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한이탈리아문화원 8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파졸리니 감독의 을 보았다. 오래전부터 영화잡지로나 보아 온 전설적인 영화라서 이번 감상은 정말 설렜고 영화는 기대한 것 이상의 작품이었다. 파졸리니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60-70년대 활동했던 감독이다. 요즘 켄 로치 감독의 영화에 좌파라는 타이틀을 붙이고들 하는데, 거기에 비교하면 파졸리니의 영화는 좌파정도가 아니라 계급주의자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정도의 감독이다. 파졸리니의 영화는 좌파의 이상을 웅변하기 보다는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서 부르조아지와 파시스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저주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를 만들어 내었다. 한 가지 잘 알려진 사실은 그가 그런 계급적인 한계 내의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은 그 주제의식에서 많이 언급이 된다. 적나라한 성 묘사, 새도 마조히즘적 묘사가 불러일으키는 센세이셔널리즘은 둘째로 하고, 그의 영화는 대단히 계급적이다. 이건 은유로서의 '계급'이 아니다. 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시선으로 특권계급과 파시스트의 행태에 대한 혐오스러운 태도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영화잡지를 보면, 은 '성을 매개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를 보여주었다거나, '성과 권력의 정치학'을 그려내었다는 평가가 많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비슷하다. 파졸리니가 영화에서 의도하는 것은?나치 치하 이탈리아의 어느 성에서 특권계급인 네 남자가 남녀들을 납치해서 벌이는 잔혹한 카니발이 이 영화의 표면적인 줄거리다. 아주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미장센 되고, 배치된 세트 위에서 3막으로 성과 피의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다.그런데. 이 영화를 일반적 시각인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에 관한 영화로 볼 때, 영화는 너무 삭막하기 조차하다. 의 피착취자들은 최소한도의 저항이나 반항도 없이 착취하는 특권계급층에 일방적으로 당한다. 특권계급 인사들의 도착성욕의 극치는 여과 없이 묘사되고, 새도 마조히즘을 넘어서서 피착취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기에 이른다.그런데, 에는 최소한의 권선징악도 없다. 관객은 마치 포르노를 감상하듯이 일방적인 착취-피착취의 관계를 감상해야만 한다. 관객이 영화에서 계급적인 의미를 조금이라도 읽어내는 순간 관객은 영화에서 심한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영화라는 쾌락장치의 제공하는 바에 함몰되어야 할 지, 아니면 도덕적 판단을 선행시켜 아주 불편한 관계로 영화를 봐야할 지, 그렇지도 않다면 극장을 나가야 할 지 파졸리니는 관객들을 정말 힘들게 한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롱샷이 빈번하여 관객들이 죄의식을 그나마 조금 덜 수 있다는 것이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도 이런 고민들을 잠깐 동안 잊게 해준다. 이 두 가지는 파졸리니가 마련한 영화감상을 위한 최소한도의 배려인 것 같다.어쨌든 영화는 결국 피착취자들이 일방적으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하는 데서 끝이 난다. 파졸리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아래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특권 부르조아지에게 어디까지 착취당하고 쥐어 짜일 수 있는 지를 '성'을 매개로 해서 보여준 것이다. 한편, 권력이라는 것이 제 계급 내에 어떻게 구동하는지 고전적인 양식을 사용하여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권력론은 결국 폭력의 독점을 통해서만 쓰여 질 수 있는 것이다. 에서 파졸리니가 의도하는 것, 그것은 한 마디로 '착취'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난 그냥 아름다운 세계에 살며 내 나름대로의 삶의 이유를 만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 영화를 보라는 숙제를 받았다. 과연 내가 저이의 영화를. 영상을 귀를 찢고 심장을 태우는 영상, 을 견딜 수 있을까. 그래 흔치 않은 기회라는 것쯤은 안다. 두렵다. 4
[영화]샬로, 소돔의 120일
ⓒ 주한이탈리아문화원
8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파졸리니 감독의
을 보았다.
오래전부터 영화잡지로나 보아 온
전설적인 영화라서 이번 감상은 정말 설렜고
영화는 기대한 것 이상의 작품이었다.
파졸리니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60-70년대 활동했던 감독이다.
요즘 켄 로치 감독의 영화에
좌파라는 타이틀을 붙이고들 하는데,
거기에 비교하면 파졸리니의 영화는
좌파정도가 아니라
계급주의자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정도의 감독이다.
파졸리니의 영화는
좌파의 이상을 웅변하기 보다는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서
부르조아지와 파시스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저주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를 만들어 내었다.
한 가지 잘 알려진 사실은
그가 그런 계급적인
한계 내의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은
그 주제의식에서 많이 언급이 된다.
적나라한 성 묘사, 새도
마조히즘적 묘사가 불러일으키는
센세이셔널리즘은 둘째로 하고,
그의 영화는 대단히 계급적이다.
이건 은유로서의 '계급'이 아니다.
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시선으로
특권계급과 파시스트의 행태에 대한
혐오스러운 태도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영화잡지를 보면,
은
'성을 매개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를
보여주었다거나, '성과 권력의 정치학'을
그려내었다는 평가가 많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비슷하다.
파졸리니가 영화에서 의도하는 것은?
나치 치하 이탈리아의 어느 성에서
특권계급인 네 남자가 남녀들을 납치해서 벌이는
잔혹한 카니발이 이 영화의 표면적인 줄거리다.
아주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미장센 되고,
배치된 세트 위에서 3막으로 성과 피의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일반적 시각인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에 관한 영화로 볼 때,
영화는 너무 삭막하기 조차하다.
의 피착취자들은
최소한도의 저항이나 반항도 없이 착취하는
특권계급층에 일방적으로 당한다.
특권계급 인사들의 도착성욕의 극치는
여과 없이 묘사되고,
새도 마조히즘을 넘어서서
피착취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기에 이른다.
그런데, 에는
최소한의 권선징악도 없다.
관객은 마치 포르노를 감상하듯이
일방적인 착취-피착취의 관계를 감상해야만 한다.
관객이 영화에서 계급적인 의미를 조금이라도 읽어내는 순간 관객은 영화에서 심한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라는 쾌락장치의 제공하는 바에
함몰되어야 할 지,
아니면 도덕적 판단을 선행시켜
아주 불편한 관계로 영화를 봐야할 지,
그렇지도 않다면 극장을 나가야 할 지
파졸리니는 관객들을 정말 힘들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롱샷이 빈번하여
관객들이 죄의식을 그나마 조금 덜 수 있다는 것이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도 이런 고민들을
잠깐 동안 잊게 해준다.
이 두 가지는 파졸리니가 마련한 영화감상을 위한
최소한도의 배려인 것 같다.
어쨌든 영화는
결국 피착취자들이 일방적으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하는 데서 끝이 난다.
파졸리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아래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특권 부르조아지에게
어디까지 착취당하고 쥐어 짜일 수 있는 지를
'성'을 매개로 해서 보여준 것이다.
한편, 권력이라는 것이 제 계급 내에
어떻게 구동하는지 고전적인 양식을 사용하여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권력론은
결국 폭력의 독점을 통해서만 쓰여 질 수 있는 것이다.
에서 파졸리니가 의도하는 것,
그것은 한 마디로 '착취'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난 그냥 아름다운 세계에 살며
내 나름대로의 삶의 이유를 만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 영화를 보라는 숙제를 받았다.
과연 내가 저이의 영화를. 영상을 귀를 찢고
심장을 태우는 영상, 을 견딜 수 있을까.
그래 흔치 않은 기회라는 것쯤은 안다.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