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시 부산구(?)를 아시나요? 이야기의 시작부터 무슨 엉뚱한 이야기인가 의아해 할 분들 많으실 겁니다.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부산이란 동네는 조그마한 포구에 불과한 바닷가 마을이었지요. 당시엔 동래부가 부산의 중심이 되고, 그 아래에 속현으로서 동평현(지금의 당감동 일대로, 넓게 보면 동구, 중구, 영도까지를 포함하는 지역), 기장현 등의 작은 마을들이 동래부에 속해 있었답니다.
동래부지(1740년)에 의하면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체제는 7개읍(읍내면, 동면, 남촌면, 동평면, 사천면, 서면, 북면)82리 19동의 체제로 나뉘어져 있었답니다. 1868년에 발간된 동래부사례에는 사천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의 이름과 함께 부산면, 사상면, 사하면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이 시기가 되어서야 부산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위의 아홉 개 면이 고종 5년(1868년)의 자료에 서술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동래부읍지(1832년)에도 9면 체제로 기록되어 있어, 1832년 이전에 9면 체제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지요.
이런 체제가 8면, 9면, 12면으로 변동이 되다가 일제 강점기에 비로소 釜山府(부산부 - 그 전에는 동래부였는데)가 설치되자 동래는 부산부의 지배를 받게 되지요. 그러나 예전부터 동래는 전통있는 고장이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여 부산부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1914년) 기장군의 일부와 합쳐져서 경상남도 동래군이 되었답니다. 좀 초라하게 되었네요. 이때 동래군지(1937년)에는 1읍(동래읍) 11면(북면, 남면, 사상면, 사하면, 구포면, 서면, 기장면, 철마면, 정관면, 일광면, 장안면) 128리 7동으로 이루어졌지요.
그 후 계속적으로 부산부는 커지고 동래군의 영역이 축소되어 1936년에는 西面(서면 - 지금 우리가 서면이라 부르는 서면보다는 조금 넓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과 岩南里(암남리), 1942년에는 동래부의 전부와 사하면 등의 지역이 부산부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전세는 완전 역전되었지요.
해방 후 부산부가 부산시로 이름이 바뀌고 1957년 1월부터 구제가 실시되어 부산시 동래구로 행정적인 편제가 되었답니다.
위의 이야기는 부산과 동래의 바뀌어버린 처지를 말해주는 대목이 되겠지요.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몰라도 동래가 원래의 당당함을 되찾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글을 시작해봅시다.
부산의 여러 지역에서 구석기, 신석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만 동래 지역에서는 현재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답니다. 신석기 인들이 청동기 문명을 점차 넓혀 가면서 청동기 유적은 동래 지방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동래 지역은 청동기 인들의 생활이 시작된 곳으로 볼 수 있답니다. 한편, 청동기 인들은 다시 철기문화를 수용하였기에 동래 지역에도 철기문화가 보급되었지요. 그 대표적인 유적이 낙민동에 있는 동래패총이랍니다.
여기에서 발견된 쇠를 제련하는 冶鐵址(야철지 - 쇠를 제련하여 만들어 내던 옛 터)가 이를 증명하는 것이지요. 이들 야철 시설들은 부근에 있는 온천천 등에서 나오는 沙鐵(사철 - 모래 철)을 수집하여 제련한 것으로 추측한답니다. 이렇게 철을 사용하던 집단이 바로 복천동 고분군에 묻힌 수장들은 아닐까요? 그러니 동래는 그 예전부터 부산의 중심이라고 봐야겠지요.
삼국시대가 되면서 동래 지역의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삼국사기 권44의 居道傳(거도전)에 의하면 ‘그(거도)는 탈해 이사금(왕을 뜻하는 앞 시대의 이름)을 만나보고는 干(간 - 벼슬)이 되었다. 이때 于尸山國(우시산국 - 현재 울산 지방에 있던 작은 나라라고 추정, 그 중심지가 웅촌면 검단리라고 본다. 우시산국에서 시(尸)는 [이두]에서 "ㄹ"로 많이 표기되는데 "우"와 "시" 를 합치면 "울"이 된다. 그래서 울산은 "울뫼나라"즉 울산국이 되는 것이다.)과 居漆山國(거칠산국 -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거친 뫼, 즉 荒嶺山(황령산)을 끼고 있다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위치상 지금의 동래 지역이다.)이 이웃에 있어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이에 거도는 변방이 관원이 되어 몰래 이들을 물리칠(병합할) 뜻을 품고 있었다. (중략) 이에 군사를 일으켜 그들이 준비하지 않는 기회를 틈타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거칠산국은 삼국사기 권34, 지리지에 또 등장하는데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에 따르고 있다. 그 아래에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 신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조에 의하면 ‘ 옛 萇山國(장산국 - 지금의 해운대 장산과 연관있을 듯, 萇(장)은 풀 우거질 장이라 나무가 울창함을 뜻한다. 그만큼 장산은 풀이 우거진 산이란 뜻)이다.(혹은 萊山國(내산국 - ‘내’자가 동래의 ‘래’자다.)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점유하고는 거칠산군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고 하고 있다.
이들 두 자료에 의하면 동래의 옛 국명은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 등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되지요.
한편 삼국지 위지 東夷傳(동이전)의 弁辰(변진)조에는 삼한시대에 24개국의 이름이 나오고 그 중에서 瀆盧國(독로국)이란 이름이 보이는데 이를 동래의 옛이름으로 보는 분들도 있답니다. 독로라는 음에서 독로 → 동네 → 동래로 음전되어 불리어 지게 되었다네요. 즉 동래라는 지명은 경덕왕 16년(757)에 지방 행정제도를 개편할 때 지방명을 모두 중국식 한자음으로 고침에 따라 東萊(동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랍니다. 한자식으로 고치면 좀 격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겠지요. 요즘도 우리 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어식 발음이 들어와 있습니까. 그런 이치겠지요.
동래의 이름 중에 거칠산국이 있었는데 나중에 신라에 병합되면서 거칠산군이 되었지요. 여기서 말하는 거칠다는 뜻은 곧 거친 뫼, 즉 荒嶺山(황령산)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답니다. 황령산 할 때 ‘荒’(황)자가 ‘거칠다’ ‘풀이 우거지다’라는 뜻이고, ‘嶺’(령)자가 ‘고개’를 뜻하니 이 산을 넘으려면 힘깨나 들었다는 뜻이지요.
이 이야기를 빌자면 지금의 황령산이 위치한 수영과 남구 일원이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의 동래 중심 치소였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겠지요.(실제 동래의 고읍성터가 국군통합병원이 있던 곳, 지금의 망미동의 포스코 더 샵 아파트가 선 자리였답니다. 여기에 있던 고읍성이 왜구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조선시대 지금의 동래로 옮겨온 것이 현재의 동래읍성이라고 본다.)
또한 부산의 지명 중에 칠산동이 나오는데 여기 ‘칠’자도 거칠산국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답니다.
萊山國(내산국)이라 한 것은 동쪽(동해)의 내산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蓬萊山(봉래산) 또는 三神山(삼신산)의 약칭이라는 설도 있답니다.
또한 내산국이나 장산국이라 할 때도 ‘萊’(내)와 ‘萇’(장)자가 잡초가 우거진 장소, 즉 거친 것을 의미하는 한자음이므로 거친산(황령산)의 동쪽 지방이란 방위가 포함되어 東萊(동래)로 지칭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위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통일신라이후에는 동래라는 표준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고, 동평현과 기장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고려시대가 되면서 동래의 위상이 강등되었는데 이는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수도였던 경주와 가까워서 대접을 받았지만 고려시대에 오면서 수도가 개경으로 옮겨가니 자연 동래의 위상도 따라서 격하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 권57, 지리2 울주조에 의하면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巘陽縣(헌양현 - 지금의 언양지방)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현종 9년(1018년)에 본주(여기서 본주란 울주를 뜻한다.)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 내용에서 보면 동래는 고려 초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답니다. 그 후 현령을 두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고려초에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동래 정씨 일족이 중앙정계로 진출하게 됨으로서 동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정서도 동래 정씨랍니다.
물론 여기서 온천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의 동래온천이 되겠지요. 많은 문인들이 온천을 찾아 동래로 오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초라한 동래가 조선시대에 오면서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 행정적, 군사적 위상이 또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태조 6년(1397년)에 일본과 대치하는 군사상의 요충지로 보고 이곳에 鎭(진 - 釜山鎭이다. 지금의 부산진구는 여기서 나왔다.)을 설치하자, 진의 장수인 兵馬使(병마사)가 동래현의 判縣使(판현사)를 겸임하였답니다. 즉 장수가 현령의 하는 일까지 도맡아 한 것이지요.
태종 5년(1405년) 부산진을 관할하는 동래군이 독립되어 동평현을 그 속현으로 하였고, 동래군은 군사 및 행정의 중심지로 부각되어 갑니다.
세종 5년(1423년)에는 병마사를 4품관인 첨절제사로 개칭하여 판현사를 겸임하게 하였고, 세종 22년(1440년)에는 부산포에 일본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진을 속현인 동평현(당감동 지역)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후 판현사를 현령으로 고쳐 불렀는데 이는 행정을 중심으로 하는 동래현을 도에 직접 소속시켜 군사적인 임무를 관할하게 함이랍니다.
삼포왜란(1510년)이 일어나면서 왜구의 침탈이 심해지자 군사권을 통제하는 행정중심지가 필요하였지요. 이에 따라 명종 2년(1547년)에는 동래현이 군사권을 관할하는 東萊都護府(동래도호부)로 승격된답니다. 물론 이것은 중종 39년(1544년) 사량진 왜변을 계기로 일본과의 유일한 개항지로 등장한 동래의 위상이 고려된 것이기도 하지요.
도호부가 되자마자 이내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이 발생하여 동래는 그 책임을 물어 현으로 다시 강등되었답니다. 그러나 선조 32년(1599년)에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다시 도호부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당상의 무관을 부사로 임명하고, 무관인 부사를 돕는 문관을 판관으로 두었답니다. 여기서 당상이란 정3품의 높은 벼슬을 말하는데 이는 당시 경상도의 다른 13군데 도호부는 당하관인 종3품의 도호부사가 파견된 것만 보아도 동래의 위치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답니다.
참고로 당상관은 중앙정부의 결재가 없어도 자기 스스로 결정하여 일을 처리하고 차후에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지만 당하관은 그런 권리가 없고 일일이 중앙정부의 결재를 맞고서야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답니다.
선조 34년(1601년)에 이르러 일본으로부터 적극적인 강화교섭의 요청이 있자, 외교상의 격식을 고려하여 당상의 문관을 부사로 삼고 대신 이전에 존재하던 판관제도는 폐지하였답니다.
광해군 1년(1609년) 일본과 己酉約條(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제한적이지만 국교를 재개할 때 부산은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곳으로서 동래부가 유일한 일본과의 외교에서의 창구 구실을 담당하였답니다. 물론 국교는 재개가 되었고, 지금 우리가 조선통신사로 부르는 回答兼刷還使(회답 겸 쇄환사)가 일본으로 떠나서는 포로를 데려오고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등 여러 교섭이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일본의 재침에 대하여 불안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효종 6년(1655년)에는 경상좌병영 관할하의 경주 진관에 속해있던 여러 鎭(진 - 군사가 주둔하는) 중의 하나인 동래 진을 경주 진관에서 떼어내어 단독 진, 즉 獨鎭(독진)이 설치되었답니다. 이때 양산군과 기장현 소속의 군사까지도 통합하여 지휘할 수 있게 하였답니다.
금강공원 안에는 독진대아문이 있지요. 이 문은 인조 14년(1636년)에 동래부 동헌인 충신당이 세워질 때 함께 만든 문으로 추정하는데, 이 문의 현판을 독진대아문이라고 쓴 이유가 무엇일까요? 1655년, 경주 진관에서 동래가 따로 독립한 독진을 설치하였다는 기념으로 걸었던 현판이겠지요. 이 문은 원래 동래부동헌의 대문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철거하여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 놓았지요.
숙종 16년(1690년)에는 부상 이형상의 狀請(장청 - 장계를 올려 청함)으로 부사가 종2품의 방어사를 겸하게 되었답니다.(종2품은 감사, 병사와 같은 계급이니 엄청 높답니다.) 그러나 2년 후에 방어사는 폐지되었답니다.
영조 15년(1739년)에는 부사 구택규의 건의에 따라 동래성과 금정산성의 수성장을 겸하여 오다가 갑오경장 때 지방관제가 전면적으로 개혁되어 폐지되었습니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었어도 종래의 관례에 따라 동래부사가 외교교섭을 담당해왔으며 그 아래에 왜학훈도라 불리던 辨察官(변찰관)이 서울에서 파견되어 와 있었는데 후에 監理署(감리서)에서 맡았지요.
고종 32년(1895년)에 동래부는 관찰사가 다스리는 10개 군에 속하여 관찰사영이 되기도 하였다가 나중에 경상남도에 편입되었답니다.
사람의 인생도 질곡이 많은데 하물며 동래의 역사도 대단히 복잡다단함을 알게 됩니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오면서는 일본과의 전쟁과 대외 교역의 시작점이 됨을 알 수 있지요. 그 중심에 동래가 있었던 겁니다.
동래시 부산구를 아시나요? - 1
*부산의 뿌리 '동래'*
동래시 부산구(?)를 아시나요? 이야기의 시작부터 무슨 엉뚱한 이야기인가 의아해 할 분들 많으실 겁니다.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부산이란 동네는 조그마한 포구에 불과한 바닷가 마을이었지요. 당시엔 동래부가 부산의 중심이 되고, 그 아래에 속현으로서 동평현(지금의 당감동 일대로, 넓게 보면 동구, 중구, 영도까지를 포함하는 지역), 기장현 등의 작은 마을들이 동래부에 속해 있었답니다.
동래부지(1740년)에 의하면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체제는 7개읍(읍내면, 동면, 남촌면, 동평면, 사천면, 서면, 북면)82리 19동의 체제로 나뉘어져 있었답니다. 1868년에 발간된 동래부사례에는 사천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의 이름과 함께 부산면, 사상면, 사하면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이 시기가 되어서야 부산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위의 아홉 개 면이 고종 5년(1868년)의 자료에 서술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동래부읍지(1832년)에도 9면 체제로 기록되어 있어, 1832년 이전에 9면 체제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지요.
이런 체제가 8면, 9면, 12면으로 변동이 되다가 일제 강점기에 비로소 釜山府(부산부 - 그 전에는 동래부였는데)가 설치되자 동래는 부산부의 지배를 받게 되지요. 그러나 예전부터 동래는 전통있는 고장이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여 부산부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1914년) 기장군의 일부와 합쳐져서 경상남도 동래군이 되었답니다. 좀 초라하게 되었네요. 이때 동래군지(1937년)에는 1읍(동래읍) 11면(북면, 남면, 사상면, 사하면, 구포면, 서면, 기장면, 철마면, 정관면, 일광면, 장안면) 128리 7동으로 이루어졌지요.
그 후 계속적으로 부산부는 커지고 동래군의 영역이 축소되어 1936년에는 西面(서면 - 지금 우리가 서면이라 부르는 서면보다는 조금 넓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과 岩南里(암남리), 1942년에는 동래부의 전부와 사하면 등의 지역이 부산부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전세는 완전 역전되었지요.
해방 후 부산부가 부산시로 이름이 바뀌고 1957년 1월부터 구제가 실시되어 부산시 동래구로 행정적인 편제가 되었답니다.
위의 이야기는 부산과 동래의 바뀌어버린 처지를 말해주는 대목이 되겠지요.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몰라도 동래가 원래의 당당함을 되찾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글을 시작해봅시다.
부산의 여러 지역에서 구석기, 신석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만 동래 지역에서는 현재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답니다. 신석기 인들이 청동기 문명을 점차 넓혀 가면서 청동기 유적은 동래 지방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동래 지역은 청동기 인들의 생활이 시작된 곳으로 볼 수 있답니다. 한편, 청동기 인들은 다시 철기문화를 수용하였기에 동래 지역에도 철기문화가 보급되었지요. 그 대표적인 유적이 낙민동에 있는 동래패총이랍니다.
여기에서 발견된 쇠를 제련하는 冶鐵址(야철지 - 쇠를 제련하여 만들어 내던 옛 터)가 이를 증명하는 것이지요. 이들 야철 시설들은 부근에 있는 온천천 등에서 나오는 沙鐵(사철 - 모래 철)을 수집하여 제련한 것으로 추측한답니다. 이렇게 철을 사용하던 집단이 바로 복천동 고분군에 묻힌 수장들은 아닐까요? 그러니 동래는 그 예전부터 부산의 중심이라고 봐야겠지요.
삼국시대가 되면서 동래 지역의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삼국사기 권44의 居道傳(거도전)에 의하면 ‘그(거도)는 탈해 이사금(왕을 뜻하는 앞 시대의 이름)을 만나보고는 干(간 - 벼슬)이 되었다. 이때 于尸山國(우시산국 - 현재 울산 지방에 있던 작은 나라라고 추정, 그 중심지가 웅촌면 검단리라고 본다. 우시산국에서 시(尸)는 [이두]에서 "ㄹ"로 많이 표기되는데 "우"와 "시" 를 합치면 "울"이 된다. 그래서 울산은 "울뫼나라"즉 울산국이 되는 것이다.)과 居漆山國(거칠산국 -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거친 뫼, 즉 荒嶺山(황령산)을 끼고 있다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위치상 지금의 동래 지역이다.)이 이웃에 있어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이에 거도는 변방이 관원이 되어 몰래 이들을 물리칠(병합할) 뜻을 품고 있었다. (중략) 이에 군사를 일으켜 그들이 준비하지 않는 기회를 틈타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거칠산국은 삼국사기 권34, 지리지에 또 등장하는데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에 따르고 있다. 그 아래에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 신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조에 의하면 ‘ 옛 萇山國(장산국 - 지금의 해운대 장산과 연관있을 듯, 萇(장)은 풀 우거질 장이라 나무가 울창함을 뜻한다. 그만큼 장산은 풀이 우거진 산이란 뜻)이다.(혹은 萊山國(내산국 - ‘내’자가 동래의 ‘래’자다.)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점유하고는 거칠산군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고 하고 있다.
이들 두 자료에 의하면 동래의 옛 국명은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 등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되지요.
한편 삼국지 위지 東夷傳(동이전)의 弁辰(변진)조에는 삼한시대에 24개국의 이름이 나오고 그 중에서 瀆盧國(독로국)이란 이름이 보이는데 이를 동래의 옛이름으로 보는 분들도 있답니다. 독로라는 음에서 독로 → 동네 → 동래로 음전되어 불리어 지게 되었다네요. 즉 동래라는 지명은 경덕왕 16년(757)에 지방 행정제도를 개편할 때 지방명을 모두 중국식 한자음으로 고침에 따라 東萊(동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랍니다. 한자식으로 고치면 좀 격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겠지요. 요즘도 우리 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어식 발음이 들어와 있습니까. 그런 이치겠지요.
동래의 이름 중에 거칠산국이 있었는데 나중에 신라에 병합되면서 거칠산군이 되었지요. 여기서 말하는 거칠다는 뜻은 곧 거친 뫼, 즉 荒嶺山(황령산)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답니다. 황령산 할 때 ‘荒’(황)자가 ‘거칠다’ ‘풀이 우거지다’라는 뜻이고, ‘嶺’(령)자가 ‘고개’를 뜻하니 이 산을 넘으려면 힘깨나 들었다는 뜻이지요.
이 이야기를 빌자면 지금의 황령산이 위치한 수영과 남구 일원이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의 동래 중심 치소였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겠지요.(실제 동래의 고읍성터가 국군통합병원이 있던 곳, 지금의 망미동의 포스코 더 샵 아파트가 선 자리였답니다. 여기에 있던 고읍성이 왜구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조선시대 지금의 동래로 옮겨온 것이 현재의 동래읍성이라고 본다.)
또한 부산의 지명 중에 칠산동이 나오는데 여기 ‘칠’자도 거칠산국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답니다.
萊山國(내산국)이라 한 것은 동쪽(동해)의 내산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蓬萊山(봉래산) 또는 三神山(삼신산)의 약칭이라는 설도 있답니다.
또한 내산국이나 장산국이라 할 때도 ‘萊’(내)와 ‘萇’(장)자가 잡초가 우거진 장소, 즉 거친 것을 의미하는 한자음이므로 거친산(황령산)의 동쪽 지방이란 방위가 포함되어 東萊(동래)로 지칭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위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통일신라이후에는 동래라는 표준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고, 동평현과 기장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고려시대가 되면서 동래의 위상이 강등되었는데 이는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수도였던 경주와 가까워서 대접을 받았지만 고려시대에 오면서 수도가 개경으로 옮겨가니 자연 동래의 위상도 따라서 격하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 권57, 지리2 울주조에 의하면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巘陽縣(헌양현 - 지금의 언양지방)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현종 9년(1018년)에 본주(여기서 본주란 울주를 뜻한다.)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 내용에서 보면 동래는 고려 초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답니다. 그 후 현령을 두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고려초에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동래 정씨 일족이 중앙정계로 진출하게 됨으로서 동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정서도 동래 정씨랍니다.
물론 여기서 온천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의 동래온천이 되겠지요. 많은 문인들이 온천을 찾아 동래로 오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초라한 동래가 조선시대에 오면서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 행정적, 군사적 위상이 또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태조 6년(1397년)에 일본과 대치하는 군사상의 요충지로 보고 이곳에 鎭(진 - 釜山鎭이다. 지금의 부산진구는 여기서 나왔다.)을 설치하자, 진의 장수인 兵馬使(병마사)가 동래현의 判縣使(판현사)를 겸임하였답니다. 즉 장수가 현령의 하는 일까지 도맡아 한 것이지요.
태종 5년(1405년) 부산진을 관할하는 동래군이 독립되어 동평현을 그 속현으로 하였고, 동래군은 군사 및 행정의 중심지로 부각되어 갑니다.
세종 5년(1423년)에는 병마사를 4품관인 첨절제사로 개칭하여 판현사를 겸임하게 하였고, 세종 22년(1440년)에는 부산포에 일본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진을 속현인 동평현(당감동 지역)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후 판현사를 현령으로 고쳐 불렀는데 이는 행정을 중심으로 하는 동래현을 도에 직접 소속시켜 군사적인 임무를 관할하게 함이랍니다.
삼포왜란(1510년)이 일어나면서 왜구의 침탈이 심해지자 군사권을 통제하는 행정중심지가 필요하였지요. 이에 따라 명종 2년(1547년)에는 동래현이 군사권을 관할하는 東萊都護府(동래도호부)로 승격된답니다. 물론 이것은 중종 39년(1544년) 사량진 왜변을 계기로 일본과의 유일한 개항지로 등장한 동래의 위상이 고려된 것이기도 하지요.
도호부가 되자마자 이내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이 발생하여 동래는 그 책임을 물어 현으로 다시 강등되었답니다. 그러나 선조 32년(1599년)에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다시 도호부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당상의 무관을 부사로 임명하고, 무관인 부사를 돕는 문관을 판관으로 두었답니다. 여기서 당상이란 정3품의 높은 벼슬을 말하는데 이는 당시 경상도의 다른 13군데 도호부는 당하관인 종3품의 도호부사가 파견된 것만 보아도 동래의 위치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답니다.
참고로 당상관은 중앙정부의 결재가 없어도 자기 스스로 결정하여 일을 처리하고 차후에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지만 당하관은 그런 권리가 없고 일일이 중앙정부의 결재를 맞고서야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답니다.
선조 34년(1601년)에 이르러 일본으로부터 적극적인 강화교섭의 요청이 있자, 외교상의 격식을 고려하여 당상의 문관을 부사로 삼고 대신 이전에 존재하던 판관제도는 폐지하였답니다.
광해군 1년(1609년) 일본과 己酉約條(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제한적이지만 국교를 재개할 때 부산은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곳으로서 동래부가 유일한 일본과의 외교에서의 창구 구실을 담당하였답니다. 물론 국교는 재개가 되었고, 지금 우리가 조선통신사로 부르는 回答兼刷還使(회답 겸 쇄환사)가 일본으로 떠나서는 포로를 데려오고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등 여러 교섭이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일본의 재침에 대하여 불안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효종 6년(1655년)에는 경상좌병영 관할하의 경주 진관에 속해있던 여러 鎭(진 - 군사가 주둔하는) 중의 하나인 동래 진을 경주 진관에서 떼어내어 단독 진, 즉 獨鎭(독진)이 설치되었답니다. 이때 양산군과 기장현 소속의 군사까지도 통합하여 지휘할 수 있게 하였답니다.
금강공원 안에는 독진대아문이 있지요. 이 문은 인조 14년(1636년)에 동래부 동헌인 충신당이 세워질 때 함께 만든 문으로 추정하는데, 이 문의 현판을 독진대아문이라고 쓴 이유가 무엇일까요? 1655년, 경주 진관에서 동래가 따로 독립한 독진을 설치하였다는 기념으로 걸었던 현판이겠지요. 이 문은 원래 동래부동헌의 대문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철거하여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 놓았지요.
숙종 16년(1690년)에는 부상 이형상의 狀請(장청 - 장계를 올려 청함)으로 부사가 종2품의 방어사를 겸하게 되었답니다.(종2품은 감사, 병사와 같은 계급이니 엄청 높답니다.) 그러나 2년 후에 방어사는 폐지되었답니다.
영조 15년(1739년)에는 부사 구택규의 건의에 따라 동래성과 금정산성의 수성장을 겸하여 오다가 갑오경장 때 지방관제가 전면적으로 개혁되어 폐지되었습니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었어도 종래의 관례에 따라 동래부사가 외교교섭을 담당해왔으며 그 아래에 왜학훈도라 불리던 辨察官(변찰관)이 서울에서 파견되어 와 있었는데 후에 監理署(감리서)에서 맡았지요.
고종 32년(1895년)에 동래부는 관찰사가 다스리는 10개 군에 속하여 관찰사영이 되기도 하였다가 나중에 경상남도에 편입되었답니다.
사람의 인생도 질곡이 많은데 하물며 동래의 역사도 대단히 복잡다단함을 알게 됩니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오면서는 일본과의 전쟁과 대외 교역의 시작점이 됨을 알 수 있지요. 그 중심에 동래가 있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