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혼자 놀기, 특기는 고독 하기…글루미씨를 소개합니다

김학선200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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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놀기, 특기는 고독 하기…글루미씨를 소개합니다

쓸쓸함을 세련되게 즐기는 사람들 글루미족의 출현

조선일보 글=정재연기자 whauden@chosun.com
김신영기자 sky@chosun.com
사진=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기자 canyou@chosun.com

[조선일보 2007.02.01 (목) 오전 9:57]

취미는 혼자 놀기, 특기는 고독 하기…글루미씨를 소개합니다 월요일 회식, 화요일 출장, 수요일 야근…. 한 주는 빼곡했다. 주말 아침, 서른 살의 글루미씨는 집을 나섰다. 한산하고 조용한 서울 종로 ‘스폰지하우스’에서 미셸 공드리 감독의 ‘수면의 과학’을 봐야지. 오래 전부터 보고 싶어 벼르던 영화다. 영화 보는데 옆에서 말 거는 게 제일 싫다. 남자친구에게는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캄캄한 극장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영화를 보며 블루베리 머핀과 카페라테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다. ‘사랑은 왜 꿈처럼 되지 않는 걸까.’ 주인공 스테판의 대사를 떠올리며 혼자 청계천을 따라 걷는다. 배들리 드로운 보이(Badly Drawn Boy)의 ‘이어 오브 더 랫(Year of the Rat)’을 들으며 광화문까지 걸어가 교보문고에서 책 구경을 한 후 지하철을 타고 상수동 카페 ‘비하인드’에 자리를 잡는다. 커피 한 잔 시키고 소설을 읽다가 간간이 다이어리에 감상을 끄적끄적.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

끊임없이 말하고 듣고 의무적으로 인간 관계를 맺다 보면 가끔은 외롭고 싶다. 혼자이고 싶다. 종일 사람에 치이고 부대끼며 사는 일상에 지친 탓일까. 지나치게 깔끔 떠는 자기애(愛)일까. 고독한 시간, 아주 잠깐의 우울을 일부러 찾아 다니는 ‘글루미족(族)’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낯선 곳에 익숙한 사람과 가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점심은 일부러 혼자 먹어요.” ‘글루미(gloomy)’는 ‘칙칙하고 우울하다’는 뜻이지만, 이 시대의 글루미족은 성격이 괴팍한 외톨이들이 아니다. 통제 가능한 가벼운 우울을 감성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부류에 더 가깝다.

영국에는 글루미족과 비슷한 ‘와이즈’(WISE)족이 있다. ‘더 타임스’ 온라인판에 따르면 ‘나홀로 경험을 고집하는 여자들’(Women who Insist on Single Experiences)의 약자다. 홀로 식당에 예약해 밥 먹고, 혼자 영화 보고, 혼자 짐 싸서 여행을 떠나는 여자들이다. 혼자 할 수 있으니까 혼자 한다. 요즘 여자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오랫동안 싱글 라이프를 즐긴다. 쇼핑부터 메뉴 결정, 여행지 선택에 이르기까지 남과 타협할 필요가 없는 절대 자유를 누리기 위해 혼자 한다. 영국의 한 여행업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19%가 ‘나홀로 여행을 즐긴다’고 답했다.

우리가 사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이 더욱 촘촘해지면서 글루미족이 등장한다. 스터디·학교·모임·직장에 이르기까지 하루 종일 이 사람 저 사람 시달리다 보면 이제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요즘 글루미족,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내공을 자랑한다. ‘어떻게 혼자 밥 먹냐’던 옛날의 겁쟁이들이 아니다. 일부러 쓸쓸해지려는 사람들, 쓸쓸함을 세련되게 즐기는 사람들, 글루미족이 사는 법은 D2~4면으로 이어진다.


(모델=곽보윤(연세대 정치외교))

조용한 시간 즐기며 좀 더 ‘나’였으면 해요

글루미씨의 하루

조선일보 김신영기자 sky@chosun.com
신윤주 인턴기자(동국대 신문방송 2)
입력시간 : 2007.02.01 09:28 / 수정시간 : 2007.02.01 09:35

취미는 혼자 놀기, 특기는 고독 하기…글루미씨를 소개합니다 ▲ 홍익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상수역 부근에는 조용히 차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한달 전 문을 연 카페 ‘에이드’. 조선영상미디어 이경호기자 ho@chosun.com

바쁜 일상과 팍팍한 인간 관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현대인들은 가끔 외로움과 쓸쓸함의 감성이 그리워진다.
우울한 감정을 솔직히 마주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 자신과의 대화에 몰두하는 2007년 대한민국의 ‘글루미씨(氏)’들을 만났다.
이들은 “취향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불편하다”며 “나만의 느낌과 생각을 방해 받지 않으면서 즐기는 조용한 시간이 삶의 에너지가 된다”고 입을 모았다.

12:00 광화문 카페- 샌드위치와 커피
19:00 스폰지하우스- 영화 한 편
22:00 홍익대 앞 Bar- 칵테일 한 잔

취미는 혼자 놀기, 특기는 고독 하기…글루미씨를 소개합니다 ▲ 홍익대 앞 북 카페 ‘이리’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좋아요”

공무원 한모(32·여)씨는 지난해 7월 ‘나만의 점심 데이(day)’를 정한 후 매월 첫째 셋째 수요일마다 혼자 점심을 먹는다. 비슷비슷한 사람들과 하나 마나 한 얘기를 나누며 점심을 해결한다는 느낌이 싫었다. 야근이 잦아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도 이유였다.

“광화문 한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영화 잡지나 소설을 읽어요. 너무 춥지 않으면 광화문 스타벅스 4층 옥외 테라스에서 베이글과 커피를 먹는 것도 좋아하고요. 점심을 혼자 먹는 건 팍팍한 일상을 털어내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이죠.”

한씨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술도 혼자 먹는다. 퇴근 길에 조용하고 쾌적한 카페에 가서 맥주 한두 병을 마시기도 하고, 회식이 끝난 후 ‘나만의 3차’를 즐길 때도 있다. 북적북적한 회식 분위기를 떨쳐낸 후 잠들고 싶어서다.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30대 중반의 황수영씨도 ‘퇴근길 혼자 술 한잔’이 취미다. “종각 뒤 ‘락더후(Rock the Who)’와 홍익대 정문 오른쪽 ‘섬’이라는 바에 자주 혼자 가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술 먹는 시간까지 다른 사람에게 방해 받고 싶지 않거든요.” 여행은 계획 없이 홀로 훌쩍

회사원 이준석(33)씨는 지난해 7월 ‘생일 기념’ 월차를 내고 아침 일찍 동해로 떠났다. 이름도 모를 작은 해수욕장에 도착해 바다를 보고 있자니 따뜻한 잠이 몰려왔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백사장에 누워 서너 시간 여유롭게 낮잠을 즐긴 후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이씨의 동행은 디지털 카메라와 ‘어떤날’ 1집의 나른한 멜로디가 전부였다.

그는 한 달에 한번 꼴로 혼자 여행을 간다. 부산으로 훌쩍 떠났다가 밤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기도 하고 강릉을 즐긴 후 심야 버스를 타고 부산을 들러 서울로 돌아오기도 한다. 원칙이 있다면 특별한 계획 안 세우고, 숙소 예약도 안 한다는 것뿐이다.

“낯선 공간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곳에 있는 어떤 것에 몰두하더라도 평소 직장에서 절 괴롭히던 골치 아픈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거든요.”

프리랜서 화가로 일하는 윤지영(27)씨도 혼자 여행 다니는 것을 즐긴다. 주말마다 버스와 기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스케치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아무도 저를 알지 못하는 곳에 가면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게 돼요. 서울서는 종일 사람에 치이잖아요. 쓸쓸하다는 느낌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문화 생활 방해 받고 싶지 않아요”

“영화는 항상 혼자 봐요. 단, 관객이 빼곡히 들어찬 인기 영화는 피합니다. 혹시 블록버스터 중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주말에 부지런히 집을 나서 조조를 보죠.”

회사원 정모(32·여)씨가 평소에 즐겨가는 극장은 관객이 비교적 적은 편인 광화문 시네큐브, 압구정동과 종로의 스폰지하우스 등이다. 일반 상영관에서 잘 ‘걸지’ 않는 제3세계 영화나 저예산 작품을 보며 ‘나만의 문화 생활’을 즐긴다는 쾌감을 느낀다. 특히 압구정동 스폰지하우스는 좌석이 80석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아늑한데다 음식물을 마음대로 갖고 들어가도 된다는 장점 때문에 글루미족에게 인기다.

스폰지하우스 최지선씨는 “관객의 절반 이상이 혼자”라며 “마니아 성향의 영화를 많이 상영해 비교적 한적하다는 점이 방해 받지 않고 영화를 즐기려는 이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대학생 김지선(24)씨는 미술 전시를 홀로 찾아다닌다. 주말이면 인사동이나 홍익대 앞에 있는 작은 갤러리들을 계획도 없이 둘러보다 다리가 아프면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기도 한다. 그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여유롭게 감상을 할 수 있다는 게 좋다”며 “친구와 약속을 잡고 전시회를 찾으면 작품보다는 ‘만남’에 집중하게 돼 불편하다”고 했다.


우울해서 더 좋은 ‘브릿팝’과 ‘트립합’

흐리고 비가 잦은 영국 날씨를 닮은 브릿팝(Brit pop·영국의 모던록)은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비 오는 거리를 끝도 없이 걸을 때, 쓸쓸함을 극대화시키는 ‘배경음악’이 돼 준다. 의도적인 우울함과 외로움을 통해 엉킨 마음의 매듭을 풀어가는 ‘글루미족’의 취향에 딱 맞는다.

문화 마케팅업체 ‘엔스토리’ 이혜원 대리는 “라디오헤드, 버브, 오아시스 등으로 대표되는 브릿팝은 감성적이면서 우울하다”며 “그다지 대중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지난해에는 스타세일러, 막시밀리언 해커 등 브릿팝 가수들이 소규모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다”고 밝혔다.

글루미 세대는 브릿팝 중에서도 특히 몽환적이고 실험성이 강한 트립합(trip hop)에 열광한다. 트립합은 영국 남서부의 다(多)문화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유래해 ‘브리스톨 사운드’라고도 일컬어진다. 뮤지션 중에는 매시브 어택, 포티셰드, 트리키 등이 대표적이다.

이 대리는 “브릿팝과 트립합은 ‘너도 싫고, 나도 싫고, 세상도 싫다’는 식의 자기고립을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라며 “우울하다고 느껴질 때 더 우울한 음악을 들으면 슬픈 영화를 보고 펑펑 울 때처럼 치유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했다.


혼자 논 후 인터넷서 느낌 나눠요

대한민국 ‘글루미족’만의 특징은 혼자 즐기되, 혼자 노는 모습을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을 통해 공유한다는 점이다. 혼자 여행을 즐긴다는 회사원 김상우(32)씨는 “여행하며 가졌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SLR 클럽(www.slr club.com)’에 자주 올린다”며 “취향을 억지로 맞추거나 싫은 사람을 억지로 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오프라인 동호회보다 편한 것 같다”고 했다.

삼겹살, 혼자 구워 먹어도 맛있다

글루미씨를 잡아라

조선일보 김신영기자 sky@chosun.com
입력시간 : 2007.02.01 09:37

취미는 혼자 놀기, 특기는 고독 하기…글루미씨를 소개합니다 ▲ 혼자 고기를 구워 먹고 싶은 사람을 위해 ‘바(bar)’ 형태의 좌석을 마련한 신촌 ‘고기촌 플러스 바’. 조선영상미디어 이경호기자 ho@chosun.com 발그레한 조명에 기분 좋은 재즈가 흐른다. 짙은 고동색 바(bar) 건너에는 바텐더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듬성듬성 홀로 앉아 분위기를 즐기는 손님들 앞에 놓인 돌판에서 삼겹살이 신나게 익고 있다. 서울 신촌 삼겹살집 고기촌 플러스 바(02-3141-2292)의 오후 8시 풍경이다. 이 식당은 퇴근 후 삼겹살 한 점과 소주가 그리운데, 함께 갈 사람이 없어 포기해야 했던 이들을 위해 4~6인석과 별도로 혼자 앉기 편한 바를 마련했다.

고독한 시간을 찾아 즐기는 글루미씨(氏)가 늘면서 식당 카페 여행 인테리어 등 삶의 구석구석에 ‘1인용’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다. 홍익대 앞에 늘고 있는 북 카페들은 조용히 혼자 책 읽기를 즐기는 이들을 위해 테이블 간 간격을 넓힌 것이 특징이다.

하나투어는 홀로 떠나는 사람이 늘고 남성보다는 여성의 ‘나홀로 여행’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이들을 겨냥한 상품 ‘여우여심(女友女心)’을 최근 내놓았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발리,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등 여성들이 좋아하는 여행지로 구성됐다. 혼자 방을 쓰기 원할 경우 비용에 추가되는 ‘싱글룸 차지(single room charge)’ 중 절반을 여행사가 지원한다.

영화제를 혼자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영화제 사무국에서 이들의 숙박을 해결해주기 위한 마련한 서비스가 눈에 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혼자 즐겼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정희란(35)씨는 영화제 사무국이 준비한 유스호스텔 예약 서비스를 이용했다. 인터넷으로 숙소 예약을 하면 8인실이나 15인실의 침대 하나를 선착순으로 배정 받을 수 있었다.

이 영화제 사무국 이수정씨는 “숙소를 예약한 관람객 중 대부분은 혼자 부산을 찾은 이들”이라며 “비용은 한 사람당 1만원에 불과해 혼자 여행할 때 가장 고민되는 숙박비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한 것이 장점”이라고 밝혔다. 전주국제영화제도 인터넷을 통해 숙소 예약을 받아 혼자 오는 사람들을 적절히 ‘배치’ 해준다. 가격은 1박당 5000원에 불과하다. 취미는 혼자 놀기, 특기는 고독 하기…글루미씨를 소개합니다 ▲ 안방서 한 층 내려가면 분리된 공간이 숨어 있는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의 E빌라.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기자 글루미씨의 생활 패턴은 인테리어 경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 E빌라 안방 전실(前室)에는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다. 신경 써서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얌전한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면 작은 방이 웅크리고 있다. 서재나 기도실 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숨은 공간이다. 현대건설도 최근 아파트 새 브랜드 ‘힐스테이트’를 선보이며 ‘남편만의 공간’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현대건설 주택영업본부 이현정 차장은 “남성 전용 공간은 안방에서 연결되는 작은 방으로 음악·영화 감상 등 ‘나만의’ 재충전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말 ‘글루미 세대’를 마케팅 키워드로 제시한 트렌드 컨설팅 업체 ‘아이에프네트워크’ 김희수 본부장은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우울하고 외로운 느낌을 추종하는 것이 ‘싱글족’과의 차이”라며 “팍팍한 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울이 일종의 취미처럼 번져 이를 위한 상품 및 서비스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