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내가 가장 괴롭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나보다 힘든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깨닫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 만큼 나를 둘러싼 삶의 힘겨움이 나의 어깨를 짓눌러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내일이면 새 학년이 시작된다. 한 참 바쁘게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내가 늘 불평인 술자리가 늘어날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겠지. 사실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인간살이가 어찌 내가 싫다고 무조건 피하며 살 수만 있겠는가. 또 내가 술을 무척이나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이것으로 번민하는 것은 원인이 다른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는 접어두고 나의 직분을 충실히 하며 그 속에서 낙도 찾고, 보람도 찾아보련다. 현명하게 나를 지켜가며 살아가야겠다.
언젠가, 한참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참기획이란 곳을 다니며 대학원에서 공부를 할 때로 기억된다.
그 때 도서관에서 신문사 후배 영란이란 후배를 만난적이 있다. 반갑기도 하고 오랫만에 후배를 만났으니 우선 부담없이 얘기를 한참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헌데, 한참 후배 앞에서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나도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 친구가 --- 정확히는 후배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그런 얘기가 얘기거리가 되었던 것 같다.
뭔 얘긴가싶겠지만 별게 아니다. 당시 전교조 해직 교사의 복직 문제가 한참 사회적 이슈가 될 때였던 것 같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복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거야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입이 방정이다. 그리되면 교직으로 가기가 더 어려워 지는게 아닌가 라고 그냥 가볍게 얘기했것만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서슬퍼런 선배보다도 후배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절감하고야 말았다.
그 후배 왈, '그래도 모두 복직이 되어야죠.' 라는 말을 듣고 뒤통수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한동안 정신이 없어 멍해져 있어야 했다. 또 부끄러워 얼굴을 차마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때 나를 살려 준 것은 경석이였다. 마침 고교동창인 경석이가 들어서지 않았으면 계속 쩔쩔매고 있었을 것이다. 경석이에게 오버를 해면서까지 반가움을 표시하며 그를 끌고 휴게실에서 복도로 나와버렸다.
아까 참, 참기획이란 곳을 다니고 있을 때라 했는데 그곳은 제일기획이니 대홍기획이니 하는 광고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코딱지만한 영세업체다. 출판도 하고 광고기획이란 것도 하던 곳이다. 신국장님이 소개를 해주지 않았으면 그곳에 갈일도, 그런 쪽에 발으 ㄹ들여놓을 이유도 없었을 게다. 아무튼 그때부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교육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이 시작되었다.
면접을 보고 다음날부터 당장 출근하라는 권 이사의 말에 어렵사리 직장을 구했건만 왜 그리 허탈하던지.....
아, 면접을 보러 간 첫날.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좀 쌩뚱맞게도 축구공을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 왜 그리도 예뻐 보이던지 모른다. 그녀 이름은 수정이다.
권수정! 수정처럼 맑은 눈을 가진 앳띤 이십대 초반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여인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가 화장을 약간 짙게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춘기때인지 아니면 대학 졸업하고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사원들이 그러하듯이 화장을 잘못해 화장독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여드름 자국이 얼굴에 무슨 훈장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뻐보이기만 했다. 그래도 일 년이 넘도록 따로 개인적인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농담도 잘하고, 짖궂은 장난도 치건만 왜 그녀 앞에서는 일 이외에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다니. 지금 생각해 봐도 참 바보다.
그런데 하루는 수정 씨에게 용기를 내어 데이트 신청을 했다. 퇴근 시간이 여섯 시로 정해져 있건만 제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직원들의 인건비로 겨우겨우 먹고사는 회사였으니까. 어떤 때는 월급날에 월급을 제 때에 받지 못하고 이삼일 후에 받은 적도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허탈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이다.
그 날따라 다른 직원들이 거의 다 퇴근하고, 나도 그 날따라 일이 별로 없어 퇴근을 모처럼 일찍 해 볼까 하고 책상 정리를 하고 있던 차에 디자인실에서 그녀가 단짝 친구인 혜경 씨외 퇴근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날은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무작정 다가가 먼저 혜경 씨에게 말을 걸었다.
" 바쁘지 않으면 명동에 가서 피자나 먹고 갈래요?"
혜경 씨는 옆에 있는 수정 씨의 눈치를 살피더니 괜찮다는 표정이다. 수정 씨 역시 갑작스런 일이라 의아해 하는 눈치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 역력하다. 오호!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천천히 사무실을 나와 백병원 앞을 지나 중앙극장을 거쳐 바로 명동으로 접어들었다. 명동 성당 앞에서는 통기타를 치며 좋은 일을 하자는,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가난한 이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빨간 양철 성금통이 통기타 가락에 맞춰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지갑에서 돈 몇 천 원을 꺼내 넣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괜히 누구 앞이라 생색을 내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피자 가게에 들어 섰더니 수정 씨가 먼저 말을 걸어 주어 너무도 고마웠다. 왜냐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스러웠는데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별 다른 얘기도 아니다.
" 노기세 씨는 솔직히 피자 별로 안 좋아하죠? "
순간 뭐라 답을 할까 망설였지만 쉽사리 입이 열렸다.
" 아, 예. 사실 그렇죠. 많이 안 먹어봐서. 하지만
가끔 먹어보면 맛있어요." " 그럴 줄 알았대니까요...?"
유쾌하게 웃는 그녀의 웃음이 더욱 더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그 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이제 시작이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들뜬 채 지하철에 올랐다. 그런 흐뭇함은 아주 오랫만에 맛보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일 후에 나의 첫 사랑이었던, 지금은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린 난희 씨가 근무하는 병원을 찾았다. 그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결혼을 하기로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커피 솦에서 담담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고, 그녀에게 수정 씨 얘기를 꺼냈더니 그래 잘 됐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댓시해 봐.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말이 네가 전에 나에게 확실하게 댓시를 하지 않아 너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어.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캐 물을 수도 없었다. 이미 얼마 후면 결혼을 한다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후딱 두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모르게 얘기를 하다보니 마음이 후련해 졌다. 얘, 결혼식 날짜가 잡히면 꼭 연락해라. 하고 헤어졌건만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고향친구로부터 전해들었다. 그런데 왜 그리 서운하던지. 난희가 시집을 가서가 아니다. 나에게 연락을 굳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서운했다. 연락했으면 가서 축하를 해 주었을 텐데 말이다.
며칠 전에는 우리 고향 마산리 친구들의 동창회가 있었다. 그 놈들이야 다들 고향 마을에 살고 있지만 나 같이 타지 생활을 하는 사람은 시간을 내서 두어 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처음 모임을 갖는데다가 꺽어진 팔십, 즉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니 친구가 더욱 그리워진다고 특별히 시간을 내어 모임에 나갔다. 거기서 또 난희를 만났다. 물론 고향에 들르면 가끔 씩은 만난 적이 있다. 나도 벌써 애가 둘이고, 그녀도 큰 얘가 열 살이 넘었단다. 모임이 파할 무렵, 그녀의 남편이 차를 끌고 나왔단다. 그리고 난희는 그렇게 훌쩍 인사만 남기고 떠나 갔다.
아참, 난희 남편은 몇 번 본적이 있다. 내가 졸업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국어 선생님이다. 내가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 같이 축구도 한 적이 있다.
수정 씨와 나는 그 첫 만남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시절에 나는 대학원 수업도 수업이지만 우리 부서에서 직원이 갑자기 둘이나 그만 두어 담당 회사가 배로 늘어 난 상태였다.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과음으로 기침 감기가 심해지더니 급기야 결핵성 늑막염을 얻었다. 그 때는 마포에서 떡 방앗간을 하던 형 집에 신세를 지던 때였는데, 형에게 그 일을 전했더니 부모님 걱정하신다고 시골에는 연락도 하지 말라하고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형과 형수가 삼계탕이며, 이런저런 음식을 사다주었다. 시술을 할 때도 형이 그 자리를 지켜주었고, 입원비도 물론 형이 계산하였다. 그리고, 한 달만에 우기다시피 하여 퇴원을 하였다. 병원에 오래 입원해본 사람들은 안다. 병원에 있는 것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것을.
그리하여 퇴원을 하고 회사에는 휴직을 하고 형과 함께 시골집에 내려갔다. 아니, 퇴직이구나. 퇴원을 하고 회사를 더 다니고, 대학원을 휴학할까 생각했는데 형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형의 강압이 있었지만 형의 말이 일리가 있기에 결국 형의 말대로 퇴사하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수정 씨 하고 겨우 말을 텄는데....... 퇴사하는 날이 마침 내 생일이었다. 어찌 알았는지 여직원들이 케익을 준비해 주었다.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어느 누구도 웃지를 못하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한다. 이런 말과 함께 섭섭하다는 말이 줄을 이었다. 또 잘 살라고. 그런데 수정 씨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얼굴이라도 보고 작별인사를 해야 할텐데.
그 때 그녀가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손에 들고 들어와 생일 축하해요 라고 하는 말이 그리 섭섭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모님이 어찌나 놀라워 하던지. 막내 아들이 병을 앓고 있다니, 그것도 결핵성 늑막염이라고 하니 노인네들 입장에선 예전엔 결핵이 힘든 병이라는 인식도 있었을 테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애꿎은 형만을 나무라고 또 나무랐다. 그런 일이 있으면 부모에게 바로 알려야지 쟤가 무슨 부모 형제 없는 고아냐고 ..... 한참을 언성을 높이고 나서야 잠잠해 졌다.
어찌 보면 형 입장에서야 동생을 데리고 있던 처지에 병을 얻었다니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염려하여 혼자 알아서 처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역시 형만 한 아우 없다고, 장남은 뭐가 달라도 다르긴 다르다. 병원비며 이래저래 돈이 꽤나 들었을 텐데도 용돈을 하라며 십만 원 짜리 수표를 내 손에 끝내 쥐어 주고 서울로 올라갔다.
수시로 주사를 맞고 약을 꼬박꼬박 먹어가며 시골에서의 요양생활이 시작되었다. 친구들이 찾아와 어떠냐고 걱정도 해주고, 보는 이 마다 걱정을 해주었다. 그 때는 꼭 숨어 지내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조차 꺼리지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친구들을 피하면 친구들이며, 인간관계가 다 끊기게 될 거야.’ 이런 생각이 나를 붙들었다. 껄끄러운 자리를 피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때 이런 일도 있었다. 용인 친구가 송탄에서 학원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그만 접은 일이 있었다. 그때가 학원을 아직 하고 있을 때인지 아니면, 그만 두고 잠시 쉬고 있을 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집에서 쉴 때이다. 집에 형이 전에 타던 88 오토바이를 타고 그 친구 집에 놀러갔다. 한여름이니 칠팔월 복 무렵으로 기억된다. 반바지 차림에 무작정 친구가 일러준, 골프장 건설을 하려다가 산사태가 난 곳이 가깝다는 말을 떠올리며, 어비리 방죽을 보고 오토바이를 달렸다. 정확히는 송전 저수지인데 우리 동네에서는 어려서부터 그리 불렀다. 벼이삭이 패기 시작한 논도 간혹 눈에 띄는 들판을 가로질러 물어물어 방아리 방축 마을에 도착했다.
사실 용인이라해도 그 친구와 우리 동네는 십오 분 남짓이면 도착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바로 우리 동네와 붙어 있다시피한 큰 누나의 시댁인 진목리도 용인친구와 같은 남사면에 속해 있다 분리된 마을이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 어렵지 않게 찾아 들어가니 친구가 낚시를 하러 가자고 한다. 그래 따라 나섰다. 한참을 낚시를 하며 놀다가 저녘 때가 되어 현재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었다. 아참, 그 친구 이름이 현재이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막무가내로 밤 낚시를 하자는 거다. 그래 집에 전화를 했다. 아버지께서 전화를 받으셨는데, 몸이 성치 않아 그런지 다짜고짜 무조건 집에 오라고 하시며 끊으셨다.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친구가 야, 빨리 가자! 라는 말에 그냥~ 따라 나섰다. 또 집에 가서 할 일도 딱히 없는 데 뭐하냐는 말에 낮에 놀던 낚시터로 향했다.
어비리 저수지 옆에 있는 자그마한 방죽인데 고기가 훨씬 많이 나온단다. 낮에부터 한 낚시지만 처음이라 그런지 손 맛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어대는 모기도 모기지만 입질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 낚시대를 붙들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졌다. 더구나 소주 한 잔씩을 했으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현재 녀석은 참 꿋꿋하다. 가끔씩 고기를 건져내고 말이다. 나는 졸음을 못 이겨 텐트에 가서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을 대강 때우고 집으로 돌아오려 했다. 어제의 아버지 말씀이 계속 마음에 켕기었다.
그런데 현재 녀석이 한사코 붙드는 거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데 여기 있다고 했으면 된 거 아니냐고 하는 거다. 망설이고 있는데 우재 친구 말고는 이름도 가물가물하다만 몇몇 친구들이 놀러 왔다.
솥단지에 닭 백숙을 끓여 고깃살을 뜯어 먹고 난 후에 그 국물에 쌀을 넣고 끓여 먹으면 진국이란다. 처음 그리 먹어 봤는데 밖에 나와 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이틀 밤이나 자고 집에 돌아왔더니 난리가 났다.
몸도 성지 않은 놈이 없어졌다고. 처음 전화를 한 번 드리고, 연락이 없었으니 집에서는 더구나 아버지께서 집에 오라고 했으니 바로 올 줄 알았는데, 다음 날도 오지를 않고, 그 다음 날에서야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무렵 인신매매가 한참 뉴스에 자주 나올 무렵이다. 그래 인신매매가 되어 새우젓 배에라도 끌려 간 줄 알았다고 하신다. 나도 일부러 연락을 안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마음도 답답하고 해서 친구 말대로 낚시나 할 까 했던 건데, 낚시터에 계속 있다보니 연락을 못했던 거다. 요즘 같으면 핸드폰이라도 있지 그 당시에는 현재네 집에나 가야 하는데 걸어서 십여 분이나 걸리고, 현재와 계속 텐트에서 자가며 낚시를 했으니 말이다. 좀 더 부모님 생각을 했으면 그리 속을 썩여드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회사는 그만두고, 다니던 대학원을 마쳤다. 졸업식 날 광도 녀석이 생각지도 않았는데 서울까지 자기 차로 부모님과 나를 태워 준 기억이 난다. 참, 고마운 일이다. 어머니는 힘들게 식당 일을 해가며 버신 돈으로 졸업 선물을 해 주신단다. 나이 먹은 녀석이 부모님께 손을 벌려 학비를 타온 것도 송구한대 무슨 선물이랴 싶어 됐다는 말에도 굳이 해 주신단다.
그래서 자동 카메라가 생겼다. 지금이야 벌써 고장 나 없어진지 오래건만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송구스럽다. 그 이후에도 어머니는 여기저기 식당일을 계속하였고, 어떤 때는 여관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방청소를 해서 돈을 버신 일도 있다. 육십이 넘도록 식당일을 계속하셨고, 허리 디스크가 있어 그만 두시지 않으셨으면 어쩌면 지금도 식당일을 하실 지도 모른다. 허기야 요즘도 가끔 공사판 함바집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시면 식당일을 나가셨다가 며칠을 끙끙 앓으시곤 하시니 말이다. 지금이야 안 하시지만 부업도 참 많이 하셨다.
젊어서는 농삿일에 허리가 휘고, 늘그막에는 큰 아들이 저러하고, 또 하나 막내 아들은 멀리 산다는 이유로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니 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또 형이 저리 어렵게 지내는 데도 연락한번 하지 않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못하기만 하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놀고만 지내는 듯하더니, 겨우내 주유소에서 덜덜 떨어가며 돈을 벌었다는 거. 그리고 이 달부터는 육촌 인환이 형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니 다행스럽다. 어머니 말씀이 형이 공장에 가 봤더니 일이 할 만 하더란다고 형 친구 재우 형이 전하더란다. 형이 이 기회에 열심히 생활하여 재기하고 조카들과 함께 살며 안정된 생활을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참,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다. .......
낼모레면 우리 집에 집들이를 하는 날이다. 아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집 말이다. 옛날 집은 다 헐리고, 집 뒷산이 온통 전원주택단지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잘 된 일이다. 그만한 돈에 신식으로 집을 지어 집들이를 하게 되었으니 두 분 노인네 말년에 호강이다. 어쨌든 좋은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나중에 내려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낚시터
낚시터
노기세나
요즘 나는 내가 가장 괴롭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나보다 힘든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깨닫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 만큼 나를 둘러싼 삶의 힘겨움이 나의 어깨를 짓눌러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내일이면 새 학년이 시작된다. 한 참 바쁘게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내가 늘 불평인 술자리가 늘어날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겠지. 사실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인간살이가 어찌 내가 싫다고 무조건 피하며 살 수만 있겠는가. 또 내가 술을 무척이나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이것으로 번민하는 것은 원인이 다른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는 접어두고 나의 직분을 충실히 하며 그 속에서 낙도 찾고, 보람도 찾아보련다. 현명하게 나를 지켜가며 살아가야겠다.
언젠가, 한참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참기획이란 곳을 다니며 대학원에서 공부를 할 때로 기억된다.
그 때 도서관에서 신문사 후배 영란이란 후배를 만난적이 있다. 반갑기도 하고 오랫만에 후배를 만났으니 우선 부담없이 얘기를 한참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헌데, 한참 후배 앞에서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나도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 친구가 --- 정확히는 후배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그런 얘기가 얘기거리가 되었던 것 같다.
뭔 얘긴가싶겠지만 별게 아니다. 당시 전교조 해직 교사의 복직 문제가 한참 사회적 이슈가 될 때였던 것 같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복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거야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입이 방정이다. 그리되면 교직으로 가기가 더 어려워 지는게 아닌가 라고 그냥 가볍게 얘기했것만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서슬퍼런 선배보다도 후배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절감하고야 말았다.
그 후배 왈, '그래도 모두 복직이 되어야죠.' 라는 말을 듣고 뒤통수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한동안 정신이 없어 멍해져 있어야 했다. 또 부끄러워 얼굴을 차마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때 나를 살려 준 것은 경석이였다. 마침 고교동창인 경석이가 들어서지 않았으면 계속 쩔쩔매고 있었을 것이다. 경석이에게 오버를 해면서까지 반가움을 표시하며 그를 끌고 휴게실에서 복도로 나와버렸다.
아까 참, 참기획이란 곳을 다니고 있을 때라 했는데 그곳은 제일기획이니 대홍기획이니 하는 광고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코딱지만한 영세업체다. 출판도 하고 광고기획이란 것도 하던 곳이다. 신국장님이 소개를 해주지 않았으면 그곳에 갈일도, 그런 쪽에 발으 ㄹ들여놓을 이유도 없었을 게다. 아무튼 그때부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교육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이 시작되었다.
면접을 보고 다음날부터 당장 출근하라는 권 이사의 말에 어렵사리 직장을 구했건만 왜 그리 허탈하던지.....
아, 면접을 보러 간 첫날.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좀 쌩뚱맞게도 축구공을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 왜 그리도 예뻐 보이던지 모른다. 그녀 이름은 수정이다.
권수정! 수정처럼 맑은 눈을 가진 앳띤 이십대 초반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여인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가 화장을 약간 짙게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춘기때인지 아니면 대학 졸업하고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사원들이 그러하듯이 화장을 잘못해 화장독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여드름 자국이 얼굴에 무슨 훈장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뻐보이기만 했다. 그래도 일 년이 넘도록 따로 개인적인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농담도 잘하고, 짖궂은 장난도 치건만 왜 그녀 앞에서는 일 이외에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다니. 지금 생각해 봐도 참 바보다.
그런데 하루는 수정 씨에게 용기를 내어 데이트 신청을 했다. 퇴근 시간이 여섯 시로 정해져 있건만 제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직원들의 인건비로 겨우겨우 먹고사는 회사였으니까. 어떤 때는 월급날에 월급을 제 때에 받지 못하고 이삼일 후에 받은 적도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허탈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이다.
그 날따라 다른 직원들이 거의 다 퇴근하고, 나도 그 날따라 일이 별로 없어 퇴근을 모처럼 일찍 해 볼까 하고 책상 정리를 하고 있던 차에 디자인실에서 그녀가 단짝 친구인 혜경 씨외 퇴근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날은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무작정 다가가 먼저 혜경 씨에게 말을 걸었다.
" 바쁘지 않으면 명동에 가서 피자나 먹고 갈래요?"
혜경 씨는 옆에 있는 수정 씨의 눈치를 살피더니 괜찮다는 표정이다. 수정 씨 역시 갑작스런 일이라 의아해 하는 눈치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 역력하다. 오호!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천천히 사무실을 나와 백병원 앞을 지나 중앙극장을 거쳐 바로 명동으로 접어들었다. 명동 성당 앞에서는 통기타를 치며 좋은 일을 하자는,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가난한 이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빨간 양철 성금통이 통기타 가락에 맞춰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지갑에서 돈 몇 천 원을 꺼내 넣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괜히 누구 앞이라 생색을 내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피자 가게에 들어 섰더니 수정 씨가 먼저 말을 걸어 주어 너무도 고마웠다. 왜냐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스러웠는데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별 다른 얘기도 아니다.
" 노기세 씨는 솔직히 피자 별로 안 좋아하죠? "
순간 뭐라 답을 할까 망설였지만 쉽사리 입이 열렸다.
" 아, 예. 사실 그렇죠. 많이 안 먹어봐서. 하지만
가끔 먹어보면 맛있어요." " 그럴 줄 알았대니까요...?"
유쾌하게 웃는 그녀의 웃음이 더욱 더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그 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이제 시작이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들뜬 채 지하철에 올랐다. 그런 흐뭇함은 아주 오랫만에 맛보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일 후에 나의 첫 사랑이었던, 지금은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린 난희 씨가 근무하는 병원을 찾았다. 그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결혼을 하기로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커피 솦에서 담담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고, 그녀에게 수정 씨 얘기를 꺼냈더니 그래 잘 됐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댓시해 봐.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말이 네가 전에 나에게 확실하게 댓시를 하지 않아 너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어.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캐 물을 수도 없었다. 이미 얼마 후면 결혼을 한다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후딱 두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모르게 얘기를 하다보니 마음이 후련해 졌다. 얘, 결혼식 날짜가 잡히면 꼭 연락해라. 하고 헤어졌건만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고향친구로부터 전해들었다. 그런데 왜 그리 서운하던지. 난희가 시집을 가서가 아니다. 나에게 연락을 굳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서운했다. 연락했으면 가서 축하를 해 주었을 텐데 말이다.
며칠 전에는 우리 고향 마산리 친구들의 동창회가 있었다. 그 놈들이야 다들 고향 마을에 살고 있지만 나 같이 타지 생활을 하는 사람은 시간을 내서 두어 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처음 모임을 갖는데다가 꺽어진 팔십, 즉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니 친구가 더욱 그리워진다고 특별히 시간을 내어 모임에 나갔다. 거기서 또 난희를 만났다. 물론 고향에 들르면 가끔 씩은 만난 적이 있다. 나도 벌써 애가 둘이고, 그녀도 큰 얘가 열 살이 넘었단다. 모임이 파할 무렵, 그녀의 남편이 차를 끌고 나왔단다. 그리고 난희는 그렇게 훌쩍 인사만 남기고 떠나 갔다.
아참, 난희 남편은 몇 번 본적이 있다. 내가 졸업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국어 선생님이다. 내가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 같이 축구도 한 적이 있다.
수정 씨와 나는 그 첫 만남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시절에 나는 대학원 수업도 수업이지만 우리 부서에서 직원이 갑자기 둘이나 그만 두어 담당 회사가 배로 늘어 난 상태였다.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과음으로 기침 감기가 심해지더니 급기야 결핵성 늑막염을 얻었다. 그 때는 마포에서 떡 방앗간을 하던 형 집에 신세를 지던 때였는데, 형에게 그 일을 전했더니 부모님 걱정하신다고 시골에는 연락도 하지 말라하고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형과 형수가 삼계탕이며, 이런저런 음식을 사다주었다. 시술을 할 때도 형이 그 자리를 지켜주었고, 입원비도 물론 형이 계산하였다. 그리고, 한 달만에 우기다시피 하여 퇴원을 하였다. 병원에 오래 입원해본 사람들은 안다. 병원에 있는 것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것을.
그리하여 퇴원을 하고 회사에는 휴직을 하고 형과 함께 시골집에 내려갔다. 아니, 퇴직이구나. 퇴원을 하고 회사를 더 다니고, 대학원을 휴학할까 생각했는데 형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형의 강압이 있었지만 형의 말이 일리가 있기에 결국 형의 말대로 퇴사하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수정 씨 하고 겨우 말을 텄는데....... 퇴사하는 날이 마침 내 생일이었다. 어찌 알았는지 여직원들이 케익을 준비해 주었다.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어느 누구도 웃지를 못하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한다. 이런 말과 함께 섭섭하다는 말이 줄을 이었다. 또 잘 살라고. 그런데 수정 씨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얼굴이라도 보고 작별인사를 해야 할텐데.
그 때 그녀가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손에 들고 들어와 생일 축하해요 라고 하는 말이 그리 섭섭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모님이 어찌나 놀라워 하던지. 막내 아들이 병을 앓고 있다니, 그것도 결핵성 늑막염이라고 하니 노인네들 입장에선 예전엔 결핵이 힘든 병이라는 인식도 있었을 테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애꿎은 형만을 나무라고 또 나무랐다. 그런 일이 있으면 부모에게 바로 알려야지 쟤가 무슨 부모 형제 없는 고아냐고 ..... 한참을 언성을 높이고 나서야 잠잠해 졌다.
어찌 보면 형 입장에서야 동생을 데리고 있던 처지에 병을 얻었다니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염려하여 혼자 알아서 처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역시 형만 한 아우 없다고, 장남은 뭐가 달라도 다르긴 다르다. 병원비며 이래저래 돈이 꽤나 들었을 텐데도 용돈을 하라며 십만 원 짜리 수표를 내 손에 끝내 쥐어 주고 서울로 올라갔다.
수시로 주사를 맞고 약을 꼬박꼬박 먹어가며 시골에서의 요양생활이 시작되었다. 친구들이 찾아와 어떠냐고 걱정도 해주고, 보는 이 마다 걱정을 해주었다. 그 때는 꼭 숨어 지내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조차 꺼리지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친구들을 피하면 친구들이며, 인간관계가 다 끊기게 될 거야.’ 이런 생각이 나를 붙들었다. 껄끄러운 자리를 피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때 이런 일도 있었다. 용인 친구가 송탄에서 학원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그만 접은 일이 있었다. 그때가 학원을 아직 하고 있을 때인지 아니면, 그만 두고 잠시 쉬고 있을 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집에서 쉴 때이다. 집에 형이 전에 타던 88 오토바이를 타고 그 친구 집에 놀러갔다. 한여름이니 칠팔월 복 무렵으로 기억된다. 반바지 차림에 무작정 친구가 일러준, 골프장 건설을 하려다가 산사태가 난 곳이 가깝다는 말을 떠올리며, 어비리 방죽을 보고 오토바이를 달렸다. 정확히는 송전 저수지인데 우리 동네에서는 어려서부터 그리 불렀다. 벼이삭이 패기 시작한 논도 간혹 눈에 띄는 들판을 가로질러 물어물어 방아리 방축 마을에 도착했다.
사실 용인이라해도 그 친구와 우리 동네는 십오 분 남짓이면 도착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바로 우리 동네와 붙어 있다시피한 큰 누나의 시댁인 진목리도 용인친구와 같은 남사면에 속해 있다 분리된 마을이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 어렵지 않게 찾아 들어가니 친구가 낚시를 하러 가자고 한다. 그래 따라 나섰다. 한참을 낚시를 하며 놀다가 저녘 때가 되어 현재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었다. 아참, 그 친구 이름이 현재이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막무가내로 밤 낚시를 하자는 거다. 그래 집에 전화를 했다. 아버지께서 전화를 받으셨는데, 몸이 성치 않아 그런지 다짜고짜 무조건 집에 오라고 하시며 끊으셨다.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친구가 야, 빨리 가자! 라는 말에 그냥~ 따라 나섰다. 또 집에 가서 할 일도 딱히 없는 데 뭐하냐는 말에 낮에 놀던 낚시터로 향했다.
어비리 저수지 옆에 있는 자그마한 방죽인데 고기가 훨씬 많이 나온단다. 낮에부터 한 낚시지만 처음이라 그런지 손 맛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어대는 모기도 모기지만 입질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 낚시대를 붙들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졌다. 더구나 소주 한 잔씩을 했으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현재 녀석은 참 꿋꿋하다. 가끔씩 고기를 건져내고 말이다. 나는 졸음을 못 이겨 텐트에 가서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을 대강 때우고 집으로 돌아오려 했다. 어제의 아버지 말씀이 계속 마음에 켕기었다.
그런데 현재 녀석이 한사코 붙드는 거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데 여기 있다고 했으면 된 거 아니냐고 하는 거다. 망설이고 있는데 우재 친구 말고는 이름도 가물가물하다만 몇몇 친구들이 놀러 왔다.
솥단지에 닭 백숙을 끓여 고깃살을 뜯어 먹고 난 후에 그 국물에 쌀을 넣고 끓여 먹으면 진국이란다. 처음 그리 먹어 봤는데 밖에 나와 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이틀 밤이나 자고 집에 돌아왔더니 난리가 났다.
몸도 성지 않은 놈이 없어졌다고. 처음 전화를 한 번 드리고, 연락이 없었으니 집에서는 더구나 아버지께서 집에 오라고 했으니 바로 올 줄 알았는데, 다음 날도 오지를 않고, 그 다음 날에서야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무렵 인신매매가 한참 뉴스에 자주 나올 무렵이다. 그래 인신매매가 되어 새우젓 배에라도 끌려 간 줄 알았다고 하신다. 나도 일부러 연락을 안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마음도 답답하고 해서 친구 말대로 낚시나 할 까 했던 건데, 낚시터에 계속 있다보니 연락을 못했던 거다. 요즘 같으면 핸드폰이라도 있지 그 당시에는 현재네 집에나 가야 하는데 걸어서 십여 분이나 걸리고, 현재와 계속 텐트에서 자가며 낚시를 했으니 말이다. 좀 더 부모님 생각을 했으면 그리 속을 썩여드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회사는 그만두고, 다니던 대학원을 마쳤다. 졸업식 날 광도 녀석이 생각지도 않았는데 서울까지 자기 차로 부모님과 나를 태워 준 기억이 난다. 참, 고마운 일이다. 어머니는 힘들게 식당 일을 해가며 버신 돈으로 졸업 선물을 해 주신단다. 나이 먹은 녀석이 부모님께 손을 벌려 학비를 타온 것도 송구한대 무슨 선물이랴 싶어 됐다는 말에도 굳이 해 주신단다.
그래서 자동 카메라가 생겼다. 지금이야 벌써 고장 나 없어진지 오래건만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송구스럽다. 그 이후에도 어머니는 여기저기 식당일을 계속하였고, 어떤 때는 여관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방청소를 해서 돈을 버신 일도 있다. 육십이 넘도록 식당일을 계속하셨고, 허리 디스크가 있어 그만 두시지 않으셨으면 어쩌면 지금도 식당일을 하실 지도 모른다. 허기야 요즘도 가끔 공사판 함바집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시면 식당일을 나가셨다가 며칠을 끙끙 앓으시곤 하시니 말이다. 지금이야 안 하시지만 부업도 참 많이 하셨다.
젊어서는 농삿일에 허리가 휘고, 늘그막에는 큰 아들이 저러하고, 또 하나 막내 아들은 멀리 산다는 이유로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니 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또 형이 저리 어렵게 지내는 데도 연락한번 하지 않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못하기만 하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놀고만 지내는 듯하더니, 겨우내 주유소에서 덜덜 떨어가며 돈을 벌었다는 거. 그리고 이 달부터는 육촌 인환이 형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니 다행스럽다. 어머니 말씀이 형이 공장에 가 봤더니 일이 할 만 하더란다고 형 친구 재우 형이 전하더란다. 형이 이 기회에 열심히 생활하여 재기하고 조카들과 함께 살며 안정된 생활을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참,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다. .......
낼모레면 우리 집에 집들이를 하는 날이다. 아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집 말이다. 옛날 집은 다 헐리고, 집 뒷산이 온통 전원주택단지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잘 된 일이다. 그만한 돈에 신식으로 집을 지어 집들이를 하게 되었으니 두 분 노인네 말년에 호강이다. 어쨌든 좋은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나중에 내려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은 수필일까요 소설일까요?
마무도 모릅니다.
왜?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