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란 명칭이 어쩐지

권동현2007.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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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일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란 명칭이 어쩐지 어색하다.

붓다의 통념적이고 사전적 정의는 스스로 깨어난 자란 뜻이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은 붓다가 되기 이전 아직 無明의 상태였던 한 인간의 태어남이었을 뿐이다.

출가 이후 6년 동안 구도의 길을 걷다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했던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란 의미에 더 정확할 것이다.

 

하나의 우상을 모시고 있는 듯 하다.

부처 본연의 가르침 보다 그의 영적인 능력과 초인적 삶에 무게를 부여하고 있다.

비록 그의 삶 자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시할 순 있다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깨달음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한 하나의 지침일 뿐이다.

主客이 전도된 것도 모자라 점점 더 우상화돼 가고 있다.

 

그렇게 살 수 없다면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결국 붓다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쟁이든 중생이든 백성이든 교조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보다 교조의 가르침 안에서 자신의 내적 안정을 꾀하거나 선택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 더 많다.

 

자신의 내적 안정을 최고로 치는 사람은 소승의 목탁을 거머쥔 채 타인의 의미를 소홀히 하기 쉽다.

 

스스로를 선택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본질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을 위축시키고 한계 지은 사람에 불과하다. 자신 안에서 절대성과 위대함을 꽃 피울 수 없었기에 외부의 절대자와 위대함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노예 근성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등신불'을 보았다.

김동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TV 드라마였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악업을 소멸시키고 인연 맺은 자 모두를 구원코자 했던 한 불제자의 염원을 슬프고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깨달은 이의 평화와 안녕한 모습을 그려낸 불상에 익숙했기에 고뇌와 슬픔이 어우러진 등신불의 얼굴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소설과 드리마 속 주인공 '나'와 마찬가지로.

 

가슴 뭉클한 마음에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아니, 오히려 염원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내 안에서 더 강렬하게 인식되었다고 할까?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부처 아닌 부처가 된 만적선사의 마음을 내 안에 키우고자 한다.

 

이기와 집착의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상즉을 잊곤 하는 지금의 모습은 결코 '나' 답지 않은 삶이다.

 

만적선사라는 사람과 소신공양의 일화가 실재한 사건인지를 찾아봤지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답은 이미 내 안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