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파리

이승협200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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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째주

 

『사랑해요, 파리』- 황성혜

 

사랑해요, 파리


 

 

- 똘레랑스, 에콜폴리테크, TRV... 이거 프문예(*프랑스 문화 예술)아냐?!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사진이 엄청 많은 이 책. 황성혜라는 기자(연세대학교 출신)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면서 얘기하는 파리지앵(파리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파리를 자신의 연인으로 생각하며, "내 인생의 반쪽이 없다면 그동안 파리가 나를 지켜줄꺼야"라며 파리에 대해서 큰 애착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파리가 이렇지만, 다른사람들에게 다 파리는 다르게 느껴진다며, 파리에 대한 사람들의 특별한 애착에 대해서 소개를 한다.

 

프문예시간에 배운 내용이 이 책에 대부분 요약되어 있다. 프랑스의 사회 구조, 교육 구조, 문화, 그리고 그 문화에 가려진 첨단 과학기술, 사람들... 하지만 이 책에만 있는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학문이 아닌 생활의 측면에서 다시 바라본 프랑스였다. 그중에서도 파리.

 

프랑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프랑스 파리를 가본 사람으로써, 솔직한 심정에 프랑스에 대한 환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리애 도착하면 느끼는 것이지만, 파리에 가보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다. 특히 몽마르트 언덕에 가서 불쾌한 일을 당하기도 했는데, 재밌게도 이 책의 작가도 그곳에서 소매치기를 당했으며 항상 가보면 불쾌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 그곳에 이민자들이 많고 빈민지역이라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몽마르트 성당과 그 언덕에서 보이는 파리의 모습은 말로 표현이 어렵다.

 

그렇다 파리라는 곳. 그렇게 불쾌하면서도 사람을 또 다시 매혹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샹젤리제거리, 난 그곳에 갔을때, 파리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편안했다. 길도 컸고 인도도 넓고, 무언가 우리나라 서울의 광화문 거리 같은 느낌이여서 일까? 편안하고 익숙했다. 그래서 좋았다. 하지만 이 작가는 그곳이 가장 프랑스 적이지 않은 곳이라고 말하며, 그곳은 파리지앵을 위한 곳이 아닌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곳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렇다. 그당시 유럽에서 거의 동생과 둘이서 걸어다니던 나로 썬, 프랑스적인, 파리적인 것이 오히려 이국적이어서 부담스럽거나 무서울 수 있었다. 카페에도 한번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주눅이 들었다는 표현이 맞다. 거기에다가 나랑 내 동생이 프랑스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였다. 겨우 겨우 영어로 이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터인데,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 사람들이 '앵글로 색슨'적 '미국'적인 것에 대해서 반감이 있는데, 어찌하여 편하겠는가? 하지만 샹젤리제 거리는 달랐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도 많았고, 멕도날드와 같이 미국식 페스트푸드점도 있고 크고 넒은 길에 넓은 인도까지, 광화문거리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나? 편안했다.

 

하지만 역시나, 프랑스 사람들은, 이러한 샹젤리제 거리를 프랑스 적이지 못하다고 하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상업적, 미국적, 관광객을 위한... 이러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

 

깨달음의 순간이랄까? 샹젤리제 거리에서 느낀 나의 그런 편안한 느낌이 그러한 이유인지 알았을까? 다른 파리의 거리에서는 주눅이 들고, 긴장을 해야 했던 내가 이곳에서는 마음이 편했었으니~

 

05년 2월에 내가 갔던 파리는 현장 예습 학습이었다면, 프문예는 이론 심화 학습, 이 책은 부록, 복습학습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작가는 또한 이 책에서 파리의 과제를 남기고 간다. 그것은 바로 "통합". 우리 나라도 이 문제로 인해 머리가 아프지 않은가? 양극화, 분열. 우리는 이러한 한 민족인데도 통합을 외치지 못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다민족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통합을 외치며, 톨레랑스를 옹호한다. 물론 그중에서도 다른 극단세력, 극우단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좋다, 그렇다면 그런 나라의 개념을 떠나서. 나 와 너. 이러한 개념으로 보자.

 

나. 나는 너가 아니다. 너. 넌 내가 아니다. 너랑 나는 '다르다'.

너와 나, 나와 너. 우리는 서로 '틀리지'않고 '다르기' 때문에 공립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나 스스로를 옹호하면서 상대에 대한 상대적인 내 감정을 상대의 탓으로 하여금 돌린다. 이것 때문에 '틀리다'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틀리다'의 기준은 바로 '나'이기 때분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상대방의 의견을 너와 나는 단지 '다르다'라고만 생각한다. 쉽게 보면 존중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일단 내 생각이 있지만, 나와 반대되어도 누가 옳고 그릇되지 않은 그냥, 차이가 날 뿐인 것이다. '다르다'의 기준은 상대이다. A가 있어야 B 가 A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만 있으면 B가 다른지는 알 수 없다. "틀리다"는 O와 X이다.

 

그렇다. 이러한 너와 나의 차이가, 있다. 이것을 알면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냥 다를 뿐이다.

 

 

 

 

나 스스로. 생각한다.

 

 

 

 

너와 나. 다시 생각하면 공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야. 단, 서로의 상황을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다르다"로 받아드릴 수만 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