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연습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르디 녀석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와 자룬 왕자는 그 냥 각자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각자 훈련을 끝 마치고는, 왕자와 나는 대련을 해보기로 했다. 물론 왕자의 실 력은 나보다 한참은 위였기 때문에, 대련이라는 말 자체가 어 울리지 않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르디 녀석이랑 붙을 때는 너무 간단하게 끝나서 몰랐지만, 왕자의 검술은 굉장히 특이하고 현란했다. 내 주춤거리는 모 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역시 기르디 녀석하고 붙을 때처럼, 굉장히 일방적인 대결이었다. 왕자는 가능한 내 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 검을 날렸고, 나는 그것을 최대한 열심 히 움직이며 방어하는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대충 연습이 끝나자,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 고 잠을 자기 위해 방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계단 하나 올 라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온몸은 엉망진창으로 망가 져 있었다. 억지로 그렇게 한 걸음씩 걸음을 움직이고 있을 때, 어느 한쪽 방에서 살짝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개인의 프라이버시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의 호기심 충 족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렇게 그 흐느끼는 소리를 따라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 상대의 의사 를 반영하지 못한 점에서 이런 사고는 굉장히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다. - 살짝 문을 열자, 흐느끼는 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셀브렛, 묘 인족의 소녀는 그렇게 이불을 작은 품 안에 잔뜩 끌어안은 상 태로 침대에 누워 눈물 흘리며 슬퍼하고 있었다. 상처받았지 만,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혼 자 울고, 혼자 슬퍼하는 것이다. 동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래도 사람인 이상 조금은 마음이 무거워져 오기 시작했다. "… 거기 있는 것은 누구?" 셀브렛은 살짝 침대에 일어나서 내가 있는 문 쪽을 바라보 며 그렇게 말했다. 묘인족은 청각과 시각이 인간에 비해 상당 히 발달된 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그렇게 문을 열고 걸 음을 움직여 셀브렛의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 흘려서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이다. 아래로 축 처진 두 개의 귀가 조금은 귀엽 기도 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살짝 입을 열었다. "… 강한 척하더니." 낮에 콧대 높은 척하던 꼴이 생각나서, 나는 그렇게 살짝 빈 정거렸다. 녀석은 내 도발적인 말에도,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 으며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기가 죽은 모 습을 보니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조 금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라도 괜찮다면 말해주지 않겠어." 그렇게 속에 쌓아놓고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홀가분하 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셀브렛 이 입은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슬슬 졸음이 와 참기 힘들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녀석은 그렇게 고개를 숙인 체, 천 천히 입을 열고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나는 노예로 팔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묘인족이 아니 다." 묘인족도 드물긴 하지만 자신의 부족을 만들고, 인적없는 산 이나 숲 속에서 무리를 짓고 살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녀석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잠시 후, 그런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는, 물기 젖은 눈 을 한 체 천천히 슬픈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와 함 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 적어도 그 녀석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신의 말에 감정이 고조된 것인지, 셀브렛은 다시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참을성있게 녀석의 다 음 말을 기다렸다. 어느새 녀석의 양쪽 허벅지가 피가 베어 나 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손톱이 그렇게 자신의 살을 파고 들 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녀석들. 그 '사냥꾼'들은 그렇게 내 어머니를 겁탈하 고, 아버지의 목을 잘랐지. 정말로 즐겁고 유쾌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이야. 나는 어려서 겁탈당하지는 않았지만." 쿡쿡-하고 웃으며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물로 잔 뜩 엉망이 된 얼굴로 말이다. 더 이상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 기 때문에, 나는 살짝 걸음을 움직여 흐느끼는 녀석에게 다가 갔다. "오지 마, 인간!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마라." 날카롭게 온몸의 털과 손톱을 세우며 나를 위협하려는 듯 녀석은 그렇게 앙칼지게 외쳤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녀석이 그런 나에게 피가 묻어 있는 손톱을 갑작스레 휘둘러서 가슴에는 피가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뒷걸음질한다면, 평 생 이 녀석과 가깝게 지내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살짝 팔을 벌려 녀석의 작은 몸을 감싸 안아주었다. 당황하 는 듯 녀석은 몸을 흔들며 저항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럴수 록 더욱더 힘을 주어 녀석을 감싸 안았다. "… …." 한참을 그렇게 바둥거리며 저항하다가 녀석은 포기한 듯, 온 몸에 힘을 빼고 그렇게 내 품속에 안겨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으니까." 서서히 가슴속이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더욱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 녀석은 아직 어리다. 묘인족 이 단명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성인이 되기에는 한참 남은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누군가에게 의지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욕할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셔츠가 몽땅 젖어버 릴 정도다. 이 녀석이 받은 고통이란 것은 내가 생각할 수 없 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말재주가 없어서 뭐라고 위로해 줄 수 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힘들 때 안아주는 것이라면, 나 같 은 녀석도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 따위는 정말 싫어." 그런 일을 겪은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만약 나 자신 도 이 녀석과 비슷한 경험을 가졌다고 생각해 보면, 똑같은 반 응을 보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런 것은 결국 세월이 약이라 는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녀석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흐느낌 소리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왠지 내 마음도 점점 착잡해지는 것 같아, 조금은 우울한 기분이었다.
종업원 옷을 입고, 녀석은 그렇게 온몸을 쭈뼛거리며 쑥스러 워 하고 있었다. 치마 사이로 살짝 빠져나오는 자신의 꼬리를 어루만지면서, 얼굴을 붉히며 나와 아이린씨를 바라보는 녀석 의 얼굴이 조금은 귀여워 보였기 때문에, 나는 팔을 뻗어 살짝 녀석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 …." 내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어색한 얼굴이다. 아 이린씨는 그런 나와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은 당황스러 운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음, 일단 이 녀석이 왠지 좋아졌다고 할까, 녀석도 내가 싫 지는 않은 것 같고. 그리고 같이 살아야 하는 이상 친하게 지 내는 편이 좋지 않겠어? "그냥요." 살짝 웃음 지으며 대답하는 내 얼굴과 녀석의 얼굴을 번갈 아 보면서, 아이린씨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 만 나와 셀브렛은 그런 아이린씨를 무시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조금은 실없이 웃음 지을 뿐이었다.
처음 셀브렛 녀석이 맡은 일은 접시를 닦는 일이었다. 종업 원들이 제일 기피하는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해서 나는 녀석을 도와주기 위해 천천히 주방으로 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오는 편이라 좋은 날씨라는 생각 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식당에서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하는 데, 날씨 따위야 아무러면 어떻겠는가. 아니, 오히려 가끔 식당 밖에서 저렇게 즐겁게 웃으며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면 '젠장, 폭풍우라도 휘몰아 쳐버려!'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니 까 말이야. - 특히 대낮부터 닭살 돋게 부비적거리는 연인들을 보게 될 경우. - 여하튼 그렇게 막 주방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익숙 한 소리가 등 뒤에 들려와서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이." 무엇인가 다리 여러 개 달린 것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기 분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평상심을 유지 하며 그렇게 나는 등을 돌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후훗." 세 명의 인간들이 그렇게 웃음 지은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 세 명의 정체가 다름 아닌 엘리 남매와, 리체 녀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 표정은 정말 급속도로 굳어 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빈혈이 느껴져서 무릎이 휘청거릴 정도로 경악했 지만, 나는 간신히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는 심신을 추스르며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 세 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리고, 왜 이곳에 온 것인가. 내 질문에 그 녀석들 은 재미있다는 듯이 유쾌하게 웃음 지으며 한마디씩 하기 시 작했다. "음, 그대는 우리의 정보 능력을 너무 무시하고 있군." "굼벵이도 굴러가는 재주가 있다잖아." "어머, 리체야. 어째 좀 비유가 그렇다." 녀석들이 떠들어대는 것을 들으니, 더 더욱 머리가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만나는 것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왜 이런 곳에서까지 봐야 되는 것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 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면 슬프다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리체 녀석이 조금은 날카로운 눈을 하 고는 말했다. 으음, 생각하는 게 표정으로 드러나다니…. 이게 다 아직 내 수련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최대한 포커 페이스 같 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말이지. "조금 몸이 안 좋아서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무슨 용무로?"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냉정한 얼굴을 한 체, 세 사람에 게 질문했다. 리체 녀석이 그런 나에게 다가와서 괜히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냥 단순한 운영진 회의라고.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운영진 회의고 나발이고, 다 좋은 데 왜 하필 이 식당에서 해야만 한다는 것이냐. 학교에서 하든지, 아니면 넓은 당신들 집에서 하던지 할 것이지 말이야. 울화가 치밀어서 눈앞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는 이 리체 녀석의 얼굴에 매직 미사일을 꽂 아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역시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어쨌든 나는 그런 녀석들을 등 뒤로 하고, 주방 안으로 걸음 을 움직였다. 리체 녀석이 뭐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지만, 가뿐 하게 무시해 주면서 말이다.
걱정했던 거와는 달리 셀브렛은 접시 닦이 역활을 잘 소화 해 내고 있었다. 예전의 나보다는 훨씬 능숙하고, 빠르고 신속 하게 말이다. 열심히 접시를 닦는 모습을 보니까, 조금은 여자 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때처럼, 더러운 꼬락서니가 아니라서 그런지는 모 르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녀석은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눈치 좋게 눈을 깜박거리며 한 번 쳐다보고는, 무시하며 다시 접시 닦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녀석이 별 말썽 없이 일을 하고 있으니, 조금은 싱 겁기도 했다. 적어도 접시 한두어 개는 깨트리고 있을 줄 알았 는데 말이다. "… …." 코 언저리에 거품이 묻은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열심 이다. 비웃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쿡쿡-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녀석의 한쪽 어깨를 잡고는, 슥슥하고 손수 건으로 코를 닦아주었다. - 녀석이 의외로 얌전하게 얼굴을 붉 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나는 별 저항 없이 거품을 닦아 낼 수 있었다. - 살짝 고개를 올리고는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조금은 귀여워 보였다. 쫑긋 서 있는 노랑 바탕에 검은색 무늬 가 들어가 있는 두 개의 귀가 조금은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 기도 했지만 말이다. 자기 나름대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나 같 은 녀석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인한 녀석이었다. 누 구 하나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며, 그렇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것을 봐도 느낄 수 있었다. 연약한 모습과는 다르게 심지가 굳 은 성격이랄까. - 그런 면에서는 시아 녀석과 조금 닮기도 한 것 같다. - 일단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난 소매를 걷어 올리고 는, 천천히 손과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라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서 도우며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이었기 때문이었다. - 세 살짜리 꼬마들 도 아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간혹 나이를 먹어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 있긴 하 지만. - 셀브렛은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입을 내밀며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별로….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도와주는 것 뿐." 처음으로 본 미소, 조금은 감격한 듯이 나를 바라보며 그렇 게 딱딱한 미소를 짓는 셀브렛 녀석. 어설프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세상의 아픔과 슬픔은 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듯한 우울한 표정보다는 백 배, 천 배.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내가 도와준 보람이 있는 모양인지, 밀린 설거지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다 끝낼 수 있었다.
식당의 저녁 식사는 언제나 빨랐다. 빠르고 신속하게 식사를 끝낸 후,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점심 겸 저녁이라고 할까, 어쨌든 마땅히 분류하기 어려운 식사를 일행 들은 하고 있었다. 모두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어서 언뜻 보면 조용하고 점 잖은 식사 시간 같기도 했지만, 셀브렛 녀석 덕분에 그렇지도 못했다. 포크, 나이프를 잡는 것도 힘들어할 정도로 녀석의 식 사 예절은 엉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이프나 포크도 본래 의 용도를 상실하고, 입으로 음식을 옮겨가는 쓰임 정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적에게 동서남북 포위된 장군의 모습이랄 까. 식은땀을 흘리며 셀브렛 녀석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식사 를 하고 있었다. 물론, 시아가 옆에서 그런 셀브렛을 가만 놔두지는 않았다. ' 나이프는 음식을 알맞게 잘라 먹을 때 쓰는 거야.'라던지, '그 렇게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주워 먹을 필요 없어.'같은 조언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 그것도 무표정으로 말이다. 시아 녀석 이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한 포커 페이스라는 것은, 요새 자주 깨닫고 있는 일이었다. - 대충 그렇게 식사가 끝나자, 저녁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식당의 사람들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셀브 렛 녀석을 도와주고 싶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여유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나마 여유로운 시아 녀석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손님들이 서서히 식당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 하자, 다른 사람 걱정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상하게 평소보 다 배는 많을 정도로 손님들이 들어 닥친 것이다. 몸은 발바닥에 땀날 정도니 설명할 필요도 없겠고 정신은 마치 사 차원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것 같으니, 그 괴로움을 어 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뭐라 쉽사리 설 명할 수 없을 그런 식당 일이 끝나자, 나는 다시 천천히 시아 와 셀브렛이 있을 주방 안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시아 녀석의 무릎에 기대어 셀 브렛 녀석은 그렇게 잠들어 있었다. 시아 녀석은 미소 지은 얼 굴로 조용히 하라는 듯이 살짝 검지 손가락을 입에 올리며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내 가 허탈한 표정을 하자, 시아 녀석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그런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힘들어 죽겠네…." 내가 푸념하자, 왕자는 잠시 그런 나를 무심한 눈빛으로 쳐 다보았다. 사실 이렇게 푸념하는 것도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평소보다 더 힘든 식당 일을 마치고, 셀브렛 녀석을 등에 들쳐 업고 계 단을 올라가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다시 이렇게 무거운 검을 들고, 뼈 빠지게 휘두르고 있으니까. 무슨 내 몸이 미스릴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이상, 이렇게 금 방 탈진해 버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여 하튼, 왕자는 내가 바닥에 쓰러지든, 푸념을 하든 상관조차 안 하겠다는 듯이 다시 검술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왕자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희미하지만, 마나의 움직임이 있 었기에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왕자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마법의 힘이 담긴 것인가?' 왕자가 몸을 움직이자, 칼은 포물선을 그리며 잔상과도 같은 미약한 빛을 내고 있었다. 역시 괜히 왕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르디가 준 검도 내게는 과분할 정도로 훌륭하긴 했 지만, 왕자의 칼은 그런 내 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았기 때문 이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왕자는 말없이 내게 다가와 자신의 칼을 내밀어 보였다. 내가 당황스러워 하며 그것을 받 아 들자, 왕자는 등을 돌리며 살짝 입을 열었다. "봐도 좋다." 흠, 왠지 모르게 왕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오해를 하고 있었 던 모양이다. 자신의 칼을 이렇게 선뜻 보여준다는 것은 그만 큼 상대를 신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게다가 이렇게 귀중하고 대단한 무기라고 한다면, 모든 검사들의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여하튼 확실히 왕자에게 나는 신용을 얻고 있었던 모양이다. 같이 지낸 지 얼마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 했다. 왕자는 뭐라 할 말이 없는지 등을 돌리고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됐든 왕자가 건네준 도(刀)를 나는 진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무엇이라 조그맣게 새겨진 수많은 문자들이, 역시 마법의 힘이 담겨져 있다는 생각을 굳 히게 만들어주었다. 날씬하게 뻗어 있는 도를 보자, 나도 모르 게 조금은 경외심 같은 것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휘둘러 봐도 될까?" 거절한다고 해도 탓할 생각은 전혀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 렇게 눈과 감촉으로 도를 견식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경험이 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 …" 왕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은 설레는 기분으 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술을 펼쳐 보였다. - 말이 거창하지만, 사실은 그냥 있는 힘껏 휘둘러 보 는 게 전부인 것이다. - 애송이인 내가 무엇인가 느낌이 들 정도로 대단했다. 조금 더 사용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그냥 아쉬운 대로 도(刀)를 왕자에게 건네주었다. 왕자는 말없이 다시 받아 들고 는 단순하지만 고귀한 몸짓으로 칼집에 자신의 도를 집어넣었 다. - 그때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것은, 우연이라고 생 각하고 싶은 일이다. - 왕자와 나는 조금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그 렇게 잠시 동안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 * *
"호오, 역시 대단하기도 하셔라." 리체 녀석은 어느새 다가왔는지,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두 르고는 그렇게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가뜩 이나 사람들, 특히 남학생들이 많은 곳에서 이 녀석과 신체 접 촉하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 이미 게시판 근처 몇 명의 남 학생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살짝 녀 석의 몸을 뿌리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솔직히 나도 조금은 의외였다. 성적이 높을 것이라고는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이나 한 듯이 리체 녀석이 다시 대답했다. "운도 실력이라고, 조금은 거만해져도 좋을 텐데 말이지." '그래, 나 잘나서 일등했수다.'라고 말하는 녀석이 되라는 것 인가. 한심한 나머지 뭐라고 대답하는 것조차 짜증이 나기 시 작했다. 말없이 내가 걸음을 움직이자, 리체 녀석도 그런 나를 따라 걸어오기 시작했다. 여하튼 반에서 성적이 최고라는 것이 기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 내색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은 벌거벗고 춤을 춰도 모자를 만큼 기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 조금 과격한 비유 같기도 하지만. - "여어, 엘리." 엘리 녀석이 타이밍 좋게, 내가 지나가는 반대쪽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일등 한 것 축하드려요." 음, 반 아이들에게 벌써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엘리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심으로 축 하해 주는 것 같은데, 무시할 수는 없을 노릇일 테니 말이다. 새삼스럽게 나 자신이 일등 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라, 여 태까지 힘들게 노력한 것이 주마등처럼 하나 둘씩 머리 속에 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식당 일에, 검술 연습에, 공부까지 하느 라고 그동안 겪은 생고생들이 말이다. 내 상상을 방해하듯이 리체 녀석은 갑작스레 엘리에게 뭐라 고 떠들기 시작했다. "정말 동호회 전체의 경사야. 축하 파티라도 할까?" 내가 일등 한 것이 왜 망할 동호회 전체에 경사라는 것인가. 이 동호회에 입부한 것도 수치스러워 죽겠는데 말이지. "그래, 그럼 오늘 수업 끝나고 모이기로 하자." 젠장, 왜 또 이런 전개냐! 녀석들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시 간과 장소를 정하고 즐겁다는 듯이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내가 뭐라 말한다고 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 분명할 것 같았다.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별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아 나는 그렇게 얼굴을 굳히고 그 둘을 바라보고 만 있을 뿐이었다.
'나오지 않아도 좋아, 너희 식당으로 찾아가면 될 테니까.'라 는 리체 녀석의 말 덕택에 도망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 이 되어버렸다. 마치 좀비처럼 형편없는 몰골로 나는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움직이 고 있었다. 오늘따라 학교의 제일 후미진 곳에 위치한 동호회 실이 왜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것인지,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눈앞에는 턱하니 회실의 문이 나타나 있는 것이 다. 구울(Ghoul:시체를 먹고 사는 몬스터. 좀비와 조금 유사하 다.)의 독에 걸린 사람마냥,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그렇게 움직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여어, 어서 와~!" 리체 녀석이 그렇게 웃는 얼굴로 다가와 부비적거리며 말했 다. 언제나처럼 엘리, 리체 그리고 또 한 명. "하하.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었어. 그대는 역시 나를 실 망시키지 않는군." 정말 잘못한 건 없어도 거부감 왕창 드는 녀석, 이 학교에 학생회장이자 엘리 녀석의 오빠이기도 한 아마 '코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지. 녀석은 그렇게 내 날카로운 시선을 능글맞은 웃음으로 받아넘기고는 수다스럽게 뭐라 떠들기 시 작했다. 여하튼 뭐라 떠들던 말든, 가뿐하게 한 귀로 흘려들으 며 나는 그렇게 정해진 자리에 몸을 묻었다. 대충 그렇게 모두 자리에 앉자 리체 녀석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은 후, 상기 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자! 베리가 일등을 한 것도, 우리 동호회 전체의 경사라 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오늘은 신나게 떠들고 놀아봅시다." 엘리는 리체가 뭐라 말하는 도중에,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음식과 마실 것을 탁자 위에 하나 둘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 여하튼, 건배합시다!" 그렇게 뭐라 한참을 장황하게 말하더니, 잔을 들고 그렇게 모두에게 건배하라고 하는 리체 녀석이었다. 대충 하는 시늉만 해주고, 천천히 잔을 들이키려고 했으나…. "푸훕, 이거 술이잖아?!" 학교 안에서 이렇게 술을 마시다니,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 일이다. 내 창백한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모두 는 그렇게 잔을 비우고 있었다. - 한두 번이 아닌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 리체 녀석이 어느새 그런 내 옆에 다가와 어깨 에 팔을 두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괜찮아. 뭐 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너 같은 녀석이야 좋겠지만, 나는 하나도 안 좋다. 라고 말 해주고 싶었지만, 한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러고 싶 은 마음도 사라졌다. 여하튼, 이 동호회에 입부했다는 것은 내 인생에 손꼽히는 실수로 기억될 것이라는 예감이 불현듯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 아니, 예감이 아니라 거의 확정된 사실 이겠지만. - 술 같은 건 그다지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분위기라던지 하 는 것 덕분에, 어쩔 수 없이 한두 잔 정도 마실 수밖에 없었 다. - 리체 녀석은 취하면 과격하게 행동하는 피곤한 타입이었 다. 거의 반강제로 내 입에 술을 집어넣는 바람에 굉장히 당황 스러웠다. 조금은 한심하기도 하지만 웃고 떠들고 마시다 보니, 스트레 스 같은 것도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질 무 렵까지 떠들다가, 나는 식당 일을 해야 한다는 핑계 덕분에 시 끌벅적한 동호회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휴…." 알콜이 조금 들어간 덕분인지,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 다. 그래도 후덕지근한 회실에서 한참 동안 있다가 밖으로 나 와보니 정말 시원하다 외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조 금 늦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뭐 오늘 같은 날이면 기르디도 용서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천천히 식당으로 향하는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1권] 금단의페트 - promise - 6-2
금단의 페트(The forbidden pet) -
[애니, 소설 보러 오세요^ - ^]
이 름 배진국제 목 금단의페트 - promise -
검술 연습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르디 녀석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와 자룬 왕자는 그
냥 각자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각자 훈련을 끝
마치고는, 왕자와 나는 대련을 해보기로 했다. 물론 왕자의 실
력은 나보다 한참은 위였기 때문에, 대련이라는 말 자체가 어
울리지 않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르디 녀석이랑 붙을 때는 너무 간단하게 끝나서 몰랐지만,
왕자의 검술은 굉장히 특이하고 현란했다. 내 주춤거리는 모
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역시 기르디 녀석하고
붙을 때처럼, 굉장히 일방적인 대결이었다. 왕자는 가능한 내
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 검을 날렸고, 나는 그것을 최대한 열심
히 움직이며 방어하는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대충 연습이 끝나자,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
고 잠을 자기 위해 방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계단 하나 올
라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온몸은 엉망진창으로 망가
져 있었다. 억지로 그렇게 한 걸음씩 걸음을 움직이고 있을
때, 어느 한쪽 방에서 살짝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개인의 프라이버시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의 호기심 충
족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렇게 그
흐느끼는 소리를 따라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 상대의 의사
를 반영하지 못한 점에서 이런 사고는 굉장히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다. -
살짝 문을 열자, 흐느끼는 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셀브렛, 묘
인족의 소녀는 그렇게 이불을 작은 품 안에 잔뜩 끌어안은 상
태로 침대에 누워 눈물 흘리며 슬퍼하고 있었다. 상처받았지
만,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혼
자 울고, 혼자 슬퍼하는 것이다. 동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래도 사람인 이상 조금은 마음이 무거워져 오기 시작했다.
"… 거기 있는 것은 누구?"
셀브렛은 살짝 침대에 일어나서 내가 있는 문 쪽을 바라보
며 그렇게 말했다. 묘인족은 청각과 시각이 인간에 비해 상당
히 발달된 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그렇게 문을 열고 걸
음을 움직여 셀브렛의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 흘려서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이다. 아래로 축 처진 두 개의 귀가 조금은 귀엽
기도 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살짝 입을 열었다.
"… 강한 척하더니."
낮에 콧대 높은 척하던 꼴이 생각나서, 나는 그렇게 살짝 빈
정거렸다. 녀석은 내 도발적인 말에도,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
으며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기가 죽은 모
습을 보니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조
금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라도 괜찮다면 말해주지 않겠어."
그렇게 속에 쌓아놓고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홀가분하
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셀브렛
이 입은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슬슬 졸음이 와 참기
힘들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녀석은 그렇게 고개를 숙인 체, 천
천히 입을 열고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나는 노예로 팔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묘인족이 아니
다."
묘인족도 드물긴 하지만 자신의 부족을 만들고, 인적없는 산
이나 숲 속에서 무리를 짓고 살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녀석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잠시
후, 그런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는, 물기 젖은 눈
을 한 체 천천히 슬픈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와 함
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 적어도 그 녀석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신의 말에 감정이 고조된 것인지, 셀브렛은 다시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참을성있게 녀석의 다
음 말을 기다렸다. 어느새 녀석의 양쪽 허벅지가 피가 베어 나
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손톱이 그렇게 자신의 살을 파고 들
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녀석들. 그 '사냥꾼'들은 그렇게 내 어머니를 겁탈하
고, 아버지의 목을 잘랐지. 정말로 즐겁고 유쾌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이야. 나는 어려서 겁탈당하지는 않았지만."
쿡쿡-하고 웃으며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물로 잔
뜩 엉망이 된 얼굴로 말이다. 더 이상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
기 때문에, 나는 살짝 걸음을 움직여 흐느끼는 녀석에게 다가
갔다.
"오지 마, 인간!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마라."
날카롭게 온몸의 털과 손톱을 세우며 나를 위협하려는 듯
녀석은 그렇게 앙칼지게 외쳤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녀석이 그런 나에게 피가 묻어 있는 손톱을 갑작스레
휘둘러서 가슴에는 피가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뒷걸음질한다면, 평
생 이 녀석과 가깝게 지내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살짝 팔을 벌려 녀석의 작은 몸을 감싸 안아주었다. 당황하
는 듯 녀석은 몸을 흔들며 저항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럴수
록 더욱더 힘을 주어 녀석을 감싸 안았다.
"… …."
한참을 그렇게 바둥거리며 저항하다가 녀석은 포기한 듯, 온
몸에 힘을 빼고 그렇게 내 품속에 안겨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으니까."
서서히 가슴속이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더욱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 녀석은 아직 어리다. 묘인족
이 단명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성인이 되기에는 한참
남은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누군가에게 의지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욕할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셔츠가 몽땅 젖어버
릴 정도다. 이 녀석이 받은 고통이란 것은 내가 생각할 수 없
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말재주가 없어서 뭐라고 위로해 줄 수
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힘들 때 안아주는 것이라면, 나 같
은 녀석도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 따위는 정말 싫어."
그런 일을 겪은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만약 나 자신
도 이 녀석과 비슷한 경험을 가졌다고 생각해 보면, 똑같은 반
응을 보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런 것은 결국 세월이 약이라
는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녀석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흐느낌 소리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왠지 내 마음도 점점
착잡해지는 것 같아, 조금은 우울한 기분이었다.
종업원 옷을 입고, 녀석은 그렇게 온몸을 쭈뼛거리며 쑥스러
워 하고 있었다. 치마 사이로 살짝 빠져나오는 자신의 꼬리를
어루만지면서, 얼굴을 붉히며 나와 아이린씨를 바라보는 녀석
의 얼굴이 조금은 귀여워 보였기 때문에, 나는 팔을 뻗어 살짝
녀석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 …."
내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어색한 얼굴이다. 아
이린씨는 그런 나와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은 당황스러
운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음, 일단 이 녀석이 왠지 좋아졌다고 할까, 녀석도 내가 싫
지는 않은 것 같고. 그리고 같이 살아야 하는 이상 친하게 지
내는 편이 좋지 않겠어?
"그냥요."
살짝 웃음 지으며 대답하는 내 얼굴과 녀석의 얼굴을 번갈
아 보면서, 아이린씨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
만 나와 셀브렛은 그런 아이린씨를 무시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조금은 실없이 웃음 지을 뿐이었다.
처음 셀브렛 녀석이 맡은 일은 접시를 닦는 일이었다. 종업
원들이 제일 기피하는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해서
나는 녀석을 도와주기 위해 천천히 주방으로 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오는 편이라 좋은 날씨라는 생각
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식당에서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하는
데, 날씨 따위야 아무러면 어떻겠는가. 아니, 오히려 가끔 식당
밖에서 저렇게 즐겁게 웃으며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면 '젠장,
폭풍우라도 휘몰아 쳐버려!'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니
까 말이야. - 특히 대낮부터 닭살 돋게 부비적거리는 연인들을
보게 될 경우. -
여하튼 그렇게 막 주방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익숙
한 소리가 등 뒤에 들려와서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이."
무엇인가 다리 여러 개 달린 것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기
분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평상심을 유지
하며 그렇게 나는 등을 돌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후훗."
세 명의 인간들이 그렇게 웃음 지은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 세 명의 정체가 다름 아닌 엘리 남매와, 리체
녀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 표정은 정말 급속도로 굳어 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빈혈이 느껴져서 무릎이 휘청거릴 정도로 경악했
지만, 나는 간신히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는 심신을 추스르며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 세 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리고, 왜 이곳에 온 것인가. 내 질문에 그 녀석들
은 재미있다는 듯이 유쾌하게 웃음 지으며 한마디씩 하기 시
작했다.
"음, 그대는 우리의 정보 능력을 너무 무시하고 있군."
"굼벵이도 굴러가는 재주가 있다잖아."
"어머, 리체야. 어째 좀 비유가 그렇다."
녀석들이 떠들어대는 것을 들으니, 더 더욱 머리가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만나는 것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왜
이런 곳에서까지 봐야 되는 것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
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면 슬프다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리체 녀석이 조금은 날카로운 눈을 하
고는 말했다. 으음, 생각하는 게 표정으로 드러나다니…. 이게
다 아직 내 수련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최대한 포커 페이스 같
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말이지.
"조금 몸이 안 좋아서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무슨 용무로?"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냉정한 얼굴을 한 체, 세 사람에
게 질문했다. 리체 녀석이 그런 나에게 다가와서 괜히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냥 단순한 운영진 회의라고.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운영진 회의고 나발이고, 다 좋은 데 왜 하필 이 식당에서
해야만 한다는 것이냐. 학교에서 하든지, 아니면 넓은 당신들
집에서 하던지 할 것이지 말이야. 울화가 치밀어서 눈앞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는 이 리체 녀석의 얼굴에 매직 미사일을 꽂
아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역시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어쨌든 나는 그런 녀석들을 등 뒤로 하고, 주방 안으로 걸음
을 움직였다. 리체 녀석이 뭐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지만, 가뿐
하게 무시해 주면서 말이다.
걱정했던 거와는 달리 셀브렛은 접시 닦이 역활을 잘 소화
해 내고 있었다. 예전의 나보다는 훨씬 능숙하고, 빠르고 신속
하게 말이다. 열심히 접시를 닦는 모습을 보니까, 조금은 여자
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때처럼, 더러운 꼬락서니가 아니라서 그런지는 모
르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녀석은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눈치
좋게 눈을 깜박거리며 한 번 쳐다보고는, 무시하며 다시 접시
닦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녀석이 별 말썽 없이 일을 하고 있으니, 조금은 싱
겁기도 했다. 적어도 접시 한두어 개는 깨트리고 있을 줄 알았
는데 말이다.
"… …."
코 언저리에 거품이 묻은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열심
이다. 비웃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쿡쿡-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녀석의 한쪽 어깨를 잡고는, 슥슥하고 손수
건으로 코를 닦아주었다. - 녀석이 의외로 얌전하게 얼굴을 붉
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나는 별 저항 없이 거품을 닦아
낼 수 있었다. - 살짝 고개를 올리고는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조금은 귀여워 보였다. 쫑긋 서 있는 노랑 바탕에 검은색 무늬
가 들어가 있는 두 개의 귀가 조금은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
기도 했지만 말이다.
자기 나름대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나 같
은 녀석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인한 녀석이었다. 누
구 하나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며, 그렇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것을 봐도 느낄 수 있었다. 연약한 모습과는 다르게 심지가 굳
은 성격이랄까. - 그런 면에서는 시아 녀석과 조금 닮기도 한
것 같다. -
일단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난 소매를 걷어 올리고
는, 천천히 손과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라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서 도우며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이었기 때문이었다. - 세 살짜리 꼬마들
도 아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간혹 나이를 먹어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 있긴 하
지만. -
셀브렛은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입을 내밀며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별로….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도와주는 것 뿐."
처음으로 본 미소, 조금은 감격한 듯이 나를 바라보며 그렇
게 딱딱한 미소를 짓는 셀브렛 녀석. 어설프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세상의 아픔과 슬픔은 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듯한
우울한 표정보다는 백 배, 천 배.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내가 도와준 보람이 있는 모양인지, 밀린 설거지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다 끝낼 수 있었다.
식당의 저녁 식사는 언제나 빨랐다. 빠르고 신속하게 식사를
끝낸 후,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점심 겸
저녁이라고 할까, 어쨌든 마땅히 분류하기 어려운 식사를 일행
들은 하고 있었다.
모두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어서 언뜻 보면 조용하고 점
잖은 식사 시간 같기도 했지만, 셀브렛 녀석 덕분에 그렇지도
못했다. 포크, 나이프를 잡는 것도 힘들어할 정도로 녀석의 식
사 예절은 엉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이프나 포크도 본래
의 용도를 상실하고, 입으로 음식을 옮겨가는 쓰임 정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적에게 동서남북 포위된 장군의 모습이랄
까. 식은땀을 흘리며 셀브렛 녀석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식사
를 하고 있었다.
물론, 시아가 옆에서 그런 셀브렛을 가만 놔두지는 않았다. '
나이프는 음식을 알맞게 잘라 먹을 때 쓰는 거야.'라던지, '그
렇게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주워 먹을 필요 없어.'같은 조언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 그것도 무표정으로 말이다. 시아 녀석
이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한 포커 페이스라는 것은, 요새 자주
깨닫고 있는 일이었다. -
대충 그렇게 식사가 끝나자, 저녁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식당의 사람들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셀브
렛 녀석을 도와주고 싶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여유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나마 여유로운 시아
녀석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손님들이 서서히 식당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
하자, 다른 사람 걱정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상하게 평소보
다 배는 많을 정도로 손님들이 들어 닥친 것이다.
몸은 발바닥에 땀날 정도니 설명할 필요도 없겠고 정신은
마치 사 차원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것 같으니, 그 괴로움을 어
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뭐라 쉽사리 설
명할 수 없을 그런 식당 일이 끝나자, 나는 다시 천천히 시아
와 셀브렛이 있을 주방 안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시아 녀석의 무릎에 기대어 셀
브렛 녀석은 그렇게 잠들어 있었다. 시아 녀석은 미소 지은 얼
굴로 조용히 하라는 듯이 살짝 검지 손가락을 입에 올리며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내
가 허탈한 표정을 하자, 시아 녀석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그런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힘들어 죽겠네…."
내가 푸념하자, 왕자는 잠시 그런 나를 무심한 눈빛으로 쳐
다보았다.
사실 이렇게 푸념하는 것도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평소보다
더 힘든 식당 일을 마치고, 셀브렛 녀석을 등에 들쳐 업고 계
단을 올라가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다시 이렇게 무거운
검을 들고, 뼈 빠지게 휘두르고 있으니까.
무슨 내 몸이 미스릴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이상, 이렇게 금
방 탈진해 버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여
하튼, 왕자는 내가 바닥에 쓰러지든, 푸념을 하든 상관조차 안
하겠다는 듯이 다시 검술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왕자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희미하지만, 마나의 움직임이 있
었기에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왕자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마법의 힘이 담긴 것인가?'
왕자가 몸을 움직이자, 칼은 포물선을 그리며 잔상과도 같은
미약한 빛을 내고 있었다. 역시 괜히 왕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르디가 준 검도 내게는 과분할 정도로 훌륭하긴 했
지만, 왕자의 칼은 그런 내 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았기 때문
이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왕자는 말없이 내게 다가와
자신의 칼을 내밀어 보였다. 내가 당황스러워 하며 그것을 받
아 들자, 왕자는 등을 돌리며 살짝 입을 열었다.
"봐도 좋다."
흠, 왠지 모르게 왕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오해를 하고 있었
던 모양이다. 자신의 칼을 이렇게 선뜻 보여준다는 것은 그만
큼 상대를 신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게다가 이렇게 귀중하고
대단한 무기라고 한다면, 모든 검사들의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여하튼 확실히 왕자에게 나는 신용을 얻고 있었던 모양이다.
같이 지낸 지 얼마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
했다. 왕자는 뭐라 할 말이 없는지 등을 돌리고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됐든 왕자가 건네준 도(刀)를
나는 진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무엇이라 조그맣게 새겨진
수많은 문자들이, 역시 마법의 힘이 담겨져 있다는 생각을 굳
히게 만들어주었다. 날씬하게 뻗어 있는 도를 보자, 나도 모르
게 조금은 경외심 같은 것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휘둘러 봐도 될까?"
거절한다고 해도 탓할 생각은 전혀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
렇게 눈과 감촉으로 도를 견식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경험이
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 …"
왕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은 설레는 기분으
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술을 펼쳐
보였다. - 말이 거창하지만, 사실은 그냥 있는 힘껏 휘둘러 보
는 게 전부인 것이다. -
애송이인 내가 무엇인가 느낌이 들 정도로 대단했다. 조금
더 사용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그냥 아쉬운 대로
도(刀)를 왕자에게 건네주었다. 왕자는 말없이 다시 받아 들고
는 단순하지만 고귀한 몸짓으로 칼집에 자신의 도를 집어넣었
다. - 그때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것은, 우연이라고 생
각하고 싶은 일이다. -
왕자와 나는 조금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그
렇게 잠시 동안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 * *
"호오, 역시 대단하기도 하셔라."
리체 녀석은 어느새 다가왔는지,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두
르고는 그렇게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가뜩
이나 사람들, 특히 남학생들이 많은 곳에서 이 녀석과 신체 접
촉하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 이미 게시판 근처 몇 명의 남
학생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살짝 녀
석의 몸을 뿌리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솔직히 나도 조금은 의외였다. 성적이 높을 것이라고는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이나 한 듯이 리체
녀석이 다시 대답했다.
"운도 실력이라고, 조금은 거만해져도 좋을 텐데 말이지."
'그래, 나 잘나서 일등했수다.'라고 말하는 녀석이 되라는 것
인가. 한심한 나머지 뭐라고 대답하는 것조차 짜증이 나기 시
작했다. 말없이 내가 걸음을 움직이자, 리체 녀석도 그런 나를
따라 걸어오기 시작했다.
여하튼 반에서 성적이 최고라는 것이 기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 내색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은 벌거벗고 춤을
춰도 모자를 만큼 기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 조금 과격한
비유 같기도 하지만. -
"여어, 엘리."
엘리 녀석이 타이밍 좋게, 내가 지나가는 반대쪽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일등 한 것 축하드려요."
음, 반 아이들에게 벌써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엘리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심으로 축
하해 주는 것 같은데, 무시할 수는 없을 노릇일 테니 말이다.
새삼스럽게 나 자신이 일등 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라, 여
태까지 힘들게 노력한 것이 주마등처럼 하나 둘씩 머리 속에
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식당 일에, 검술 연습에, 공부까지 하느
라고 그동안 겪은 생고생들이 말이다.
내 상상을 방해하듯이 리체 녀석은 갑작스레 엘리에게 뭐라
고 떠들기 시작했다.
"정말 동호회 전체의 경사야. 축하 파티라도 할까?"
내가 일등 한 것이 왜 망할 동호회 전체에 경사라는 것인가.
이 동호회에 입부한 것도 수치스러워 죽겠는데 말이지.
"그래, 그럼 오늘 수업 끝나고 모이기로 하자."
젠장, 왜 또 이런 전개냐! 녀석들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시
간과 장소를 정하고 즐겁다는 듯이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내가 뭐라 말한다고 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 분명할 것
같았다.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별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아 나는 그렇게 얼굴을 굳히고 그 둘을 바라보고
만 있을 뿐이었다.
'나오지 않아도 좋아, 너희 식당으로 찾아가면 될 테니까.'라
는 리체 녀석의 말 덕택에 도망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
이 되어버렸다. 마치 좀비처럼 형편없는 몰골로 나는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움직이
고 있었다. 오늘따라 학교의 제일 후미진 곳에 위치한 동호회
실이 왜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것인지,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눈앞에는 턱하니 회실의 문이 나타나 있는 것이
다. 구울(Ghoul:시체를 먹고 사는 몬스터. 좀비와 조금 유사하
다.)의 독에 걸린 사람마냥,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그렇게
움직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여어, 어서 와~!"
리체 녀석이 그렇게 웃는 얼굴로 다가와 부비적거리며 말했
다. 언제나처럼 엘리, 리체 그리고 또 한 명.
"하하.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었어. 그대는 역시 나를 실
망시키지 않는군."
정말 잘못한 건 없어도 거부감 왕창 드는 녀석, 이 학교에
학생회장이자 엘리 녀석의 오빠이기도 한 아마 '코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지. 녀석은 그렇게 내 날카로운 시선을
능글맞은 웃음으로 받아넘기고는 수다스럽게 뭐라 떠들기 시
작했다. 여하튼 뭐라 떠들던 말든, 가뿐하게 한 귀로 흘려들으
며 나는 그렇게 정해진 자리에 몸을 묻었다. 대충 그렇게 모두
자리에 앉자 리체 녀석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은 후, 상기
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자! 베리가 일등을 한 것도, 우리 동호회 전체의 경사라
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오늘은 신나게 떠들고 놀아봅시다."
엘리는 리체가 뭐라 말하는 도중에,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음식과 마실 것을 탁자 위에 하나 둘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 여하튼, 건배합시다!"
그렇게 뭐라 한참을 장황하게 말하더니, 잔을 들고 그렇게
모두에게 건배하라고 하는 리체 녀석이었다. 대충 하는 시늉만
해주고, 천천히 잔을 들이키려고 했으나….
"푸훕, 이거 술이잖아?!"
학교 안에서 이렇게 술을 마시다니,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 일이다. 내 창백한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모두
는 그렇게 잔을 비우고 있었다. - 한두 번이 아닌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 리체 녀석이 어느새 그런 내 옆에 다가와 어깨
에 팔을 두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괜찮아. 뭐 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너 같은 녀석이야 좋겠지만, 나는 하나도 안 좋다. 라고 말
해주고 싶었지만, 한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러고 싶
은 마음도 사라졌다. 여하튼, 이 동호회에 입부했다는 것은 내
인생에 손꼽히는 실수로 기억될 것이라는 예감이 불현듯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 아니, 예감이 아니라 거의 확정된 사실
이겠지만. -
술 같은 건 그다지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분위기라던지 하
는 것 덕분에, 어쩔 수 없이 한두 잔 정도 마실 수밖에 없었
다. - 리체 녀석은 취하면 과격하게 행동하는 피곤한 타입이었
다. 거의 반강제로 내 입에 술을 집어넣는 바람에 굉장히 당황
스러웠다.
조금은 한심하기도 하지만 웃고 떠들고 마시다 보니, 스트레
스 같은 것도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질 무
렵까지 떠들다가, 나는 식당 일을 해야 한다는 핑계 덕분에 시
끌벅적한 동호회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휴…."
알콜이 조금 들어간 덕분인지,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
다. 그래도 후덕지근한 회실에서 한참 동안 있다가 밖으로 나
와보니 정말 시원하다 외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조
금 늦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뭐 오늘 같은 날이면
기르디도 용서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천천히 식당으로
향하는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