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짧지 않은 시간동안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씁쓸한 웃음만 나올 뿐이지만, 당시에는 참 심각했 던 듯한 일도 많은 듯 했다. 다크엘프 베르니아. 평생동안 살며 그렇게 화려한 검술은 보지 못했었다. 느린 것 같지만 빠르고 섬세하며 끊이지 않는 위력적인 공격들. 비록 지성이 없는 존재지만, 와이번은 하찮은 몬스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가죽은 검이 퉁겨서 나올 정도 로 단단하고,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몸집과는 달리 민첩하고 유연하다. 나 같은 녀석이 수 십 명 있어봤자 잡기는커녕 오히 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일 것이다. 아마 평생 그런 그녀의 검술을 동경하며 살지도 모르는 일 이다. 나의 한계가 어느 정도까지 될 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 만, 확실히 그런 강함을 가질 실력이란 것은 노력만 가지고 되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
베르니아, 카이츠, 기르디….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며 세상을 여행하고 끊임없는 지식을 추구하는 종족이라는 엘프. 성격도 다르고 추구하는 것도 다르 지만 모두는 인간이 아닌 엘프라는 종족이었다. 대륙에서 그 엘프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산다는 이 곳 엘프들 의 도시 에르쥬나에서 만난 귀여운 쌍둥이 자매 세레스, 티레 스. 그 아이들과의 어이없는 만남에서부터 조금은 괴상한 카이 츠의 검술 훈련에 익숙해지려 노력한 것. 쌍둥이들의 언니라고 한 에린이란 엘프소녀와의 만남도 그렇고, 확실히 많은 일들이 있었던 듯 하다.
'적어도 오지 않는 것보단 나은 건가.'
식당에서 썩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겠지. 경험은 무엇으로 도 바꾸지 못할 값어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중얼거리며 여러 가지 잡생각에 빠졌던 내가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켰다.
"… …."
그곳에는 그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보는 이를 편하게 하 는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똑바로 내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오늘 돌아가겠습니다."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부족하기에 아직 배우고 싶은 것 투성이지만, 조금 더 식당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에.
"그런가." "네, 그 동안 지도 감사했습니다." "재미없는 일 하느라 수고했군."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자, 쓴웃음 지으며 다시 입을 여 는 카이츠 씨.
"기르디에게도 안부 전해주게." "네."
마음 속에 간직해 두었던 말을 하기 위해서, 짧게 대답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부탁이 있습니다."
괘념치 않고 말해보라는 듯 그의 표정에 자신감을 얻고 다 시 입을 열었다.
"카이츠 님의 실력을 보고 싶습니다." "나의 실력?" "네."
조금 곤란하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카이츠. 거절한다고 해도 뭐 크게 섭섭한 감정은 가지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단 한번이라도 그의 진정한 실력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싶었다. 잠시 동안의 정적을 깨고 카이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잘 것 없는 것이긴 하지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뻤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웃음 짓는 나였다. 사실 카이츠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원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말이다. - 내가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강한 누군가가 있다고 하면 눈으로 그 실력을 보기 전까지는, 신용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보여주면 좋을까?"
그의 말에 내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마땅히 상대해 줄 사람도 없는데, 마법도 아닌 검술의 실력을 어떻게 다른 자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참 난감한 일이다.
"으음…. 델리만 님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델리만 님에게?"
검은커녕 지팡이도 제대로 못 들을 것 같은 그 늙은이에게 무슨 부탁을 한다는 말인가. 델리만이 다른 누군가를 주선해 준다는 뜻인가.
"돌아갈 준비는 끝마쳤는가?" "아니요, 이제 슬슬 해볼 참이었습니다."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야."
최소한 날이 어두워 질 때까지는 준비를 끝마쳐야겠지. 뭐 준비라고 해봤자 옷가지 몇 개 보따리에 싸는 것이 전부일 테 지만 말이다.
"나도 델리만 님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 고 돌아갈 준비하게." "네, 그럼."
일이 다 결정 난 이상 몸을 지체하는 것은 바보짓이란 생각 이 들었기에,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충 인사하고 걸음 을 움직였다.
축축하게 젖은 눈망울을 하고 내 손을 부여잡는 세레스녀석.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새삼 정이 들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섭섭한 감정이 조금은 마음을 아프게 해 왔다.
"언제 다시 올 거야?"
영원히 못 올지도 몰라, 라고 대답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무책임하다고 누가 비난할지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내게도 쌍둥이들에게 도 좋은 선택 같았다.
"글세? 심심하면 일주일 후에라도 놀러 올지 모르지." "거짓말." ".. 너무 그렇게 딱 잘라 말할 것은 없잖아."
푸념에 "바보"라고 중얼거리는 티레스녀석의 머리를 쓰다듬 으며 싱거운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나였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숲에서 유일하게 이야기 상대가 되 어 주었던 쌍둥이 자매들.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서 한가롭게 흔들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수염을 잡아뜯으며 '왜 안 온 거야? 바보!'라는 말을 하고도 남을 녀석들이다. - 적어도 그런 꼴을 보지 않으려면 인형이라도 들고 언제 다시 찾아 와야하겠지. 아니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고 또 뭐라 고 화낼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먼저 아이린 씨에게 물어 엘프 아이들의 취향을 조사해 보는 것이 좋겠다.
"델리만 님, 부탁합니다.
중얼거리며 잡생각에 빠진 나를 깨우는 듯 카이츠가 입을 열었다.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인가 하기 싫다 는 기색을 역력히 들어내는 델리만이었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 지 않고, 미소지은 얼굴로 주시하는 카이츠에게는 결국 포기하 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쯧."
이내 혀를 차며 델리만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평생동안 보지도 듣지도 못한 엄청난 속도로 캐스팅을 끝내고 나와 쌍 둥이 녀석들에게 향하는 그 마법은 이름도 능력도 모를 정체 불명의 것이었지만. 왠지 모를 심각한 분위기에 질문은커녕 멍 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예쁘다."
티레스가 중얼거리는 말대로 빛은 아름다웠다. 춤추는 듯 화 려하고 불꽃처럼 용솟음치는 그 눈부신 빛은 나와 쌍둥이들 주위를 끝임 없이 맴돌았다. 어떤 용도로 쓰인 마법인지 정확 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형태나 마나의 움직임으로 보아 결계 나 보호마법의 일종인 것 같았다. 놀랄 사이도 없이 다시 연이어 주문을 캐스팅 하는 델리만. 중간에 한 두 단어 정도 알고 있는 고대어가 있었기는 하지만, 속도가 워낙 빠르고 발음이 부정확한 탓에 해석은 불가능했다.
"뒤로 물러서라!"
카이츠답지 않게 과격한 목소리였다. 나와 쌍둥이들은 그 박 력에 놀라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캐스팅이 끝나고 마법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보는 사람의 혼을 앗아갈 듯한 붉은 색 물 결의 배열은 점점 정확한 형태를 그리며 하나의 마법을 완성 시키는 '문'을 제공했다. 마법진의 밑바닥에서 생성된 어둠, 비명을 지를 여유조차 주 지 않고 그 밑에서 무엇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에 저절로 헛구역질이 새어나왔다. 불안해하는 쌍둥이들의 손을 잡으며 난 정신을 집중했다. 앞으 로 일어날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날 위해 목숨을 걸어 가며 싸우는 카이츠를 위해서.
"크아아아!!"
끝없는 어둠, 절망과 고통. 그리고 절대적인 악의 피조물. 고 막을 찢어버릴 것 같은 비명은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욕망 이 담겨져 있는 듯 하다. 좁은 문을 어떻게든 넓히기 위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허 공을 휘젓는 그것의 검고도 검은머리가 시야 가득 들어오자 델리만이 중얼거렸다.
"제법 강한 녀석 같은데. 할 수 있겠나?" "괜찮습니다." "놀고만 있지는 않았나 보군."
카이츠가 왜 아무도 없는 숲의 공터로 우리를 안내한 것인 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런 것이라니, 너무하잖아요. 평생 당신 등뒤만 쫓으라는 말입니까.'
바보 같은 푸념이었지만 확실히 저런 것은 조금 지나친 감 이 없지 않아 있었다. 평범한 기사 백 명은 쉽게 상대할 것 같 은 저런 엄청난 녀석을 해치우겠다니. 정말 이 악마와도 같은 무엇에 비하면 전에 본 와이번은 우스울 정도였다.
"젠장."
각오는 했지만 조금씩 팔 다리가 떨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 는 노릇이었다. - 그래도 난 조금 나은 편이다. 쌍둥이녀석들 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니. 드디어 거대한 몸의 상체를 녀석이 완전히 드러냈을 때, 카 이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비렌쥬(vyrenzu)."
새하얗게 공중을 빛으로 수놓으며 카이츠의 눈앞에서 빠르 게 형성화되기 시작하는 하나의 검. 악마와도 같은 그 검고 흉 측한 무엇이 두발로 대지를 딛었을 때 카이츠는 조용히 팔을 뻗어 검을 집었다.
"크아아아-!!"
자유를 만끽하는 듯 두 팔을 하늘 높이 쳐 올리며 절규하는 그 괴물을 아무런 동요 없이 바라보는 카이츠. 길고도 짧은 시간이 지나고, 괴물은 자신의 눈앞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카이츠에게 눈을 돌렸다.
"엘프? 숲의 종족이 왜 나를 부른 것이지."
목소리로 전해지는 음성이 아니라 머리 속으로 직접 울려 퍼지는 괴물의 말에 적지 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는 나였다. 차 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모습에 괴물이 지성을 가지 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소원을 말해봐라, 엘프."
미소짓는 것 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괴물이 말하자 카이 츠가 짧게 대답했다.
"죽음."
카이츠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 거대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 그 괴물의 모습은 책에서 종종 보던 악마와 비슷해 보였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갓난아기, 처녀의 피로 제단을 쌓고 지옥의 악마를 소환하는 악마의 삽화. 현실과는 다른 것 이라 믿었기에 별다른 감흥 없이 보던 책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이상 표현할 다른 것을 찾기 힘들었다. 거대한 뿔과 꼬리. 두발로 서서 노려보고 있긴 하지만 그것 은 인간보다는 짐승의 모습과 더 비슷했다. 피처럼 새빨갛게 붉은 눈으로 카이츠와 델리만을 주시하는 그 모습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두려움을 가슴 속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나의 죽음."
그 악마조차 당황한 듯 거대한 몸을 주춤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왠지 모르게 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장난하자는 것인가." "와라."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단순하고 광오한 남자구나. 자신의 능 력을 그만큼 믿고 있다는 뜻이긴 하겠지만.
"건방진 놈!"
어이가 없다는 듯 악마는 그렇게 소리치며, 눈앞에 보이는 나무를 송두리째 뽑아들었다. 땅이 흔들려 균형을 잡기조차 힘 들었지만, 카이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지으며 악마의 공 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격에 끝낼 것이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델리만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 쾅!!
악마가 온힘을 다해 카이츠가 있는 곳을 위에서 아래로 '몽 둥이'를 내리치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 겨 올랐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상상 이상으로 빠른 공격, 아 무리 대단한 자라고 해도 저런 걸 정통으로 맞는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카이츠의 실력을 불 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삼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북히 허공을 수놓던 먼지가 가라앉으며 시야가 확보되자 자연스레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느새 상대방의 등뒤로 이동한 것인지 카이츠는 미소짓는 얼굴로 악마의 등뒤에 서있 었던 것이다. 악마는 자신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예상치 못했다는 듯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을 한껏 더 구기며, 재차 몽둥이를 옆으 로 휘둘렀다. 그 몽둥이가 막 몸에 적중할 찰나에 다시 유령처럼 시야에 사라지는 카이츠. 악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끝이다!"
마치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성같이,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 는 빠르기로 악마를 향해 떨어지는 카이츠. 공격이 제대로 적 중한 것인지 확인할 사이도 없이 악마의 몸에서 분수처럼 허 공을 수놓는 악마의 피는…. 붉고 질퍽하게 주위의 땅을 물들 이고 있었다.
"크으으-"
비록 흉측한 녀석이지만 새삼 동정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 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괜히 마법으로 불러 나와서 소중한 목숨을 빼앗기다니. 뭐, 모두가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는 그 편 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것이겠지만…. 사실 조금 쉽게 결론이 나서 맥이 빠지기도 했다. 그것도 그 만큼 저 카이츠라는 엘프 사내가 강하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말이다. 일단 저렇게 큰 몸집에 악마를 일격에 베어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나 자신이 뼈저리게 알고 있었으니까. 절규하며 괴로워하는 악마의 목을 내리쳐 완전히 목숨을 끊 어버리고는 카이츠는 뭐라 작게 주문을 외워 자신의 검을 사 라지게 했다.
"이 정도면 합격인가."
살짝 쓴웃음 지으며 날 바라보는 그 엘프 사내를 향해, 땅이 떨어져라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였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하자, 델리만이 코웃 음치며 대꾸했다.
"알았으니 빨리 준비나 해."
마지막까지 저렇게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이 조금 못마땅하 기도 했지만, 저 늙은이 성질이 원래 저랬으니 새삼 뭐라고 할 필요도 없겠지. 방금 전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정신을 차 리지 못하고 멍하니 날 바라보는 쌍둥이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대충 가져가야 할 것을 챙기는 나였다. 뭐 잊어먹고 놔 두고 돌아간다고 해도 크게 곤란할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대충 모든 준비가 끝나자 델리만이 다시 주문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전에 스티브라고 했던 인간은 엄청 공을 들여서 텔레포트 마법을 완성시킨 것 같은 데. 그것에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로 빠른 속도로 어느새 마법을 완성하는 델리만을 보니, 새삼 마법사에게도 격이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빛의 기둥에 휩싸여, 나와 시아녀석은 그렇게 엘프의 숲을 벗어나 어디론가 이동되었다.
눈 깜짝할 겨를도 없이 '엘프의 눈물'의 문 앞으로 이동된 나와 시아녀석. 갑자기 나타난 나와 시아녀석을, 턱이 빠진 것 처럼 입을 벌리며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러 워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은 기르디녀석이 대걸레를 문지르며 식당을 청소하는 장면이었다.
"… …." "… …."
나와 시아녀석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 겠지만, 그래도 새삼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순 없었 다. 엘프들의 숲을 대표하는 검사가 식당에서 대걸레질하는 모 습이라니! 그렇게 몇 초간의 정적 후에 대걸레를 던지며 중얼거리는 기르디녀석.
".. 당장 훈련 시작이다."
조금 뜨끔하긴 했지만 이런 사소한 것 가지고 심하게 뭐라 화를 낼 엘프는 아니었으니까. 어색한 웃음을 하고는 '네'라고 대답하는 나였다.
"어서 와-!"
재빨리 계단을 내려와 웃는 얼굴로 나와 시아를 반기는 아 이린 씨. 뒤따라 쪼르르-하고 내려와 시아녀석의 품에 파고드 는 셀브렛녀석. 무감정한 표정으로 조용히 뒤에서 날 바라보는 자룬왕자의 모습. 그렇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운 정이 무서운 법이라고, 새삼 반가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일상생활로 복귀, 소중한 방학의 절반을 보내 야 했지만 후회보다는 아쉬움의 감정이 더 강했다. 하지만 나 는 아직 어리고, 지냈던 날보다는 살아야 할 날이 많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미소지은 얼굴로 천천히 방을 향해 걸음을 움직이며 생각하 는 나였다.
* * *
그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느 이름 모를 사내의 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지천을 적시는 붉은 피와 비의 혼합된 무엇은 소년의 온 몸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 위에 쓰러진 수많은 시체들에서 풍겨오는 역겨운 냄새들과 어 우러져, 숨조차 쉬게 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내색하나 하지 않 고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는 소년이 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이지, 라고 자문할 수 있 을 정도의 정신조차 남아있지 않은 소년에게, 눈앞에서 목이 뚫리고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지인 들의 모습은 아무런 감흥 조차 주지 못했다. 보슬보슬 작게 내리는 비속에서조차 저택이라고 불리었던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온 불길은 사방을 대낮처럼 밝히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소년의 생기 잃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 소녀가 다가왔다. 활활 타오르는 괴물 같은 불길의 힘에 저 택의 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소년에게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는 소녀. 그런 소녀의 얼굴은 섬뜩하게 아름다웠다. 비록 달라붙은 검 은 전투복에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 단정한 모습 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 악마(惡魔)."
고개를 숙이고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아무런 감정조차 담겨져 있지 않은 말이었지만, 소녀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그의 말에 동요했다.
"자신의 주인을 죽인 것에 모자라, 수없이 많은 죄 없는 사 람들의 목을 자르는 마녀(魔女)."
언제부터인지 작은 비는 폭풍이 되어 저택의 거대한 불길을 잠재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소년은 천천히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사정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 중요한 것은 평생 네가 저주 받을 것이란 거야."
한참이 지나도록 그렇게 미친 듯 웃음을 터트린 소년은 조 용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서 나를 죽여라."
그런 소년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천히 소녀는 팔을 들었다. 마법의 빛으로 붉게 빛나는 손은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힘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소년은 누구보다도 충분히 알고 있었 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그 동안 별거 아닌 일에도 싱겁게 울고 웃으며 꽤 나쁘지 않은 삶을 산 것도 같아 별다른 후회는 오 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손에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다 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
한참동안 목이 잘려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소년은 조용히 눈을 떴다. 새빨갛게 피가 굳은 땅과 시체들의 흉측한 모습을 제외하면 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다 소년이 작게 중얼거렸다.
".. 바보."
어느새 비는 그치고 검은 구름 사이에 붉은 해가 천천히 모 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추스 르지도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가야할 곳을 향해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땀에 흠뻑 젖어 딱딱하게 굳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방금 전 에 꾼 악몽의 내용을 생각해 보려 했지만, 자세하게 기억하면 할수록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꿈의 기억들 덕분에 머리만 아파 오는 듯 했다. 생긴 것은 모르지만 아름다운 소녀, 그 누구보 다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했던 그녀가 왜 죄 없는 수많은 사 람들의 목숨을 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지금 나 자신은 어떻게 그녀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일 까. 가슴이 답답했다. 오래 전부터 간혹 비슷한 악몽을 꾼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 숲에서 그를 만나고, 또 그녀를 만나면서부 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 것 같았다. 무엇인가 '억누 르고' 있었지만 오래 간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에 겪던 고통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런 악몽들이 나의 마음을 더 아파 오게 했다. 무엇인가 계기가 주어지면, 또 소 중한 그를 잃는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가슴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그녀의 존재를, 그리고 언제부터 인지 제어가 불가능한 자신의 또 다른 모습들을. 그러니 조만간 모두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또다시 비극을 반 복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가면을 쓴 '괴물'에 불과하니까.
"약속은 지킬 수 없어요…."
조용히 중얼거리며 천천히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파고들었 다. 바보같이 울고 싶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울컥 베개를 적시 며 쏟아지는 것을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금단의페트 [2권] 2-3
금단의 페트(The forbidden pet) -
[애니, 소설 보러 오세요^ - ^]
'참 다사다난했군.'
그리 짧지 않은 시간동안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씁쓸한 웃음만 나올 뿐이지만, 당시에는 참 심각했
던 듯한 일도 많은 듯 했다.
다크엘프 베르니아.
평생동안 살며 그렇게 화려한 검술은 보지 못했었다. 느린
것 같지만 빠르고 섬세하며 끊이지 않는 위력적인 공격들.
비록 지성이 없는 존재지만, 와이번은 하찮은 몬스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가죽은 검이 퉁겨서 나올 정도
로 단단하고,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몸집과는 달리 민첩하고
유연하다. 나 같은 녀석이 수 십 명 있어봤자 잡기는커녕 오히
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일 것이다.
아마 평생 그런 그녀의 검술을 동경하며 살지도 모르는 일
이다. 나의 한계가 어느 정도까지 될 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
만, 확실히 그런 강함을 가질 실력이란 것은 노력만 가지고 되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
베르니아, 카이츠, 기르디….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며 세상을 여행하고 끊임없는 지식을
추구하는 종족이라는 엘프. 성격도 다르고 추구하는 것도 다르
지만 모두는 인간이 아닌 엘프라는 종족이었다.
대륙에서 그 엘프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산다는 이 곳 엘프들
의 도시 에르쥬나에서 만난 귀여운 쌍둥이 자매 세레스, 티레
스. 그 아이들과의 어이없는 만남에서부터 조금은 괴상한 카이
츠의 검술 훈련에 익숙해지려 노력한 것. 쌍둥이들의 언니라고
한 에린이란 엘프소녀와의 만남도 그렇고, 확실히 많은 일들이
있었던 듯 하다.
'적어도 오지 않는 것보단 나은 건가.'
식당에서 썩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겠지. 경험은 무엇으로
도 바꾸지 못할 값어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중얼거리며 여러 가지 잡생각에 빠졌던 내가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켰다.
"… …."
그곳에는 그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보는 이를 편하게 하
는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똑바로 내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오늘 돌아가겠습니다."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부족하기에 아직 배우고
싶은 것 투성이지만, 조금 더 식당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에.
"그런가."
"네, 그 동안 지도 감사했습니다."
"재미없는 일 하느라 수고했군."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자, 쓴웃음 지으며 다시 입을 여
는 카이츠 씨.
"기르디에게도 안부 전해주게."
"네."
마음 속에 간직해 두었던 말을 하기 위해서, 짧게 대답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부탁이 있습니다."
괘념치 않고 말해보라는 듯 그의 표정에 자신감을 얻고 다
시 입을 열었다.
"카이츠 님의 실력을 보고 싶습니다."
"나의 실력?"
"네."
조금 곤란하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카이츠. 거절한다고 해도 뭐 크게 섭섭한 감정은 가지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단 한번이라도 그의 진정한 실력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싶었다.
잠시 동안의 정적을 깨고 카이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잘 것 없는 것이긴 하지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뻤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웃음 짓는 나였다.
사실 카이츠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원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말이다. - 내가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강한
누군가가 있다고 하면 눈으로 그 실력을 보기 전까지는, 신용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보여주면 좋을까?"
그의 말에 내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마땅히 상대해 줄 사람도 없는데, 마법도 아닌 검술의
실력을 어떻게 다른 자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참 난감한 일이다.
"으음…. 델리만 님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델리만 님에게?"
검은커녕 지팡이도 제대로 못 들을 것 같은 그 늙은이에게
무슨 부탁을 한다는 말인가. 델리만이 다른 누군가를 주선해
준다는 뜻인가.
"돌아갈 준비는 끝마쳤는가?"
"아니요, 이제 슬슬 해볼 참이었습니다."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야."
최소한 날이 어두워 질 때까지는 준비를 끝마쳐야겠지. 뭐
준비라고 해봤자 옷가지 몇 개 보따리에 싸는 것이 전부일 테
지만 말이다.
"나도 델리만 님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
고 돌아갈 준비하게."
"네, 그럼."
일이 다 결정 난 이상 몸을 지체하는 것은 바보짓이란 생각
이 들었기에,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충 인사하고 걸음
을 움직였다.
축축하게 젖은 눈망울을 하고 내 손을 부여잡는 세레스녀석.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새삼 정이 들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섭섭한 감정이 조금은 마음을 아프게 해
왔다.
"언제 다시 올 거야?"
영원히 못 올지도 몰라, 라고 대답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무책임하다고
누가 비난할지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내게도 쌍둥이들에게
도 좋은 선택 같았다.
"글세? 심심하면 일주일 후에라도 놀러 올지 모르지."
"거짓말."
".. 너무 그렇게 딱 잘라 말할 것은 없잖아."
푸념에 "바보"라고 중얼거리는 티레스녀석의 머리를 쓰다듬
으며 싱거운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나였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숲에서 유일하게 이야기 상대가 되
어 주었던 쌍둥이 자매들.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서 한가롭게
흔들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수염을 잡아뜯으며
'왜 안 온 거야? 바보!'라는 말을 하고도 남을 녀석들이다. -
적어도 그런 꼴을 보지 않으려면 인형이라도 들고 언제 다시
찾아 와야하겠지. 아니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고 또 뭐라
고 화낼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먼저 아이린 씨에게 물어 엘프
아이들의 취향을 조사해 보는 것이 좋겠다.
"델리만 님, 부탁합니다.
중얼거리며 잡생각에 빠진 나를 깨우는 듯 카이츠가 입을
열었다.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인가 하기 싫다
는 기색을 역력히 들어내는 델리만이었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
지 않고, 미소지은 얼굴로 주시하는 카이츠에게는 결국 포기하
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쯧."
이내 혀를 차며 델리만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평생동안
보지도 듣지도 못한 엄청난 속도로 캐스팅을 끝내고 나와 쌍
둥이 녀석들에게 향하는 그 마법은 이름도 능력도 모를 정체
불명의 것이었지만. 왠지 모를 심각한 분위기에 질문은커녕 멍
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예쁘다."
티레스가 중얼거리는 말대로 빛은 아름다웠다. 춤추는 듯 화
려하고 불꽃처럼 용솟음치는 그 눈부신 빛은 나와 쌍둥이들
주위를 끝임 없이 맴돌았다. 어떤 용도로 쓰인 마법인지 정확
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형태나 마나의 움직임으로 보아 결계
나 보호마법의 일종인 것 같았다.
놀랄 사이도 없이 다시 연이어 주문을 캐스팅 하는 델리만.
중간에 한 두 단어 정도 알고 있는 고대어가 있었기는 하지만,
속도가 워낙 빠르고 발음이 부정확한 탓에 해석은 불가능했다.
"뒤로 물러서라!"
카이츠답지 않게 과격한 목소리였다. 나와 쌍둥이들은 그 박
력에 놀라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캐스팅이 끝나고 마법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보는 사람의 혼을 앗아갈 듯한 붉은 색 물
결의 배열은 점점 정확한 형태를 그리며 하나의 마법을 완성
시키는 '문'을 제공했다.
마법진의 밑바닥에서 생성된 어둠, 비명을 지를 여유조차 주
지 않고 그 밑에서 무엇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에 저절로 헛구역질이 새어나왔다.
불안해하는 쌍둥이들의 손을 잡으며 난 정신을 집중했다. 앞으
로 일어날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날 위해 목숨을 걸어
가며 싸우는 카이츠를 위해서.
"크아아아!!"
끝없는 어둠, 절망과 고통. 그리고 절대적인 악의 피조물. 고
막을 찢어버릴 것 같은 비명은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욕망
이 담겨져 있는 듯 하다.
좁은 문을 어떻게든 넓히기 위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허
공을 휘젓는 그것의 검고도 검은머리가 시야 가득 들어오자
델리만이 중얼거렸다.
"제법 강한 녀석 같은데. 할 수 있겠나?"
"괜찮습니다."
"놀고만 있지는 않았나 보군."
카이츠가 왜 아무도 없는 숲의 공터로 우리를 안내한 것인
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런 것이라니, 너무하잖아요. 평생 당신 등뒤만 쫓으라는
말입니까.'
바보 같은 푸념이었지만 확실히 저런 것은 조금 지나친 감
이 없지 않아 있었다. 평범한 기사 백 명은 쉽게 상대할 것 같
은 저런 엄청난 녀석을 해치우겠다니. 정말 이 악마와도 같은
무엇에 비하면 전에 본 와이번은 우스울 정도였다.
"젠장."
각오는 했지만 조금씩 팔 다리가 떨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
는 노릇이었다. - 그래도 난 조금 나은 편이다. 쌍둥이녀석들
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니.
드디어 거대한 몸의 상체를 녀석이 완전히 드러냈을 때, 카
이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비렌쥬(vyrenzu)."
새하얗게 공중을 빛으로 수놓으며 카이츠의 눈앞에서 빠르
게 형성화되기 시작하는 하나의 검. 악마와도 같은 그 검고 흉
측한 무엇이 두발로 대지를 딛었을 때 카이츠는 조용히 팔을
뻗어 검을 집었다.
"크아아아-!!"
자유를 만끽하는 듯 두 팔을 하늘 높이 쳐 올리며 절규하는
그 괴물을 아무런 동요 없이 바라보는 카이츠.
길고도 짧은 시간이 지나고, 괴물은 자신의 눈앞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카이츠에게 눈을 돌렸다.
"엘프? 숲의 종족이 왜 나를 부른 것이지."
목소리로 전해지는 음성이 아니라 머리 속으로 직접 울려
퍼지는 괴물의 말에 적지 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는 나였다. 차
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모습에 괴물이 지성을 가지
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소원을 말해봐라, 엘프."
미소짓는 것 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괴물이 말하자 카이
츠가 짧게 대답했다.
"죽음."
카이츠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 거대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 그 괴물의 모습은 책에서 종종 보던 악마와 비슷해
보였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갓난아기, 처녀의 피로 제단을
쌓고 지옥의 악마를 소환하는 악마의 삽화. 현실과는 다른 것
이라 믿었기에 별다른 감흥 없이 보던 책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이상 표현할 다른 것을 찾기 힘들었다.
거대한 뿔과 꼬리. 두발로 서서 노려보고 있긴 하지만 그것
은 인간보다는 짐승의 모습과 더 비슷했다. 피처럼 새빨갛게
붉은 눈으로 카이츠와 델리만을 주시하는 그 모습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두려움을 가슴 속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나의 죽음."
그 악마조차 당황한 듯 거대한 몸을 주춤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왠지 모르게 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장난하자는 것인가."
"와라."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단순하고 광오한 남자구나. 자신의 능
력을 그만큼 믿고 있다는 뜻이긴 하겠지만.
"건방진 놈!"
어이가 없다는 듯 악마는 그렇게 소리치며, 눈앞에 보이는
나무를 송두리째 뽑아들었다. 땅이 흔들려 균형을 잡기조차 힘
들었지만, 카이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지으며 악마의 공
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격에 끝낼 것이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델리만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 쾅!!
악마가 온힘을 다해 카이츠가 있는 곳을 위에서 아래로 '몽
둥이'를 내리치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
겨 올랐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상상 이상으로 빠른 공격, 아
무리 대단한 자라고 해도 저런 걸 정통으로 맞는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카이츠의 실력을 불
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삼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북히 허공을 수놓던 먼지가 가라앉으며 시야가 확보되자
자연스레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느새 상대방의 등뒤로
이동한 것인지 카이츠는 미소짓는 얼굴로 악마의 등뒤에 서있
었던 것이다.
악마는 자신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예상치 못했다는 듯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을 한껏 더 구기며, 재차 몽둥이를 옆으
로 휘둘렀다.
그 몽둥이가 막 몸에 적중할 찰나에 다시 유령처럼 시야에
사라지는 카이츠. 악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끝이다!"
마치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성같이,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
는 빠르기로 악마를 향해 떨어지는 카이츠. 공격이 제대로 적
중한 것인지 확인할 사이도 없이 악마의 몸에서 분수처럼 허
공을 수놓는 악마의 피는…. 붉고 질퍽하게 주위의 땅을 물들
이고 있었다.
"크으으-"
비록 흉측한 녀석이지만 새삼 동정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
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괜히 마법으로 불러 나와서 소중한
목숨을 빼앗기다니. 뭐, 모두가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는 그 편
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것이겠지만….
사실 조금 쉽게 결론이 나서 맥이 빠지기도 했다. 그것도 그
만큼 저 카이츠라는 엘프 사내가 강하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말이다. 일단 저렇게 큰 몸집에 악마를 일격에 베어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나 자신이 뼈저리게 알고 있었으니까.
절규하며 괴로워하는 악마의 목을 내리쳐 완전히 목숨을 끊
어버리고는 카이츠는 뭐라 작게 주문을 외워 자신의 검을 사
라지게 했다.
"이 정도면 합격인가."
살짝 쓴웃음 지으며 날 바라보는 그 엘프 사내를 향해, 땅이
떨어져라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였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하자, 델리만이 코웃
음치며 대꾸했다.
"알았으니 빨리 준비나 해."
마지막까지 저렇게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이 조금 못마땅하
기도 했지만, 저 늙은이 성질이 원래 저랬으니 새삼 뭐라고 할
필요도 없겠지. 방금 전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정신을 차
리지 못하고 멍하니 날 바라보는 쌍둥이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대충 가져가야 할 것을 챙기는 나였다. 뭐 잊어먹고 놔
두고 돌아간다고 해도 크게 곤란할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대충 모든 준비가 끝나자 델리만이 다시 주문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전에 스티브라고 했던 인간은 엄청 공을 들여서 텔레포트
마법을 완성시킨 것 같은 데. 그것에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로 빠른 속도로 어느새 마법을 완성하는 델리만을 보니, 새삼
마법사에게도 격이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빛의 기둥에 휩싸여, 나와 시아녀석은 그렇게 엘프의
숲을 벗어나 어디론가 이동되었다.
눈 깜짝할 겨를도 없이 '엘프의 눈물'의 문 앞으로 이동된
나와 시아녀석. 갑자기 나타난 나와 시아녀석을, 턱이 빠진 것
처럼 입을 벌리며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러
워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은 기르디녀석이
대걸레를 문지르며 식당을 청소하는 장면이었다.
"… …."
"… …."
나와 시아녀석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
겠지만, 그래도 새삼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순 없었
다. 엘프들의 숲을 대표하는 검사가 식당에서 대걸레질하는 모
습이라니!
그렇게 몇 초간의 정적 후에 대걸레를 던지며 중얼거리는
기르디녀석.
".. 당장 훈련 시작이다."
조금 뜨끔하긴 했지만 이런 사소한 것 가지고 심하게 뭐라
화를 낼 엘프는 아니었으니까. 어색한 웃음을 하고는 '네'라고
대답하는 나였다.
"어서 와-!"
재빨리 계단을 내려와 웃는 얼굴로 나와 시아를 반기는 아
이린 씨. 뒤따라 쪼르르-하고 내려와 시아녀석의 품에 파고드
는 셀브렛녀석. 무감정한 표정으로 조용히 뒤에서 날 바라보는
자룬왕자의 모습.
그렇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운
정이 무서운 법이라고, 새삼 반가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일상생활로 복귀, 소중한 방학의 절반을 보내
야 했지만 후회보다는 아쉬움의 감정이 더 강했다. 하지만 나
는 아직 어리고, 지냈던 날보다는 살아야 할 날이 많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미소지은 얼굴로 천천히 방을 향해 걸음을 움직이며 생각하
는 나였다.
* * *
그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느 이름 모를 사내의 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지천을 적시는 붉은 피와 비의 혼합된
무엇은 소년의 온 몸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
위에 쓰러진 수많은 시체들에서 풍겨오는 역겨운 냄새들과 어
우러져, 숨조차 쉬게 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내색하나 하지 않
고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는 소년이
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이지, 라고 자문할 수 있
을 정도의 정신조차 남아있지 않은 소년에게, 눈앞에서 목이
뚫리고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지인 들의 모습은 아무런 감흥
조차 주지 못했다.
보슬보슬 작게 내리는 비속에서조차 저택이라고 불리었던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온 불길은 사방을 대낮처럼 밝히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소년의 생기 잃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 소녀가 다가왔다. 활활 타오르는 괴물 같은 불길의 힘에 저
택의 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소년에게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는 소녀.
그런 소녀의 얼굴은 섬뜩하게 아름다웠다. 비록 달라붙은 검
은 전투복에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 단정한 모습
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 악마(惡魔)."
고개를 숙이고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아무런 감정조차 담겨져
있지 않은 말이었지만, 소녀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그의 말에
동요했다.
"자신의 주인을 죽인 것에 모자라, 수없이 많은 죄 없는 사
람들의 목을 자르는 마녀(魔女)."
언제부터인지 작은 비는 폭풍이 되어 저택의 거대한 불길을
잠재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소년은 천천히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사정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
중요한 것은 평생 네가 저주 받을 것이란 거야."
한참이 지나도록 그렇게 미친 듯 웃음을 터트린 소년은 조
용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서 나를 죽여라."
그런 소년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천히 소녀는 팔을 들었다.
마법의 빛으로 붉게 빛나는 손은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힘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소년은 누구보다도 충분히 알고 있었
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그 동안 별거 아닌 일에도 싱겁게 울고
웃으며 꽤 나쁘지 않은 삶을 산 것도 같아 별다른 후회는 오
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손에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다
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
한참동안 목이 잘려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소년은
조용히 눈을 떴다. 새빨갛게 피가 굳은 땅과 시체들의 흉측한
모습을 제외하면 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다 소년이 작게 중얼거렸다.
".. 바보."
어느새 비는 그치고 검은 구름 사이에 붉은 해가 천천히 모
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추스
르지도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가야할 곳을 향해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땀에 흠뻑 젖어 딱딱하게 굳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방금 전
에 꾼 악몽의 내용을 생각해 보려 했지만, 자세하게 기억하면
할수록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꿈의 기억들 덕분에 머리만 아파
오는 듯 했다. 생긴 것은 모르지만 아름다운 소녀, 그 누구보
다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했던 그녀가 왜 죄 없는 수많은 사
람들의 목숨을 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지금 나 자신은
어떻게 그녀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일
까.
가슴이 답답했다. 오래 전부터 간혹 비슷한 악몽을 꾼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 숲에서 그를 만나고, 또 그녀를 만나면서부
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 것 같았다. 무엇인가 '억누
르고' 있었지만 오래 간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에 겪던 고통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런 악몽들이 나의
마음을 더 아파 오게 했다. 무엇인가 계기가 주어지면, 또 소
중한 그를 잃는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가슴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그녀의 존재를, 그리고 언제부터
인지 제어가 불가능한 자신의 또 다른 모습들을.
그러니 조만간 모두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또다시 비극을 반
복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가면을 쓴 '괴물'에 불과하니까.
"약속은 지킬 수 없어요…."
조용히 중얼거리며 천천히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파고들었
다. 바보같이 울고 싶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울컥 베개를 적시
며 쏟아지는 것을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