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생 10만명 육박, 세계 1위… 자랑스러운가? 아니면 쪽 팔린가? 이렇게 누가 묻는다면 사람들은 “웬 쪽? 너 제정신이냐고?” 그럴 것이다.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쪽 팔릴 것까지야 없다고 대충 피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곪다 못해 터졌으니 쪽 팔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한국인 유학생 10만 명 시대, 그러나 미국 현지에서의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비싼 유학을 했는데도 정작 미국에 남아 직장을 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취업이 안 되다 보니 미국에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들 대부분은 귀국길에 오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온다고 다 취업되는 것도 아니니 국제 실업자가 되는 현실... 그러니 쪽팔리지 않는다고? 무슨 용빼는 재주 있겠는가.
이제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다시 묻겠다. 미국 유학은 왜 가는데? 그냥 공부가 좋아서? 아닐 것이다. 공부가 좋으면 국내에서도 할 수 있다. 출세하려고? 그게 답이겠지! 그럼 어떻게 출세할건데? 좋은 직장 취직해서! 그것도 답이다. 그럼 취직은 어디서? 미국 아니면 한국?
아마 답은 한국이었을 것이다. 나는 미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불행하게도 한국이다. 지금까지 한국인의 미국유학이 그랬다. 미국 유학만이 아니라 모든 유학의 목적이 그랬다. 국내 대학보다 해외 대학을 더 상위에 두고 마치 상급학교 진학처럼 가는가 하면, 한국 대학에 못가서 해외 대학에 가거나 아니면 한국 대학이라도 가기 위해서 해외 초중고 유학을 가는 세 가지 부류의 유학생들이 있을 뿐이었다.
선진문물을 배우고 익히겠다는 19세기초의 신사유람단만도 못한 유학 목적이 태반이었다. 유학이나 관광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러니 가면 영어는 익히되 침대영어나 대충 익히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교회에 가서 사교영어나 익히는 부류가 있었다. 정작 익혀야 할 학술영어, 문화영어, 교양영어는 나 몰라라 했거나 능력 부족이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한국자료 가져다 번역해서 헌납하고 학위로 대물 변제받는 이른바 [세작학위]도 많았다. 춘향전으로, 한국 정당제도로 하버드대 박사받았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인디언 향가 연구, 미국 정지연구로 그럴 듯한 박사학위 받았다는 인간은 별로 만나보지를 못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교수되고 정치인 되고 끼리끼리 무슨무슨 동창회 만들어서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이 되었다. 그 잘난(?) 꼴을 보면서 그런 꼴값들이 대량번식한다. 그것이 한국 유학사의 변치 않는 줄거리다. 한국사 최초의 유학생이라는 최치원, 아니 그 이전의 의상대사, 아니면 그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중국 유학생들 이래 지금까지 바뀌었을 것 같지 않은 유학 이야기의 줄거리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다. 그렇게 현지에는 착근조차 할 수 없는 어설픈 유학생들이 국내에 회귀한들 누가 환영하겠는가? 이제 과거와 같이 명성으로만 한 몫 보는 때도 아니고 유학생 학맥은 국내 학맥처럼 끈끈하지도 않으니 반쯤은 떨거질 거고.
그러다보니 조승희 사건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게 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조승희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미국 가 있는 자식들에 대한 차별대우, 그로인한 안전을 걱정하지 왜 조승희가 생겼는지를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런 차별은 이미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돌아올 때까지 곳곳에서 받고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10만명의 세계 1위 유학생이 있는데 유학생의 취업비자는 인도나 싱가폴보다도 적게 배정된다. 지난해 한국인 전문직 종사자에게 배정된 취업 비자는 전체 취업비자 쿼터의 6%에 해당하는 3,924개에 불과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인도 기업들이 챙긴 취업비자는 전체 쿼터의 66.4%인 4만3,167개였다. 유학생들끼리 비교니 어학 문제도 아니다. 자세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정부의 문제일 수도 있다. 지난 92년 4,875개(7.5%)의 취업비자를 받았던 인도는 15년 만에 그 숫자가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은 미국기업의 인도진출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미국-싱가포르 FTA(자유무역협정)’를 통해 싱가포르가 확보한 취업 비자 5,000개보다도 적은 숫자다.
10만명, 세계1위의 유학생을 보내 엄청난 교육산업을 도와주고 있는데 토플대란은 왜 생겼는가? ‘토플대란’의 본질을 간단한 수요·공급 법칙에 근거한다고 편하게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해 한국의 토플 응시자는 약 13만명으로 5년 전보다 두 배가 넘게 뛰었다. 조기 유학, 어학 연수생이 늘어서 그럴 수도 있고, 특목고 전형에 너도나도 토플성적을 써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CBT에서 IBT로 바뀌면서 응시생 수를 1/3로 줄인 토플 주관사인 ETS가 원흉이다. 응시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응시방식이 바뀌었는데 응시가능자수를 줄이는 배부른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접수사이트가 폭주하자 시험접수를 안 받겠다고 해놓고 기습적으로 게릴라 접수를 하는 오만방자함까지... 그들의 무소불위 특권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한국의 저자세였다.
교육당국은 통제대상으로만 인식하고 학교 당국은 상업주의에만 급급하며 수요자는 짝퉁이라 외면한다. 그러니 미국대학들만 살판났다. 사전관리, 사후관리를 안 해 줘도 마땅한 대체상품도 없어 수요는 빅뱅인 사업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거기 소비자 주권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상황변화는 여전히 요원해보인다. 저처럼 사전사후관리도 못 받는 불량품조차도 상대적으로 명품이라는 논리가 지배한다. 그저 외제라서 좋다는 사고가 여전히 지배한다. 그렇게 못 파는데 대체상품이라는 한국 대학은 어떤가?
FTA 반대 촛불시위나 조승희 사건 피해자에 대한 추모 촛불집회는 있어도 대학개방 요구나 유학생 취업비자 요구나 토플대란에 대한 분노는 없었다. FTA 쓰나미가 몰아닥치고 나면 그 해일이 휩쓸고 갈 곳은 농촌도 영화계만이 아닐 것임에도 10대와 20대마저 그들만 걱정하고 있다. 물론 거기가 먼저 피해를 입겠지만 한국 경제가 글로벌 경제권에 편입하면 할수록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한국 기업이나 외국 기업은 점점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10대와 20대,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지도 모르는데, FTA반대 촛불시위 현장에 그런 것을 생각하는 구호가 없다. 물론 FTA로 떠나는 산업만큼 들어오는 산업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그것은 규제철폐 등 산업정책이 바로 선 연후에 가능한 일이다.
대학을 평균 6년 다니고, 해외연수는 필수에다 그것도 안 되면 대학원이건 유학이건 무조건 밀어붙이는 만년 학생으로 전전하거나, 취업 학원을 빙빙 돌거나 PC방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태백이 부지기수다. 그렇게 부모 등골 휘게 하면서 부모가 아파트 한 채 물려주기를 학수고대하고 그게 안 되면 이유없이 분노한다. 그게 다 부모에게 부담되는 일인 줄도 모르면서 농촌이나 영화감독은 걱정한다. 다 농촌의 아들딸이거나 부모가 영화감독인 사람들 같다.
그런 처지이면서도 농민과 영화감독을 위해 촛불을 켜고 화염병을 던지며 오늘도 남의 걱정뿐 자신들의 밥줄에는 간절한 촛불을 들지 않는다. 왜 FTA에 대학개방이 빠졌느냐고, 해외유학생 비자쿼터가 왜 유학생 수에 비례하지 않아 유학생들이 다 국내로 들어와 우리 일자리를 빼앗느냐고, 왜 토플대란으로 우리는 시험도 못 봐야 하느냐, 아니 왜 우리같은 초중등생이 토플을 봐야 하느냐고 따지는 청소년들을 보지 못했다. ‘대학교육은 상품이 아닙니다!’라는 새빨간 구호나 붙여놓고 ‘등록금 투쟁’을 벌이는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늘도 한국 교육 소비자들은 대학 교육이 결코 ‘시장에서 이익을 전제로 교환되는 유형·무형의 재화’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지만, 대학만큼 철저한 시장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곳도 없다는 현실의 암울함은 그런 동떨어진 절규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기들의 일자리가 위협받자 1년여 전 많은 도시에 분노의 불길을 댕겼던 프랑스의 20대와는 참으로 비교되는 착한 종자들이다. 아무리 피 끓는 젊은이라지만 농민이나 영화감독의 밥줄보다는 자기 밥그릇을 더 걱정해야 되는 게 아닌가. 그렇게 현실인식이 돼먹지 않았으니 지난 10년 사이 한국의 20대가 우리 사회의 거대한 악성 부실채권 같은 집단으로 전락했던 것도 우연은 아닌 듯 싶다. 그리고 지금 대선을 위해 뛰고 있는 차기 정치 지도자들마저 이 사회의 ‘초대형 부실채권’에 무관심한 것 역시 그런 현실인식이 결여된 종자들의 성장후 모습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최대고객이 천대받았다면 누구 책임일까?
미국 유학생 10만명 육박, 세계 1위… 자랑스러운가? 아니면 쪽 팔린가? 이렇게 누가 묻는다면 사람들은 “웬 쪽? 너 제정신이냐고?” 그럴 것이다.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쪽 팔릴 것까지야 없다고 대충 피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곪다 못해 터졌으니 쪽 팔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한국인 유학생 10만 명 시대, 그러나 미국 현지에서의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비싼 유학을 했는데도 정작 미국에 남아 직장을 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취업이 안 되다 보니 미국에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들 대부분은 귀국길에 오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온다고 다 취업되는 것도 아니니 국제 실업자가 되는 현실... 그러니 쪽팔리지 않는다고? 무슨 용빼는 재주 있겠는가.
이제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다시 묻겠다. 미국 유학은 왜 가는데? 그냥 공부가 좋아서? 아닐 것이다. 공부가 좋으면 국내에서도 할 수 있다. 출세하려고? 그게 답이겠지! 그럼 어떻게 출세할건데? 좋은 직장 취직해서! 그것도 답이다. 그럼 취직은 어디서? 미국 아니면 한국?
아마 답은 한국이었을 것이다. 나는 미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불행하게도 한국이다. 지금까지 한국인의 미국유학이 그랬다. 미국 유학만이 아니라 모든 유학의 목적이 그랬다. 국내 대학보다 해외 대학을 더 상위에 두고 마치 상급학교 진학처럼 가는가 하면, 한국 대학에 못가서 해외 대학에 가거나 아니면 한국 대학이라도 가기 위해서 해외 초중고 유학을 가는 세 가지 부류의 유학생들이 있을 뿐이었다.
선진문물을 배우고 익히겠다는 19세기초의 신사유람단만도 못한 유학 목적이 태반이었다. 유학이나 관광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러니 가면 영어는 익히되 침대영어나 대충 익히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교회에 가서 사교영어나 익히는 부류가 있었다. 정작 익혀야 할 학술영어, 문화영어, 교양영어는 나 몰라라 했거나 능력 부족이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한국자료 가져다 번역해서 헌납하고 학위로 대물 변제받는 이른바 [세작학위]도 많았다. 춘향전으로, 한국 정당제도로 하버드대 박사받았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인디언 향가 연구, 미국 정지연구로 그럴 듯한 박사학위 받았다는 인간은 별로 만나보지를 못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교수되고 정치인 되고 끼리끼리 무슨무슨 동창회 만들어서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이 되었다. 그 잘난(?) 꼴을 보면서 그런 꼴값들이 대량번식한다. 그것이 한국 유학사의 변치 않는 줄거리다. 한국사 최초의 유학생이라는 최치원, 아니 그 이전의 의상대사, 아니면 그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중국 유학생들 이래 지금까지 바뀌었을 것 같지 않은 유학 이야기의 줄거리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다. 그렇게 현지에는 착근조차 할 수 없는 어설픈 유학생들이 국내에 회귀한들 누가 환영하겠는가? 이제 과거와 같이 명성으로만 한 몫 보는 때도 아니고 유학생 학맥은 국내 학맥처럼 끈끈하지도 않으니 반쯤은 떨거질 거고.
그러다보니 조승희 사건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게 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조승희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미국 가 있는 자식들에 대한 차별대우, 그로인한 안전을 걱정하지 왜 조승희가 생겼는지를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런 차별은 이미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돌아올 때까지 곳곳에서 받고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10만명의 세계 1위 유학생이 있는데 유학생의 취업비자는 인도나 싱가폴보다도 적게 배정된다. 지난해 한국인 전문직 종사자에게 배정된 취업 비자는 전체 취업비자 쿼터의 6%에 해당하는 3,924개에 불과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인도 기업들이 챙긴 취업비자는 전체 쿼터의 66.4%인 4만3,167개였다. 유학생들끼리 비교니 어학 문제도 아니다. 자세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정부의 문제일 수도 있다. 지난 92년 4,875개(7.5%)의 취업비자를 받았던 인도는 15년 만에 그 숫자가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은 미국기업의 인도진출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미국-싱가포르 FTA(자유무역협정)’를 통해 싱가포르가 확보한 취업 비자 5,000개보다도 적은 숫자다.
10만명, 세계1위의 유학생을 보내 엄청난 교육산업을 도와주고 있는데 토플대란은 왜 생겼는가? ‘토플대란’의 본질을 간단한 수요·공급 법칙에 근거한다고 편하게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해 한국의 토플 응시자는 약 13만명으로 5년 전보다 두 배가 넘게 뛰었다. 조기 유학, 어학 연수생이 늘어서 그럴 수도 있고, 특목고 전형에 너도나도 토플성적을 써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CBT에서 IBT로 바뀌면서 응시생 수를 1/3로 줄인 토플 주관사인 ETS가 원흉이다. 응시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응시방식이 바뀌었는데 응시가능자수를 줄이는 배부른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접수사이트가 폭주하자 시험접수를 안 받겠다고 해놓고 기습적으로 게릴라 접수를 하는 오만방자함까지... 그들의 무소불위 특권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한국의 저자세였다.
교육당국은 통제대상으로만 인식하고 학교 당국은 상업주의에만 급급하며 수요자는 짝퉁이라 외면한다. 그러니 미국대학들만 살판났다. 사전관리, 사후관리를 안 해 줘도 마땅한 대체상품도 없어 수요는 빅뱅인 사업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거기 소비자 주권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상황변화는 여전히 요원해보인다. 저처럼 사전사후관리도 못 받는 불량품조차도 상대적으로 명품이라는 논리가 지배한다. 그저 외제라서 좋다는 사고가 여전히 지배한다. 그렇게 못 파는데 대체상품이라는 한국 대학은 어떤가?
FTA 반대 촛불시위나 조승희 사건 피해자에 대한 추모 촛불집회는 있어도 대학개방 요구나 유학생 취업비자 요구나 토플대란에 대한 분노는 없었다. FTA 쓰나미가 몰아닥치고 나면 그 해일이 휩쓸고 갈 곳은 농촌도 영화계만이 아닐 것임에도 10대와 20대마저 그들만 걱정하고 있다. 물론 거기가 먼저 피해를 입겠지만 한국 경제가 글로벌 경제권에 편입하면 할수록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한국 기업이나 외국 기업은 점점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10대와 20대,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지도 모르는데, FTA반대 촛불시위 현장에 그런 것을 생각하는 구호가 없다. 물론 FTA로 떠나는 산업만큼 들어오는 산업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그것은 규제철폐 등 산업정책이 바로 선 연후에 가능한 일이다.
대학을 평균 6년 다니고, 해외연수는 필수에다 그것도 안 되면 대학원이건 유학이건 무조건 밀어붙이는 만년 학생으로 전전하거나, 취업 학원을 빙빙 돌거나 PC방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태백이 부지기수다. 그렇게 부모 등골 휘게 하면서 부모가 아파트 한 채 물려주기를 학수고대하고 그게 안 되면 이유없이 분노한다. 그게 다 부모에게 부담되는 일인 줄도 모르면서 농촌이나 영화감독은 걱정한다. 다 농촌의 아들딸이거나 부모가 영화감독인 사람들 같다.
그런 처지이면서도 농민과 영화감독을 위해 촛불을 켜고 화염병을 던지며 오늘도 남의 걱정뿐 자신들의 밥줄에는 간절한 촛불을 들지 않는다. 왜 FTA에 대학개방이 빠졌느냐고, 해외유학생 비자쿼터가 왜 유학생 수에 비례하지 않아 유학생들이 다 국내로 들어와 우리 일자리를 빼앗느냐고, 왜 토플대란으로 우리는 시험도 못 봐야 하느냐, 아니 왜 우리같은 초중등생이 토플을 봐야 하느냐고 따지는 청소년들을 보지 못했다. ‘대학교육은 상품이 아닙니다!’라는 새빨간 구호나 붙여놓고 ‘등록금 투쟁’을 벌이는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늘도 한국 교육 소비자들은 대학 교육이 결코 ‘시장에서 이익을 전제로 교환되는 유형·무형의 재화’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지만, 대학만큼 철저한 시장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곳도 없다는 현실의 암울함은 그런 동떨어진 절규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기들의 일자리가 위협받자 1년여 전 많은 도시에 분노의 불길을 댕겼던 프랑스의 20대와는 참으로 비교되는 착한 종자들이다. 아무리 피 끓는 젊은이라지만 농민이나 영화감독의 밥줄보다는 자기 밥그릇을 더 걱정해야 되는 게 아닌가. 그렇게 현실인식이 돼먹지 않았으니 지난 10년 사이 한국의 20대가 우리 사회의 거대한 악성 부실채권 같은 집단으로 전락했던 것도 우연은 아닌 듯 싶다. 그리고 지금 대선을 위해 뛰고 있는 차기 정치 지도자들마저 이 사회의 ‘초대형 부실채권’에 무관심한 것 역시 그런 현실인식이 결여된 종자들의 성장후 모습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