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루가 지나자,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빠르게 갑작스 러운 여행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여행을 위한 옷가지 및 물품들을 챙겨주고는 사정을 설명하 기 위해 아이린씨는 카이리온 기사 양성학교로 가버렸고, 어 제 온 다크엘프와 함께 기르디녀석도 사라져버려서 식당을 지 키고 있는 것은 셀브렛과 나와 시아녀석뿐이었다. 청소를 끝내고 모두는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차와 과자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셀브렛녀석은 생선을 제일 좋아하고, 단 것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먹성 좋은 타입이었다. 고양이가 과자를 먹는다고 생 각하면 굉장히 우습지만 말이다. 열심히 과자를 입안 가득 우 겨 넣어서, 씹어 먹는 모습이 나름대로 진지해 보이기도 했 다. "아, 좋은 아침일세." 어제의 덩치 좋은 중년 사내가 어느새 근처에 다가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외쳤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옆자리에 의자를 권했다. - 사실, '지 금은 아침이 아니라 점심인데요.'하고 쏘아 붙여주고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것은 얼간이나 하는 짓 이니까. 시아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중년사내를 위해 차를 준비하 기 시작했다. 셀브렛녀석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 아주며 천천히 중년사내에게 말을 건네는 나였다. "저는 베리라고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이름도 말하지 않았구만, 미안하 네. 편하게 그냥 스티브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군." 잠시동안 미소지은 얼굴로 '허허허'하고 웃어 보이더니, 로 브의 품안에서 조그마한 나무 지팡이를 꺼내 보이는 스티브씨 였다. - 시아녀석도 준비를 끝내고,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마법사지. 보조마법에 조금은 지식이 있는 편이라네." '춤추는 빛(dancing light)', 가볍게 주문을 캐스팅하자 세 개에 작은 빛의 구체가 테이블 위를 날아다니며 모두의 시선 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와아-!" 그 현란한 빛의 구체들의 향연에, 입을 벌리고 당혹성을 지 르며 놀라워하는 셀브렛녀석이었다. 빛의 구체들을 이용해서 '잘. 부. 탁. 해.'하는 글씨를 순 서대로 만들어 보이는 스티브씨. 커다란 덩치와 험상궂은 모 습에 비해 재미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신기해하는 셀브렛과 시아녀석을 위해, 좀 더 여러 가지 재 주를 부리는 것을 보니 그래도 좋은 사람 같아서 조금은 안심 이 되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여행의 시작이다. 알고 보니 스티브씨는 우리 일행에게 텔레포트 주문'만'을 걸어주기 위해서,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 식당까지 온 것이 라 한다. …쉽게 말해서 다크엘프녀석과 나와 시아녀석만의 삭막한 여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젠장. "아, 걱정하지 마시길. 텔레포트 마법만은 실패해 본 적 없으니까 말이야. 허허허…."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에도 삭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 는 다크엘프, 기르디녀석과 잠시 어디를 다녀온 후로 계속 벌 레 씹은 표정인 것 같았다. "알았으니 준비나 하도록." 그 다크엘프의 신경질적인 말에, 로브의 품안에서 지팡이를 꺼내며 마법주문의 캐스팅을 준비하는 스티브씨. 셀브렛녀석은 나와 시아가 잠시 여행을 간다는 말에, 눈시 울을 붉히며 슬퍼하고 있었다. 뭐, 고작 며칠 동안 보지 못하 는 것뿐인데 말이다. - 덩달아 시아녀석도 우울한 표정이었 다. 옷가지와 조금의 식량, 여행에 필요한 필수품들이 들어있는 가방을 건네주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 아이린씨였다. "엘프의 숲에는 몬스터들이 엄청 많거든. 뭐, 몬스터와 부 딪힐 위험은 없겠지만, 함부로 숲을 돌아다니지는 않는 게 좋 을 꺼야…." 몬스터라, 내 실력을 테스트해 볼 겸 한 두 마리 정도는 나 와도 좋을 텐데 말이지. - 물론 엄청 강한 녀석은 죽어도 사 양이지만, 오크나 고블린정도는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으니 까. "조심해서 다녀와-!" 훌쩍거리며 손을 흔드는 셀브렛녀석과 그런 녀석을 품에 안 고 웃음 지은 얼굴로 배웅하는 아이린씨. "텔레포트(teleport)!" 주문의 캐스팅이 끝나자 어느새 마법진이 형성된 바닥에서 는, 빛이 뿜어져 나와 시야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멀리에서 날 바라보는 왕자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거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의 기둥의 휩싸여 그렇게 일행들은 어딘 가로 이동되 었다.
* * *
"말씀드린 대로, 굉장한 세력들에게 '실험체'가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 소년의 아버지만 해도 그렇고." "… 그렇군." 눈앞에 무릎꿇은 자신의 한심한 부하를, 경멸 가득한 표정 으로 그는 바라보았다. 똑똑하지만 소심했다. 뭐, 그 소심함 덕분에 오래 살수 있 었던 거지만 말이다. - 욕심이 지나치거나, 겁을 모르는 녀석 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여하튼 그런 한심한 부하덕분인지, 예상 못한 결과덕분인지 상당히 기분이 안 좋은 것은 확실했다. '그'답지 않게 조금은 초조하기도 했다. 그 동안 공들인 시 간과 노력,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손해를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쉽게 포 기하기에는 너무나 이르다. "쿠쿡, 용제가 개입된다고 해도…. 이 쪽도 비장의 카드 한 두 장은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지. 안 그런가?" 그래, '실험체'가 여러 성가신 녀석들에게 알려진 것은 사 실이지만. 조금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보자. 어찌됐든 상대는 나의 정체를 모르고, 나는 상대의 정체를 절반쯤은 파악했으 니까. 지자크, 언제 보아도 불쌍한 녀석. 지금쯤 얼마 전에 자신 이 허락도 없이 한 행동을 미친 듯이 후회하고 있겠지. 하지 만 말이야, 예상치 못한 곳에서 행운은 찾아오는 법이거든? 예를 들어 그 '힘'을 손에 넣었을 때처럼, 위기 속에서 찾아 오는 행운이란 것은 언제나 모두를 놀라게 해주지. "뭐 널 믿어 보겠다." 어떻게 소심한 자신의 부하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가에 대해 서는, 몇 백년 전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긴장의 끈을 놓 치게 해서는 안 된다. 당근과 채찍, 칭찬과 독설. 이제는 익 숙해 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던 불쌍한 지자크는 몸을 일 으키고는, 크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그렇게 어딘 가로 사 라졌다. 바닥을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모든 것이 무(無)로 여겨질 만큼 긴 시간이 흐 른 후, 비릿한 조소가 섞여있는 말이 어딘 가에서 들려왔다. "그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 * *
모두는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그 포커페이스 같았던 다크엘프녀석 마저도 그렇 게 식은땀을 흘리며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엘프들의 숲-에르쥬나?" 정말 말하기도 민망하다. 푸른 하늘에 햇빛은 음침하게 생 긴 나무들 덕택에 찾아보기도 힘들고, 바닥은 기분 나쁘게 축 축하고 미끈거리는 이런 곳. 엘프들의 숲은 얼어죽을 엘프들 의 숲이란 말인가? 언데드의 숲 내지는 죽음의 숲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가끔씩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생명체 - 몬스터일지도 - 들의 울음소리가 더더욱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아녀석 은 이런 음침한 곳에는 약한 모양인지, 내 뒤쪽 상의를 부여 잡으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왜 이렇게 추운 것인지. 여름 기온에 익숙해서 그렇 기도 하겠지만, 북방에 있는 것치고는 온난한 편이라는 엘프 들의 숲이 말이다. 두터운 옷을 갈아입었지만 온 몸이 떨려올 정도로 추웠다. "미친…. 그 녀석 다시 보면 정말 죽여 버릴 테다." 뭐, 인간인 이상 실수는 할 수도 있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엘프들의 숲은 넘어 가더라도, 정말 얼어죽게 생겼다. - 덕분에 다크엘프녀석의 말에 뭐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하여튼 이렇게 된 마당에, 빨리 어떤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 면 그냥 얼어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작은 한숨 한번 쉬고 다크엘프에게 말했다. "어찌되었든 길을 찾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여기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다가는 되는 일도 안 될 테니까 말이다. 다크엘프녀석은 조금 신경질적인 눈으로 잠시 날 바라보더니 엄청난 빠르기로 나무 위를 향해 몸을 움직였 다. 잠시 후, 아래를 바라보며 나와 시아를 향해 다크엘프가 외 쳤다. "잠시 거기에서 기다리도록." 그 말을 끝으로 어딘 가로 사라져 버린 다크엘프. 시아녀석 도 나도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나마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아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어째 여행만 하면 이상한 일에 휩쓸리는 것 같군.' 내가 그렇게 운이 없는 편이었던가?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 은 없었지만…. 정말 올해의 절반, 그 전반적인 추세는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들의 연속이다. 뭐, 내 과거가 지극히 평 범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휴…." 추운 것은 넘어가더라도 배고픈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조 금 시간이 흐르자, 배낭 속에 넣어 두었던 약간의 먹을 것을 꺼내고 시아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먹어야 살지." 빵 한 조각을 건네주자, 조금 망설이는 듯 머뭇거리는 시아 녀석의 얼굴. 하지만 내가 끈덕지게 바라보자, 어쩔 수 없다 는 듯 가느다란 손으로 빵을 받아들었다. 조금은 게걸스럽게 빵을 먹기 시작하자, 멍하니 그런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아녀석. 그리고 다시 망설이며 자신의 손 에 들고있는 빵을 보다가,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 그 모습에 상황에 맞지 않는 싱거운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 도 사실이었다.
"느긋하군." 땅바닥에 멍하니 등을 맞대고 앉아서 빵을 먹고있는 나와 시아녀석을 향해, 이름 모를 괴기한 나무 위에서 다크엘프가 말했다. 우리들끼리 식사를 한 까닭에 왠지 모르게 삐진 것도 같은 그 다크엘프에게, 남겨 놓았던 빵을 집어다 던져주었다. 잠시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빵을 먹기 시작하는 다크엘프. 생각보다 그렇게 막힌 녀석은 아닌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 기도 했다. 그렇게 대충 허기를 채우자, 나무 위에서 다크엘프가 입을 열었다. "대충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은 잡아 두었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 안에 도착할 수 있겠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르 는 다크엘프녀석. "이 근처에는 와이번들이 많은 것 같으니 조심해야겠지. 녀 석들의 독은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니까." 와이번, 드래곤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주 위험 한 몬스터다. 꼬리 끝에는 치명적인 독이 있고, 가죽은 갑옷 처럼 딱딱하다. 어설픈 모험자들이라면 단번에 전멸 당할 정 도니까. "와이번녀석들 덕분에 다른 하급 몬스터들은 그다지 살지 않고 있는 것 같군. 다행인 건가." 확실히 오크녀석들도 왕창 있으면 무서운 법이다. 사방에서 달려들면 무슨 수로 그것을 막겠는가? 뭐, 어느 정도 단련된 사람이면 몰라도. 사실 오크는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다. 그 많은 오크들이 강 도질만 해서 살았다면, 아마 인간이나 오크나 둘 중에 하나는 멸망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농사를 지을 줄도 알고, 과 일을 채집하고, 간단한 도구를 만드는 법도 알고 있다. 마법 의 경우만 해도 인간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일부 '뛰어난' 오 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 엘프, 드래곤, 그 외 수많 은 몬스터들이 마법을 사용하거나, 이용할 줄 알고 있다. 무 엇이든 인간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면, 그건 어설픈 이기주의일 뿐인 것이다. 여하튼 잠시 동안의 휴식시간도 그렇게 끝나 버리고, 모두 는 몸을 일으켜서 축축한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뜩이나 어두웠던 숲은 앞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졌다. 나도 시아녀석도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다크엘프녀석은 묵묵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 서 길을 걷고 있었다. - 길이라고 해봤자, 짐승들이나 몬스터 들이 지나간 조잡한 흔적정도다. 덕분에 걷는 것이 더더욱 힘 에 겨울 수밖에 없었다. "으윽." 앞이 보이지 않아 나무뿌리 비슷한 것에 걸려서, 막 넘어질 뻔한 것을 시아녀석이 손을 뻗어 도와주었다. 다크엘프녀석은 그런 내 모습을 한심스러운 듯 바라보더니, 한숨쉬며 입을 열 었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오늘은 이쯤해서 쉬어가지." 앞부분은 작은 소리였지만 들을 수 있었다. 조금 성질이 난 것도 사실이어서 뭐라 한마디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옆에 서 애처롭게 바라보는 시아녀석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저 다크엘프녀 석 밖에 없었으니까. - 괜한 짓을 했다가 개죽음 당하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난 좀 먹을 것을 구해보지."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다크엘프녀석, 확실히 우리들 중에서 제일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도 사실이겠지. 다크엘프 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고비도 많이 겪었을 테고. - 신성국 류 시온에서는 다크엘프를 엄청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 를 떠나서 기사들이 보는 즉시 즉결처분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말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근래에 왕족들 중에 누가 다크엘프에게 암살 당했다고 그랬나? 여하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번 여행이 끝 나면 저 다크엘프녀석도 사라질 테니. "그나저나 너무 어둡군." 불을 피우고 싶었지만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숲이니까, 어 느 정도 추위는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잡아 먹혀 죽 는 것보다는 얼어죽는 게 백 배는 나을 터니 말이다. - 사실 뭐 죽으면 말짱 꽝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란 게 있으니 말 이다. "어떤 괴물녀석이 자신의 몸을 뜯어먹는 걸 상상해봐도…." "네?" 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반색을 하며 시아녀석이 날 바 라보았다. "응, 그냥 생각 좀 해봤어." 요즘 들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일이 자주 발생 하는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 몰입하게 되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버릇. 예전부터 남에게 종종 지적 받은 것이 기도 한 것이지만…. - 고쳐야 할 것이겠지만, 이런 건 무의 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발생하는 거라서 말이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어린 녀석에게 조금은 무리한 질문이라고도 생각했지만, 그 냥 추워죽겠는데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난 그렇 게 입을 열었다. "… …." 대답 없는 시아녀석, 타이밍에 맞게 어디에서 바람까지 불 어와 말 그대로 '썰렁'한 순간이었다. 애초에 어떤 고차원적 인 대답을 바라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예의 상 뭐라 한 마디 정도는 해주는 게 정상 아닌가. "글쎄요, 전 바보라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런 것을 물어 본 내가 더 바보지. 하고 생각하며 조금은 맥빠진 표정을 지어 보이는 나였다. 이 정도도 못 참아서 죽는다 어쩐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아직은 철이 들지 않았다는 증거겠지. 기르디녀석과 검 술연습하면서 몇 번이나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했으면서 말 이다. "지금 죽는다고 해도 그렇게 큰 아쉬움 같은 것은 없겠죠." 작은 중얼거림, 조금은 슬프고 자조적인 톤이 묻어있는 것 도 같았다. 무엇이라 반박하기도 전에, 고개를 한껏 숙이고 녀석은 다시 조그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보 같은 나를 좋아 해주는 모두를 위해서 라도, 약한 마음가져서는 안되겠죠." "… …." 고작 그런 이유?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이 단지 '나를 좋아 해주는 모두를 위해서'뿐이라니. 너무 한심하다, 지금 당장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네 존재가 고작 그렇게 작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거 냐."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속에서 품고 있 었던 것을 정말 바보 같은 녀석에게 미친 듯 내뱉기 시작했 다. "그래. 너 같은 녀석이 죽는다고 세상이 변하진 않겠지. 세 월이 흐르면 모든 사람이 네 존재도 다 잊어버릴 것이 분명 해. 차라리 잘된 일이 될지도 몰라. 그렇게 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단 편안하게 죽어 버리는 것이." 너무 슬픈 미소, 지금도 녀석은 자기 자신의 자존심보다는 동정하듯이 날 염려하고 있겠지. "너 같은 녀석 따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 라. 젠장!" 당장 저 숲으로 뛰어가서 와이번에게 뜯어 먹히고 싶은 욕 구가 솟아올랐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병신 같이 시아 녀석에게 화풀이 한 것 같았기 때문에. 항상 이렇게 녀석과 나의 관계는 엉망진창이다. 녀석이 조 금이라도 이기적으로 변했으면 좋겠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조 금이라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지만. - 아마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 할 것이다. 볼을 타고 질퍽한 땅위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지독한 추위 탓이겠지. 녀석 앞에서 눈물 보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지 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미안해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조그마한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그렇 게 나는 스스로를 미친 듯 혐오했다. 당장이라도 무엇이라 변 명하고, 녀석을 안아 주고 싶었지만…. 숲은 그렇게 한없이 춥고, 우울한 곳이었다. 빨리 여관으로 돌아가서 시아녀석에게 변명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금단의페트 [2권] - promise - 1-2
금단의 페트(The forbidden pet) -
[애니, 소설 보러 오세요^ - ^]
이 름 배진국
제 목 금단의페트 - promise -
그렇게 하루가 지나자,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빠르게 갑작스
러운 여행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여행을 위한 옷가지 및 물품들을 챙겨주고는 사정을 설명하
기 위해 아이린씨는 카이리온 기사 양성학교로 가버렸고, 어
제 온 다크엘프와 함께 기르디녀석도 사라져버려서 식당을 지
키고 있는 것은 셀브렛과 나와 시아녀석뿐이었다.
청소를 끝내고 모두는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차와 과자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셀브렛녀석은 생선을 제일 좋아하고, 단 것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먹성 좋은 타입이었다. 고양이가 과자를 먹는다고 생
각하면 굉장히 우습지만 말이다. 열심히 과자를 입안 가득 우
겨 넣어서, 씹어 먹는 모습이 나름대로 진지해 보이기도 했
다.
"아, 좋은 아침일세."
어제의 덩치 좋은 중년 사내가 어느새 근처에 다가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외쳤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옆자리에 의자를 권했다. - 사실, '지
금은 아침이 아니라 점심인데요.'하고 쏘아 붙여주고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것은 얼간이나 하는 짓
이니까.
시아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중년사내를 위해 차를 준비하
기 시작했다. 셀브렛녀석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
아주며 천천히 중년사내에게 말을 건네는 나였다.
"저는 베리라고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이름도 말하지 않았구만, 미안하
네. 편하게 그냥 스티브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군."
잠시동안 미소지은 얼굴로 '허허허'하고 웃어 보이더니, 로
브의 품안에서 조그마한 나무 지팡이를 꺼내 보이는 스티브씨
였다. - 시아녀석도 준비를 끝내고,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마법사지. 보조마법에 조금은 지식이 있는 편이라네."
'춤추는 빛(dancing light)', 가볍게 주문을 캐스팅하자 세
개에 작은 빛의 구체가 테이블 위를 날아다니며 모두의 시선
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와아-!"
그 현란한 빛의 구체들의 향연에, 입을 벌리고 당혹성을 지
르며 놀라워하는 셀브렛녀석이었다.
빛의 구체들을 이용해서 '잘. 부. 탁. 해.'하는 글씨를 순
서대로 만들어 보이는 스티브씨. 커다란 덩치와 험상궂은 모
습에 비해 재미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신기해하는 셀브렛과 시아녀석을 위해, 좀 더 여러 가지 재
주를 부리는 것을 보니 그래도 좋은 사람 같아서 조금은 안심
이 되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여행의 시작이다.
알고 보니 스티브씨는 우리 일행에게 텔레포트 주문'만'을
걸어주기 위해서,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 식당까지 온 것이
라 한다. …쉽게 말해서 다크엘프녀석과 나와 시아녀석만의
삭막한 여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젠장.
"아, 걱정하지 마시길. 텔레포트 마법만은 실패해 본 적
없으니까 말이야. 허허허…."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에도 삭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
는 다크엘프, 기르디녀석과 잠시 어디를 다녀온 후로 계속 벌
레 씹은 표정인 것 같았다.
"알았으니 준비나 하도록."
그 다크엘프의 신경질적인 말에, 로브의 품안에서 지팡이를
꺼내며 마법주문의 캐스팅을 준비하는 스티브씨.
셀브렛녀석은 나와 시아가 잠시 여행을 간다는 말에, 눈시
울을 붉히며 슬퍼하고 있었다. 뭐, 고작 며칠 동안 보지 못하
는 것뿐인데 말이다. - 덩달아 시아녀석도 우울한 표정이었
다.
옷가지와 조금의 식량, 여행에 필요한 필수품들이 들어있는
가방을 건네주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 아이린씨였다.
"엘프의 숲에는 몬스터들이 엄청 많거든. 뭐, 몬스터와 부
딪힐 위험은 없겠지만, 함부로 숲을 돌아다니지는 않는 게 좋
을 꺼야…."
몬스터라, 내 실력을 테스트해 볼 겸 한 두 마리 정도는 나
와도 좋을 텐데 말이지. - 물론 엄청 강한 녀석은 죽어도 사
양이지만, 오크나 고블린정도는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으니
까.
"조심해서 다녀와-!"
훌쩍거리며 손을 흔드는 셀브렛녀석과 그런 녀석을 품에 안
고 웃음 지은 얼굴로 배웅하는 아이린씨.
"텔레포트(teleport)!"
주문의 캐스팅이 끝나자 어느새 마법진이 형성된 바닥에서
는, 빛이 뿜어져 나와 시야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멀리에서
날 바라보는 왕자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거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의 기둥의 휩싸여 그렇게 일행들은 어딘 가로 이동되
었다.
* * *
"말씀드린 대로, 굉장한 세력들에게 '실험체'가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 소년의 아버지만 해도 그렇고."
"… 그렇군."
눈앞에 무릎꿇은 자신의 한심한 부하를, 경멸 가득한 표정
으로 그는 바라보았다.
똑똑하지만 소심했다. 뭐, 그 소심함 덕분에 오래 살수 있
었던 거지만 말이다. - 욕심이 지나치거나, 겁을 모르는 녀석
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여하튼 그런 한심한 부하덕분인지, 예상 못한 결과덕분인지
상당히 기분이 안 좋은 것은 확실했다.
'그'답지 않게 조금은 초조하기도 했다. 그 동안 공들인 시
간과 노력,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손해를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쉽게 포
기하기에는 너무나 이르다.
"쿠쿡, 용제가 개입된다고 해도…. 이 쪽도 비장의 카드 한
두 장은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지. 안 그런가?"
그래, '실험체'가 여러 성가신 녀석들에게 알려진 것은 사
실이지만. 조금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보자. 어찌됐든 상대는
나의 정체를 모르고, 나는 상대의 정체를 절반쯤은 파악했으
니까.
지자크, 언제 보아도 불쌍한 녀석. 지금쯤 얼마 전에 자신
이 허락도 없이 한 행동을 미친 듯이 후회하고 있겠지. 하지
만 말이야, 예상치 못한 곳에서 행운은 찾아오는 법이거든?
예를 들어 그 '힘'을 손에 넣었을 때처럼, 위기 속에서 찾아
오는 행운이란 것은 언제나 모두를 놀라게 해주지.
"뭐 널 믿어 보겠다."
어떻게 소심한 자신의 부하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가에 대해
서는, 몇 백년 전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긴장의 끈을 놓
치게 해서는 안 된다. 당근과 채찍, 칭찬과 독설. 이제는 익
숙해 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던 불쌍한 지자크는 몸을 일
으키고는, 크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그렇게 어딘 가로 사
라졌다.
바닥을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모든 것이 무(無)로 여겨질 만큼 긴 시간이 흐
른 후, 비릿한 조소가 섞여있는 말이 어딘 가에서 들려왔다.
"그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 * *
모두는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그 포커페이스 같았던 다크엘프녀석 마저도 그렇
게 식은땀을 흘리며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엘프들의 숲-에르쥬나?"
정말 말하기도 민망하다. 푸른 하늘에 햇빛은 음침하게 생
긴 나무들 덕택에 찾아보기도 힘들고, 바닥은 기분 나쁘게 축
축하고 미끈거리는 이런 곳. 엘프들의 숲은 얼어죽을 엘프들
의 숲이란 말인가? 언데드의 숲 내지는 죽음의 숲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가끔씩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생명체 - 몬스터일지도 - 들의
울음소리가 더더욱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아녀석
은 이런 음침한 곳에는 약한 모양인지, 내 뒤쪽 상의를 부여
잡으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왜 이렇게 추운 것인지. 여름 기온에 익숙해서 그렇
기도 하겠지만, 북방에 있는 것치고는 온난한 편이라는 엘프
들의 숲이 말이다. 두터운 옷을 갈아입었지만 온 몸이 떨려올
정도로 추웠다.
"미친…. 그 녀석 다시 보면 정말 죽여 버릴 테다."
뭐, 인간인 이상 실수는 할 수도 있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엘프들의 숲은 넘어
가더라도, 정말 얼어죽게 생겼다. - 덕분에 다크엘프녀석의
말에 뭐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하여튼 이렇게 된 마당에, 빨리 어떤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
면 그냥 얼어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작은 한숨 한번 쉬고
다크엘프에게 말했다.
"어찌되었든 길을 찾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여기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다가는 되는 일도 안 될
테니까 말이다. 다크엘프녀석은 조금 신경질적인 눈으로 잠시
날 바라보더니 엄청난 빠르기로 나무 위를 향해 몸을 움직였
다.
잠시 후, 아래를 바라보며 나와 시아를 향해 다크엘프가 외
쳤다.
"잠시 거기에서 기다리도록."
그 말을 끝으로 어딘 가로 사라져 버린 다크엘프. 시아녀석
도 나도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나마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아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어째 여행만 하면 이상한 일에 휩쓸리는 것 같군.'
내가 그렇게 운이 없는 편이었던가?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
은 없었지만….
정말 올해의 절반, 그 전반적인 추세는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들의 연속이다. 뭐, 내 과거가 지극히 평
범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휴…."
추운 것은 넘어가더라도 배고픈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조
금 시간이 흐르자, 배낭 속에 넣어 두었던 약간의 먹을 것을
꺼내고 시아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먹어야 살지."
빵 한 조각을 건네주자, 조금 망설이는 듯 머뭇거리는 시아
녀석의 얼굴. 하지만 내가 끈덕지게 바라보자, 어쩔 수 없다
는 듯 가느다란 손으로 빵을 받아들었다.
조금은 게걸스럽게 빵을 먹기 시작하자, 멍하니 그런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아녀석. 그리고 다시 망설이며 자신의 손
에 들고있는 빵을 보다가,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 그 모습에 상황에 맞지 않는 싱거운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
도 사실이었다.
"느긋하군."
땅바닥에 멍하니 등을 맞대고 앉아서 빵을 먹고있는 나와
시아녀석을 향해, 이름 모를 괴기한 나무 위에서 다크엘프가
말했다.
우리들끼리 식사를 한 까닭에 왠지 모르게 삐진 것도 같은
그 다크엘프에게, 남겨 놓았던 빵을 집어다 던져주었다. 잠시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빵을 먹기 시작하는 다크엘프.
생각보다 그렇게 막힌 녀석은 아닌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
기도 했다.
그렇게 대충 허기를 채우자, 나무 위에서 다크엘프가 입을
열었다.
"대충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은 잡아 두었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 안에 도착할 수 있겠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르
는 다크엘프녀석.
"이 근처에는 와이번들이 많은 것 같으니 조심해야겠지. 녀
석들의 독은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니까."
와이번, 드래곤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주 위험
한 몬스터다. 꼬리 끝에는 치명적인 독이 있고, 가죽은 갑옷
처럼 딱딱하다. 어설픈 모험자들이라면 단번에 전멸 당할 정
도니까.
"와이번녀석들 덕분에 다른 하급 몬스터들은 그다지 살지
않고 있는 것 같군. 다행인 건가."
확실히 오크녀석들도 왕창 있으면 무서운 법이다. 사방에서
달려들면 무슨 수로 그것을 막겠는가? 뭐, 어느 정도 단련된
사람이면 몰라도.
사실 오크는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다. 그 많은 오크들이 강
도질만 해서 살았다면, 아마 인간이나 오크나 둘 중에 하나는
멸망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농사를 지을 줄도 알고, 과
일을 채집하고, 간단한 도구를 만드는 법도 알고 있다. 마법
의 경우만 해도 인간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일부 '뛰어난' 오
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 엘프, 드래곤, 그 외 수많
은 몬스터들이 마법을 사용하거나, 이용할 줄 알고 있다. 무
엇이든 인간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면, 그건 어설픈 이기주의일
뿐인 것이다.
여하튼 잠시 동안의 휴식시간도 그렇게 끝나 버리고, 모두
는 몸을 일으켜서 축축한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뜩이나 어두웠던 숲은 앞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졌다. 나도 시아녀석도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다크엘프녀석은 묵묵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
서 길을 걷고 있었다. - 길이라고 해봤자, 짐승들이나 몬스터
들이 지나간 조잡한 흔적정도다. 덕분에 걷는 것이 더더욱 힘
에 겨울 수밖에 없었다.
"으윽."
앞이 보이지 않아 나무뿌리 비슷한 것에 걸려서, 막 넘어질
뻔한 것을 시아녀석이 손을 뻗어 도와주었다. 다크엘프녀석은
그런 내 모습을 한심스러운 듯 바라보더니, 한숨쉬며 입을 열
었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오늘은 이쯤해서 쉬어가지."
앞부분은 작은 소리였지만 들을 수 있었다. 조금 성질이 난
것도 사실이어서 뭐라 한마디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옆에
서 애처롭게 바라보는 시아녀석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저 다크엘프녀
석 밖에 없었으니까. - 괜한 짓을 했다가 개죽음 당하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난 좀 먹을 것을 구해보지."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다크엘프녀석, 확실히 우리들
중에서 제일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도 사실이겠지. 다크엘프
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고비도 많이 겪었을 테고. - 신성국 류
시온에서는 다크엘프를 엄청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
를 떠나서 기사들이 보는 즉시 즉결처분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말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근래에 왕족들 중에 누가 다크엘프에게 암살 당했다고
그랬나? 여하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번 여행이 끝
나면 저 다크엘프녀석도 사라질 테니.
"그나저나 너무 어둡군."
불을 피우고 싶었지만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숲이니까, 어
느 정도 추위는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잡아 먹혀 죽
는 것보다는 얼어죽는 게 백 배는 나을 터니 말이다. - 사실
뭐 죽으면 말짱 꽝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란 게 있으니 말
이다.
"어떤 괴물녀석이 자신의 몸을 뜯어먹는 걸 상상해봐도…."
"네?"
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반색을 하며 시아녀석이 날 바
라보았다.
"응, 그냥 생각 좀 해봤어."
요즘 들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일이 자주 발생
하는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 몰입하게 되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버릇. 예전부터 남에게 종종 지적 받은 것이
기도 한 것이지만…. - 고쳐야 할 것이겠지만, 이런 건 무의
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발생하는 거라서 말이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어린 녀석에게 조금은 무리한 질문이라고도 생각했지만, 그
냥 추워죽겠는데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난 그렇
게 입을 열었다.
"… …."
대답 없는 시아녀석, 타이밍에 맞게 어디에서 바람까지 불
어와 말 그대로 '썰렁'한 순간이었다. 애초에 어떤 고차원적
인 대답을 바라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예의 상 뭐라 한
마디 정도는 해주는 게 정상 아닌가.
"글쎄요, 전 바보라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런 것을 물어 본 내가 더 바보지. 하고 생각하며
조금은 맥빠진 표정을 지어 보이는 나였다.
이 정도도 못 참아서 죽는다 어쩐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아직은 철이 들지 않았다는 증거겠지. 기르디녀석과 검
술연습하면서 몇 번이나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했으면서 말
이다.
"지금 죽는다고 해도 그렇게 큰 아쉬움 같은 것은 없겠죠."
작은 중얼거림, 조금은 슬프고 자조적인 톤이 묻어있는 것
도 같았다. 무엇이라 반박하기도 전에, 고개를 한껏 숙이고
녀석은 다시 조그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보 같은 나를 좋아 해주는 모두를 위해서
라도, 약한 마음가져서는 안되겠죠."
"… …."
고작 그런 이유?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이 단지 '나를 좋아 해주는 모두를 위해서'뿐이라니. 너무
한심하다, 지금 당장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네 존재가 고작 그렇게 작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거
냐."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속에서 품고 있
었던 것을 정말 바보 같은 녀석에게 미친 듯 내뱉기 시작했
다.
"그래. 너 같은 녀석이 죽는다고 세상이 변하진 않겠지. 세
월이 흐르면 모든 사람이 네 존재도 다 잊어버릴 것이 분명
해. 차라리 잘된 일이 될지도 몰라. 그렇게 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단 편안하게 죽어 버리는 것이."
너무 슬픈 미소, 지금도 녀석은 자기 자신의 자존심보다는
동정하듯이 날 염려하고 있겠지.
"너 같은 녀석 따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
라. 젠장!"
당장 저 숲으로 뛰어가서 와이번에게 뜯어 먹히고 싶은 욕
구가 솟아올랐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병신 같이 시아
녀석에게 화풀이 한 것 같았기 때문에.
항상 이렇게 녀석과 나의 관계는 엉망진창이다. 녀석이 조
금이라도 이기적으로 변했으면 좋겠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조
금이라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지만. - 아마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 할 것이다.
볼을 타고 질퍽한 땅위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지독한
추위 탓이겠지. 녀석 앞에서 눈물 보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지
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미안해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조그마한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그렇
게 나는 스스로를 미친 듯 혐오했다. 당장이라도 무엇이라 변
명하고, 녀석을 안아 주고 싶었지만….
숲은 그렇게 한없이 춥고, 우울한 곳이었다. 빨리 여관으로
돌아가서 시아녀석에게 변명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