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가 즉위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망명길에 오르는데, 그 망명행렬에는 그녀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대거 동참하였다.
이들 망명세력은 대부분 계루부 출신들이었을 것이다. 5부족 연맹체인 구려(고구려의 전신)는 원래 연노부에서 왕을 배출하다가 주몽이 고구려를 일으키면서 계루부 중심의 사회로 전환되었다. 이는 주몽을 왕으로 등극시킨 중심세력이 계루부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 주몽의 정치적 기반이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취발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연타취발이 죽자 계루부의 족장직을 승계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노부를 제치고 왕으로 등극하여 고구려를 개국했다.
계루부는 주몽의 등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정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주몽은 고구려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과정에서 계루부를 소외시키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태자 책봉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계루부는 소서노의 장자이자 계루부의 혈통을 이어받은 비류를 태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몽은 동부여에 머무르고 있던 자신의 친자 유리를 불러들여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 때문에 소서노와 주몽은 대립으로 치달았고, 두 사람의 대립은 급기야 조정의 양분사태를 불러일으켰다.
태자 책봉 문제에 휘말린 고구려 조정은 순식간에 근왕세력과 소서노세력으로 양분되어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고, 결국 근왕세력이 승리를 거둔다. 이에 따라 동부여에 머물고 있던 주몽의 친자 유리와 그의 어머니 예씨가 고구려로 오고, 주몽은 자신의 소원대로 서기전 19년 4월에 유리를 태자에 책봉한다. 그리고 5개월 뒤에 주몽이 죽자 유리가 즉위한다.
이에 반발한 계루부 세력 및 소서노 일파는 유리의 즉위를 인정할 수 없다며 망명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들의 망명행렬에는 오간, 마려, 을음 등 열 명의 중신과 졸본의 많은 백성이 동참했다. 말하자면 계루부 전체가 대이동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이동행렬에는 계루부에 예속된 병력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들의 망명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찾아와 태자에 오르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들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또는 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유류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그러자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 곳으로 도망해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공로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승하하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괜히 쓸모없는 사람들처럼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별도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비류는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거하게 되었다.
이 기록에서처럼 망명길에 오른 소서노 일행은 남쪽으로 갔다. 그리고 서기전 18년 10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후에 백제(百濟)로 개칭한다. 망명길에 오른 때가 서기전 19년 9월이었기에 망명지를 전전한지 13개월만에 비로소 터전을 잡아 개국의 대업을 이렀던 것이다.
처음에 국호를 '십제'라고 한 것은 아마도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한 것에 근거한 듯하다. 그러다가 다시 '백제'로 개칭했는데, 이에 대하여『삼국사기』는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와『수서』에는 '처음에 일백 가구가 건넜기 때문에 백제라 이름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여'를 왕실의 성씨로 삼는데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1대 온조왕실록 - 망명, 그리고 백제의 탄생
망명, 그리고 백제의 탄생
유리가 즉위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망명길에 오르는데, 그 망명행렬에는 그녀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대거 동참하였다.
이들 망명세력은 대부분 계루부 출신들이었을 것이다. 5부족 연맹체인 구려(고구려의 전신)는 원래 연노부에서 왕을 배출하다가 주몽이 고구려를 일으키면서 계루부 중심의 사회로 전환되었다. 이는 주몽을 왕으로 등극시킨 중심세력이 계루부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 주몽의 정치적 기반이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취발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연타취발이 죽자 계루부의 족장직을 승계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노부를 제치고 왕으로 등극하여 고구려를 개국했다.
계루부는 주몽의 등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정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주몽은 고구려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과정에서 계루부를 소외시키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태자 책봉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계루부는 소서노의 장자이자 계루부의 혈통을 이어받은 비류를 태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몽은 동부여에 머무르고 있던 자신의 친자 유리를 불러들여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 때문에 소서노와 주몽은 대립으로 치달았고, 두 사람의 대립은 급기야 조정의 양분사태를 불러일으켰다.
태자 책봉 문제에 휘말린 고구려 조정은 순식간에 근왕세력과 소서노세력으로 양분되어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고, 결국 근왕세력이 승리를 거둔다. 이에 따라 동부여에 머물고 있던 주몽의 친자 유리와 그의 어머니 예씨가 고구려로 오고, 주몽은 자신의 소원대로 서기전 19년 4월에 유리를 태자에 책봉한다. 그리고 5개월 뒤에 주몽이 죽자 유리가 즉위한다.
이에 반발한 계루부 세력 및 소서노 일파는 유리의 즉위를 인정할 수 없다며 망명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들의 망명행렬에는 오간, 마려, 을음 등 열 명의 중신과 졸본의 많은 백성이 동참했다. 말하자면 계루부 전체가 대이동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이동행렬에는 계루부에 예속된 병력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들의 망명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찾아와 태자에 오르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들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또는 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유류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그러자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 곳으로 도망해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공로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승하하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괜히 쓸모없는 사람들처럼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별도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비류는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거하게 되었다.
이 기록에서처럼 망명길에 오른 소서노 일행은 남쪽으로 갔다. 그리고 서기전 18년 10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후에 백제(百濟)로 개칭한다. 망명길에 오른 때가 서기전 19년 9월이었기에 망명지를 전전한지 13개월만에 비로소 터전을 잡아 개국의 대업을 이렀던 것이다.
처음에 국호를 '십제'라고 한 것은 아마도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한 것에 근거한 듯하다. 그러다가 다시 '백제'로 개칭했는데, 이에 대하여『삼국사기』는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와『수서』에는 '처음에 일백 가구가 건넜기 때문에 백제라 이름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여'를 왕실의 성씨로 삼는데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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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님이 지은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인용한 것입니다.
저작권에 피해가 된다면 삭제 조치 하겠습니다. 백제의 역사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이렇게 책에 있는 내용을 옮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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