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너무 느리다. 손짓도 발짓도 어린아이 수준이다. 기르디, 아 니 왕자 녀석과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한심한 능력인 것이다.
자학하듯이 몸을 움직이다, 저절로 풀려져 오는 발 덕분에 차가운 땅바닥으로 그렇게 처박혀 버렸다. 그렇게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에 기척도 없이 다가와 왕자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조금은 안타까워하는 것 같은 눈을 마주 보며,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난 너무 약하다." "… …." 왕자의 눈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비웃는 것인가, 경멸 하는 것인가. "강하다는 게 뭐지?"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왕자의 목소리다. 여하튼 조금은 선문 답 같은 말이었지만,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힘." "그래." 왕자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 다. "하지만…. 그 힘이 물리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 다." 물리적이지 않고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 알 것 같기도 했 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그런 류의 힘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조금은 불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왕자는 피식 웃 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나보다 훨씬 강하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막 내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라고 할 때에, 등 뒤에서 먼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느 아이인가."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대머리의 노인이랄까, 여하튼 나는 잘 모르겠지만 왕자조차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못 챈 것을 생각하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왕자도 나 도 조금은 긴장하며 그 노인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을 때, 때 마침 기르디 녀석이 노인 옆으로 다가와서 대꾸했다. - 아까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계집애같이 생긴 인간 남자 아이입니다." 무엇인가 상당히 거슬리는 대답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 고 그 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는, 나를 마주 바라보며 노인은 입을 열었다. "흠, 그럭저럭 좋은 눈이군. 그래, 너의 이름이 뭐지?" 별로 대답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느끼기 힘들었지만 말이 다. 그래도 연장자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있을 테니, 퉁명스럽 게나마 대충 대답해 주었다. "베리입니다." "흐음." 그 노인은 오른손으로 수염을 한 번 쓰다듬더니, 무엇인가 사색하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기르디가 다른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처음 본 일이었기 때문에, 난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엘 프는 확실히 인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사는 종족이었기 때문에, 기르디가 평범한 '인간'에게 존댓말 해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 노인은 무엇인가 경 외심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 다.'라는 생각을 해주게 한다고 할까. 하여튼 노인은 참 오랫동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 이 짜증이 날 정도로 말이다. 막, 내가 '이제 전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려는 순간에, 노인은 그 굳게 닫힌 입술을 열고 말했다. "음, 그래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왠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 같다. 궁금해하는 상대방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울화 같은 것이 저절 로 치밀어오는 것은, 적어도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만은 아 닐 것이다. "기르디 군, 저 아이를 한 번 믿어 보겠네. 자네 의견은 어 떤가?" "…저런 녀석이지만, 뭐 쓸 만할지도 모르죠." 도대체 둘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 내 얼굴이 조금은 구겨지기 시작하고 있을 때에, 그 노인이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날 바라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년이여, 너에게 다가올 시련과 고통 앞에서 밝게 빛나주 기를 난 소망한다. 부디 리지안트님의 가호가 영원하기를." 갑작스런 노인의 어법에 휘말린 것인지, 조금은 엄숙해진 분 위기다. 심지어는 기르디 녀석마저도 조금은 진지한 표정을 짓 고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기르디 녀석과 함께 여관 안 을 향해 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은 황당해하는 나와 왕 자를 남겨둔 채.
따스하고 익숙한, 체온과 감촉.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시아의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었 다. 그런 녀석의 얼굴에 손을 가까이 가져갔을 때에. 난 그 따 스함에 저절로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따스하다. 차갑지 않다. 다른 사람이라면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었지만, 어제의 시체 처럼 차가웠던 녀석의 몸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살짝 그 몸을 두 팔로 안아 들었을 때에, 가볍지만 따스한 온기가 내 가슴 안에 느껴졌다. 그냥 살아 있어주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달리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에. "… …." 한껏 졸린 눈으로 멍하니 녀석은 날 마주 바라보았다. 조금은 수척해진 모습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여운 얼굴이 다. 녀석은 잠시 그렇게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어디 아파요?" 아픈 것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황당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조금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녀석다운 성격이라고 생각 하면서 말이다. 자기 자신은 안 챙기면서, 철저하게 남을 걱정해 주는 것. 처음부터 녀석은 그랬으니까. "넌 아프지 않아? 어제 그렇게 끔찍하게…." 녀석은 가만히 내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 어제 기르디 녀 석에게 얻어맞은 덕분에 조금은 멍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네."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녀석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는, 약을 찾아오겠다고 하며 밖으로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 다. 왠지 무시당한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괜스레 별거 아닌 일 가지고 소심해지는 것 같아서 한숨 한 번 쉬고는 그냥 침대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 지금 살아남는다고 해도, 다음에 살아남을 보장은 없는 거니까.' 아이린씨의 슬픈 목소리가 머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가슴 한구석이 막힌 것처럼 답답한 것 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난 죽음 같은 것 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애송이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아, 죽는구나.'하고 그냥 체념해 버리는 것은 정말 질색이니 까 말이다. -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인지 모른다.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할 내가 말이다. "휴." 정말 생각할수록 착잡한 일들의 연속이다. 어찌 됐든 약한 마음을 먹다간 죽도 밥도 안될 텐데 말이다.
한참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아이린씨와 기르디가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나는 몸 을 일으키고는 그 둘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저 둘이 함께 내 방에 들어오는 것이 워낙 드문 일이어서 조금은 당황한 것이다. "조금 너에게 이야기해 줄 말이 있어서." 아이린씨는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에게 말했 다. "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해 주자,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아이린씨가 말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면 당분간은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아." 잠시 말을 멈추며 호흡을 정리하고는, 아이린씨는 옆 - 정확 히는 벽에 삐딱하게 기대서며 허공을 응시하는 기르디 녀석 - 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저께 너도 본 '그분'이 약간의 조치를 하셨거든." "조치?" "쉽게 말하면 '저주'일지도 모르지." 저주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닌가? 아이린 씨나 기르디 녀석이나, 시아 녀석에게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방 관할 엘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조금은 머리가 혼란스 러워졌다. "그래, 더 정확히 말해주자면…. 내부의 힘을 정지시켜 버린 것이겠지."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 저주가 있다는 것은 내 평생 들어본 적도 없었다. 물론 마법이나 성력의 한계 는 끝도 없을 정도로 깊고 방대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바라는 대로 다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니까. - 그럼 마법사가 아니라 '신'이겠지. "네가 이해를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불멸자 에게 주어진 권능과 아티펙트를 이용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 니야." "불멸자…." 화신(avatar), 이모탈(immortal). 신에 근접한 자. 갑작스럽게 떠오른 단어들의 연속으로 머리 속은 더 더욱 혼란해지는 느낌이었다. "… 거기까지다. 더 이상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게 좋아." 기르디 녀석이 나와 아이린씨의 대화에 날카롭게 끼어드는 것이었다. 조금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아이린씨는 고개를 끄덕 이며 입을 열었다. "여하튼 이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꺼야. 발작을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경미한 것이겠지." 휴, 하고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직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조금의 시간은 번 셈이니까 말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었지만, 아직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모탈 (mortal)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여하튼 기르디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나와 아이린씨를 바라 보고 있다가 방문을 열고 어딘가를 향해서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더 이상의 볼일은 없는 것인지, 아이린씨도 '이만.' 라고 내게 말한 뒤 기르디 녀석의 등을 쫓아 걸음을 움직였다. '가지가지 대단한 엘프들이군.' 이모탈이라. 역시 저 두 남매는 무엇인가 이상했다. 이런 큰 수도 내에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고 해도, 평범한 엘프라고 보기에는 핀트가 어긋나는 점이 몇 가지 있 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전부터 어렴풋이 이상하다는 것은 느꼈지만 말이다. - 확실히 평범한 가정이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먼 삶을 살았으니. - 저런 대단한 둘조차 '그분'이라고 부를 정 도라니. 확실히 무엇인가 이상해도, 정말 이상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냥 평범한 광부가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내 가 모르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무엇인가 엉망진창으로 꼬인 실 같은 생각들.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키워드만 얻을 수 있다면,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지 모른다. 아버지, 이모탈, 어머니, 기르디와 아이린, 그리고 시아. 여하튼 지금은 그냥 속 편하게, 잠시 기억 속에 지워두는 것 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 베리 양. 왜이리 우울한 표정이신가?" "… …." "애인한테 채이기라도 했나 보지?" "… …." 무시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친한 친구끼리라도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리 체 녀석과 내가 친한 친구 사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여하튼 적어도 이런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서, 내가 이런 치욕을 당해야 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는 것이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베리 양은 뭐죠?" "베리라는 이름은 말이지. 남자보다는 귀여운 여자 아이한테 더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솔직히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가 리체님을 '리체 군'이라고 부르셨으면 좋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난 계속 베리 양이라고 부르지, 뭐." "…관두죠." 확실히 리체 녀석과 이런 짓을 할수록 더 손해 보는 것은 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시험이 끝났으니 곧 축제군." 리체 녀석의 말대로 축제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 다. 카이리온 기사 양성 학교는 매년 이 시즌마다 성대하게 3 일 동안 축제를 한다는 것이, 아이린씨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베리는 뭘 할거야? 댄스 파트너는 구했어?" "전 별로. 떠들썩한 것은 좋아하지 않아서." 게다가 춤에는 영 소질이 없으니 말이죠. 라고 덧붙이자, 리 체 녀석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푸하하하. 뭐 다 처음에는 그런 거겠지." 으윽,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비웃지 말란 말이다. "어머, 리체야. 뭐가 그렇게 즐거워?" 다른 아이와 잡담을 나누고 있던 엘리 녀석이 어느새 다가 와 물었다. 내 책상에서 불량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던 리 체 녀석은, 양손을 슬쩍 올리는 거만한 제스츄어를 하며 대답 했다. - 그것도 치마를 입은 녀석이. - "우리의 베리 양이 글쎄, 춤에는 영 소질이 없다고 해서 말 이야." 그 행동과, 대답에 나도 모르기 살의가 용솟음쳐 왔지만, 수 련을 통한 인내심 제어 덕분에 간신히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거 정말 심각하네. 춤을 배우지 않으면 2학년 실기 시험 때 타격이 클 텐데." 실기 시험? 내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리체 녀석 이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어이, 2학년 때 예절 시험 중에 하나가 바로 춤이야, 춤." 헉, 젠장! 다른 것도 아니고 춤이라니!! 갑작스런 엄청난 말 에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만 같았다. "쯧쯧, 그리고 기사가 된 이상 춤 정도는 기본으로 배워야 할 항목일꺼다." 생각해 보니 리체 녀석의 말이 옳은 듯했다. 춤 못 추는 기 사는 내 평생 들어본 일이 없으니. 점점 굳어져 가는 내 표정을 바라보며 리체 녀석이 말했다. "쯧쯧, 안되겠다. 엘리야. 우리가 도와줘야겠다." "네. 하루빨리 베리 군이 춤의 달인이 되도록 노력하죠." 두 사람의 말에 심장이 덜컥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바보처럼 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1권] 금단의페트 - promise - 7-1
금단의 페트(The forbidden pet) -
[애니, 소설 보러 오세요^ - ^]
이 름 배진국제 목 금단의페트 - promise -
"젠장."
너무 느리다. 손짓도 발짓도 어린아이 수준이다. 기르디, 아
니 왕자 녀석과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한심한 능력인 것이다.
자학하듯이 몸을 움직이다, 저절로 풀려져 오는 발 덕분에
차가운 땅바닥으로 그렇게 처박혀 버렸다.
그렇게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에 기척도 없이
다가와 왕자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조금은 안타까워하는 것 같은 눈을 마주 보며,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난 너무 약하다."
"… …."
왕자의 눈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비웃는 것인가, 경멸
하는 것인가.
"강하다는 게 뭐지?"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왕자의 목소리다. 여하튼 조금은 선문
답 같은 말이었지만,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힘."
"그래."
왕자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
다.
"하지만…. 그 힘이 물리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
다."
물리적이지 않고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 알 것 같기도 했
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그런 류의 힘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조금은 불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왕자는 피식 웃
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나보다 훨씬 강하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막 내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라고
할 때에, 등 뒤에서 먼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느 아이인가."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대머리의 노인이랄까, 여하튼 나는 잘
모르겠지만 왕자조차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못
챈 것을 생각하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왕자도 나
도 조금은 긴장하며 그 노인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을 때, 때
마침 기르디 녀석이 노인 옆으로 다가와서 대꾸했다. - 아까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계집애같이 생긴 인간 남자 아이입니다."
무엇인가 상당히 거슬리는 대답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
고 그 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는, 나를 마주 바라보며 노인은 입을 열었다.
"흠, 그럭저럭 좋은 눈이군. 그래, 너의 이름이 뭐지?"
별로 대답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느끼기 힘들었지만 말이
다. 그래도 연장자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있을 테니, 퉁명스럽
게나마 대충 대답해 주었다.
"베리입니다."
"흐음."
그 노인은 오른손으로 수염을 한 번 쓰다듬더니, 무엇인가
사색하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기르디가 다른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처음
본 일이었기 때문에, 난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엘
프는 확실히 인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사는
종족이었기 때문에, 기르디가 평범한 '인간'에게 존댓말 해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 노인은 무엇인가 경
외심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
다.'라는 생각을 해주게 한다고 할까.
하여튼 노인은 참 오랫동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
이 짜증이 날 정도로 말이다.
막, 내가 '이제 전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려는
순간에, 노인은 그 굳게 닫힌 입술을 열고 말했다.
"음, 그래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왠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 같다. 궁금해하는
상대방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울화 같은 것이 저절
로 치밀어오는 것은, 적어도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만은 아
닐 것이다.
"기르디 군, 저 아이를 한 번 믿어 보겠네. 자네 의견은 어
떤가?"
"…저런 녀석이지만, 뭐 쓸 만할지도 모르죠."
도대체 둘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 내 얼굴이
조금은 구겨지기 시작하고 있을 때에, 그 노인이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날 바라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년이여, 너에게 다가올 시련과 고통 앞에서 밝게 빛나주
기를 난 소망한다. 부디 리지안트님의 가호가 영원하기를."
갑작스런 노인의 어법에 휘말린 것인지, 조금은 엄숙해진 분
위기다. 심지어는 기르디 녀석마저도 조금은 진지한 표정을 짓
고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기르디 녀석과 함께 여관 안
을 향해 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은 황당해하는 나와 왕
자를 남겨둔 채.
따스하고 익숙한, 체온과 감촉.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시아의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었
다. 그런 녀석의 얼굴에 손을 가까이 가져갔을 때에. 난 그 따
스함에 저절로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따스하다. 차갑지 않다.
다른 사람이라면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었지만, 어제의 시체
처럼 차가웠던 녀석의 몸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살짝 그 몸을 두 팔로 안아 들었을 때에, 가볍지만 따스한
온기가 내 가슴 안에 느껴졌다.
그냥 살아 있어주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달리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에.
"… …."
한껏 졸린 눈으로 멍하니 녀석은 날 마주 바라보았다.
조금은 수척해진 모습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여운 얼굴이
다. 녀석은 잠시 그렇게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어디 아파요?"
아픈 것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황당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조금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녀석다운 성격이라고 생각
하면서 말이다.
자기 자신은 안 챙기면서, 철저하게 남을 걱정해 주는 것.
처음부터 녀석은 그랬으니까.
"넌 아프지 않아? 어제 그렇게 끔찍하게…."
녀석은 가만히 내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 어제 기르디 녀
석에게 얻어맞은 덕분에 조금은 멍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네."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녀석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는, 약을 찾아오겠다고 하며 밖으로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
다. 왠지 무시당한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괜스레 별거 아닌 일 가지고 소심해지는 것 같아서 한숨 한
번 쉬고는 그냥 침대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 지금 살아남는다고 해도, 다음에 살아남을 보장은 없는
거니까.'
아이린씨의 슬픈 목소리가 머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가슴 한구석이 막힌 것처럼 답답한 것
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난 죽음 같은 것
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애송이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아, 죽는구나.'하고 그냥 체념해 버리는 것은 정말 질색이니
까 말이다. -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인지 모른다.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할 내가 말이다.
"휴."
정말 생각할수록 착잡한 일들의 연속이다. 어찌 됐든 약한
마음을 먹다간 죽도 밥도 안될 텐데 말이다.
한참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아이린씨와 기르디가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나는 몸
을 일으키고는 그 둘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저
둘이 함께 내 방에 들어오는 것이 워낙 드문 일이어서 조금은
당황한 것이다.
"조금 너에게 이야기해 줄 말이 있어서."
아이린씨는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에게 말했
다.
"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해 주자,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아이린씨가 말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면 당분간은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아."
잠시 말을 멈추며 호흡을 정리하고는, 아이린씨는 옆 - 정확
히는 벽에 삐딱하게 기대서며 허공을 응시하는 기르디 녀석 -
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저께 너도 본 '그분'이 약간의 조치를 하셨거든."
"조치?"
"쉽게 말하면 '저주'일지도 모르지."
저주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닌가? 아이린
씨나 기르디 녀석이나, 시아 녀석에게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방
관할 엘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조금은 머리가 혼란스
러워졌다.
"그래, 더 정확히 말해주자면…. 내부의 힘을 정지시켜 버린
것이겠지."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 저주가 있다는
것은 내 평생 들어본 적도 없었다. 물론 마법이나 성력의 한계
는 끝도 없을 정도로 깊고 방대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바라는
대로 다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니까. - 그럼 마법사가 아니라
'신'이겠지.
"네가 이해를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불멸자
에게 주어진 권능과 아티펙트를 이용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
니야."
"불멸자…."
화신(avatar), 이모탈(immortal). 신에 근접한 자.
갑작스럽게 떠오른 단어들의 연속으로 머리 속은 더 더욱
혼란해지는 느낌이었다.
"… 거기까지다. 더 이상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게 좋아."
기르디 녀석이 나와 아이린씨의 대화에 날카롭게 끼어드는
것이었다. 조금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아이린씨는 고개를 끄덕
이며 입을 열었다.
"여하튼 이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꺼야. 발작을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경미한 것이겠지."
휴, 하고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직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조금의 시간은 번 셈이니까 말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었지만, 아직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모탈
(mortal)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여하튼 기르디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나와 아이린씨를 바라
보고 있다가 방문을 열고 어딘가를 향해서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더 이상의 볼일은 없는 것인지, 아이린씨도 '이만.'
라고 내게 말한 뒤 기르디 녀석의 등을 쫓아 걸음을 움직였다.
'가지가지 대단한 엘프들이군.'
이모탈이라. 역시 저 두 남매는 무엇인가 이상했다. 이런 큰
수도 내에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고 해도,
평범한 엘프라고 보기에는 핀트가 어긋나는 점이 몇 가지 있
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전부터 어렴풋이 이상하다는 것은 느꼈지만
말이다. - 확실히 평범한 가정이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먼 삶을 살았으니. - 저런 대단한 둘조차 '그분'이라고 부를 정
도라니. 확실히 무엇인가 이상해도, 정말 이상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냥 평범한 광부가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내
가 모르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무엇인가 엉망진창으로 꼬인 실 같은 생각들.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키워드만 얻을 수 있다면,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지 모른다.
아버지, 이모탈, 어머니, 기르디와 아이린, 그리고 시아.
여하튼 지금은 그냥 속 편하게, 잠시 기억 속에 지워두는 것
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 베리 양. 왜이리 우울한 표정이신가?"
"… …."
"애인한테 채이기라도 했나 보지?"
"… …."
무시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친한 친구끼리라도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리
체 녀석과 내가 친한 친구 사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여하튼 적어도 이런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서, 내가
이런 치욕을 당해야 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는 것이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베리 양은 뭐죠?"
"베리라는 이름은 말이지. 남자보다는 귀여운 여자 아이한테
더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솔직히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가 리체님을 '리체 군'이라고 부르셨으면 좋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난 계속 베리 양이라고 부르지, 뭐."
"…관두죠."
확실히 리체 녀석과 이런 짓을 할수록 더 손해 보는 것은
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시험이 끝났으니 곧 축제군."
리체 녀석의 말대로 축제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
다. 카이리온 기사 양성 학교는 매년 이 시즌마다 성대하게 3
일 동안 축제를 한다는 것이, 아이린씨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베리는 뭘 할거야? 댄스 파트너는 구했어?"
"전 별로. 떠들썩한 것은 좋아하지 않아서."
게다가 춤에는 영 소질이 없으니 말이죠. 라고 덧붙이자, 리
체 녀석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푸하하하. 뭐 다 처음에는 그런 거겠지."
으윽,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비웃지 말란 말이다.
"어머, 리체야. 뭐가 그렇게 즐거워?"
다른 아이와 잡담을 나누고 있던 엘리 녀석이 어느새 다가
와 물었다. 내 책상에서 불량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던 리
체 녀석은, 양손을 슬쩍 올리는 거만한 제스츄어를 하며 대답
했다. - 그것도 치마를 입은 녀석이. -
"우리의 베리 양이 글쎄, 춤에는 영 소질이 없다고 해서 말
이야."
그 행동과, 대답에 나도 모르기 살의가 용솟음쳐 왔지만, 수
련을 통한 인내심 제어 덕분에 간신히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거 정말 심각하네. 춤을 배우지 않으면 2학년 실기 시험
때 타격이 클 텐데."
실기 시험? 내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리체 녀석
이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어이, 2학년 때 예절 시험 중에 하나가 바로 춤이야, 춤."
헉, 젠장! 다른 것도 아니고 춤이라니!! 갑작스런 엄청난 말
에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만 같았다.
"쯧쯧, 그리고 기사가 된 이상 춤 정도는 기본으로 배워야
할 항목일꺼다."
생각해 보니 리체 녀석의 말이 옳은 듯했다. 춤 못 추는 기
사는 내 평생 들어본 일이 없으니.
점점 굳어져 가는 내 표정을 바라보며 리체 녀석이 말했다.
"쯧쯧, 안되겠다. 엘리야. 우리가 도와줘야겠다."
"네. 하루빨리 베리 군이 춤의 달인이 되도록 노력하죠."
두 사람의 말에 심장이 덜컥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바보처럼 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