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찻집의 낙서

정민희2007.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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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찻집의 낙서

그남자

오랜만에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근처 서점에 놀러 왔다가 날씨도 춥지 않고 해서

그냥 혼자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여기까지 왔죠.

 

이 거리는 많이 변하는 듯 하면서도

참 변하지 않네요.

눈에 약간 거슬리는

커다란 커피 체인점을 빼고는

크데 달라진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우리가 자주 가던

그 전통찻집도 그대로 있습니다.

 

좁은 나무 계단에 올라

우리가 앉던 구석 자리를 찾아가서

녹차를 한잔 시키고는

새카맣게 써 있는 벽의 낙서에서

그녀와 내 이름을 찾아냅니다.

 

'2000년 겨울, 우리가 이 곳에 왔다 가다.'

그녀와 내 이름

그리고 그 사이에 그려진 하트 하나.

 

나는 그 낙서를 한참 바라보다가

펜을 꺼내서 그 오래된 낙서 밑에

다시 한마디를 적었습니다.

 

'2003년 겨울,

혼자가 된 내가 이 곳엘 다녀가다.'

 

그여자

인사동 거리의 이 오래된 찻집은,

다락방에 숨겨 놓은 꿀단지

어린 시절의 그림 일기

아빠의 비상금과 엄마의 비밀 통장처럼

 

그렇게 가끔씩 꺼내 보면

혼자 행복해지는 곳이에요.

 

바람이 부는 날

얼음이 녹는 날

코끝이 매운 날

가슴이 슬픈 날..

난 이 곳을 찾죠.

 

"아,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안녕하셨죠."

얼굴을 익힌 주인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차를 주문하고

녹찻물이 적당히 식길 기다립니다.

 

그 사이 난 버릇처럼

우리의 오래된 흔적을 찾아보죠.

그런데 오늘 우리 이름 밑으로

새로운 낙서가 하나 매달려 있습니다.

 

이건 분명 그 사람 글씨인데..

 

오래지 않은 어느 날 그 사람도

이 곳을 다녀갔나 봅니다.

 

겨울 볕이 스미는 나무창틀 위에,

김이 피어오르는 녹찻잔 속에,

오랜만에 느끼는 그리움 하나가

가만히 내려앉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