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한 약장수는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다짜고짜 만병통치약 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노련한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윤기(소설가)
나는 어떤 도시로 여행하면 먼저 그 도시의 장거리를 구경하고 싶어한다. 국내의 도시로 여행하든 외국 도시로 여행하든 마찬가지다. 해거름에 장거리에서 첫날의 저녁밥을 먹는 일은 그 도시의 속살 냄새를 맡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도(南道)의 한 소도시. 나는 초행인 그 소도시의 장거리를 홀로 걷는다. 어디에선가 슬픈 노래가 들려오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는 더이상 들을 수 없을 듯한, 한물간 여가수의 흘러간 노래다. 나의 걸음은 그쪽으로 쏠린다. 짐작했던 대로 약장수가 판을 벌이고 있다. 보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짠하게 하는 여가수의 노래는, 울긋불긋하게 차려입은 차력사의 차력 시범으로 이어진다.
발길 돌릴 것 없다. 잠들기 전까지 마땅히 할 일도 없다. 밑져야 본전이다. 차력사의, 보아도 그만 안 보아도 그만인 차력 시범은 원숭이 묘기로, 원숭이 묘기는 약장수의 본론인 약 선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나는 그만 여가수의 페이소스, 차력사의 오버액션, 약장수의 허풍에 차례로 정이 들고 만다.
어둑어둑해진 녘에 장터를 떠나는 내 손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게 된, 나에게는 소용도 없는 만병통치약이 들려 있다. 약장수는 여가수의 노래로 나를 판으로 끌어들여 약을 팔아먹은 것이다. 언필칭 성동격서(聲東擊西)다. 공갈은 동쪽에다 치고 주먹질은 서쪽에다 하기다.
나는, 글쓰는 일 역시 장거리 약장수가 약을 파는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장거리 약장수가 약을 팔려면 먼저 사람을 모아야 하듯이, 글로써 자기 뜻을 전하려면 먼저 독자를 글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읽게 해야 한다. 읽히는 데에 실패한 주장은 발화(發話)되지 못한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약장수에게, ‘독자를 글 속으로 끌어들이기’ ‘그 글을 기어이 읽히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사람 모으기다. 그래서 노회한 약장수는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다짜고짜 만병통치약 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여흥을 베풀어 사람들 마음을 느슨하게 푼 다음에 본론을 슬그머니 내놓는다. 노련한 작가가 쓴 글의 도입부는 대체로 사람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그 글에 끌려 들어간다. 작가는 한참 끌고 들어가다가, 본론에 이르면 안면을 싹 바꾸어 버린다. 약은 이 대목에서 파는 것이다.
“어린이 여러분, ‘보통’의 반대말이 무엇이지요?” 하고 선생님이 묻자, “예, 선생님, ‘곱배기’요” 하는 대답이 즉시 튀어나왔다. 그는 자장면 집 아들이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이 젖어 있는 습관이나 스스로 처해 있는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학자 정운영 박사가 올림픽 이후의 경제를 걱정하면서 지금부터 12년 전에 ‘한겨레신문’에다 쓴 글의 들머리다. 이 노련한 약장수는 이런 들머리로, 경제수치 읽는 것이 질색인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 판판이 성공한다.
군대 생활할 때 나는 책을 좀 읽고 싶었다. 하지만 하급자 시절에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사관들이나 고참병들은 내가 즐겨 읽는 영미 소설이나 일본 소설을 자주 빼앗아가고는 했는데 나는 책을 빼앗길 때마다 심한 절망을 느끼고는 했다. 항의하다가 얻어맞은 일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수정했다. 표지를 갈아 끼운 것이다. 말하자면 표지를 ‘세속의 길 열반의 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존재와 무’ 따위로 바꾼 것이다. 하사관이나 고참병들은 더 이상 빼앗아가지 못했다.
그들로 하여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힐 묘안을 낸 것도 그 때다. 책표지를 ‘청춘의 쌍곡선’으로 바꾸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도 들머리는 ‘청춘의 쌍곡선’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도 뵌 적이 없지만, 미국까지 싸가지고 간 ‘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를 정독하면서 글쓰기를 배웠으니 나는 그분의 문하인 셈이다. 약장수가 가수와 차력사를 내세우는 까닭을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한다.
약장수가 가수를 내세우는 까닭 노회한 약장수는
노회한 약장수는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다짜고짜 만병통치약 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노련한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윤기(소설가)
나는 어떤 도시로 여행하면 먼저 그 도시의 장거리를 구경하고 싶어한다. 국내의 도시로 여행하든 외국 도시로 여행하든 마찬가지다. 해거름에 장거리에서 첫날의 저녁밥을 먹는 일은 그 도시의 속살 냄새를 맡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도(南道)의 한 소도시. 나는 초행인 그 소도시의 장거리를 홀로 걷는다. 어디에선가 슬픈 노래가 들려오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는 더이상 들을 수 없을 듯한, 한물간 여가수의 흘러간 노래다. 나의 걸음은 그쪽으로 쏠린다. 짐작했던 대로 약장수가 판을 벌이고 있다. 보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짠하게 하는 여가수의 노래는, 울긋불긋하게 차려입은 차력사의 차력 시범으로 이어진다.
발길 돌릴 것 없다. 잠들기 전까지 마땅히 할 일도 없다. 밑져야 본전이다. 차력사의, 보아도 그만 안 보아도 그만인 차력 시범은 원숭이 묘기로, 원숭이 묘기는 약장수의 본론인 약 선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나는 그만 여가수의 페이소스, 차력사의 오버액션, 약장수의 허풍에 차례로 정이 들고 만다.
어둑어둑해진 녘에 장터를 떠나는 내 손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게 된, 나에게는 소용도 없는 만병통치약이 들려 있다. 약장수는 여가수의 노래로 나를 판으로 끌어들여 약을 팔아먹은 것이다. 언필칭 성동격서(聲東擊西)다. 공갈은 동쪽에다 치고 주먹질은 서쪽에다 하기다.
나는, 글쓰는 일 역시 장거리 약장수가 약을 파는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장거리 약장수가 약을 팔려면 먼저 사람을 모아야 하듯이, 글로써 자기 뜻을 전하려면 먼저 독자를 글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읽게 해야 한다. 읽히는 데에 실패한 주장은 발화(發話)되지 못한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약장수에게, ‘독자를 글 속으로 끌어들이기’ ‘그 글을 기어이 읽히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사람 모으기다. 그래서 노회한 약장수는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다짜고짜 만병통치약 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여흥을 베풀어 사람들 마음을 느슨하게 푼 다음에 본론을 슬그머니 내놓는다. 노련한 작가가 쓴 글의 도입부는 대체로 사람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그 글에 끌려 들어간다. 작가는 한참 끌고 들어가다가, 본론에 이르면 안면을 싹 바꾸어 버린다. 약은 이 대목에서 파는 것이다.
“어린이 여러분, ‘보통’의 반대말이 무엇이지요?” 하고 선생님이 묻자, “예, 선생님, ‘곱배기’요” 하는 대답이 즉시 튀어나왔다. 그는 자장면 집 아들이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이 젖어 있는 습관이나 스스로 처해 있는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학자 정운영 박사가 올림픽 이후의 경제를 걱정하면서 지금부터 12년 전에 ‘한겨레신문’에다 쓴 글의 들머리다. 이 노련한 약장수는 이런 들머리로, 경제수치 읽는 것이 질색인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 판판이 성공한다.
군대 생활할 때 나는 책을 좀 읽고 싶었다. 하지만 하급자 시절에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사관들이나 고참병들은 내가 즐겨 읽는 영미 소설이나 일본 소설을 자주 빼앗아가고는 했는데 나는 책을 빼앗길 때마다 심한 절망을 느끼고는 했다. 항의하다가 얻어맞은 일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수정했다. 표지를 갈아 끼운 것이다. 말하자면 표지를 ‘세속의 길 열반의 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존재와 무’ 따위로 바꾼 것이다. 하사관이나 고참병들은 더 이상 빼앗아가지 못했다.
그들로 하여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힐 묘안을 낸 것도 그 때다. 책표지를 ‘청춘의 쌍곡선’으로 바꾸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도 들머리는 ‘청춘의 쌍곡선’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도 뵌 적이 없지만, 미국까지 싸가지고 간 ‘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를 정독하면서 글쓰기를 배웠으니 나는 그분의 문하인 셈이다. 약장수가 가수와 차력사를 내세우는 까닭을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