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다시 생각하기

이영주2007.06.05
조회26

 

밀양, 다시 생각하기


 

최근 본 영화는 뿐이다. 극장에도 가지 못할 만큼 바쁜 것은 분명 아닌데도 불구하고 선뜻 극장에 가지 못하는 것, 아니 가지 않는 것은 보고 싶은 영화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극장이라는 ‘놀이’와 ‘휴식’의 공간과 괴리된 최근의 나를 반영하는 현상일까.


각설하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유일하게 본 영화인 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다. 개봉일에 맞춰 영화를 보았고, 보자마자 리뷰를 썼다. 사실, 리뷰라고 하기엔 뭐한 간단한 소감글이었는데, 그걸 그냥 싣기는 아무래도 양심에 찔려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다른 시선으로 밀양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전에 썼던 첫 글에서는 ‘용서’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이 ‘용서와 구원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구도(求道)의 길이었다고 평하고, 그 끝에 밀양이 있다고 했다. 결국 용서도 구원도 불가능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은 여전히 불연속적으로 지속된다는 것, 징글징글한 삶의 연속성이 바로 이창동 감독의 구도를 통해 얻은 깨달음인 것 같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삶은 그럴듯한 이유와 의미로 포장은 할 수 있으나, 어쩌면 이유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니 존재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글에서는 이 영화 전체의 메시지에 골몰하기보다는 ‘신애’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세밀한 안경을 쓰고 들여다볼까 한다. 이 글은 영화 전체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아주 일부분을 들여다 본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듯’ 쓴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힘들지? 아니예요!


두어 달 전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라는 다큐를 본 적이 있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필리핀에서 이주해 온 하은씨의 일상을 담은 다큐였다. 하은씨의 남편은 두 팔과 두 다리를 잃은 1급 장애인이다. 장애인 남편과 노환으로 거동도 불편한 시부모를 모시고 아이를 키우며 낯선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하은씨는, 사실 힘들다.

그렇지만 그녀가 힘든 것은 장애를 가진 남편 때문도, 늙으신 시부모님 때문도, 매일 칭얼대는 아이 때문도 아니다. 그녀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그녀는 당연히 힘들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가지고 대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신애도 그렇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내미 하나 끼고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땅, 남편의 고향 밀양에 정착한 젊은 여자. 그 여자를 바라보는 밀양 현지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불쌍한 여자’ ‘박복한 여자’의 범주 안에 들어 있다.

개업한 뒤 평생 인테리어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된 양품점 아줌마에게도, 틈만 나면 ‘햇살과도 같은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혈안이 된 약사 부부에게도. 심지어 누나가 걱정돼 밀양까지 달려 내려온 남동생에게마저도.

그러나 남에게 불쌍하게 보이는 것만큼 불쌍한 꼬라지는 없다. 설사 남편이 나 말고 딴 여자랑 바람을 피우다가 교통사고로 콱 죽으면서 변변한 재산도 남겨놓지 않은 현실이 복장 터질 만큼 괴로운 일이어도, 남들에게 불쌍한 여자로 보이는 것보다는 덜 비참하다.

‘불쌍한 여자’가 되기 싫은 신애는 비밀스러운 햇볕이 감싸줄 것 같은 비밀스러운 이름을 가진 도시 밀양에서 ‘불쌍’을 ‘허영’으로 도배한다. 돈도 없으면서 좋은 땅 있으면 투자나 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요즘 재테크는 부동산만한 게 없다고 거드름을 피운다.

평소 허풍치고 거드름피우는 인간들을 본능적으로 혐오하던 나였지만, 신애의 허풍은 충분히 공감이 됐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설혹 ‘종찬’처럼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아서’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의 호의마저도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애처럼, 있는 척 잘난 척하며 고개를 빳빳이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불쌍’을 가리기 위한 ‘허영’은 결국, 밀양에 내려오기 직전까지 겪은 ‘불쌍’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참혹한 비극을 불러온다. 나를 지키기 위해 입었던 철갑옷은 어느새 쇠꼬챙이가 되어 심장을 도려낸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주위 사람들의 진심 어린 호의가 시작된다. 신애가 정말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임을 확인했을 때 양품점 주인은 신애의 충고대로 하얀색으로 인테리어를 바꾸고 햇살 같은 하나님을 전하고자 했던 약국 주인은 신애의 집까지 찾아온다.

어디서 그랬더라.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산다고. 인생이란, 삶이란 참 징글징글하다.

 


‘의미’에 대한 집착 그리고 배신


자식의 죽음 앞에서, 그것도 자신의 객기 어린 허영 때문에 어이없이 죽어버린 아들 앞에서 숨조차 쉬기 힘들었던 신애는 ‘아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자신의 불행과 슬픔’이라는 현실을 두고 그것과는 다른 ‘의미’를 찾기 위해 집착한다.

최근 내가 좋아하는 한 밴드가 발표한 새 앨범에 실린 노래 제목이 ‘시니피에’인 바람에 프랑스어의 ‘프’자도 모르는 내가 기호학의 ‘기’자도 모르던 내가 ‘시니피에(signifié)’와 ‘시니피앙(signifiant)’이 뭔 뜻인지 여기저기 뒤져보게 됐다.

그러니까 시니피앙이란 언어로 표현되는 기호이고 시니피에는 그것에 담겨 있는 뜻, 개념이다. 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연관이 없다”는 것이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한 이야기란다.

아무튼 잘 모르겠는 이야기는 대충 넘어가고, 신애는 ‘아들의 죽음’과 자신에게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불행’은 단지 신이 내린 기호일 뿐이고 그 안에는 약국 아줌마 말대로 햇살과도 같은 슬픔이나 불행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신의 뜻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신애에게 종교는 ‘아들의 죽음’과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기호학이다.

밀양에 처음 내려왔을 때는 말 한 마디 섞기조차 꺼려했던 이웃들 앞에서 감격에 겨운 간증을 하고 낯선 사람들의 천국인 역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신애를 보며 종교는 신애뿐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모두에게 기호학이겠다 생각했다.

엄마 뱃속부터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교회에 다녔지만 단 한 번도 신애처럼 가슴 뜨거운 ‘믿음의 행위’를 해본 적 없는 내게도 신애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저렇게 실재하는 상황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는 신애의 고통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의미에 집착하는 이들, 혹은 그랬던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분리시켜줄 줄 알았던 하나님의 햇살은 신애만 비추는 게 아니었다. 신은 참으로 공평하게시리 신애가 아직까지는 용서하지 못한, 아들을 죽인 원수에게도 따뜻하게 햇살을 내리쬐고 있었던 것이다.

신의 햇살을 듬뿍 받고 환한 얼굴로 신애를 맞이하는 원수 앞에서, 완전하게 분리된 줄 알았던 기표들, 아들의 죽음과 자신의 불행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다시 부활한다. 오, 마이 갓~!

 


다시 땅 위에 내리쬐는 햇볕


어차피 불행은 신에게 매달린다고 해서 비켜가지 않는다. 다만 잠시 자신과 고통을 분리하는 최면을 걸 수 있을 뿐이다. 그 최면의 효과가 죽을 때까지 간다면야 그것도 구원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신애처럼 짙은 배신감으로 더한 고통을 얻을 수도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러나 삶이 진정 위대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징글징글하게도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고통에도 생의 욕구는 가슴을 배반하고 움트고야 마는 것이다.

제 손으로 머리를 잘라내는 신애가 발을 딛고 앉은 땅바닥에 비치는 햇볕에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끈질긴 생의 욕구, 혹은 의지나 의미따위와는 별 상관없이 흐르는 생의 흐름을 비추고 있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