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 of Africa

서영희200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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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 of Africa

하나같이 차마 말 못할 사연을 머금은 얼굴이다.

 

송골송골 땀이 맺힌 마르티뇨 아저씨의 주름살 패인 얼굴

땀을 흘리는 소녀 제나보의 다부진 표정과 입술을 꾹 다문 닌떼

아주머니의 근심 어린 모습이 그렇다 .

 

아프리카인들의 애환과 고뇌를 화폭에 옮긴 사람은 아프리카

기니비사우 Guinea - Bissau 선교사인 이인응씨다.

 

그는 오직 크레파스로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다. 

왜 그는 아프리카인들의 검은 얼굴을 그리는 것일까 ? 

 

" 딸이 미국 칼슨뉴먼 대학에서 그래픽을 전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2004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저희 부부를 만나러 왔다가

택시 강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딸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낯선 땅에서 고생하며 자란 딸이지 않은가. 딸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아프리카 기니비사우를 피로 물들였던 두 번의 내전을 겼으며

수십만의 인파 속에 섞여 피란을 갔을 때에나 강도들이 총부리를

머리에 겨누었던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오히려

감사했던 그였다. 그러나 딸의 죽음앞에서는 신앙 깊은 선교사가

아닌 한 사람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결국 끝없는 절망과 슬픔에 몸부림치다 못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았다. 아프리카인들에 대해서도 미움만이 가득 차올랐다.

 

몇 달 후 결코  잦아들 것 같지 않던 슬픔이 조금이나마 가라

앉자  딸의 유품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때 무심코 크레파스를 바라보는데 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아빠는 화가면서 왜 그림을 그리지 않으세요?

 

생전에 딸아이가 자주 하던 질문이었다. 그는 가만히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그순간 그림에 대한 열정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

했다. 그런데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한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데

다가 물감도 아닌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독일 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 1980년 그는 피카소에 비할 만한

화가를 꿈꾸며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술 명문인 뒤셀도르프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진 것은 미술에 대한 열정뿐이었다.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해도 학비를 감당하기도 힘겨웠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아내를 독일로 데려오겠다던 약속도 지킬수

없었다.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에 지쳐갈 무렵 한국인 선교사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스물여섯 살의 나니에 처음으로

신앙을 갖게 된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됐다.

 

"신앙이 깊어지자 독일의 화풍과 신앙사이에 강한 이질감이 생겼

어요. 그 무렵 독일 미술계는 신표현주의 경향이 강했는데 아주

세속적인 시각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죠. 자연히 신앙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어요. 깊은 갈등 끝에 화가의 꿈을 내려놓게 되었습니

다. 그때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성공과 명성에만 눈이

어두워 환경을 탓하며 괴로워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섞었는지를

깨닫게 된것이다.

 

독일 유학 생활 6년만에 그림을 계속 할지 한국으로 돌아갈지를

결정해야할 기로에 섰다. 그런데 마침 스페인에 사는 친구가 그를 라스팔마스 Las Palmas 섬으로 초대했다.

 

어느 날 새벽.

라스 팔마스 해변을 홀로 걸으며 하나님께 물었어요.

저를 이곳에 인도하신 이유를 알고 싶다고요.

 

그때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죠 .

저 멀리 바다 건너 아프리카 땅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불을 삼킨 듯한 뜨거운 열기가 제 가슴 속으로 들어 오더군요.

선교사의 소명을 깨닫는 순간이었죠.

 

그 후 3년간 저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1989년 그는 마침내 아프리카 감비아에 선교사

로 첫발을 내딛었다. 다섯살 배기 딸과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원주민들 속에서 함께 생활하며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애썼다.

 

그때 감비아에 선교사로 첫발을 내딛었다.

다섯 살 배기 딸과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원주민 촌에 무작정

정착했던 것이다. 평신도 선교사라 한국 교회의 지원도 없었다.

 

그저 원주민들 속에서 함께 생활하며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애썼다. 그때 감비아와 인접한 기니비사우 청년들이

그에게 찾아왔다.

 

" 기니비사우는 서부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예요 .

1990년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국가였어요. 약 150만 인구중에

50 퍼센트 이상이 이슬람교도이고 40퍼센트 이상은 샤머니즘에

빠져 있었지요. 그런데 기니비사우 청년들이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기니비사우에도 미전도 종족들이 많은데 선교사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제발 기니비사우에도 복음을 전파해 달라고 말이에요."

 

그러나 후원받을 교회도 없는 선교사가 돈 한 푼 없이 아이둘을

데리고 기니비사우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비아의 동료 선교사들 조차 기비니사우에 들어가는 것은

내전이 잦아 위험하며 온 가족이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은

무모하다며 만류할 정도였다. 그 때 그의 결정에 힘을 실어

준 것은 성경의 여호수아서였다.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

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결국 한국인 선교사로서는 최

초로 기니 비사우에 정착했다. 오랫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였

으며 독립 후에는 사회주의 국가였던 기니비사우에서의 생활

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짐을 푼 지 한 달도 되지도 않아 위기가

찾아 왔다.

 

원주민 마을에 싼값으로 집을 빌려 정착은 했지만 사회주의

국가라 생필품 구입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원주님에게 먹을 것을 빌려 근근이 먹고 사는것도 한계가 있잖아

요. 아이들이 배고프다며 울때면 불안감과 신앙적인 회의가 엄습해

왔어요. ' 선교를 포기하라 ' '너무 무모했어' '아무도 너를 도와줄 사람은 없어'라는 생각들이 끈질기게 저를 괴롭혔어요.

그러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30여 명의 청년들이 매주 저희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외국인선교사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어요.

쌀이며 의약품, 돈까지 얻어가더니 점차 일도 하지않으려 들더군요

오랜 고민 끝에 해결책을 찾았죠 . 바로 아이들을 선교하는 것이었어요."

 

어린이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처음 시작할 무렵 30명이었던 아이들이 6년째 되자 500명을

넘어섰다. 무엇보다 그 아이들이 성장해 주일학교 교사가 되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전도사가 된것이다.

 

그리고 기니비사우에 들어간 지 7년이 될 무렵에 뜻 밖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진주에 있는 한 교회가 그를 선교사로 파송하고

선교비를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환경에서 선교할 수 있게 된것이다.

그즈음 큰 딸이 장학금까지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자 그간의 고생이 축복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2004년 여름, 딸의 비보를 접하게 된 것이다.

딸의 장례식 후 미국 칼슨뉴먼 대학총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딸 이름으로 장학기금을 만들려고 하니 동의해 달라는 것이었다.

 

" 딸의 모교에 가서 채플에 참석했는데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천여명의 학생들이 단상에 올라와 제 딸 두제의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신의 인생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는 것이었어요."

 

아프리카로 돌아온 후, 그는 다시 크레파스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조차 힘겨웠

다. 그러나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아프리카 사람들의 얼굴을

화폭에 옮기며, 원망이 점차 사랑과 연민으로 바뀌어 갔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속 아프리카인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공포

슬픔과 연민이 그대로 서려있다. 또한 화폭 전체에는 기비니사우

종족 공용어인 크레올어로 성격이 쓰여 있다.

 

그는 말한다. 딸의 죽음이 없었다면 아프리카인들의 영혼을 진심

으로 사랑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진심으로 용서 한 후에야 비로서 사랑에

눈 떳다고 말이다.

 

그가 세운 기니비사우의 교회에는 현재 1.500여명의 성도가

출석하고 있다. 그는 피와 땀으로 일군 교회를 원주민 교역자에게

위임했다.그는 이제 더 큰 비전을 품고 나아간다, 정령숭배자와

무슬림 아이들을 위해 사랍학교를 세울 것이다 .

 

이제 그는 스페인 라스팔마스 섬에서 마음 속을 뜨겁게 달궜던

감동을 되새기며 조용히 외친다.

 

 "사랑합니다. 딸의 생명과 맞바꾼 이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

 

 

 

 

내용- 가이드 포스트 6월호 글  박혜나 기자

 

아웃 오브 아프리카 / 거꾸로 사는사람들

이 인웅 ( 아프리카 기비니사우 선교사.화가 ) 편

 

사진  이 요셉 럽앤 포토 www.lovenpho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