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다.

이상준2007.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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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이것을 생각하게 된 이유

 

 우리는 단지 흙에서 난 동식물의 파편들이 부모의 몸 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형성된 난자와 정자가 교배를 통해 '생겨난' 존재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만물의 영장이나 영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뇌라는 '신체의 부위'가 발달했기 때문에 사고할수 있을 뿐이다. 치매나 기억상실증이 그러한 것에 대한 단적인 예이다. 그러므로 전생이나 후생의 존재는 근거가 없으며 단지 현생만 존재한다.

 

 위의 논증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그토록 대단하다고 여기던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실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이는 곧 인생의 목적 또한 소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으면 끝날 인생ㅡ 힘들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생 자체가 고통이다.'

 

 아마 이 명제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설사 인생에 대한 고통을 극복한다하더라도 그 극복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고통이 발생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결국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서 그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죽음'이다. 삶이 고통이므로 그 삶을 없애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삶을 없앤다는 것은 곧 '자살'을 의미하며 이는 실제로 많은 자살자들이 가지고 있는 논증구조이기도 하다.

 

 과연 그러한가? 내가 봤을 때 '자살'이란 해결책이 아니라 도피책일 뿐이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지금 느끼고 있는 회의를 해결하기 위함이므로 우선 차치한다. 아직 내게는 삶에 대한 의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모든 생물에 존재하고 있는- 이 의지가 나를 문제에 대해 도피하기 보다는 해결하기를 바라게 만들고 있다.

 

 삶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데다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면 정말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고통스럽지는 않다면 어느 정도 일말의 가치 정도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인생이 고통스럽지 않기 위한- 나아가서는 행복을 위한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과연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무엇일까?

 

2. 적어도 '성공'은 행복의 요소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보통 '노력'과 '욕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욕심이 생겨나고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 실패하면 불행을 느끼고 성공하면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빵 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생존욕구 이상의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인간이 불행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 이외의 동물들은 대체로 단순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에 비교적 간단하게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언제나 욕구불만이기 때문인데 이는 비유하자면 공급이 수요보다 현저하게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수지를 맞추기 위해서는 공급을 줄이든지 수요를 늘리던지 해야 하지만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욕심은 무한하며 노력은 힘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두가지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1) 욕심을 줄인다. 또는 쓸데없는 욕심을 제거한다.

 (2)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1)은 우선 논외로 두자. (2)를 보면 약간 아이러니컬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력하는 와중에 우리는 피로에 의해 불행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는 방법이다. 성취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노력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노력한 사람들이 모두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신은 불행을 위해 불행을 감수한 것이므로 헛된 행위를 한 셈이다. 어느 누구도 헛된 행위를 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결론은 -매우 슬프지만 무욕이나 절제와 같은- 종교인들이나 지켜야 할 것 같은 금언이 남게 된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만족이라든가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 게으름이나 우둔함으로 치부되는 바로 이 시대의 세태가 나는 매우 불만스럽다. 이것은 바로 서양에서 건너온 시장경제주의에 의한 병폐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솝우화에 보면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안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동양에도 '안분지족'이라는 비슷한 말이 있다. 이런 좋은 말들을 내버려 두고 우리는 위에서 본 책들의 제목과 같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말고 끝없이 노력하라'는 명령을 듣게 된다. 명령의 강제성에 의해 우리는 계속 채찍질을 받게 되고 결국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만다. 노예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결론은 누구나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키가 작은 사람이 있으면 키가 큰 사람이 있고 꿈이 큰 사람이 있다면 꿈이 작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모두 '자신의 뜻'이 있는 것인데 왜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뜻'에 주목하지 않고 오직 많은 것을 가진 '타인의 뜻'을 탐내도록 강요하고 있는걸까. 마치 그러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인간마냥 말이다.

 

우리는 거대한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 그리고 우선 앞서나가고 있을 때에는 행복을 느낄 수 있겠지만 결국은 뒤처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체력이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계가 없는 인간은 매우 극소수의 인간일 뿐이며 이러한 극소수의 인간이 제시하는 기준이란 보통 사람에게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제시한다.

 이 의미없는 레이스에서 벗어날 것을.

 벗어나서 자신만의 활주로를 닦아 두기를.

 

3. 여전히 물음표로 얼룩져 있는 삶

 

나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항상 입에 "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쩌면 단순한 반항심에서 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선배나 선생님들과 대립이 꽤나 잦았다. 그럴 때마다 하는 말이 "토달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듣고도,

 

"왜 토달지 말아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되죠?"

 

"왜긴 왜야. 잘 살아야 될 꺼 아니야?"

 

"충분히 먹고 입을 만큼은 되잖아요."

 

"야야, 누구누구는 봐라. 저렇게 잘 사는데...또 불쌍하게 먹고 입어봐라.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잘 보일려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은 가축이나 할 짓이잖아요."

 

"뭔 소리야. 닥쳐."

 

"..."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으니 토달지 말라고 한 것 같기도 하다.

 

진리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삶에 대한 회의주의는 여전히 내 머리속에 교차된 체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러한 교차점을 떨쳐낼 수 없기에 살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학창시절 수학경시대회 문제를 풀 때, 정답은 나오지 않더라도 풀이만으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문제를 풀기 위해 책상에 앉아 전전긍긍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문제라 할 지라도 풀기 위해서 푸는 문제가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