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부파일 광주코뮨:20년이후 -----------------------------------------------------------광주 항쟁에 대한 기억 출처:대자보기사 조지 카치아피카스
아르키메데스는 언젠가 나에게 지렛목을 주면 지구를 움직여 보이겠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바로 그 지렛목이다. 한국이 독재에서 민주사회로 전환하는 중심 축이었다. 그 열정이 20년 후 전 세계를 공명시키고 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5.18민중항쟁은 미래의 자유사회 및 아시아에서 미국정부와 그의 동맹국들이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한 현실적이고 진지한 평가기준을 제공한다. 광주항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존엄과 자유로운 사회에 대해 분명한 예시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광주는 한국역사에서 프랑스의 파리콤뮨과 러시아의 전함 포템킨에 비교할 수 있을 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파리콤뮨과 같이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했고,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는 토착 군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 당할 때까지 스스로를 통치했다. 또 전함포템킨처럼 광주사람들은 1894년 동학 혁명, 1929년 학생봉기 그리고 1980년 항쟁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한국에서 혁명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의 발신지가 됐다. 수천 명의 희생 속에 벼려진 광주 민중항쟁의 신화적 힘은 독재정부가 2000여명에 이르는 학살을 은폐하려고 시도했던 1980년 이후 처음 5년 동안에 더욱 단련되었다. 광주 콤뮨이 무자비하게 깨지고 난 후 항쟁소식은 자신들을 멸망시키기에 충분했기에 군부는 시체를 불태우고 암매장하고 기록을 지워내려고 했다.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살인마의 이름을 속삭이는 것조차 못하게 하려고 수천의 사람들을 투옥하고 수백 명을 고문했다. 1985년 광주항쟁을 다룬 첫 번째 책 수천 권은 몰수당했고 출판인과 저자로 의심을 받았던 사람은 체포됐다. 군부의 잔인한 학살과 이후 진상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정부가 쉽게 무너질 만큼 한국의 시민사회는 강력했다. 이 재의는 한국국민들이 1987년 그렇게 신속하게 지독한 폭압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광주에서의 저항 때문이다고 지적한다. 전두환 대통령과 그의 군사정부는 1980년 광주에서는 이겼지만 민주주의는 7년 후 민중운동 세력이 군부독재를 몰아내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파리 콤뮨, 전함 포템킨과 같이 광주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단순히 한국(또는 프랑스, 러시아)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이다. 광주 항쟁의 의미와 교훈은 동서남북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이전 혁명의 상징들처럼 1980년 민중항쟁은 전 세계적인 반향을 얻었다. 투쟁의 상징으로서 광주는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자극했다. 자기 손에 자신들만의 권력을 창출하려는 사람들에게 광주항쟁은 선구적이다. 1996년 홍콩의 인권 운동가 산지와는 광주항쟁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썼다. 민중의 힘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수단으로는 파괴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사람들에게서 나온 그 같은 힘은 다음 세대들에게 전승될 것이다. 광주는 민중의 힘(People power)으로 충만한 도시다.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것은 단순히 고립된 한 사건이 아니었다. 아직도 혹독하고 억압적인 체제와 군사정부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광주민중항쟁은 빛이고 희망이다. 선구적인 활동을 하는 광주시민들의 힘과 의지는 매우 인상적이다...오늘날 그로부터 무엇을 취할 수 있을지 주목하면서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다...나 역시 그들의 용기와 정신에 영감을 얻었다. 광주는 결코 꺾이지 않는 민중의 힘을 보여주는 아주 독특한 상징이다. 그 상징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의 깃발이 되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1980년 민중항쟁이 지닌 힘을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 자치력 · 참가자들의 유기적 연대 · 국제사회에서 항쟁의 중요성 <자치력> 광주 시민들의 용기와 용감성이 기념비적인 것처럼 자치력은 그들 봉기의 명백한 보증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이 항쟁의 오직 하나뿐인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싸움의 정점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해서 한 도시를 통제하고 군대가 반격해 올 때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자치역량은 환상적이다. 20세기의 마지막에, 높은 문자 해독률, 대중매체, 그리고 보편적 교육(모든 남성들이 군복무를 해야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극소수의 엘리트들 보다 훨씬 더 현명하게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광주 민중항쟁에서 그러한 자발적인 자치역량을 관찰 할 수 있다. 1980년 5월15일 서울에서 백만 여명이 학생시위에 참여해 독재에 저항했다. 많은 사람들이 독재를 일소할 시간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는 동안 자신들의 성공에 흥분한 학생지도자들은 자유주의적 정치가들의 영향을 받아 정부가 계엄령을 끝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17일과 18일로 예정된 대규모 행동을 연기한다. 이에 비해 군부는 대도시 특히 광주에 수천의 계엄군을 내려보내 강력한 진압을 벌인다. 5월 14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캠퍼스를 에워싼 진압 경찰의 방어선을 뚫었다. 그들이 도심가운데로 진출했을 때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에 지지를 보냈다. 5월16일 한국의 다른 모든 곳이 침묵하고 있을 때 광주에 있는 9개 대학 학생들은 민주광장으로 명명된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저녁, 군 정보요원들과 경찰은 시내 전역에서 활동가들의 집을 급습해 체포했다. 체포를 면한 지도자들은 몸을 숨겼다. 이미 김대중을 포함한 최소한 26명의 전국적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한 목격자에 따르면 운동의 핵심은 무력화 됐다. 또 다른 사람은 학생운동의 지도세력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고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바로 다음날 아침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조직화 됐고-처음에는 수백만이 그리고 이어서 수천만이-경찰과 새로 파견된 부대의 점령에 대항해 행진을 벌였다. 미국의 동의 속에 정부는 1년 전 부산, 마산에서 진압을 맡았던 그 부대로 DMZ에 있던 가장 노련한 계엄군의 일부를 풀어놓았다. 일단 광주에 도착한 계엄군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시민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 18일 아침 첫 번째 대치에서 비무장 학생 시위대를 특수 제작한 곤봉으로 해산시켰다. 도망갔다가 다시 모인 시위대가 반격을 가해 산수동 오거리에서는 폭동진압 경찰 45명이 시위대에 포위돼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잠시동안 사람들 사이에 포로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들을 풀어주기로 결정하고 풀려나자 계엄군은 다시 폭력적으로 공격을 가해 왔다. 한 무리의 계엄군이 학생들을 하나 하나씩 공격했다. 머리를 짓밟고 등을 내리치고 얼굴을 발로 가격했다. 군인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마치 고기 양념을 친 누더기 옷 같아 보였다." 트럭에 짐짝처럼 실린 사람들은 그 위에서 다시 군인들의 구타를 당했다. 밤에 계엄군은 몇몇 대학에 숙영지를 차렸다. 학생들이 저항을 계속하는 동안 군인들은 그들에게 총검을 휘둘렀고 수십 명을 체포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옷을 벗긴 체 잔인한 짓을 당했다. 이 사건을 목도한 한 아이는 부모에게 언제 군대가 오느냐고 물었다. 또 다른 세상물정 모르고 일방적인 정치 신념을 배운 아이는 공산당이 군대를 접수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한 군인은 학생들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면서 이 칼로 베트남에서 베트콩 여자 40명의 가슴을 도려냈다고 악을 썼다. 전 시민들이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충격을 받았다. 시민들에 대한 잔인한 진압행위를 중지시키려고 했던 정보과 형사를 찔러 죽일 만큼 계엄군의 행동은 통제 밖에 놓여 있었다. 이처럼 진압이 계속되고 수백 명이 체포되었는데 학생들은 끊임없이 모여들었고 집요하게 저항했다. 다음날 도시 전체가 참여한 시위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가담하면서 학생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게 줄었다. 이 자발적 민중운동 세대는 혁명의 첫 번째 일반적 특성인 시민과 학생간의 분열을 뛰어넘었다. 노동자들이 참여하자 계엄군은 다시 한번 냉혹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대응했다. --거리에 나선 사람들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었다. 부상자를 돕던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이나 헌혈하던 사람을 막론하고 찔러 죽이고 때리고 살해했다. 일부 경찰들은 비밀리에 포로들을 풀어주다가 그들도 총칼을 맞았다. 시민들은 돌, 몽둥이 칼 파이프 철근 망치로 1만8천여 명의 폭동진압 경찰과 3천여 계엄군에 맞섰다. 비록 수많은 시민들이 살해됐지만 그 도시는 침묵하기를 거부했다. 20일 공식 언론매체와는 달리 정확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투사회보"가 처음으로 발행됐다. 수천의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그들은 계엄군의 곤봉에 흩어졌다가 오후 5시 30분 폭력진압과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5천여 명의 군중이 경찰 저지선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들은 계엄군이 뒤로 물러서자 거리로 몰려나와 연좌시위를 벌였다. 대표를 뽑아 군대와 경찰을 분열시키려고 시도했다. 저녁 무렵 시위대는 전체 인구 70만 중에 20만 명(어떤 이는 30만 명이라고도 한다.)으로 불어났다. 대규모 군중들은 노동자 농민 학생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도시의 가장 번화가인 금남로를 뒤덮은 행렬을 9대의 버스와 200대의 택시가 선도했다. 다시 계엄군은 악독한 방법으로 공격을 가했다. 바로 이 시간 전 도시가 군대와 맞섰던 것이다. 밤에는 자동차와 지프, 택시 등 차량에 불을 질러 군인들을 향해 밀어붙였다. 비록 군부대는 반복적으로 공격을 가했지만 밤이 지나자 마침내 민주광장으로 고립됐다. 광주역에서는 수많은 시위대들이 살해당했고 도청에서는 계엄군이 M16을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그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죽었다. 검열통제를 받던 언론들은 그들 코앞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현장을 보도하지 못했다. 대신에, 어리석게도 파괴적인 행위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경찰의 대응 같은 보고를 기사로 조작해 보도했다. 군대의 잔인성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도가 이뤄지지 않자 수천의 사람들은 MBC방송국을 포위했다. 방송국 관리자들과 수비병력이 후퇴하자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방송시설을 작동시킬 수 없자 사람들은 빌딩에 불을 놓았다. 군중들은 상당히 이성적으로 공공 건물들에 대한 입장을 정했다. 오전 1시, 시민들은 세무서로 몰려가서 집기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국민의 삶과 복지를 위해 써야 할 세금을 국민들을 죽이고 구타하는 군대를 위해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찰서와 다른 빌딩들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반면 방송국과 세무서에 불을 지른 것은 매우 드문 사례다. 세무서와 두 개의 언론사 건물 외에 노동청, 도청 주차장, 16개의 경찰 초소가 불에 탔다. 오전 4시까지 계속된 광주역 전투는 매우 격렬했다. 군대는 다시 M16을 발포했고 그 때 피해규모는 상당히 큰 사례로 기록돼 있다. 믿어지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시민들은 이를 극복했고 군대는 서둘러 후퇴했다. 다음날 오전 9시 1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다시 금남로에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군수품 제조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가서 차량을 징발해 와야 한다고 외쳤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사라졌다가 겨우 7대를 끌고 왔다.(정확히 운전할 줄 아는 사람들의 수만큼). 왔다 갔다 몇 차례 왕복한 끝에 장갑차 7대를 포함해 350대의 차량이 시민들 손에 들어왔다. 이 징발된 차량으로 시내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시위대는 주민들을 불러모으고 이웃 시·군에 항쟁 소식을 알리러 갔다. 어떤 트럭으로는 빵과 코카콜라 공장에서 가져온 음료수를 날랐다. 협상대표들을 뽑아 계엄군 측에 보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관통해 갑자기 총격이 울렸다. 평화적인 해결의 희망은 끝이 났다. 10분 동안 군대는 무차별 사격을 했고 대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 수십 명이 죽고 500여명이 부상당했다. 시민들은 재빨리 대응했다. 총격이 있은 후 2시간이 채 못돼 경찰서에서 처음으로 무기가 털렸다. 더 많은 시민들이 타격대를 만들어 경찰서와 병기고를 털고 두 개의 중심지로 모여들었다. 수천의 사람들이 정부에 대항해 무기를 들지 않았던 한국의 오래된 전통을 가볍게 뛰어넘어 버렸다. 탄광 광부들의 협조를 얻어 화순에서 시위대는 다이나마이트와 뇌관을 획득했다. 방직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나주에서 7대 규모의 탄약과 권총 수백 정을 광주로 가져왔다. 비슷한 무기탈취가 장성, 영암, 담양에서도 일어났다. 항쟁은 급속히 화순, 나주, 함평, 영광,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16개 지역으로 확산됐다. 항쟁의 급속한 확산은 시민들의 자치역량과 자율적인 주도권을 가리키는 또 다른 징표다. 전주와 서울로 항쟁을 확산시키기 위해 일부 시위대가 나갔지만 고속도로, 국도, 철도를 차단한 군대에 의해 격퇴 당했다. 김대중의 출신지인 목포에서는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아끼는 정치인의 체포에 항의해 시위행진을 벌였고 민주 헌법을 요구하며 5일 동안 연속해서 시위를 벌였다. 전주에서는 시청을 점거했고 Jeonji와 이리에서는 경찰이 시위에 동참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화순, 영광부터 광주까지 무장한 시위대를 향해 기총소사가 있었다. 만약 군대가 언론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여행을 제한하지 않았다면 일부 사람들이 희망한대로 항쟁은 전국적인 항쟁이 되었을 것이다. 사북탄광 광부들의 봉기, 부마항쟁, 그리고 수백 건에 이르는 투쟁은 많은 곳에서 사건이 발생할 조건이 성숙해 가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광주공원과 유동 사거리에는 전투소조와 지휘체계가 만들어졌다. 도청을 겨냥해 기관총이 설치되었다. 5시30분까지 군대는 모두 후퇴했다. 오후 8시가 되자 시민들은 도시를 장악했다. 이곳저곳에서 환호가 터졌다. 비록 그들이 가진 무기는 구식으로 군대와 비교가 안될 만큼 보잘것없었지만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은 군대의 기술적 우위 보다 훨씬 강력함이 입증되었다. 5일 동안 시민들은 도시를 굳게 지켰다. 자발적으로 형성된 시민 위원회가 도시 방어를 포함해 모든 핵심적인 공공업무를 조직했고 동시에 분쟁을 평화롭게 마무리하는 한편 더 많은 관을 확보하고 수천의 구속자들(이들 중 일부는 이미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이 풀려나게 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시켰다. 누군가 말하기도 전에 쓰레기는 말끔히 치워졌다. 일찌감치 무장 저항세력이 조직되었다. 광주 공원에서는 78개의 차량이 열을 지어 서있었는데 페인트로 숫자가 매겨져 있었다. 이들에게는 다가올 반격에 대비,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특정 지역을 순찰할 과제가 주어졌다. 시민군 관리 사무실을 만들고 사령부에 접근 할 수 있는 통행증과 차량 통과를 위해 안전통행권, 연료 주입권을 발행했다.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군부의 정보요원을 수색했지만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었음이 드러났다. 비상조직이 자연스럽게 출현했다. 그 과정은 명백했다. 항쟁을 자치공동체로 언급했다. 5월 22일 오전 10시30분 개신교 목사 8명이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침례교 목사였던 아놀드 페터슨이다. 그는 나중에 모임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그들이 공통으로 느낀 것은 "이럴 수 없다"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아무런 사전 계획이나 지휘도 없이 시민들이 봉기해 정부를 몰아내는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항쟁이 시작됐을 때 이곳에 지휘자는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항쟁의 가혹한 시련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군부에 대항하는 집단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단지 잔인성 때문에 군인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곧 위원회로 불리는 두 집단이 해방광주에 만들어졌다. 하나는 시민수습위원회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투쟁위원회다. 시민수습위 또는 5.18범시민대책위원회는 목사, 상인, 변호사, 교수, 정치인등 약 20명으로 구성됐다. 독립운동 지도자로 존경받던 최한영이 이끌었는데 그들은 학생투쟁위(SAC)가 만들어지기 몇 시간 전에 만들어졌고 즉시 계엄사령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들은 가능하면 항쟁의 평화적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시민수습위원화와는 달리, 강경한 학생투쟁위는 이전에 한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몇 년 후 개인적인 경험을 증언하면서 송기숙 교수는 이 사건들을 자세히 얘기했다. 그와 명노근 교수는 5월22일 분수대 집회에 나갔는데 같은 날 페터슨도 목회자들의 회합에 참석했다. 명노근은 운동가들을 모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람들은 시민수습위 구성원들의 과거 행적에 비춰 그들이 투쟁이 아니라 적과 내통하려는 것이 아닌가를 걱정했다. 송기숙은 명노근을 따라 나섰다. 명노근은 휴대용 마이크가 건네 지자 연설을 시작했다. 전남대와 조선대생들 중에 믿을만한 사람들로 대표 다섯 명을 뽑아달라. 그는 계속했다. 비록 계엄군이 지금 물러났지만 시민군은 당황하고 있고 혼란을 겪고 있는 데다 지휘본부도 없다. 시민수습위는 이미 만들어져 해결을 위한 전제조건을 가지고 상무대로 갔다. 그러나 시민군을 통제할 수가 없다. 이 모든 일들은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므로 학생들이 지도력을 세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도청으로 가서 학생 수습위를 만들자. 이와 함께 명노근 교수는 군중들을 이끌고 도청 정문으로 갔다. 거기서 폭동진압경찰에게서 빼앗은 헬맷을 쓴 시민군이 긴장속에 보초를 서고 있었다. 10명의 학생대표들이 도청으로 들어갔고 완전히 혼란상태였던 행정관서로 안내되었다. 강경파들은 민주주의와 인간존엄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면서 학생수습위원회와의 대화조차 거절했다. 송교수의 끈질긴 설득으로 학생투쟁위원가 구성돼 곧바로 장례준비와 대안매체, 차량 통제, 무기 회수와 분배 등이 이뤄졌다. 반면 시민수습위는 군부와 협상에 나섰다. 때때로 두 위원회는 함께 성명을 발표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5월 24일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집회에 모이자 시민수습위원들은 확성기를 망가트렸다. 어디선가 확성기를 가져왔지만 시민수습위원들은 전원을 꽂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속에서도 시민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고 어떤 전기공이 자동차 건전지에 음향시설을 연결시키자 학생투쟁위는 격앙된 집회를 진행했다.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다수는 무기 회수를 주장했지만 일부 소수는 그런 식의 항복을 거부했다. 밤이 오자 소수파만 남은 체 온건파들은 모두 물러났다. 노동자들과 운동가들이 가세하고 명칭을 시민학생투쟁위원회(CSAC)로 바꿨다. SAC에서 CSAC로 교체는 노동자 계급의 선도적 역할을 반영한 것이다. 비록 학생들은 항쟁에 불을 지폈지만 그들은 통솔력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미 화순 탄광 광부들과 여성 방직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언급한바 있다. 그 외에도 노동자 계급의 선도적 역량을 보여주는 예는 많다. 피터슨의 기록에 따르면 21일 장 신부가 총을 잡고 있는 이들이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젊은 실업자나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재의는 5월 22일 많은 시민들이 시민수습위원회에에 총기를 반납한 반면 노동자와 하층민들은 총을 놓지 않으려 했다고 기록했다. 이들 투사들은 독재를 뒤엎고 전국적인 항쟁이 불붙기를 바랬고 일거에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죽으려고 했다. 그들은 계엄령 해제, 정치범 석방뿐만 아니라 전두환의 퇴진과 완전한 민주주의와 같은 한국 정치의 질적 변화를 바랬다. 학원 자율을 위한 투쟁은 동시에 사회적 자율성과 민주주의로 일변했다. 지금 분명히 해야할 것은 SAC(학생투쟁위원회)는 시민항쟁이 인도한 확실한 전망과 불굴의 용기를 지니고 헌신했던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의 핵심이었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의 별 중에서 아무도 윤 상원 만큼 밝게 빛나지는 않았다. 5월 21일 20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에서 윤 상원은 개별적으로 돌격대를 이끌고 무기고를 급습했고 아시아 자동차에 있는 350대의 차량과 3대의 장갑차를 통제하는데 관여했다. 공공장소에서 일어나는 발포, 끝이 없는 회의, 매일매일 이뤄지는 대중 집회 그리고 수시로 일어나는 사소한 충돌과 같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윤 상원은 유일하게 전략적 시각을 갖고 있던 사람으로 비췄다. 그는 한 줌의 저항으로 독재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다고 믿고 도박을 했다. 만약 사람을 더 많이 죽일 용기가 없으면 항복할 것이다. 만약 그럴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 야만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저항이 일어나기를 바랬다. 야학과 민족민주 노동자 동맹의 일부와 함께 윤 상원과 전 영호는 일간지 투사회보를 발간했는데 이것은 무장투쟁을 보완하고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그들은 시장과 위원회의 보수적인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무장세력의 임시 지도자였던 박 남순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윤 상원은 강경파들의 열정을 하나로 묶고 무장 저항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중요한 것은 보다 투쟁적인 이들이 시인 김남주와 함께 파리 콤뮨에 관한 스터디 그룹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윤 상원은 위원회의 대표에 자기 이름을 올리기를 거절한 대신 대변인 자격으로 선전활동, 기획과 배급 업무를 통합적으로 관할했다. 선전활동은 4개의 집단으로 이뤄져 있었다: 확성기를 단 차량으로 거리에서 공지사항을 알리는 것, 투사회보와 그 밖의 인쇄물 발행, 재원마련과 사람들에게 헌혈 권장, 집회 조직 등이 그것이다. 26일 군부는 군대를 광주 근교로 배치하고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군대가 다음날 이동해 들어올 것임을 알렸다. 윤 상원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운 수백 명중에 있었고 27일 탱크 부대가 도시를 재 장악하면서 윤 상원을 포함한 수 십 명이 살해당했다. 윤 상원의 역할만큼 중요한 사실은 그와 그가 속한 미약한 단체만으로는 대중 운동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자연발생성과 조직적 움직임의 변증법 속에서 광주를 휩쓴 대중운동의 추진력이 분명해 진다. 무기를 들고 싸운 많은 강경파들은 지도부의 제안을 따르기보다는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결정했다. 예를 들면 5월22일 시민군 지휘부는 백내평을 영산포에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당사자가 이를 거절했다. 대신 백은 화순역으로 4명과 함께 가서 무기를 조달해 광주로 돌아왔다. 개인적인 판단이 좋은 결말을 가져온 특별한 사례지만 전략이 부재한 조직으로 인해 지지자들은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투사회보는 시민들에게 방송을 통해 전국에 당시의 현장이 알려지도록 KBS를 점령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투쟁기간 중에 군중들은 그곳을 불질러 버렸다. 만약 시민들이 윤 상원 그룹의 얘기에 귀기울였다면 타 지역에 항쟁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을까? 전국적 항쟁이 일어났을까? 광주에서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건 정부를 타도하는데 성공하려면 투쟁 집단 내 전략적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지나고 보니 운동에서 이 약점은 쉽게 눈에 띄지만 싸움이 고조될 때 선택은 제한돼 있다. 광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대성이고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특징이다. <참가자들의 유기적 연대> 도시는 더 이상 정부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 광주시민들은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피로서 이 새로운 체제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21일 아침, 거리는 새로워져 있었다. 시위대를 위해 거리마다 식사가 준비되었고 모든 사거리에서 식사를 제공했다. 여성들은 적당한 차량을 세워서 음식을 올려주었다. 정부의 야만성을 목도했던 거리와 시장 상인들은 음식을 공급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반면 부자동네는 텅 비었다. 주부 수백 명이 금남로에서 시위대에 음식을 제공했다. 아무도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음식 제공은 시위 군중들의 투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5월21일 군인들을 도시 밖으로 몰아낸 후 시민군 소속 수백 명이 도시를 순찰했다. 모든 사람이 환희와 안도감을 나눴다. 싸움은 끝났고 도시는 자유를 얻었다. 시장과 가게들이 다시 열리고 식료품과 전기는 정상적으로 공급됐다. 어떤 은행도 털리지 않았고 도둑질, 강간이나 절도와 같은 일반 범죄조차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외국인들도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했다. 피터슨은 미국 성조기를 달고 마치 외국인 차량임을 크게 써 붙인 것과 다름없이 차를 몰고 다녔는데 거리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관, 연료, 담배들은 공급이 딸렸다. 시민수습위원들이 군으로부터 관을 더 얻어내려고 하는 동안 연료를 배급했고 담배는 새로 전우애를 나눈 사람들끼리 서로 나눠 폈다. 어떤 이들에게 담배를 나눠 피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이 됐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담배가 남아 있던 가게 주인들 중에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한 개피씩 파는 사람도 있었고 때로는 그냥 나눠주기도 했다. 병원에서 피도 부족했지만 피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몰려와 헌혈을 했고 그 중에는 술집 접대부도 있었다. 많은 집회에서 수십 만원이 모아져 수습위에 전달되기도 했다. 이 모든 사례들은 도시 전체가 놀랍도록 일체감을 이뤘음을 가리킨다. 많은 목격자들은 대중들 속에서 새로운 연대의 정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항쟁 기간 내내 광주시는 서로 도우며 위기를 극복했다. 광주시민들은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에게 의지했고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서로를 격려했다. 그들은 필요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고 부상자들에게 피를 주고 기꺼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공공치안 제도가 완전히 부재한 상황에도 불구 광주시민들은 치안과 질서를 완벽히 유지했다. 비록 수많은 무기들이 시민들 손에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사고가 나지는 않았다. 전당포나 보석상에는 평상시에 일어나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변안전 때문에 익명으로 글을 남긴 한 광주대 교수는 값을 따지지 않고 보이는 대로 물건을 사대던 시민들이 생필품을 나눠 가졌다. 참을성 없고 이윤 챙기기에 익숙했던 상인들이 전혀 값을 올리지 않았다. 시민들은 담배 잠옷 음식 음료수를 제공하는 식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어떤 수치스러운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고 무방비 상태의 은행에서 돈을 약탈하지 않았다. 광주에 살던 외국인들에 해를 주지도 않았다.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 6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놓았다. 참여하지 않은 사람, 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해방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젊은이들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들의 뺨은 피로 범벅이 돼 있었다. 피묻은 머리띠를 두르고 목이 쉬도록 구호를 외쳤다. 우리들의 사랑하는 이웃들, 젊은이, 죄 없는 어린이와 주부들조차도 차량 행렬에 동참했다.....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김밥과 음료수를 가져 왔다....그들은 시위대들에게 달걀 빵 과자 우유 음료수를 주고 싶어했다. 어떤 노인 한 분이 음식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들어 올려주면서 멈칫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비장함을 보았다. 음식을 준비 못한 주부들은 물동이를 날라, 먹고 씻을 수 있게 해줬다. 이는 피의 투쟁이자 삶을 공유하려는 사랑이었다. 어떤 사람은 시위대 참가자들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고 약을 가져온 약사도 있었으며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1980년 6월 카톨릭 광주교구의 신부는 같은 취지의 말을 되풀이했다. 군인들은 외부와의 교통을 차단했지만 음식을 들여올 필요가 없었고 사재기나 부당하게 이익을 얻는 사람도 없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서로 음식을 나눠 먹었다. 총을 맞은 사람이 늘어나면서 피가 필요해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헌혈을 했다...광주시민들은 거리의 돌멩이와 유리 최루탄 파편들을 치우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총을 맞아 위험한 환자들을 옮겼다. 버스와 택시 운전사들은 자기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이들을 숨겨줬다. 부랑아들과 고아들은 전에 없이 고결했다." 사람들 사이를 묶는 이 새롭고 놀라운 연대의 출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협력과 공동체적 가치로 장사하는 사람들간의 경쟁, 개인들의 사욕과 같은 일상의 가치들을 억제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 며칠동안,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를 치우고 밥을 짓고 공짜로 음식을 제공하면서 반격을 예상해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광주를 해방시키는데 기여했고 해방 광주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집단이 부상했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시민군 또는 동지(군인들을 적이라고 부는 것과는 반대로)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그들은 시민들을 보호하고 반대로 시민들은 그들을 돌봐주었다. 어떤 가르침이나 전 세계 군대에 기괴한 행동을 끌어내는 군부의 광기도 없이 시민군들은 훌륭하게 행동했다. 망설이지 않고 대중들의 욕구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마지막 순간이 임박했을 때 윤 상원은 개인적으로 시민군들 중에 고등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 살아남아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발했지만 눈물을 삼키며 젊은이들은 떠났다. 시민군들은 시민들에게 봉사하고 매일 도청 분수대 주변에서 군중 집회가 열렸다. 5월 16일 민주광장으로 다시 이름 부쳐진 이곳은 도시가 해방되기 전부터 이미 성지가 되었다. "민주화 성회"에서 쓰여진 시는 이런 격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남쪽 하늘은 아름다워라. 나발을 부는 천사도 없고. 꽃밭을 배회하는 색색의 나비 없이도 남쪽 하늘은 아름다워라 분수대에서 형형 색색 흩뿌리던 물줄기가 멈추던 날 조화조차 시들어 버리던 날 나는 너에게 가고 당신은 한 달음에 내게 오고 최루탄이 그치던 날 무진벌에서 온 사람들 모든 민주시민들: 지식인 노동자 농부들 사람들은 도청 분수대 앞에 모여들어 분수대에 손을 대는 사람들 잔디 위에 서고 서로를 껴안고 서로 마주보고 우는 사람들 우리 함께 부르는 이 노래만큼 아름다운 노래는 없어라
수천만 사람들이 평화롭게 집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친구들과 이웃들이 흘린 피로서 얻은 대가였다. 본능적으로 광주시민들은 광장을 정신적인 고향으로 여겼고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집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장소가 되었다. 광주가 해방돼 있던 기간 동안 모두 다섯 번의 집회가 열렸다. 첫 대중 집회는 군대가 퇴각한 날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열리게 됐다. 다음날(5월 23일)에는 제1회 민주화를 위한 범 시민 대회가 열렸는데 15만 명이 운집했다. 이날 집회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것으로 끝났다. 5월24일에는 10만 명이, 25일에는 5만 명, 26일 마지막 집회에는 3만 명이 모였다. 이 마지막 집회에서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 요구가 등장했다. 그 날의 마지막도 다시 한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것으로 끝났다. 비록 집회는 규모가 매우 컸지만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욕구를 표현 할 수 있었다. 이 재의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분수대는 지금 단합의 구심이 되었다. 누구나 걸어 올라가 주저하지 않고 연설을 했다. 여자, 거리의 상인들, 초등학교 선생님, 종교인들. 주부들, 대학생들, 고등학생들과 농부들까지. 그들의 분노한 목소리는 일반 시민들의 공감을 얻었고, 거대한 항쟁의 에너지원이 됐다. 그들은 모여 함께 녹아들고 강력한 연대의식을 체험했다. 그 순간 도시는 하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오랫동안 분열과 분쟁의 원인이었던 지역주의는 민주화운동보다 덜 중요한 것이 되었다. 5월 21일 전남 민주주의 소식지는 우리는 지역적 원한 때문에 우리 목표를 흐리고 싶지 않으며 차별철폐가 아니라 민주화의 원리에 기초한 자발적인 행동임을 잊지 말고 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시다.라고 선언했다. 지역주의을 떨쳐낸 것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에 호소력을 갖는 항쟁의 또 다른 보편성이다. 이제부터는 항쟁의 국제적 함의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광주항쟁이후 국제적 봉기> 1985년 십 수년간 집권해온 동아시아 독재정권들은 안정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광범한 민주세력의 대중적 지지를 받던 김대중과 베니그노 아키노는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비록 무지막지한 탄압에도 불구 한국 민주화 운동은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1980년 5월 27일 학살이 있은 지 2년이 지나 희생자 가족들의 모임이 만들어졌고 항쟁을 다룬 첫 번째 책이 나오기까지 5년이 걸렸다. 1985년 5월17일 80개 대학 연합 집회가 3만 8천 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려 학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일주일 후 73명의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3일 동안 점거하고 광주학살에서 미국의 책임을 묻고 사과를 요구했다. 8월15일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홍 기일씨가 광주 금남로에서 분신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억압된 지 수십 년 후 반역과 항쟁의 물결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86년 2월의 열 여드레 동안 필리핀에서는 개표를 담당했던 30명의 요원이 퇴장함으로써 갑작스런 마르코스 독재 종식에 불을 지폈다. 거리를 떠나지 않았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승리를 거뒀다. 필리핀의 시민혁명은 다시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고무시켰다. 시민혁명이 일어난 지 체 한 달이 되기 전에 추기경과 주교들이 필리핀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1년이 못 되 군부 독재는 무너졌다. 민중운동의 감격스러운 승리의 중심에는 6월 항쟁이 있다. 열흘이 넘도록 수천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 출신 이 한열이 연세대 시위 도중 숨졌고 1백만이 넘는 시민들이 그의 장례식에 몰려들었다. 필리핀에서와 마찬가지로 공공장소를 점거한 대중들의 요구에 군부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대통령 직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7월과 8월에는 백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수천 개의 파업이 봇물처럼 터졌다. 정부의 승인을 얻어낸 후에도 투쟁은 계속됐다. 전 아시아에서 민주화와 인권 운동이 속속 등장했다: 타이완에서 계엄령이 해제됐다; 미얀마에서는 1988년 3월 학생들과 소수민족들이 마치 광주에서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대중운동이 폭발했다. 악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26년 간 집권했던 느윈 대통령을 사퇴시켰다. 8월에 학생들이 이끄는 시위가 5일 동안 벌어져 그에게 사퇴 압력을 넣었다. 노동자 대표, 작가, 승려와 학생들이 힘을 합쳐 다당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총 파업을 벌였지만 군부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발포했다. 100여명의 선거 당선자들을 포함해 수천 명이 체포당했다. 버마군사정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총칼에 의존한다. 다음해, 중국의 학생운동가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범위한 대중 운동을 벌였고 천안문 광장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그 후 몇 년 동안 추적과 체포가 이어졌다. 사회주의의 본산에서조차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반란의 고리는 이어졌는데 베트남의 정치관료인 트란 도 장군은 1989년 공개적으로 베트남에서 다당제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폭발을 경험한 나라는 태국이다. 야당 정치지도자가 20일 동안 벌인 단식 농성은 1992년 5월 수만 명의 사람들을 거리로 끌어 모았다. 군부의 진압으로 수십 명이 부상당했고 그 잔인함 때문에 수친타 크라마욘 장군은 강제 퇴진 당했다. 1998년 인도네시아서는 학생들이 시민혁명을 요구하며 수하르토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한 대학에서 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학생들은 전술상 공공 장소 점거 시위를 새로 도입한 것과 함께 시민혁명 구호도 필리핀의 경험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항쟁들의 관계는 각각이 서로의 특징을 학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나는 혁명적 열망과 실천이 급속하게 퍼지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에로스 효과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에로스 효과라는 개념으로 항쟁의 자발적 연쇄반응과 공공장소 점거 시위와 같은 사건들을 설명한다. 둘 다 자기들의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서 수백만의 보통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례들이다 에로스 효과가 일어나는 순간 사회의 지배 가치(국수주의, 계층제, 통치이념, 지역주의, 사유재산제)는 부정됨과 동시에 만인의 이익은 일반화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광주 콤뮨에서 참가자들간의 유기적 연대라고 지적한 것이다. 에로스 효과는 단순히 마음가짐이나 양심적 세력들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에로스 효과는 수천의 보통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로서 역사를 움켜쥐려는 대중적 혁명 운동을 수반한다. 에로스 효과 개념을 통해 나는 이론가들의 경멸로부터 수백만의 일반인들이 보여주는 자발적 행동의 혁명적 가치를 구제하고자 한다. 또 나는 혁명이 아니라 반동으로 취급받는 그들의 초상을 전복함으로써 무의식과 감정의 가치를 재평가하도록 자극하고자 한다. 에로스 효과는 감정을 중대한 사회 변혁을 가져올 긍정적이고 혁명적 동력이라는 범주 속에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마르쿠제가 말했듯이 자연은 혁명적 과정의 총합이다. 이때 자연은 외부적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향한 본능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자유는 직관적으로 터득되는 것이며. 광주항쟁 기간동안에 벌어진 집합적 현상들 속에도 이 본능적 욕망이 내재돼 있다. 에로스 효과는 분석적인 구조물인가 아니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전술인가? 답은 확실히 전자이다. 공공장소 점거 시위의 갑작스러운 등장;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또 나라 전체로 확산되는 혁명;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동질성을 느끼고 그들의 행동이 가진 힘을 신뢰하는 것; 지역주의 경쟁 범죄 탐욕과 같은 일상적 가치를 내던지는 것: 이것들은 광주에서 벌어진 에로스 효과의 특징이다. 갑작스럽고 기대하지 않았던 대중적 권력 논쟁의 등장은 대중 운동의 중요한 전술이 되었다. <전망> 만약 에로스효과를 높일 수 있다면 이런 역동성이 실제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최소한 두 가지 사례를 알고 있다. 1999년 여름 사파니스타는 인터넷을 이용해 신자유주의에 맞서 시위를 벌일 것을 요구했는데 지난 10년 동안 가장 큰 소요를 겪었던 런던을 포함해 몇 개 도시의 활동가들이 이에 호응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국제적으로 동시적이고 대중적인 항쟁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이 성공하려면 행동을 요구한 그룹 내에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사회적으로 정당한 지도력이 있어야 하고 주도적 힘을 지혜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세력이 놓은 이 불씨가 타기 쉬운 땅에 떨어져야 한다. 사파티스타 외에 광주가 점차 국제 사회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 전함 포템킨과 같이 광주 항쟁은 다시 항쟁의 때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그것은 광주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1972년 베트남 혁명은 국제 사회 전체가 동시에 공격을 하도록 완벽하게 준비를 했다. 80개 국가 이상의 나라에서 참석해 전쟁 반대를 위한 운동 일정을 협의한 파리 대회 이후 베트남인들은 임시 혁명 정부를 선언했던 1972년 4월 군사 공격을 단행했다. 두 번째로 IMF, 세계 은행과 같은 지구적 지배 기구에 맞서기 위한 전선이 전지구적으로 대결을 고조시키면서 역동성을 만들고 있다. 전지구적 자본 지배 체제(IMF, 세계은행, WTO)의 선동으로 지역의 지배 계급들-동아시아와 미국 모두-은 설득을 통해 기업착취와 문화적 지배권을 유지시키는데 실패하자 강제력을 동원하고 있다. 사람들이 한 나라에서 그와 같은 독선적인 경향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운동을 꾸리고 연대와 투쟁의 지구적 역동성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는 세계의 가난한 노동자의 등위에 세워져 있다. 더 많은 양의 자본 집중은 세계 체제의 외곽에 놓인 수백만 민중들의 고통에 기반하고 있다. 세계화 경향은 수백만 민중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간의 국제적 연합이 더욱더 필요하다. 에로스 효과가 활성화되려면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수천 수백만 사람들의 행동이 필요하다.-판에 박힌 일상을 부정하고 뿌리깊은 정해진 틀을 부숴야 한다. 이 과정은 비록 하나의 작은 불씨는 될 수 있지만 작은 집단들의 의지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랑에 빠지듯 에로스 효과를 일으키는 과정은 복잡하다.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종종 에로스 효과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만약 에로스 효과가 계속해서 활성화되었다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역사 이전이라고 이름 붙였던 단계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해 기꺼이 살고 싶은 사회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인류사의 시기로 뛰어 넘어왔을지도 모른다. 광주 항쟁에서 우리는 그런 세상을 잠시 보았다. 1980년의 악랄한 현실에서 한국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잠시나마 자유를 맛봤다. 자치정부와 시민들간 유기적 연대를 이루는 자발성을 통해 광주 사람들이 보여준 사례는 그들이 간직한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오늘날 인류가 지닌 아직 깨닫지 못한 잠재력의 한 표상과 함께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다른 민주화운동을 고취시킨 점, 전략적 조직과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노동계급의 구심점에 대한 필요성을 확실하게 얻었다. 20년이 흐른 오늘에도 항쟁은 우리들에게 인류의 존엄과 투쟁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계속해서 일깨워 주고 있다.
광주에 대한 기억-조지 카치아피카스
조지 카치아피카스
아르키메데스는 언젠가 나에게 지렛목을 주면 지구를 움직여 보이겠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바로 그 지렛목이다. 한국이 독재에서 민주사회로 전환하는 중심 축이었다. 그 열정이 20년 후 전 세계를 공명시키고 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5.18민중항쟁은 미래의 자유사회 및 아시아에서 미국정부와 그의 동맹국들이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한 현실적이고 진지한 평가기준을 제공한다.
광주항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존엄과 자유로운 사회에 대해 분명한 예시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광주는 한국역사에서 프랑스의 파리콤뮨과 러시아의 전함 포템킨에 비교할 수 있을 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파리콤뮨과 같이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했고,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는 토착 군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 당할 때까지 스스로를 통치했다. 또 전함포템킨처럼 광주사람들은 1894년 동학 혁명, 1929년 학생봉기 그리고 1980년 항쟁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한국에서 혁명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의 발신지가 됐다.
수천 명의 희생 속에 벼려진 광주 민중항쟁의 신화적 힘은 독재정부가 2000여명에 이르는 학살을 은폐하려고 시도했던 1980년 이후 처음 5년 동안에 더욱 단련되었다. 광주 콤뮨이 무자비하게 깨지고 난 후 항쟁소식은 자신들을 멸망시키기에 충분했기에 군부는 시체를 불태우고 암매장하고 기록을 지워내려고 했다.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살인마의 이름을 속삭이는 것조차 못하게 하려고 수천의 사람들을 투옥하고 수백 명을 고문했다. 1985년 광주항쟁을 다룬 첫 번째 책 수천 권은 몰수당했고 출판인과 저자로 의심을 받았던 사람은 체포됐다. 군부의 잔인한 학살과 이후 진상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정부가 쉽게 무너질 만큼 한국의 시민사회는 강력했다. 이 재의는 한국국민들이 1987년 그렇게 신속하게 지독한 폭압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광주에서의 저항 때문이다고 지적한다. 전두환 대통령과 그의 군사정부는 1980년 광주에서는 이겼지만 민주주의는 7년 후 민중운동 세력이 군부독재를 몰아내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파리 콤뮨, 전함 포템킨과 같이 광주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단순히 한국(또는 프랑스, 러시아)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이다. 광주 항쟁의 의미와 교훈은 동서남북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이전 혁명의 상징들처럼 1980년 민중항쟁은 전 세계적인 반향을 얻었다. 투쟁의 상징으로서 광주는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자극했다. 자기 손에 자신들만의 권력을 창출하려는 사람들에게 광주항쟁은 선구적이다. 1996년 홍콩의 인권 운동가 산지와는 광주항쟁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썼다.
민중의 힘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수단으로는 파괴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사람들에게서 나온 그 같은 힘은 다음 세대들에게 전승될 것이다. 광주는 민중의 힘(People power)으로 충만한 도시다.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것은 단순히 고립된 한 사건이 아니었다. 아직도 혹독하고 억압적인 체제와 군사정부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광주민중항쟁은 빛이고 희망이다. 선구적인 활동을 하는 광주시민들의 힘과 의지는 매우 인상적이다...오늘날 그로부터 무엇을 취할 수 있을지 주목하면서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다...나 역시 그들의 용기와 정신에 영감을 얻었다. 광주는 결코 꺾이지 않는 민중의 힘을 보여주는 아주 독특한 상징이다. 그 상징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의 깃발이 되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1980년 민중항쟁이 지닌 힘을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 자치력
· 참가자들의 유기적 연대
· 국제사회에서 항쟁의 중요성
<자치력>
광주 시민들의 용기와 용감성이 기념비적인 것처럼 자치력은 그들 봉기의 명백한 보증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이 항쟁의 오직 하나뿐인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싸움의 정점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해서 한 도시를 통제하고 군대가 반격해 올 때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자치역량은 환상적이다. 20세기의 마지막에, 높은 문자 해독률, 대중매체, 그리고 보편적 교육(모든 남성들이 군복무를 해야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극소수의 엘리트들 보다 훨씬 더 현명하게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광주 민중항쟁에서 그러한 자발적인 자치역량을 관찰 할 수 있다.
1980년 5월15일 서울에서 백만 여명이 학생시위에 참여해 독재에 저항했다. 많은 사람들이 독재를 일소할 시간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는 동안 자신들의 성공에 흥분한 학생지도자들은 자유주의적 정치가들의 영향을 받아 정부가 계엄령을 끝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17일과 18일로 예정된 대규모 행동을 연기한다. 이에 비해 군부는 대도시 특히 광주에 수천의 계엄군을 내려보내 강력한 진압을 벌인다. 5월 14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캠퍼스를 에워싼 진압 경찰의 방어선을 뚫었다. 그들이 도심가운데로 진출했을 때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에 지지를 보냈다. 5월16일 한국의 다른 모든 곳이 침묵하고 있을 때 광주에 있는 9개 대학 학생들은 민주광장으로 명명된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저녁, 군 정보요원들과 경찰은 시내 전역에서 활동가들의 집을 급습해 체포했다. 체포를 면한 지도자들은 몸을 숨겼다. 이미 김대중을 포함한 최소한 26명의 전국적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한 목격자에 따르면 운동의 핵심은 무력화 됐다. 또 다른 사람은 학생운동의 지도세력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고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바로 다음날 아침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조직화 됐고-처음에는 수백만이 그리고 이어서 수천만이-경찰과 새로 파견된 부대의 점령에 대항해 행진을 벌였다.
미국의 동의 속에 정부는 1년 전 부산, 마산에서 진압을 맡았던 그 부대로 DMZ에 있던 가장 노련한 계엄군의 일부를 풀어놓았다. 일단 광주에 도착한 계엄군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시민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 18일 아침 첫 번째 대치에서 비무장 학생 시위대를 특수 제작한 곤봉으로 해산시켰다. 도망갔다가 다시 모인 시위대가 반격을 가해 산수동 오거리에서는 폭동진압 경찰 45명이 시위대에 포위돼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잠시동안 사람들 사이에 포로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들을 풀어주기로 결정하고 풀려나자 계엄군은 다시 폭력적으로 공격을 가해 왔다. 한 무리의 계엄군이 학생들을 하나 하나씩 공격했다. 머리를 짓밟고 등을 내리치고 얼굴을 발로 가격했다. 군인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마치 고기 양념을 친 누더기 옷 같아 보였다." 트럭에 짐짝처럼 실린 사람들은 그 위에서 다시 군인들의 구타를 당했다. 밤에 계엄군은 몇몇 대학에 숙영지를 차렸다. 학생들이 저항을 계속하는 동안 군인들은 그들에게 총검을 휘둘렀고 수십 명을 체포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옷을 벗긴 체 잔인한 짓을 당했다. 이 사건을 목도한 한 아이는 부모에게 언제 군대가 오느냐고 물었다. 또 다른 세상물정 모르고 일방적인 정치 신념을 배운 아이는 공산당이 군대를 접수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한 군인은 학생들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면서 이 칼로 베트남에서 베트콩 여자 40명의 가슴을 도려냈다고 악을 썼다. 전 시민들이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충격을 받았다. 시민들에 대한 잔인한 진압행위를 중지시키려고 했던 정보과 형사를 찔러 죽일 만큼 계엄군의 행동은 통제 밖에 놓여 있었다. 이처럼 진압이 계속되고 수백 명이 체포되었는데 학생들은 끊임없이 모여들었고 집요하게 저항했다.
다음날 도시 전체가 참여한 시위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가담하면서 학생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게 줄었다. 이 자발적 민중운동 세대는 혁명의 첫 번째 일반적 특성인 시민과 학생간의 분열을 뛰어넘었다. 노동자들이 참여하자 계엄군은 다시 한번 냉혹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대응했다. --거리에 나선 사람들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었다. 부상자를 돕던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이나 헌혈하던 사람을 막론하고 찔러 죽이고 때리고 살해했다. 일부 경찰들은 비밀리에 포로들을 풀어주다가 그들도 총칼을 맞았다. 시민들은 돌, 몽둥이 칼 파이프 철근 망치로 1만8천여 명의 폭동진압 경찰과 3천여 계엄군에 맞섰다. 비록 수많은 시민들이 살해됐지만 그 도시는 침묵하기를 거부했다.
20일 공식 언론매체와는 달리 정확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투사회보"가 처음으로 발행됐다. 수천의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그들은 계엄군의 곤봉에 흩어졌다가 오후 5시 30분 폭력진압과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5천여 명의 군중이 경찰 저지선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들은 계엄군이 뒤로 물러서자 거리로 몰려나와 연좌시위를 벌였다. 대표를 뽑아 군대와 경찰을 분열시키려고 시도했다. 저녁 무렵 시위대는 전체 인구 70만 중에 20만 명(어떤 이는 30만 명이라고도 한다.)으로 불어났다. 대규모 군중들은 노동자 농민 학생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도시의 가장 번화가인 금남로를 뒤덮은 행렬을 9대의 버스와 200대의 택시가 선도했다. 다시 계엄군은 악독한 방법으로 공격을 가했다. 바로 이 시간 전 도시가 군대와 맞섰던 것이다. 밤에는 자동차와 지프, 택시 등 차량에 불을 질러 군인들을 향해 밀어붙였다. 비록 군부대는 반복적으로 공격을 가했지만 밤이 지나자 마침내 민주광장으로 고립됐다. 광주역에서는 수많은 시위대들이 살해당했고 도청에서는 계엄군이 M16을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그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죽었다.
검열통제를 받던 언론들은 그들 코앞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현장을 보도하지 못했다. 대신에, 어리석게도 파괴적인 행위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경찰의 대응 같은 보고를 기사로 조작해 보도했다. 군대의 잔인성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도가 이뤄지지 않자 수천의 사람들은 MBC방송국을 포위했다. 방송국 관리자들과 수비병력이 후퇴하자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방송시설을 작동시킬 수 없자 사람들은 빌딩에 불을 놓았다. 군중들은 상당히 이성적으로 공공 건물들에 대한 입장을 정했다.
오전 1시, 시민들은 세무서로 몰려가서 집기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국민의 삶과 복지를 위해 써야 할 세금을 국민들을 죽이고 구타하는 군대를 위해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찰서와 다른 빌딩들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반면 방송국과 세무서에 불을 지른 것은 매우 드문 사례다.
세무서와 두 개의 언론사 건물 외에 노동청, 도청 주차장, 16개의 경찰 초소가 불에 탔다. 오전 4시까지 계속된 광주역 전투는 매우 격렬했다. 군대는 다시 M16을 발포했고 그 때 피해규모는 상당히 큰 사례로 기록돼 있다. 믿어지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시민들은 이를 극복했고 군대는 서둘러 후퇴했다.
다음날 오전 9시 1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다시 금남로에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군수품 제조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가서 차량을 징발해 와야 한다고 외쳤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사라졌다가 겨우 7대를 끌고 왔다.(정확히 운전할 줄 아는 사람들의 수만큼). 왔다 갔다 몇 차례 왕복한 끝에 장갑차 7대를 포함해 350대의 차량이 시민들 손에 들어왔다. 이 징발된 차량으로 시내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시위대는 주민들을 불러모으고 이웃 시·군에 항쟁 소식을 알리러 갔다. 어떤 트럭으로는 빵과 코카콜라 공장에서 가져온 음료수를 날랐다. 협상대표들을 뽑아 계엄군 측에 보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관통해 갑자기 총격이 울렸다. 평화적인 해결의 희망은 끝이 났다. 10분 동안 군대는 무차별 사격을 했고 대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 수십 명이 죽고 500여명이 부상당했다.
시민들은 재빨리 대응했다. 총격이 있은 후 2시간이 채 못돼 경찰서에서 처음으로 무기가 털렸다. 더 많은 시민들이 타격대를 만들어 경찰서와 병기고를 털고 두 개의 중심지로 모여들었다. 수천의 사람들이 정부에 대항해 무기를 들지 않았던 한국의 오래된 전통을 가볍게 뛰어넘어 버렸다. 탄광 광부들의 협조를 얻어 화순에서 시위대는 다이나마이트와 뇌관을 획득했다. 방직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나주에서 7대 규모의 탄약과 권총 수백 정을 광주로 가져왔다. 비슷한 무기탈취가 장성, 영암, 담양에서도 일어났다.
항쟁은 급속히 화순, 나주, 함평, 영광,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16개 지역으로 확산됐다. 항쟁의 급속한 확산은 시민들의 자치역량과 자율적인 주도권을 가리키는 또 다른 징표다. 전주와 서울로 항쟁을 확산시키기 위해 일부 시위대가 나갔지만 고속도로, 국도, 철도를 차단한 군대에 의해 격퇴 당했다. 김대중의 출신지인 목포에서는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아끼는 정치인의 체포에 항의해 시위행진을 벌였고 민주 헌법을 요구하며 5일 동안 연속해서 시위를 벌였다. 전주에서는 시청을 점거했고 Jeonji와 이리에서는 경찰이 시위에 동참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화순, 영광부터 광주까지 무장한 시위대를 향해 기총소사가 있었다. 만약 군대가 언론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여행을 제한하지 않았다면 일부 사람들이 희망한대로 항쟁은 전국적인 항쟁이 되었을 것이다. 사북탄광 광부들의 봉기, 부마항쟁, 그리고 수백 건에 이르는 투쟁은 많은 곳에서 사건이 발생할 조건이 성숙해 가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광주공원과 유동 사거리에는 전투소조와 지휘체계가 만들어졌다. 도청을 겨냥해 기관총이 설치되었다. 5시30분까지 군대는 모두 후퇴했다. 오후 8시가 되자 시민들은 도시를 장악했다. 이곳저곳에서 환호가 터졌다. 비록 그들이 가진 무기는 구식으로 군대와 비교가 안될 만큼 보잘것없었지만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은 군대의 기술적 우위 보다 훨씬 강력함이 입증되었다.
5일 동안 시민들은 도시를 굳게 지켰다. 자발적으로 형성된 시민 위원회가 도시 방어를 포함해 모든 핵심적인 공공업무를 조직했고 동시에 분쟁을 평화롭게 마무리하는 한편 더 많은 관을 확보하고 수천의 구속자들(이들 중 일부는 이미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이 풀려나게 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시켰다. 누군가 말하기도 전에 쓰레기는 말끔히 치워졌다. 일찌감치 무장 저항세력이 조직되었다. 광주 공원에서는 78개의 차량이 열을 지어 서있었는데 페인트로 숫자가 매겨져 있었다. 이들에게는 다가올 반격에 대비,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특정 지역을 순찰할 과제가 주어졌다. 시민군 관리 사무실을 만들고 사령부에 접근 할 수 있는 통행증과 차량 통과를 위해 안전통행권, 연료 주입권을 발행했다.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군부의 정보요원을 수색했지만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었음이 드러났다.
비상조직이 자연스럽게 출현했다. 그 과정은 명백했다. 항쟁을 자치공동체로 언급했다. 5월 22일 오전 10시30분 개신교 목사 8명이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침례교 목사였던 아놀드 페터슨이다. 그는 나중에 모임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그들이 공통으로 느낀 것은 "이럴 수 없다"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아무런 사전 계획이나 지휘도 없이 시민들이 봉기해 정부를 몰아내는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항쟁이 시작됐을 때 이곳에 지휘자는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항쟁의 가혹한 시련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군부에 대항하는 집단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단지 잔인성 때문에 군인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곧 위원회로 불리는 두 집단이 해방광주에 만들어졌다. 하나는 시민수습위원회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투쟁위원회다. 시민수습위 또는 5.18범시민대책위원회는 목사, 상인, 변호사, 교수, 정치인등 약 20명으로 구성됐다. 독립운동 지도자로 존경받던 최한영이 이끌었는데 그들은 학생투쟁위(SAC)가 만들어지기 몇 시간 전에 만들어졌고 즉시 계엄사령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들은 가능하면 항쟁의 평화적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시민수습위원화와는 달리, 강경한 학생투쟁위는 이전에 한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몇 년 후 개인적인 경험을 증언하면서 송기숙 교수는 이 사건들을 자세히 얘기했다. 그와 명노근 교수는 5월22일 분수대 집회에 나갔는데 같은 날 페터슨도 목회자들의 회합에 참석했다. 명노근은 운동가들을 모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람들은 시민수습위 구성원들의 과거 행적에 비춰 그들이 투쟁이 아니라 적과 내통하려는 것이 아닌가를 걱정했다. 송기숙은 명노근을 따라 나섰다. 명노근은 휴대용 마이크가 건네 지자 연설을 시작했다. 전남대와 조선대생들 중에 믿을만한 사람들로 대표 다섯 명을 뽑아달라. 그는 계속했다.
비록 계엄군이 지금 물러났지만 시민군은 당황하고 있고 혼란을 겪고 있는 데다 지휘본부도 없다. 시민수습위는 이미 만들어져 해결을 위한 전제조건을 가지고 상무대로 갔다. 그러나 시민군을 통제할 수가 없다. 이 모든 일들은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므로 학생들이 지도력을 세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도청으로 가서 학생 수습위를 만들자.
이와 함께 명노근 교수는 군중들을 이끌고 도청 정문으로 갔다. 거기서 폭동진압경찰에게서 빼앗은 헬맷을 쓴 시민군이 긴장속에 보초를 서고 있었다. 10명의 학생대표들이 도청으로 들어갔고 완전히 혼란상태였던 행정관서로 안내되었다.
강경파들은 민주주의와 인간존엄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면서 학생수습위원회와의 대화조차 거절했다. 송교수의 끈질긴 설득으로 학생투쟁위원가 구성돼 곧바로 장례준비와 대안매체, 차량 통제, 무기 회수와 분배 등이 이뤄졌다. 반면 시민수습위는 군부와 협상에 나섰다. 때때로 두 위원회는 함께 성명을 발표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5월 24일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집회에 모이자 시민수습위원들은 확성기를 망가트렸다. 어디선가 확성기를 가져왔지만 시민수습위원들은 전원을 꽂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속에서도 시민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고 어떤 전기공이 자동차 건전지에 음향시설을 연결시키자 학생투쟁위는 격앙된 집회를 진행했다.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다수는 무기 회수를 주장했지만 일부 소수는 그런 식의 항복을 거부했다. 밤이 오자 소수파만 남은 체 온건파들은 모두 물러났다. 노동자들과 운동가들이 가세하고 명칭을 시민학생투쟁위원회(CSAC)로 바꿨다.
SAC에서 CSAC로 교체는 노동자 계급의 선도적 역할을 반영한 것이다. 비록 학생들은 항쟁에 불을 지폈지만 그들은 통솔력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미 화순 탄광 광부들과 여성 방직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언급한바 있다. 그 외에도 노동자 계급의 선도적 역량을 보여주는 예는 많다. 피터슨의 기록에 따르면 21일 장 신부가 총을 잡고 있는 이들이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젊은 실업자나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재의는 5월 22일 많은 시민들이 시민수습위원회에에 총기를 반납한 반면 노동자와 하층민들은 총을 놓지 않으려 했다고 기록했다. 이들 투사들은 독재를 뒤엎고 전국적인 항쟁이 불붙기를 바랬고 일거에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죽으려고 했다. 그들은 계엄령 해제, 정치범 석방뿐만 아니라 전두환의 퇴진과 완전한 민주주의와 같은 한국 정치의 질적 변화를 바랬다. 학원 자율을 위한 투쟁은 동시에 사회적 자율성과 민주주의로 일변했다.
지금 분명히 해야할 것은 SAC(학생투쟁위원회)는 시민항쟁이 인도한 확실한 전망과 불굴의 용기를 지니고 헌신했던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의 핵심이었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의 별 중에서 아무도 윤 상원 만큼 밝게 빛나지는 않았다. 5월 21일 20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에서 윤 상원은 개별적으로 돌격대를 이끌고 무기고를 급습했고 아시아 자동차에 있는 350대의 차량과 3대의 장갑차를 통제하는데 관여했다. 공공장소에서 일어나는 발포, 끝이 없는 회의, 매일매일 이뤄지는 대중 집회 그리고 수시로 일어나는 사소한 충돌과 같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윤 상원은 유일하게 전략적 시각을 갖고 있던 사람으로 비췄다. 그는 한 줌의 저항으로 독재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다고 믿고 도박을 했다. 만약 사람을 더 많이 죽일 용기가 없으면 항복할 것이다. 만약 그럴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 야만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저항이 일어나기를 바랬다.
야학과 민족민주 노동자 동맹의 일부와 함께 윤 상원과 전 영호는 일간지 투사회보를 발간했는데 이것은 무장투쟁을 보완하고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그들은 시장과 위원회의 보수적인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무장세력의 임시 지도자였던 박 남순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윤 상원은 강경파들의 열정을 하나로 묶고 무장 저항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중요한 것은 보다 투쟁적인 이들이 시인 김남주와 함께 파리 콤뮨에 관한 스터디 그룹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윤 상원은 위원회의 대표에 자기 이름을 올리기를 거절한 대신 대변인 자격으로 선전활동, 기획과 배급 업무를 통합적으로 관할했다. 선전활동은 4개의 집단으로 이뤄져 있었다: 확성기를 단 차량으로 거리에서 공지사항을 알리는 것, 투사회보와 그 밖의 인쇄물 발행, 재원마련과 사람들에게 헌혈 권장, 집회 조직 등이 그것이다.
26일 군부는 군대를 광주 근교로 배치하고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군대가 다음날 이동해 들어올 것임을 알렸다. 윤 상원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운 수백 명중에 있었고 27일 탱크 부대가 도시를 재 장악하면서 윤 상원을 포함한 수 십 명이 살해당했다.
윤 상원의 역할만큼 중요한 사실은 그와 그가 속한 미약한 단체만으로는 대중 운동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자연발생성과 조직적 움직임의 변증법 속에서 광주를 휩쓴 대중운동의 추진력이 분명해 진다. 무기를 들고 싸운 많은 강경파들은 지도부의 제안을 따르기보다는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결정했다. 예를 들면 5월22일 시민군 지휘부는 백내평을 영산포에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당사자가 이를 거절했다. 대신 백은 화순역으로 4명과 함께 가서 무기를 조달해 광주로 돌아왔다. 개인적인 판단이 좋은 결말을 가져온 특별한 사례지만 전략이 부재한 조직으로 인해 지지자들은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투사회보는 시민들에게 방송을 통해 전국에 당시의 현장이 알려지도록 KBS를 점령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투쟁기간 중에 군중들은 그곳을 불질러 버렸다. 만약 시민들이 윤 상원 그룹의 얘기에 귀기울였다면 타 지역에 항쟁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을까? 전국적 항쟁이 일어났을까? 광주에서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건 정부를 타도하는데 성공하려면 투쟁 집단 내 전략적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지나고 보니 운동에서 이 약점은 쉽게 눈에 띄지만 싸움이 고조될 때 선택은 제한돼 있다. 광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대성이고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특징이다.
<참가자들의 유기적 연대>
도시는 더 이상 정부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 광주시민들은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피로서 이 새로운 체제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21일 아침, 거리는 새로워져 있었다. 시위대를 위해 거리마다 식사가 준비되었고 모든 사거리에서 식사를 제공했다. 여성들은 적당한 차량을 세워서 음식을 올려주었다. 정부의 야만성을 목도했던 거리와 시장 상인들은 음식을 공급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반면 부자동네는 텅 비었다. 주부 수백 명이 금남로에서 시위대에 음식을 제공했다. 아무도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음식 제공은 시위 군중들의 투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5월21일 군인들을 도시 밖으로 몰아낸 후 시민군 소속 수백 명이 도시를 순찰했다. 모든 사람이 환희와 안도감을 나눴다. 싸움은 끝났고 도시는 자유를 얻었다. 시장과 가게들이 다시 열리고 식료품과 전기는 정상적으로 공급됐다. 어떤 은행도 털리지 않았고 도둑질, 강간이나 절도와 같은 일반 범죄조차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외국인들도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했다. 피터슨은 미국 성조기를 달고 마치 외국인 차량임을 크게 써 붙인 것과 다름없이 차를 몰고 다녔는데 거리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관, 연료, 담배들은 공급이 딸렸다. 시민수습위원들이 군으로부터 관을 더 얻어내려고 하는 동안 연료를 배급했고 담배는 새로 전우애를 나눈 사람들끼리 서로 나눠 폈다. 어떤 이들에게 담배를 나눠 피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이 됐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담배가 남아 있던 가게 주인들 중에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한 개피씩 파는 사람도 있었고 때로는 그냥 나눠주기도 했다. 병원에서 피도 부족했지만 피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몰려와 헌혈을 했고 그 중에는 술집 접대부도 있었다. 많은 집회에서 수십 만원이 모아져 수습위에 전달되기도 했다. 이 모든 사례들은 도시 전체가 놀랍도록 일체감을 이뤘음을 가리킨다. 많은 목격자들은 대중들 속에서 새로운 연대의 정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항쟁 기간 내내 광주시는 서로 도우며 위기를 극복했다. 광주시민들은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에게 의지했고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서로를 격려했다. 그들은 필요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고 부상자들에게 피를 주고 기꺼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공공치안 제도가 완전히 부재한 상황에도 불구 광주시민들은 치안과 질서를 완벽히 유지했다. 비록 수많은 무기들이 시민들 손에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사고가 나지는 않았다. 전당포나 보석상에는 평상시에 일어나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변안전 때문에 익명으로 글을 남긴 한 광주대 교수는 값을 따지지 않고 보이는 대로 물건을 사대던 시민들이 생필품을 나눠 가졌다. 참을성 없고 이윤 챙기기에 익숙했던 상인들이 전혀 값을 올리지 않았다. 시민들은 담배 잠옷 음식 음료수를 제공하는 식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어떤 수치스러운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고 무방비 상태의 은행에서 돈을 약탈하지 않았다. 광주에 살던 외국인들에 해를 주지도 않았다.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 6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놓았다.
참여하지 않은 사람, 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해방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젊은이들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들의 뺨은 피로 범벅이 돼 있었다. 피묻은 머리띠를 두르고 목이 쉬도록 구호를 외쳤다. 우리들의 사랑하는 이웃들, 젊은이, 죄 없는 어린이와 주부들조차도 차량 행렬에 동참했다.....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김밥과 음료수를 가져 왔다....그들은 시위대들에게 달걀 빵 과자 우유 음료수를 주고 싶어했다. 어떤 노인 한 분이 음식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들어 올려주면서 멈칫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비장함을 보았다. 음식을 준비 못한 주부들은 물동이를 날라, 먹고 씻을 수 있게 해줬다. 이는 피의 투쟁이자 삶을 공유하려는 사랑이었다. 어떤 사람은 시위대 참가자들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고 약을 가져온 약사도 있었으며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1980년 6월 카톨릭 광주교구의 신부는 같은 취지의 말을 되풀이했다.
군인들은 외부와의 교통을 차단했지만 음식을 들여올 필요가 없었고 사재기나 부당하게 이익을 얻는 사람도 없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서로 음식을 나눠 먹었다. 총을 맞은 사람이 늘어나면서 피가 필요해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헌혈을 했다...광주시민들은 거리의 돌멩이와 유리 최루탄 파편들을 치우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총을 맞아 위험한 환자들을 옮겼다. 버스와 택시 운전사들은 자기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이들을 숨겨줬다. 부랑아들과 고아들은 전에 없이 고결했다."
사람들 사이를 묶는 이 새롭고 놀라운 연대의 출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협력과 공동체적 가치로 장사하는 사람들간의 경쟁, 개인들의 사욕과 같은 일상의 가치들을 억제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
며칠동안,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를 치우고 밥을 짓고 공짜로 음식을 제공하면서 반격을 예상해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광주를 해방시키는데 기여했고 해방 광주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집단이 부상했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시민군 또는 동지(군인들을 적이라고 부는 것과는 반대로)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그들은 시민들을 보호하고 반대로 시민들은 그들을 돌봐주었다. 어떤 가르침이나 전 세계 군대에 기괴한 행동을 끌어내는 군부의 광기도 없이 시민군들은 훌륭하게 행동했다. 망설이지 않고 대중들의 욕구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마지막 순간이 임박했을 때 윤 상원은 개인적으로 시민군들 중에 고등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 살아남아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발했지만 눈물을 삼키며 젊은이들은 떠났다.
시민군들은 시민들에게 봉사하고 매일 도청 분수대 주변에서 군중 집회가 열렸다. 5월 16일 민주광장으로 다시 이름 부쳐진 이곳은 도시가 해방되기 전부터 이미 성지가 되었다. "민주화 성회"에서 쓰여진 시는 이런 격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남쪽 하늘은 아름다워라.
나발을 부는 천사도 없고.
꽃밭을 배회하는 색색의 나비 없이도
남쪽 하늘은 아름다워라
분수대에서 형형 색색 흩뿌리던 물줄기가 멈추던 날
조화조차 시들어 버리던 날
나는 너에게 가고 당신은 한 달음에 내게 오고
최루탄이 그치던 날
무진벌에서 온 사람들
모든 민주시민들: 지식인 노동자 농부들
사람들은 도청 분수대 앞에 모여들어
분수대에 손을 대는 사람들
잔디 위에 서고 서로를 껴안고 서로 마주보고 우는 사람들
우리 함께 부르는 이 노래만큼
아름다운 노래는 없어라
수천만 사람들이 평화롭게 집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친구들과 이웃들이 흘린 피로서 얻은 대가였다. 본능적으로 광주시민들은 광장을 정신적인 고향으로 여겼고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집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장소가 되었다. 광주가 해방돼 있던 기간 동안 모두 다섯 번의 집회가 열렸다. 첫 대중 집회는 군대가 퇴각한 날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열리게 됐다. 다음날(5월 23일)에는 제1회 민주화를 위한 범 시민 대회가 열렸는데 15만 명이 운집했다. 이날 집회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것으로 끝났다. 5월24일에는 10만 명이, 25일에는 5만 명, 26일 마지막 집회에는 3만 명이 모였다. 이 마지막 집회에서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 요구가 등장했다. 그 날의 마지막도 다시 한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것으로 끝났다.
비록 집회는 규모가 매우 컸지만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욕구를 표현 할 수 있었다. 이 재의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분수대는 지금 단합의 구심이 되었다. 누구나 걸어 올라가 주저하지 않고 연설을 했다. 여자, 거리의 상인들, 초등학교 선생님, 종교인들. 주부들, 대학생들, 고등학생들과 농부들까지. 그들의 분노한 목소리는 일반 시민들의 공감을 얻었고, 거대한 항쟁의 에너지원이 됐다. 그들은 모여 함께 녹아들고 강력한 연대의식을 체험했다. 그 순간 도시는 하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오랫동안 분열과 분쟁의 원인이었던 지역주의는 민주화운동보다 덜 중요한 것이 되었다. 5월 21일 전남 민주주의 소식지는 우리는 지역적 원한 때문에 우리 목표를 흐리고 싶지 않으며 차별철폐가 아니라 민주화의 원리에 기초한 자발적인 행동임을 잊지 말고 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시다.라고 선언했다. 지역주의을 떨쳐낸 것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에 호소력을 갖는 항쟁의 또 다른 보편성이다. 이제부터는 항쟁의 국제적 함의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광주항쟁이후 국제적 봉기>
1985년 십 수년간 집권해온 동아시아 독재정권들은 안정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광범한 민주세력의 대중적 지지를 받던 김대중과 베니그노 아키노는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비록 무지막지한 탄압에도 불구 한국 민주화 운동은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1980년 5월 27일 학살이 있은 지 2년이 지나 희생자 가족들의 모임이 만들어졌고 항쟁을 다룬 첫 번째 책이 나오기까지 5년이 걸렸다. 1985년 5월17일 80개 대학 연합 집회가 3만 8천 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려 학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일주일 후 73명의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3일 동안 점거하고 광주학살에서 미국의 책임을 묻고 사과를 요구했다. 8월15일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홍 기일씨가 광주 금남로에서 분신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억압된 지 수십 년 후 반역과 항쟁의 물결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86년 2월의 열 여드레 동안 필리핀에서는 개표를 담당했던 30명의 요원이 퇴장함으로써 갑작스런 마르코스 독재 종식에 불을 지폈다. 거리를 떠나지 않았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승리를 거뒀다. 필리핀의 시민혁명은 다시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고무시켰다. 시민혁명이 일어난 지 체 한 달이 되기 전에 추기경과 주교들이 필리핀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1년이 못 되 군부 독재는 무너졌다.
민중운동의 감격스러운 승리의 중심에는 6월 항쟁이 있다. 열흘이 넘도록 수천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 출신 이 한열이 연세대 시위 도중 숨졌고 1백만이 넘는 시민들이 그의 장례식에 몰려들었다. 필리핀에서와 마찬가지로 공공장소를 점거한 대중들의 요구에 군부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대통령 직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7월과 8월에는 백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수천 개의 파업이 봇물처럼 터졌다. 정부의 승인을 얻어낸 후에도 투쟁은 계속됐다.
전 아시아에서 민주화와 인권 운동이 속속 등장했다: 타이완에서 계엄령이 해제됐다; 미얀마에서는 1988년 3월 학생들과 소수민족들이 마치 광주에서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대중운동이 폭발했다. 악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26년 간 집권했던 느윈 대통령을 사퇴시켰다. 8월에 학생들이 이끄는 시위가 5일 동안 벌어져 그에게 사퇴 압력을 넣었다. 노동자 대표, 작가, 승려와 학생들이 힘을 합쳐 다당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총 파업을 벌였지만 군부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발포했다. 100여명의 선거 당선자들을 포함해 수천 명이 체포당했다. 버마군사정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총칼에 의존한다.
다음해, 중국의 학생운동가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범위한 대중 운동을 벌였고 천안문 광장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그 후 몇 년 동안 추적과 체포가 이어졌다. 사회주의의 본산에서조차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반란의 고리는 이어졌는데 베트남의 정치관료인 트란 도 장군은 1989년 공개적으로 베트남에서 다당제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폭발을 경험한 나라는 태국이다. 야당 정치지도자가 20일 동안 벌인 단식 농성은 1992년 5월 수만 명의 사람들을 거리로 끌어 모았다. 군부의 진압으로 수십 명이 부상당했고 그 잔인함 때문에 수친타 크라마욘 장군은 강제 퇴진 당했다. 1998년 인도네시아서는 학생들이 시민혁명을 요구하며 수하르토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한 대학에서 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학생들은 전술상 공공 장소 점거 시위를 새로 도입한 것과 함께 시민혁명 구호도 필리핀의 경험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항쟁들의 관계는 각각이 서로의 특징을 학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나는 혁명적 열망과 실천이 급속하게 퍼지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에로스 효과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에로스 효과라는 개념으로 항쟁의 자발적 연쇄반응과 공공장소 점거 시위와 같은 사건들을 설명한다. 둘 다 자기들의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서 수백만의 보통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례들이다 에로스 효과가 일어나는 순간 사회의 지배 가치(국수주의, 계층제, 통치이념, 지역주의, 사유재산제)는 부정됨과 동시에 만인의 이익은 일반화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광주 콤뮨에서 참가자들간의 유기적 연대라고 지적한 것이다. 에로스 효과는 단순히 마음가짐이나 양심적 세력들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에로스 효과는 수천의 보통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로서 역사를 움켜쥐려는 대중적 혁명 운동을 수반한다.
에로스 효과 개념을 통해 나는 이론가들의 경멸로부터 수백만의 일반인들이 보여주는 자발적 행동의 혁명적 가치를 구제하고자 한다. 또 나는 혁명이 아니라 반동으로 취급받는 그들의 초상을 전복함으로써 무의식과 감정의 가치를 재평가하도록 자극하고자 한다. 에로스 효과는 감정을 중대한 사회 변혁을 가져올 긍정적이고 혁명적 동력이라는 범주 속에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마르쿠제가 말했듯이 자연은 혁명적 과정의 총합이다. 이때 자연은 외부적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향한 본능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자유는 직관적으로 터득되는 것이며. 광주항쟁 기간동안에 벌어진 집합적 현상들 속에도 이 본능적 욕망이 내재돼 있다.
에로스 효과는 분석적인 구조물인가 아니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전술인가? 답은 확실히 전자이다. 공공장소 점거 시위의 갑작스러운 등장;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또 나라 전체로 확산되는 혁명;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동질성을 느끼고 그들의 행동이 가진 힘을 신뢰하는 것; 지역주의 경쟁 범죄 탐욕과 같은 일상적 가치를 내던지는 것: 이것들은 광주에서 벌어진 에로스 효과의 특징이다. 갑작스럽고 기대하지 않았던 대중적 권력 논쟁의 등장은 대중 운동의 중요한 전술이 되었다.
<전망>
만약 에로스효과를 높일 수 있다면 이런 역동성이 실제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최소한 두 가지 사례를 알고 있다. 1999년 여름 사파니스타는 인터넷을 이용해 신자유주의에 맞서 시위를 벌일 것을 요구했는데 지난 10년 동안 가장 큰 소요를 겪었던 런던을 포함해 몇 개 도시의 활동가들이 이에 호응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국제적으로 동시적이고 대중적인 항쟁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이 성공하려면 행동을 요구한 그룹 내에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사회적으로 정당한 지도력이 있어야 하고 주도적 힘을 지혜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세력이 놓은 이 불씨가 타기 쉬운 땅에 떨어져야 한다. 사파티스타 외에 광주가 점차 국제 사회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 전함 포템킨과 같이 광주 항쟁은 다시 항쟁의 때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그것은 광주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1972년 베트남 혁명은 국제 사회 전체가 동시에 공격을 하도록 완벽하게 준비를 했다. 80개 국가 이상의 나라에서 참석해 전쟁 반대를 위한 운동 일정을 협의한 파리 대회 이후 베트남인들은 임시 혁명 정부를 선언했던 1972년 4월 군사 공격을 단행했다.
두 번째로 IMF, 세계 은행과 같은 지구적 지배 기구에 맞서기 위한 전선이 전지구적으로 대결을 고조시키면서 역동성을 만들고 있다. 전지구적 자본 지배 체제(IMF, 세계은행, WTO)의 선동으로 지역의 지배 계급들-동아시아와 미국 모두-은 설득을 통해 기업착취와 문화적 지배권을 유지시키는데 실패하자 강제력을 동원하고 있다. 사람들이 한 나라에서 그와 같은 독선적인 경향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운동을 꾸리고 연대와 투쟁의 지구적 역동성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는 세계의 가난한 노동자의 등위에 세워져 있다. 더 많은 양의 자본 집중은 세계 체제의 외곽에 놓인 수백만 민중들의 고통에 기반하고 있다. 세계화 경향은 수백만 민중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간의 국제적 연합이 더욱더 필요하다. 에로스 효과가 활성화되려면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수천 수백만 사람들의 행동이 필요하다.-판에 박힌 일상을 부정하고 뿌리깊은 정해진 틀을 부숴야 한다. 이 과정은 비록 하나의 작은 불씨는 될 수 있지만 작은 집단들의 의지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랑에 빠지듯 에로스 효과를 일으키는 과정은 복잡하다.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종종 에로스 효과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만약 에로스 효과가 계속해서 활성화되었다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역사 이전이라고 이름 붙였던 단계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해 기꺼이 살고 싶은 사회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인류사의 시기로 뛰어 넘어왔을지도 모른다.
광주 항쟁에서 우리는 그런 세상을 잠시 보았다. 1980년의 악랄한 현실에서 한국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잠시나마 자유를 맛봤다. 자치정부와 시민들간 유기적 연대를 이루는 자발성을 통해 광주 사람들이 보여준 사례는 그들이 간직한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오늘날 인류가 지닌 아직 깨닫지 못한 잠재력의 한 표상과 함께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다른 민주화운동을 고취시킨 점, 전략적 조직과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노동계급의 구심점에 대한 필요성을 확실하게 얻었다. 20년이 흐른 오늘에도 항쟁은 우리들에게 인류의 존엄과 투쟁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계속해서 일깨워 주고 있다.
첨부파일 : 광주코뮨20년이후.rt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