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과 정약용

이진이200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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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다. 화성이란 이름은 편 화인축성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화 지방 사람이 요임금에게 수(오래살것)와 부(복 많이 받을 것)과 다남(자손이 번창하기)를 기원하자, 요임금이 "수는 욕됨이 많고 부는 일이 많으며 다남은 걱정이 많아서 싫다. 이 세가지는 덕을 기르는 까닭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정조 이금이 수원화성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정조 자신이 요임금처럼 성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요, 백성들 입장에서는 왕실의 장수와 부귀와 번창을 기원하는 도시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강력한 계몽 군주가 되고자 한 정조는 상업 발달을 배경으로 상업의 요충지인 수원의지리적 위상을 재평가하여 왕권을 지원하는 배후 도시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상업이 활성화된 신도시를 인위적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도시로서의 화성은 읍성과 산성의 이원구조를 유기적으로 통합했으며, 삼남으로 가는 교통이 요지로서 상업 도시로 번성할 수 있는 입지적 특성도 가졌다. 따라서 상업 활성화를 통한 민생 안정과 유사시의 견고한 방어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계획도시를 설계한 사람은 당시 홍문관 수찬이었던 31세의 젊은 정약용이었다.

 화성을 당대의 사회 문화적 역량이 구체적인 건축으로드러난 것이다.

 정치.행정.군사.생산.소비 기능이 결합한 계획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전통적 지식과 외래 지식을 포괄하는 당대의 지적 성과와 과학 기술을 집약해서 만들었다. 즉 수원 화성은 과학 문명과 서학의 유입과 실학사상의 발전이 결합하면서 이룩해 낸 당대 최고이 계획도시였다. 정약용은 화성을 건설하면서 거중기 등을 이용하고 벽돌을 활용해 새로운 성곽 축성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재료의 표준화, 분업화된 작업과정, 상품경제에 적합한 효율적인 자재 공급 방식, 임노동 방식 등이 성곽 축성에 적용되었다. 돌을 가까운 산에서 채취해 자른 다음 기중소가(기중기의 일종)을 이용해 들어 올리고 유형소거(움직이는 수레)를 사용해서 운반하면서 비용도 적게 들고 편리했다.

 

-한국철학 스케치2-김교빈외 6인- 풀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