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당시 나이 22살의 아름다운 소녀의 이미지를 한 대학생이었던 서미혜(현 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 관장은 모국인 캐나다에서 화학을 전공(이후 심리학, 사회학 학사)하는 학생이었다. 당시 졸업 무렵 활동하던 대학 내 선교모임에서는 졸업 후 일련의 사명을 가지고 한국이나 일본, 홍콩 등지로 선교여행이나 영어교사로 파견?(하지만 자의에 의한 것)을 가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서 관장은 지난 1960년 한국에 귀국하여 소외된 장애인들을 돌보며 영어를 지도, 봉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연히 알게 된 간호사들과의 친분을 쌓은 후, 모국인 캐나다로 돌아가 다시 간호학을 전공했다.
이후 1974년 원주에서 가정간호(가정을 돌면서 장애인, 환자를 돌보는 일)를 다니면서 많은 장애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연세대학 원주기독병원 보호 작업장에서 전문적으로 장애인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기에 이른다.
40년이 지난 지금 서 관장은 지역 내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장애인들이 마음껏 활동하고 정상인들처럼 사회 기물들을 사용할 수 있는 시설 기반이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서 관장은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거나 화장실을 이용할 때, 아니면 기차를 이용할 때도, 높은 둔 턱 때문에 이들의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고 말한다. 선진국의 경우 장애인 전용이라는 문구를 따로 게재해 놓은 곳을 찾기 힘든 나라도 더러 있는데 이유는 기본적으로 모든 시설의 설계 시 장애인의 편의를 도모해 설계가 되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은 교육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의지를 표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필요한 저의 사명이며, 남들에게 불쌍해 보여야 하는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서 관장은 현재 복지관에서 장애인 교육 프로그램과 복지 프로그램, 컴퓨터 교육 등 다양한 교육에 열정을 쏟고 있다.
“교육하고 또한 배워서 취업도 하고,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도약할 수 있기를 바라고, 원주시에 계시는 모든 분들도 이들을 차별하거나 다른 시선으로 보지를 말았으면 합니다.” 한국 아니 자그마한 시골이었던 원주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40년이 흘렀다.
“처음 한국 와서 그리운 캐나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 했던 생각이 납니다. 요즘은 이메일, 휴대폰 등이 발달되어 아주 쉽게 연락을 할 수 있어 좋습니다”라고 말하며 미소를 건넨다.
세월의 희비박함 속에 그녀도 어느덧 한국인이 다 되어버렸다. 하지만 40년 전 낯선 한국 땅을 처음 밞은, 그때 그 시절 파란 눈의 어여쁜 간호사 선생님의 모습은 수많은 장애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파란 눈의 천사 서미혜 관장
파란 눈의 천사 서미혜 관장
원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
“어머니! 한국으로 가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영어도 가르치고 선교도 하고 싶어요”
1960년 당시 나이 22살의 아름다운 소녀의 이미지를 한 대학생이었던 서미혜(현 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 관장은 모국인 캐나다에서 화학을 전공(이후 심리학, 사회학 학사)하는 학생이었다. 당시 졸업 무렵 활동하던 대학 내 선교모임에서는 졸업 후 일련의 사명을 가지고 한국이나 일본, 홍콩 등지로 선교여행이나 영어교사로 파견?(하지만 자의에 의한 것)을 가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서 관장은 지난 1960년 한국에 귀국하여 소외된 장애인들을 돌보며 영어를 지도, 봉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연히 알게 된 간호사들과의 친분을 쌓은 후, 모국인 캐나다로 돌아가 다시 간호학을 전공했다.
이후 1974년 원주에서 가정간호(가정을 돌면서 장애인, 환자를 돌보는 일)를 다니면서 많은 장애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연세대학 원주기독병원 보호 작업장에서 전문적으로 장애인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기에 이른다.
40년이 지난 지금 서 관장은 지역 내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장애인들이 마음껏 활동하고 정상인들처럼 사회 기물들을 사용할 수 있는 시설 기반이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서 관장은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거나 화장실을 이용할 때, 아니면 기차를 이용할 때도, 높은 둔 턱 때문에 이들의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고 말한다. 선진국의 경우 장애인 전용이라는 문구를 따로 게재해 놓은 곳을 찾기 힘든 나라도 더러 있는데 이유는 기본적으로 모든 시설의 설계 시 장애인의 편의를 도모해 설계가 되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은 교육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의지를 표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필요한 저의 사명이며, 남들에게 불쌍해 보여야 하는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서 관장은 현재 복지관에서 장애인 교육 프로그램과 복지 프로그램, 컴퓨터 교육 등 다양한 교육에 열정을 쏟고 있다.
“교육하고 또한 배워서 취업도 하고,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도약할 수 있기를 바라고, 원주시에 계시는 모든 분들도 이들을 차별하거나 다른 시선으로 보지를 말았으면 합니다.” 한국 아니 자그마한 시골이었던 원주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40년이 흘렀다.
“처음 한국 와서 그리운 캐나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 했던 생각이 납니다. 요즘은 이메일, 휴대폰 등이 발달되어 아주 쉽게 연락을 할 수 있어 좋습니다”라고 말하며 미소를 건넨다.
세월의 희비박함 속에 그녀도 어느덧 한국인이 다 되어버렸다. 하지만 40년 전 낯선 한국 땅을 처음 밞은, 그때 그 시절 파란 눈의 어여쁜 간호사 선생님의 모습은 수많은 장애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김창신 기자 changshin123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