화처럼 이미 마주친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 그 모습이 좋은 모습이든 나쁜 모습이든.
혹시 그녀가 왔을까 부스 너머로 시선을 던져본다. 낯선 풍경 속에 눈에 익은 우산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 부스는 큰 도로와 주택가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맞닿아있는 삼거리의 정 중앙에 우두커니 서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서 그런지 차도는 차들이 점령을 하고 있었고, 주택가로 향하는 우산들로 거리도 분주했다.
빨간 체크무늬 우산. 검은 우산. 어린아이가 쓰고 있는 노란 병아리 우산. 검은 우산 구름이 그려진 하늘색 우산. 검은 우산. 검은 우산…….
지리도 모르는 전혀 처음 와보는 곳이라 그런지 그런 일상적인 모습도 낯설게 보였다. 나도 이 전화 부스도 갑자기 작아지는 것 같았지만 저 수많은 우산들 중에 하나는 분명 그녀가 쓰고 내게로 오고 있겠지 라고 머릿속으로 되뇌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다시 시계를 봤다. 초침은 그 사이 시계를 부지런하게 열댓 번이나 더 돌고 있었다. 전화를 해볼까 하고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잡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동전 몇 개를 집었다. 마침 지하철을 타고 거슬러 받은 잔돈이 얼마 남아있었다. 공중전화 안에서 핸드폰이라니. 뭔가 꼴이 우스워보였다.
수화기를 들자 수화 또는 카드를 넣어주십시오 라는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멘트가 들려왔다. 동전을 집어넣을 때 마다 철그렁- 거리며 고맙다고 하기에 혼자 중얼거리듯이 ‘녀석, 고맙기는.’ 하며 차근차근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낯설다. 그동안 통화는 많이 했었는데. 공중전화라 그런가보다.
“나야. 어디쯤이야?”
“아, 거의 다 와가. 놀랐잖아. 핸드폰 내버려두고 왠거야?”
“그냥, 오랜만에 공중전화 써보고 싶어서. 얼른 와. 나 우산도 없고, 춥다.” 라고 했더니.
“사내새끼가 징징거리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라고 한다.
당연히. 미치도록 보고 싶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수화기 너머로 킬킬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그럼 잘 찾아봐. 나는 너 보이는데에-”
고개를 돌려 부스 너머로 천천히 시선을 넘겼다.
비 내리는 거리. 바삐 움직이는 수십 개의 우산들 중에 단 하나의 우산이 나를 향해 멈춰서 있었다. 유리창이 뽀얗게 김이 서려서 흐릿했지만, 분명 단 하나. 나를 향해 있는 모습만큼은 확실했다.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딱 열 발자국. 그 건너에 그녀가 서있었다.
삼년만의 재회. 그 것 하나만으로 얼마나 간절했던가.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는 순간을. 그리고 지금 그렇게 열망했던 순간이 다가왔다. 설마 꿈은 아닐까. 이 수화기를 놓아버리면 눈앞에 그녀가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져버릴까 두려워졌다. 꿈이라면 딱 이 순간 시간이 멈춰서 영원히 깨지 않기를. 아니 제발 이 순간이 현실이기를.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꽉 움켜잡았다.
한걸음, 한걸음. 그녀도 핸드폰을 놓지 않은 채 걸어와 바로 한걸음 앞에 섰다. 서로 마주보고 그녀도 나도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너무나 많아서 어떤 말부터 꺼내야하는지. 아무래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그런 말들은 아무 것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지금 내가 그녀를 찾아왔고. 내 앞에 이렇게 그녀가 서있다는 것만이 전부일 것이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하나도 안 변했다야-”
“그러게……. 너도, 하나도 변한게 없네.”
마지막 한걸음을 내딛어 그녀를 와랑 감싸 안았다. 비 내리는 공중전화 아래에서의 재회. 아마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장 설레었던 만남으로 기억될 것이다.
“많이 보고 싶었어.”
이 한마디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말 밖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녀를 더 꽉 안았다. 귓가에 스치는 차분한 숨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그리곤 넘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