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소설] - 숲의 내부(6)

최용진2007.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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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 숲의 내부(6)

 

 

 

 

[6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애드거 앨런 포도 잊고 밤비만 찾았는데, 들창코는 그렇지 않았다. 나와 숲을 드나들면서도 녀석은 틈틈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어나갔다. 대견한 녀석, 집중력이 부족한 녀석, 호리와 밤비를 놔두고도 다른 것에 눈이 가더냐. 그래, 아무래도 좋다. 각자의 삶이 있는 거지. 각자의 삶이라, 정말 그런 것인가. 우리 마을에 첫눈이 오면서부터 들창코와의 우정이 심상찮다. 녀석과 같이 있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추워서 개울가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리자, 녀석은 우리 집에 감자를 같이 구워 먹으러 가지도 않았다. 가끔 숲에 같이 들어갔으나 그마저도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왜 그러냐?’ 들창코에게 물었지만 ‘내가 뭐!’ 하고 입을 삐죽거렸다. 꽁한 녀석, 아마도 지난 번에 나 혼자 숲에 들어가서 밤비랑 놀았던 것을 목격한 때문인 듯 하다. 그때부터 녀석의 눈빛이 달라졌다. 맘대로 해라, 이래선 지난번 껄렁이 원한테 너랑 친하지 않다 말해놓고 미안했던 것이 무색하다, 인마. 원래 네 놈이 날 따라다녔던 거잖아.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한테는 밤비가 있고, 너한테는 책이 있잖아. 원래 15세의 우정이란 게 이렇게 얄팍한 거다. 아무튼 어정쩡하게 내 옆에 붙어있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넌 아닌 척 하지만 난 다 안다. 혼자 숲에 들어간 게 그렇게도 싫었냐. 싫었는데도 말도 안 하고 그렇게 꽁하고 있느냐. 역시 세심한 녀석일수록 맘이 좁은 법이다. 난 대범하다, 아버질 닮아서. 음, 춥다. 옷을 두껍게 입고 옷깃을 단단히 여민다.  

 

 

서점에 들렀다.

정확히 말하면 책을 사러 간 것은 아니다. 그저 하교 길에 우연히 들른 것뿐이다. 요즘 밤비에 미쳐 책을 등한시하고 있는 내가 서점에 볼 일이 있을 리 없다. 그저 기분 나쁘게도 서점 문 앞에 20% 세일을 하는 책들이 쌓여있는 것을 모른 척 지나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 책들 속에서 내가 구입했던 [우울과 몽상]을 발견했다. 짜증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게다가 내가 살 때는 없었는데, 20%나 저렴한 주제에 비닐 커버로 소중히 덮여있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서점 아저씨가 친근한 인상을 하고 곁에 다가왔다. ‘뭐, 사고 싶은 책이라도 있는 게냐? 지금 세일 중이기 때문에 좋은 기회란다.’ 나는 아저씨의 멱살이라도 잡고 왜 세일 따위를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지만 순발력이 좋아진 때문인지 ‘요즘 장사 잘 안 되시나 보네요, 세일 같은 걸 다 하시고.’라고 쏘아붙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뒤통수가 조금 따갑긴 했다. 두고 봐라, 내가 이제 저 서점에서 책을 사면 사람도 아니다. 마지막 멘트는 속이 다 후련하다. 드디어 나의 소양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거야. 책을 허투루 읽은 것이 아니었어. 제 때 맞춰 좋은 멘트를 구사할 수 있는 순발력이 샘솟은 거야. 애드거 앨런 포 아저씨, 감사합니다. 아버지, 저 성장한 것 같아요. 밤비야, 네 덕분이다. 그런데 들창코는?

 

 

그러기 마련이다. 

책은 세일을 하기 마련이다. 어디 책뿐이겠는가. 무릇, 모든 재화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예외도 있다.

그러다가 그 재화의 수량이 턱없이 부족해지면 종종 다시 값이 오르기도 한다. 오를 때는 갑자기 확 오른다.

  

 

밤비를 보러 가자.

춥긴 하지만 밤비를 보러 가자. 서점도 우울하고 들창코도 우울하다. 날씨는 더욱 그렇다. 오직 밤비만이 책값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밤비를 보러 가자, 밤비를 보러 가자. 게으른데다가 추운 것이 싫은 나지만, 밤비를 보기 위해 숲을 찾는 즐거움을 위해선 성실하다. 앙상한 숲은 더 이상 나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않는다. 초겨울의 나무란 무릇 내년을 위해 죽어 있는 법이니까. 잠시 이 계절엔 숲 따윈 잊도록 하자. 그 대신 사계절 항상 나를 반겨줄 밤비를 생각하자. 동물이 식물보다 그래서 월등한 거야, 동물은 움직이니까, 겨울에 죽지 않으니까, 고양이는 겨울잠을 자지 않으니까, 나도 겨울잠 같은 건 필요 없고 싶으니 말이다. 15세 우울한 소년의 마음속에 고양이 털 하나가 박혀 따뜻함을 전파한다. 고양이에 위안 받는 15세는 건전하다. 그래, 나는 건전하다. 그래서 밤비를 보러 간다. 밤비를 보러 가며 어느새 이렇게 마음에 시를 쓴다.  

 

 

숲에 미안하다.

숲이 풍성할 때 숲의 탐험을 마쳤어야 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있을 숲, 나는 밤비에 미쳐 가던 길만 계속 오가고 있으니, 숲에 조금 미안하다. 지금은 앙상해서 숲의 내부가 비교적 잘 보인다. 그래도 가던 길만 간다. 사람이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새로운 것을 싫어하고 반복에 목숨을 거는 법이다. 아마, 이 말은 삼촌이 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다. 밤비 생각에 숲은 아랑곳 없다. 그래서 숲에 미안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겨울의 죽어있는 숲 따위는 잠시 잊기로 결심해놓고, 또 숲을 보며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다니, 이번엔 밤비에게 미안하다. 나는 계속 죄송하다. 그래서 달리기 시작했다. 슬픔의 도살장으로, 밤비가 있는 곳으로.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숙련된 솜씨로 통나무를 건너고 슬픔의 도살장에 다가갈수록 이상한 느낌이 든다. 들창코의 ‘윽아’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의 잔털들이 곤두서는 날카로운 예지력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슬픔의 도살장에 무언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창코다, 이건 분명히 들창코가 먼저 와 있는 거야. 왜 왔지? 호리를 보러 왔나, 그럼 껄끄럽다. 요즘 사이도 안 좋은데, 저 곳에 둘이 같이 있는 것은 불편하다. 그런데 내가‘윽아’를 들은 것이 분명한가? 그렇다면 그건 들창코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인데, 껄렁이 놈들인가? 나쁜 놈들, 내가 혼을 내주어야겠다. 다시 한 번 아버지의 기운을 받으면 그만이다, 이 잡놈들아! 그런데 그 순간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윽아’는 들창코가 고양이를 도륙할 때 내는 소리잖아. 혹시, 이 놈이 지금 밤비를 짓이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껄렁이들의 괴롭힘에 못 이겨 마침 지나가는 밤비를 잡았다면? 가뜩이나 나와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밤비니까 더불어 잘 되었구나 하는 맘으로 뿌듯하게 해체해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들창코보다 감각이 뛰어나진 않지만 상상력만큼은 뒤지지 않는 나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다급한 나는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해 슬픔의 도살장으로 뛰어들었다.

 

 

들창코가 있다!

이런 직감은 고양이의 직감과도 같다. 순간 밤비에게 고맙다. 예상대로 들창코가 있다. 껄렁이 원, 투도 있다. 그런데 이번엔 지난번과 다른 광경이었다. 들창코는 무언가를 움켜쥔 채 웅크리고 있었고, 껄렁이들은 그런 들창코에게 발길질을 가하고 있었다. 순간, 녀석이 밤비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거의 이성을 잃었다. 생전 안 하던 욕이 튀어나왔다. 신기했다. 역시 평소 자주 듣던 것은 언젠가 내 것으로 써먹는 거로구나. ‘야, 이 씨발 놈들아!’ 나는 달려가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껄렁이 원에게 달려들어 어깨로 밀쳤다. 껄렁이 원이 바닥에 보기 좋게 나뒹굴었다. 껄렁이 투가 놀라며 경직하는 사이, 나는 재치 있게 바닥에 놓인 뾰족한 돌맹이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의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창코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찍어 내리는 것은 약자인 고양이가 아니라 아마 네 놈들이 될 것이다, 이 비겁한 놈들아! 나는 표독한 표정으로 껄렁이 투를 쏘아보았다. 돌 조각을 집어 든 내 팔뚝의 힘줄이 불끈거렸다. 너희들이 감히 나의..? 용서할 수 없다. 씩씩거리는 나를 보고 두 놈 모두 겁을 집어먹었다. 이번엔 아버지의 도움 없이 내가 이겨먹은 모냥이다. 자빠졌다 일어난 껄렁이 원과 그 옆의 껄렁이 투는 혹이나 내 무기에 얼굴을 찍힐까봐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무릇 싸움이란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압도하는 분위기에 숙연해진 놈들은 서둘러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지난 번처럼 패잔병의 쓰디쓴 뒷모습으로. 역시나 그런 모습이 어울리는 형편없는 놈들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다.

껄렁이들에게서 들창코를 구해준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다. 나는 더 이상 머쓱하게 ‘괜찮냐?’라고 묻진 않았다. 그보다도 들창코 품 안에 있을 녀석이 걱정되었다. 정말 밤비일까. 나는 들창코에게 일어서 보라고 했다. 들창코는 눈물을 훔치며 일어선다. 호리였다, 밤비가 아니었다. 호리를 짓이기게 될까봐 그토록 웅크리고 맞았나 보다. 밤비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이내 밤비가 아니어서 화가 났다. 호리 때문이었냐, 네 놈이 열심히 매를 맞은 것도, 내가 그토록 식겁하게 광분한 것도 전부 호리 때문이었냐. 매정한 나에게는 마치 보잘것없는 겨울 숲의 나무처럼 앙상한 동기가 아니겠냐. 이 순간 누구를 구하면 당연히 들게끔 되어 있는 보람이나 정의감이 거짓말처럼 조금도 생겨나지 않는 것은 어쩔 것이냐. 아무튼 그만하니 되었다, 어서 눈물이나 닦아라, 오늘 기분 다 잡쳤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기쁜 맘으로 시를 쓰며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데, 이번으로 두 번째다.

 

 

값이 오른다.  

들창코는 눈물을 훔치고 일어서서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 됐다니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이번엔 너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없어. 괜찮다. 그냥 숲에 들어와 보니 네가 그 꼴이어서 그랬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해 보았자 어차피 부질 없는 것임을 알기에 나는 묵묵히 들창코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호리를 놓아주고는 숲 밖으로 걸어 나온다. 실로 간만에 함께 숲을 거닌다. 난 아니지만 적어도 들창코에게는 값이 오르게 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미 재화로 간주하고 있지만, 들창코에게 있어 우리의 우정은 아직까지는 재화가 아닌 모양이다. 무튼, 재화의 관념으로 생각한다면 값이 오른 것이 사실이다. 값이 오를 때에는 갑자기 확 오른다. 들창코는 나에게 다시 친절하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아양이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녀석이 나에게 친절하게 구는 것이 딱히 싫지는 않다. 내가 해를 볼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손해를 따지자면 이번 일을 계기로 껄렁이 녀석들을 완전히 적으로 두게 된 것뿐, 그런 손해는 누리게 될 혜택에 비하면 미미하다. 덕분에 다시금 녀석의 살가운 도시락을 나눠 먹게 될 것이다. 같이 밤비와 호리를 보러 갈 수도 있다. 심심하면 우리 집에 가서 감자를 구워 먹으며 책을 읽을 지도 모른다. 겨울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방학이 되면 심심하다. 녀석이 퍽이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무료하게 긴 겨울을 지내는 것보다는 누군가 하나쯤 옆에 있는 것이 낫다. 들창코와 사이를 회복하는 것, 혹은 그래 보이는 것은 적절히 흥미롭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싫어하기 어려운 법이라니까. 이것이 주도권을 쥔 자의 여유로움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