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 脫北한 김미선씨의 충격증언 -「정치범수용소」그 지옥의 악몽 2007/03/1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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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 脫北한 김미선씨의 충격증언 -「정치범수용소」그 지옥의 악몽
『거긴 지옥이에요! 손톱을 하루에 하나씩 뽑았어요. 매 맞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1995년 겨울] 여섯살 딸업고 中國으로 탈출, 딸을 조선족 가정에 맡겨
[1999년 2월][2001년 6월] 딸을 찾아 다시 脫北
[2003년 3월] 네 번째 脫北, 베트남 거쳐 한국으로
[2005년 11월] 中國에서 딸과 상봉, 함께 한국行
金景洙 주간조선 기자 (kimks@chosun.com)
네 번의 북한 탈출
2005년 11월29일 중국에서 10년 만에 딸을 찾은 김미선씨. 딸은 몰라보게 컸고, 엄마는 그만큼 늙어 버렸다. 말 없이 눈물만 나오던 시간이었다.
김미선(가명·42·여)씨는 脫北者(탈북자)다.
그녀는 1995년 여섯 살 난 딸을 등에 업고 처음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그녀는 딸을 중국의 조선족 집에 맡겼다. 만에 하나 둘이 잡혀 北으로 압송되느니 딸이라도 자유의 땅에 남겨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1996년 중국 公安(공안)에 붙잡혔고, 북한으로 압송돼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1999년 그녀는 딸을 찾기 위해 두 번째로 압록강을 건넜다. 또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두 번이나 脫北을 시도한 그녀에게는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출옥 후 2001년 그녀는 세 번째로 압록강을 건넜다. 또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역시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딸을 못 찾으면 차라리 죽겠다」는 심정으로 그녀는 2003년 네 번째로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全域(전역)을 돌며 딸을 찾아다니다 실패하자 그녀는 한국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목숨을 걸고 중국 국경을 넘어 2004년 2월 베트남에 입국했다. 2004년 7월 베트남에서 400여 명의 탈북자들이 단체로 한국에 들어올 때, 그녀는 그들 틈에 끼어 있었다.
국가정보원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을 수료한 후 그녀는 다시 딸을 찾아 나섰다. 한국의 교회와 일본의 시민단체가 현금 1000만원을 지원해 줬다. 그녀는 현금 1000만원을 들고 딸을 찾으러 중국으로 떠났다.
『아직도 北에 가족이 남아 있어요』 김미선씨를 처음 만난 때는 2006년 8월이었다. 당시 그녀는 정부가 마련해 준 서울 은평구의 14평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는 네 번이나 북한을 탈출한 사람처럼 강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병을 앓고 있는 듯, 연약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150cm의 작은 키에 몸무게가 40kg 정도였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 전조선기계체조 대회에서 2위에 입상할 정도로 건강했다고 한다. 그녀는 『고문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며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안 보이는 상처 때문에 힘이 들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지난 6개월 동안 수시로 만났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만날 때 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조금씩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걱정했다.
혹여 언론 인터뷰로 北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했다.
그녀는 아직도 「한국」보다는 「남조선」이라는 단어가 익숙했다. 한국 사회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심한 고문을 당한 그녀에게 정신적 압박을 주며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제 이야기는 이름과 지명, 연도까지 모두 가짜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최근 그녀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전화 통화를 했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이 휴대폰을 들고 북한으로 들어가 가족과 연결해 줬다고 한다. 요즘은 북한이 접경지역의 휴대폰 전파를 추적하고 있어 오래 통화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脫北한 이후 그녀의 집은 보위부의 살벌한 감시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이혼하는 데 6개월 걸려
그녀가 수박을 썰어 주며 처음 꺼낸 얘기는 남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나에게 『젊은이는 고향이 어디요?』라고 처음 물었다. 그리고 『젊은이는 만나는 처녀가 있어요?』라고 다시 물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한국과 북한의 젊은이들이 연애를 어떻게 하는지에 관해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자연스레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남편이랑 선을 봐서 만났어요. 강가에서 산책하고, 냉면을 먹었어요. 근데, 선본 날 밤에 강간을 당했어요(웃음)』
―누구한테 강간을 당했다는 말씀이세요.
『선본 남자지 누구예요. 남자들이 정말 무섭더라고요. 남자 힘이 그렇게 센 줄은 처음 알았어요. 정말 눈 깜짝 할 새 당해 버렸어요』
―그럼 결혼은 왜 하셨어요? 신고를 하셨어야죠.
『강간당했다고 소문을 내서 저한테 좋을 게 뭐 있어요. 저는 그 사람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당한 게 분하긴 했는데, 그냥 참아 넘겼어요. 근데 몇 개월이 지나니 배가 불러 오는 거예요. 친구에게 찾아가서 물어봤죠. 한 번 당한 걸로도 임신이 되냐고』
지방 교원대학 교양과를 졸업한 김미선씨는 당시 사령부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유치원 원장이 『너 아무래도 이상하니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병원에 갔다가 임신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우리 엄마는 무조건 결혼하라면서 그날로 결혼 준비를 시작하셨고요. 그 후로 한 달도 안 돼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밤새 울다 식장에 나가서 눈이 퉁퉁 부은 채로 결혼했어요』
남편과는 6개월을 같이 살았다고 한다. 김미선씨는 딸이 태어나자마자 이혼 수속을 밟았다. 북한에서는 부부가 이혼하는 데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 남편의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은 중학교 체육교사였다고 한다.
『사랑이 없으니까, 애가 있어도 같이 살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혼하자니까 남편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라고요』
脫北한 두 친구
젊은 여자가 남편 없이 애를 키우는 일이 부끄럽다고 그녀는 친정에 들어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혼 후 평범하게 집에만 있던 그녀의 집에 1991년 어느 날 두 남자가 찾아왔다.
한 명은 脫北해 현재 朝鮮日報 북한전문기자인 강철환씨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옛 친구였다. 친구는 『장사하러 왔다』고 했다. 김미선씨는 『둘다 요덕에서 살며 생사고락을 같이 한 친구 사이』라며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요덕』이라고 했다.
김미선씨가 살던 곳은 중국 접경지역이라 무역이 많았다.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중국을 왕래하는 동네라고 한다. 요즘은 아니지만, 예전엔 아예 보초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친구가 장사하러 왔다는 말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다.
얼었던 압록강이 녹을 때 즈음, 강철환씨와 친구는 함께 압록강에 목욕하러 간다며 비누와 수건을 들고 나갔다. 두 남자는 며칠 전 그녀에게 중국돈 환전을 부탁했다. 목욕하러 간다던 그들은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북한에는 목욕탕이 없어요. 그래서 강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봄이라곤 하지만 압록강엔 그때도 얼음이 송송했어요. 두 사람은 그 차가운 얼음물을 뚫고 북한을 탈출한 거예요』
보위부가 김미선씨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강철환씨 일행이 脫北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김미선씨는 바로 보위부 사무실로 연행됐다. 김미선씨는 아이를 업고 선 채로 다섯 시간 넘게 심문을 받았다. 보위부 사람들은 김미선씨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보위부 간부가 소리를 질렀다.
『그 반역자 새끼가 어디로 간 줄 알아! 남조선으로 갔어, 남조선! 그 반역자가 남조선에서 기자회견을 했어! 알어!』
김미선씨는 『지금은 북한 사람들이 「남조선에 한번 가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남조선은 적국이고 북한과는 아주 먼 나라처럼 여겨졌다』고 했다. 그녀는 결국 보위부 간부가 보는 앞에서 자기비판서를 써야 했다.
『보위부에서 너무 고생을 하다 보니 강철환과 친구가 너무 밉더라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려간 김에 가서 잘 살았으면 했어요. 요덕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남조선 가서는 잘 살아야지요. 지금 둘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참 좋아요』
큰일을 한번 치르고 나서 그녀가 시작한 일은 골동품 장사였다. 화가였던 아버지가 모아 둔 골동품을 중국에서 건너온 상인들에게 팔고, 그 돈으로 다시 다른 골동품을 구해서 파는 식으로 사업을 키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람을 얽매는 북한 사회를 싫어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주위에서 『반동』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을 참지 못하고 결국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당시 그녀는 열여덟 살이었다.
『처음엔 집에 아버지가 모아 둔 골동품들이 쌓여 있기에, 저게 돈이 될까 싶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하면 손 대기도 좀 죄송스러웠고요. 우연히 골동품 가격을 알아보니 중국 사람들이 가격을 제법 높게 불렀어요. 딱히 수입이 없었고 딸도 키워야 하고, 그래서 장사를 시작했죠』
그녀는 장사 수완이 좋았다. 그녀는 중국 상인 사이에서 금세 신용이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이후 중국 상인들은 그녀의 집을 은행처럼 이용하기 시작했다. 뭉칫돈을 그녀의 집에 맡겨 놓고 다니며 사업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투자자가 생긴 셈이다.
그녀는 외국인이나 당 간부들만 이용할 수 있는 열차 1등칸을 타고 환전을 위해 평양에 출장을 다녔다. 그녀는 『북한에서는 돈으로 안 되는 게 없었다』며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고 했다. 사업은 점점 커져 김미선씨는 북한 내에서 유명한 유통업자로 통했다.
김미선씨는 『내가 무엇을 구하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북한 내에만 있으면 다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당이 긴급 자금 조달을 요청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중고 승용차를 중국으로 밀수출해 자금을 대라는 명령이었다.
여섯 살 난 딸을 업은 채 압록강 건너
그녀가 처음 脫北할 당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1995년 겨울이었다.
김미선씨는 여섯 살 난 딸을 등에 업은 채 쏜살같이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은 꽁꽁 얼어 있었고, 빙판 위에는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눈이 쌓인 빙판은 미끄럽지 않았다. 그녀는 거래하던 조선족 상인이 사기를 치고 나타나지 않자, 상인을 찾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길이었다.
『정말 추운 날이었어요. 그래도 나한테 그 돈은 정말 큰돈이었어요. 사실 내 돈이 아니라, 당에 보낼 돈이었거든요. 이 돈을 못 받으면 당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뻔한 거예요. 당에서 돈이 없어 자동차를 팔게 한 건데, 거래처에서 자동차만 가져가고 돈은 주지 않았어요. 속이 타서, 어떻게든 그 사람을 찾아야만 했어요』
그렇게 압록강을 건넌 게, 김미선씨의 인생을 바꿔 버렸다. 북한 당국은 김미선씨가 당의 자금을 갖고 잠적했다고 생각해 바로 인근 중국지역에 수배령을 내렸다.
『평범한 사람 하나 탈북했다고 바로 수배령을 내리진 않아요. 누가 언제 없어졌는지 매일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압록강 건너자마자 얼마 안 돼서 바로 수배령이 떨어졌습니다』
중국에서 가이드를 맡은 조선족 남성이 『길거리 벽에 붙은 당신 사진을 봤다』며, 『당신 때문에 나한테도 화가 생길 것』이라며 신경질을 냈다. 이후 김미선씨는 길고 긴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저는 괜찮았는데, 혹시라도 어린 딸이 잡혀서 고초를 겪지 않을까 그게 항상 걱정이 됐습니다. 도망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도망가다 보니 어느덧 소련 인접 지역까지 갔다. 그녀는 『그 지독한 추위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게 얼어 버리는 동네였어요. 먼 친척집이라고 찾아갔는데, 영감 하나 사는 집이었어요. 수돗물을 틀어도 제대로 마실 수 없는 물이 나오더라고요. 아이도 계속 아팠어요. 피신해 온 주제에 불평을 할 수 없고, 결국 일주일 만에 너무 추워서 그 집을 나오기로 결심했어요. 3월이었는데 영하 40℃였어요. 아이의 눈가가 다 터졌어요. 바깥에서 눈을 감았다 뜨면 눈이 얼어 붙는 동네였어요』
도피생활 중 조선족에게 딸을 맡겨
김선미씨 딸은 10년간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사진은 열다섯 살 모습. 도피생활 4개월이 지나자 갖고 있는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북한으로 돌아가자니 총살당할까 두려워 돌아갈 수 없었다. 딸은 당시 수두에 걸린 상태였다. 체온이 40℃를 넘고, 물도 제대로 못 넘겼다.
결국 그녀는 가이드 조선족의 친척집에 아이를 맡기기로 했다. 딸은 당시 일곱 살이었다. 친척집 아주머니는 크게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마침 아는 사람 중에 애가 없는 집이 있으니 그 집에 맡겨 놓겠다』고 했다.
『北에서 왔다고 하면 딸도 무조건 잡혀 가니까, 한국에서 온 아이로 위장시켜야 했어요. 아주머니 집에 딸을 눕혀 놓고 딸 머리를 만지면서 제가 그랬어요.
「엄마가 잠깐 돈 벌러 갔다올게. 엄마 올 때까지 아주머니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우리 딸이 원래 어릴 때부터 보채는 일이 없었어요. 근데 그때는 「엄마 꼭 빨리 와야 돼. 꼭 빨리 와」 그러면서 내 옷을 잡고 놓지 않더라고요. 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애가 걱정할까 봐 울지도 못하고 그렇게 나왔어요. 필요한 학용품과 간식을 많이 사다 놓고 집을 나섰어요.
다음날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애가 「엄마, 올 때 내 빨간 구두 사와야 돼」 하면서 전봇대 사이에 얼굴을 내밀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어요. 1995년 5월21일이었어요. 그게 갈림길이었어요. 그게』
딸과 헤어지던 때를 얘기하면서 김미선씨는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 후로 10년간 딸을 찾아다닌 김미선씨는 하루도 편하게 잠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김미선씨가 장롱 속에서 딸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딸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대한민국의 여느 학부모처럼 딸을 곱게 키우려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김미선씨는 딸을 맡겨 놓고 나와 다시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친척 할머니 집에 잠시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중국 公安에게 붙잡혔다.
公安에게 붙잡혀 강제 北送 중국 변방대와 공안, 군인들이 모두 출동해 할머니 집을 포위해 버렸다. 본능적으로 창을 넘고, 담을 넘자마자 뒤에서 『손 들어!』 했다. 당시 중국 군인들은 김미선씨가 대단한 무술을 연마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잡고 보니 연약한 젊은 여자임을 알고 『북조선이 왜 그리 큰일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이 『애는 어디 있냐』고 묻자 그녀는 『애는 도망가다 잃어버렸다』고 했다. 중국 공안들은 『우리는 네가 훈련받은 여자인 줄 알고 있었다』며 『6개월 넘게 너를 찾아 온 중국을 헤맸다』고 했다.
김미선씨는 「이제 북한으로 가면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워 물도 못 먹고, 밥도 못 먹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은 반드시 그녀를 살려서 북한에 보내야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김미선씨에게 『북조선으로 안 보내고, 중국 내 봉제공장으로 보낼 것이니 걱정 말라』며 그녀를 위로하고 밥을 먹게 했다.
며칠 후 승용차에 올라탄 그녀는 군용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긴 다리를 하나 건넜다. 다리를 건너가다 보니 「조중 친선은 하나다」라는 현수막이 보였다.
『왜 거짓말 했어!』 하며 중국 공안들에게 따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다리 끝에 보위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중국 공안들이 수갑을 풀고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보위부 외사과 과장이 뒷짐을 지고 나와 있었다.
다른 보위부 사람들이 그녀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중국이 북한보다 더 잘사는 나라라는 것이었어요. 중국 족쇄(수갑)는 깨끗한 스테인리스 족쇄였는데, 북한 족쇄는 시커멓게 녹슨 구리 족쇄였어요. 북한 족쇄를 차니 손이 많이 아팠어요. 일단 나를 북한 차량에 잡아넣더니, 중국 사람들이 트럭에서 소시지랑 중국 맥주를 엄청나게 많이 내려놓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이 고맙다고 하면서 소시지랑 맥주를 북한차에 실었어요.
저는 바로 감옥으로 갈 줄 알았는데, 호텔로 가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한테 접대하는 자리였어요. 북한이 의뢰한 사람을 잡아다 줘서 고맙다는 거겠죠. 저는 밑에서 지도원 두 명이 감시하며 밥을 먹었고요.
지도원 하나가 「그래도 내 조국이 좋지?」 하고 묻더라고요. 제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네」 하니까 지도원이 「그것 봐라. 장군님이 이렇게 좋은데, 왜 그렇게 나쁜 사상을 가져서 조국을 버리고 나쁜 길을 갔어」 하더라고요』
그녀는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백두산 근처였던 것 같다고 했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차에 올라타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어느 도시의 보위부 집결소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돈 감춘 데가 어디냐』는 추궁을 몇 주간 받았다. 그곳 감옥에서 3개월가량 갇혀 있었다.
『처음 탈북했다 잡혀 온 거라서 그때는 고문 같은 건 없었어요. 근데 강철환씨와 친구가 탈북할 때 관련된 일 때문에 내가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조사를 엄청 받았어요. 3개월 감옥살이 하니 집으로 보내 줬어요.
머릿속에는 딸을 찾아 다시 중국 갈 생각만 하고 있었죠. 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어요』
1995년 11월 출소한 그녀는 『무서워서 바로 강을 건너진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딸을 찾으려고 미국달러를 구해 중국 조선족들에게 돌렸다. 그녀가 뭉칫돈을 들고 딸을 찾는다는 소문이 돌자, 무수한 사기꾼들이 꾸며 낸 정보를 갖고 와 그녀의 돈을 가지고 잠적했다.
그렇게 3년 동안 벌어 놓은 돈을 쓰며 답답한 생활을 하다 그녀는 다시 脫北을 결심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정치범수용소 고문
1999년 2월 그녀는 두 번째 脫北했다. 그러나, 한 달도 못 돼 붙잡혔다. 두 번째 붙잡혀 들어간 감옥은 정치범수용소였다. 그녀는 이번에 간첩혐의로 수용소에 갇혔다.
『거긴 지옥이에요. 옷을 다 벗으라고 하더니 입속, 귓구멍, 아랫도리까지 다 훑어서 검사했어요. 감옥 입구가 좁아 게걸음으로 옆으로 들어가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에요. 거긴 간첩을 취급하는 감옥이었어요. 거기서 고문이 시작됐어요』
이곳에서 그녀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들어와도 6개월이면 백골이 돼서 죽어 나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곳에서는 밍밍한 시래깃국을 하루 세 끼 주고 잠을 재우지 않는다』고 했다. 조심스레 고문에 대해 물어보자 그녀는 『처음엔 여자로서 치욕을 느꼈지만, 나중엔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고 했다. 『죽어서 나간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
『손톱을 하루에 하나씩 뽑았어요. 매 맞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남조선 사람들이랑 내통한 일은 다 말하라면서 때렸어요. 죽을 것 같으면 잠깐 멈춰요. 24시간 양반다리로 앉아서 먹고 자야 돼요. 죽어도 앉아서 죽으라고 해요. 쓰러진 사람도 앉혀 놔요. 기대지도 못하게 하고 물도 안 줘요. 새벽엔 잠을 못 자게 계속 고문을 하니까, 잠을 아예 못 자고 사는 거죠. 밥은 시간 안에 먹어야 되는데, 급하게 먹게 돼요.
그 수용소에 여자는 저 혼자였어요. 남자들은 여러 명이 한방을 썼는데, 누가 규칙을 어기면 간수가 들어와서 같이 방 쓰는 사람들한테 그를 때리라고 해요. 남자들이 싫든 좋든 몽둥이로 동료를 때리는데, 그게 유일한 운동시간이에요. 그래서 더 열심히 때려요. 그때 팔 다리를 놀리지 않으면 팔다리가 다 쪼그라들어요.
그때 남자들이 온갖 춤을 추면서 온 몸을 움직이면서 한 사람을 때리더라고요. 그럼 맞은 사람은 며칠 못 가서 죽어요. 저는 거기가 어딘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제 한번 내 몸을 보니까 뼈랑 가죽만 남았더라고요』
세 번째 脫北
2000년 3월, 1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하고 출소했을 때 그녀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처음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집에서 어머니의 간호를 받으며 1년간 누워 지냈다. 화장실까지 걸어가질 못해 어머니가 대·소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딸을 중국에 두고 그녀는 누워 지낼 수 없었다. 2001년 6월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꿈에 딸이 나타났다. 그녀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세 번째 脫北했다.
『이번엔 예전에 같이 거래하던 조선족 언니를 찾아갔어요. 그 언니는 사업하다 실패해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비싼 물건을 들고 갔어요. 딸 찾으러 왔다고 했더니, 「잘 왔다」고 하더라고요』
―비싼 물건은 어떤 물건인데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핵물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금속이라고 했어요. 손바닥에 딱 잡을 수 있는 크기예요. 그거 하나 팔면 최소한 1만 달러는 돼요』
―그런 귀한 군사 물품은 어떻게 구하세요.
『제가 조선 전역에 인맥이 있었으니까요. 제가 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저를 믿고 물건을 구해다 주는 거예요. 저 때문에 돈번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한국 오니까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제가 북한에 그 인맥을 다 버리고 왔는데, 서울에서 장사를 하려면 최소 1억5000만원은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돈이 어디 있겠어요. 너무 답답해요』
―그래서 조선족 여성이 딸 찾는 데 도움은 주었나요.
『제가 그때 그 물건을 세 개 들고 갔는데, 조선족 언니한테 「내가 딸을 찾으러 왔는데, 돈이 필요하니까 이거 팔아서 반은 언니가 갖고, 반은 나에게 주라」고 했어요』
그녀의 물건을 전해받은 조선족 여성은 물건은 몰래 팔아 넘기고, 그녀를 중국 변방대에 신고해 버렸다. 그녀는 믿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세 번째로 붙잡혔다.
『공안들한테 막 악을 썼어요. 내 딸 찾고 가야 된다고, 내 딸』
그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은 내내 그치지 않았다.
김미선씨에게 저녁식사로 중국요리를 대접했다. 김미선씨는 『중국요리는 중국에서 먹어야 더 맛있다』고 했다. 그날 헤어지고 우리는 다음 날 다시 만났다.
『그때 북한으로 압송될 때는 무서운 게 하나도 없었어요. 이제 죽으면 끝이구나. 딸은 결국 못 찾았구나. 그런데도 후회가 되더라고요. 내가 어디서 긴장을 풀었을까. 내가 뭘 잘못 처리했기에 또 잡혔을까. 다 포기하고 나니 눈물도 안 났어요. 그냥 죽자. 고통만 없이 죽으면 됐다고 생각했어요』
네 번째 脫北 후 한국으로
2001년 7월 그녀는 다시 수용소에 갇혔다. 그녀는 2003년 3월까지 밖에 나오지 못했다. 출소하고 바로 다음 날 그는 네 번째로 脫北했다. 이때 그녀는 『조국을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확신이 섰다』고 한다.
중국 남부지방의 한 교회에서 생활하던 그녀는 2004년 3월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에 들어갔다. 그해 7월17일 그녀는 다른 400여 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한국行 대한항공 여객기에 올랐다.
다른 이들은 모두 길고 긴 여정을 끝냈다는 안도감에 기뻐했지만 김미선씨의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드디어 자유의 품에 안겼지만, 아직 딸을 품에 안지 못한 게 恨(한)으로 남았다.
김미선씨는 안동 金씨다. 할아버지가 안동 金씨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돈을 벌러 일본行 밀배를 타고 갔다가 일본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960년대에 할머니는 김미선씨의 아버지를 데리고 北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당시엔 남한보다 북한이 일본에 있는 조선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했어요. 그러나 할머니는 막상 와 보니 모두 거짓 선전이었다고 후회했어요』
김미선씨는 한국에 들어와서 많이 놀라지 않았다. 중국 접경지역에서는 중국 TV를 볼 수 있는데, 그곳에서 한국 드라마를 몇 편 보았다.
그녀에게는 민주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라는 구분이 의미 없었다. 그녀는 자본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녀는 오직 한 어머니이다. 그녀는 딸을 찾기 위해 북한에서는 간첩 취급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탈북자로 살고 있다.
2004년 11월18일 「하나원」을 수료하자마자 딸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 교회와 일본 시민단체의 지원으로 2005년 여름 중국行 비행기를 탔다. 딸과 헤어진 지 어느덧 10년. 그러나, 그녀는 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조선족들은 딸을 찾기 위해 도와 달라는 그녀에게 돈을 요구했다. 어렵게 찾아간 곳은 흑룡강성의 「감옥사」라는 곳이었다.
10년 만의 재회
『찾아갔더니 기숙사 학교더라고요. 교장선생 허락 없이 학생은 절대 밖에 나오지 못한대요. 도와 준다고 같이 간 분이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 허락을 받고 딸을 데리고 나왔어요. 호텔로 딸을 데리고 왔어요』
일곱 살이던 딸은 열일곱 살이 되어 있었다. 딸은 어머니를 알아봤다. 처음엔 둘다 아무 말이 없다가 김미선씨가 『엄마다』 하며 딸을 품에 안자 둘은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흐느끼던 두 사람은 잠시 후 목놓아 울었다. 母情(모정)은 10년이란 세월을 눌렀다. 2005년 11월29일. 그녀는 딸을 다시 만난 날짜를 정확히 기억했다.
그녀의 딸은 곧바로 그해 12월 캄보디아로 들어갔다. 2006년 6월 태국을 경유해 한국에 입국한 그녀의 딸은 국정원 조사를 받고, 하나원을 수료해 10월에 어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에 들어갔다. 김미선씨는 딸에게 강아지를 선물했다.
지난 12월 어느 일요일 오후 김미선씨 집을 찾았다. 하얀색 강아지가 정신없이 집 안을 뛰어다녔다. 그녀의 딸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해왔다. 김미선씨는 얼굴 표정이 환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딸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1989년생, 이제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 나이다.
그녀의 딸은 열여덟 살 또래 아이들에 비해 훨씬 작아 보였다. 키는 150cm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얼굴이 앳돼 보여 첫인상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처럼 보였다.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떡볶이집에가서 함께 떡볶이를 먹었다.
―서울 와서 보니 뭐가 제일 좋아.
『며칠 전에 롯데월드 갔다 왔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그녀의 딸은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질문을 하면 대답을 당차게 했다.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게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강아지 이야기, 고양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번 脫北한 김미선씨의 충격증언
매 맞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1999년 2월][2001년 6월] 딸을 찾아 다시 脫北
[2003년 3월] 네 번째 脫北, 베트남 거쳐 한국으로
[2005년 11월] 中國에서 딸과 상봉, 함께 한국行
그녀는 1995년 여섯 살 난 딸을 등에 업고 처음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그녀는 딸을 중국의 조선족 집에 맡겼다. 만에 하나 둘이 잡혀 北으로 압송되느니 딸이라도 자유의 땅에 남겨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1996년 중국 公安(공안)에 붙잡혔고, 북한으로 압송돼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1999년 그녀는 딸을 찾기 위해 두 번째로 압록강을 건넜다. 또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두 번이나 脫北을 시도한 그녀에게는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출옥 후 2001년 그녀는 세 번째로 압록강을 건넜다. 또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역시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딸을 못 찾으면 차라리 죽겠다」는 심정으로 그녀는 2003년 네 번째로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全域(전역)을 돌며 딸을 찾아다니다 실패하자 그녀는 한국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목숨을 걸고 중국 국경을 넘어 2004년 2월 베트남에 입국했다. 2004년 7월 베트남에서 400여 명의 탈북자들이 단체로 한국에 들어올 때, 그녀는 그들 틈에 끼어 있었다.
국가정보원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을 수료한 후 그녀는 다시 딸을 찾아 나섰다. 한국의 교회와 일본의 시민단체가 현금 1000만원을 지원해 줬다. 그녀는 현금 1000만원을 들고 딸을 찾으러 중국으로 떠났다.
『아직도 北에 가족이 남아 있어요』
당시 그녀는 정부가 마련해 준 서울 은평구의 14평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는 네 번이나 북한을 탈출한 사람처럼 강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병을 앓고 있는 듯, 연약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150cm의 작은 키에 몸무게가 40kg 정도였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 전조선기계체조 대회에서 2위에 입상할 정도로 건강했다고 한다. 그녀는 『고문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며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안 보이는 상처 때문에 힘이 들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지난 6개월 동안 수시로 만났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만날 때 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조금씩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걱정했다.
혹여 언론 인터뷰로 北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했다.
그녀는 아직도 「한국」보다는 「남조선」이라는 단어가 익숙했다. 한국 사회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심한 고문을 당한 그녀에게 정신적 압박을 주며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제 이야기는 이름과 지명, 연도까지 모두 가짜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최근 그녀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전화 통화를 했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이 휴대폰을 들고 북한으로 들어가 가족과 연결해 줬다고 한다. 요즘은 북한이 접경지역의 휴대폰 전파를 추적하고 있어 오래 통화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脫北한 이후 그녀의 집은 보위부의 살벌한 감시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이혼하는 데 6개월 걸려
그녀가 수박을 썰어 주며 처음 꺼낸 얘기는 남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나에게 『젊은이는 고향이 어디요?』라고 처음 물었다. 그리고 『젊은이는 만나는 처녀가 있어요?』라고 다시 물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한국과 북한의 젊은이들이 연애를 어떻게 하는지에 관해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자연스레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남편이랑 선을 봐서 만났어요. 강가에서 산책하고, 냉면을 먹었어요. 근데, 선본 날 밤에 강간을 당했어요(웃음)』
―누구한테 강간을 당했다는 말씀이세요.
『선본 남자지 누구예요. 남자들이 정말 무섭더라고요. 남자 힘이 그렇게 센 줄은 처음 알았어요. 정말 눈 깜짝 할 새 당해 버렸어요』
―그럼 결혼은 왜 하셨어요? 신고를 하셨어야죠.
『강간당했다고 소문을 내서 저한테 좋을 게 뭐 있어요. 저는 그 사람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당한 게 분하긴 했는데, 그냥 참아 넘겼어요. 근데 몇 개월이 지나니 배가 불러 오는 거예요. 친구에게 찾아가서 물어봤죠. 한 번 당한 걸로도 임신이 되냐고』
지방 교원대학 교양과를 졸업한 김미선씨는 당시 사령부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유치원 원장이 『너 아무래도 이상하니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병원에 갔다가 임신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우리 엄마는 무조건 결혼하라면서 그날로 결혼 준비를 시작하셨고요. 그 후로 한 달도 안 돼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밤새 울다 식장에 나가서 눈이 퉁퉁 부은 채로 결혼했어요』
남편과는 6개월을 같이 살았다고 한다. 김미선씨는 딸이 태어나자마자 이혼 수속을 밟았다. 북한에서는 부부가 이혼하는 데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 남편의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은 중학교 체육교사였다고 한다.
『사랑이 없으니까, 애가 있어도 같이 살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혼하자니까 남편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라고요』
脫北한 두 친구
젊은 여자가 남편 없이 애를 키우는 일이 부끄럽다고 그녀는 친정에 들어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혼 후 평범하게 집에만 있던 그녀의 집에 1991년 어느 날 두 남자가 찾아왔다.
한 명은 脫北해 현재 朝鮮日報 북한전문기자인 강철환씨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옛 친구였다. 친구는 『장사하러 왔다』고 했다. 김미선씨는 『둘다 요덕에서 살며 생사고락을 같이 한 친구 사이』라며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요덕』이라고 했다.
김미선씨가 살던 곳은 중국 접경지역이라 무역이 많았다.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중국을 왕래하는 동네라고 한다. 요즘은 아니지만, 예전엔 아예 보초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친구가 장사하러 왔다는 말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다.
얼었던 압록강이 녹을 때 즈음, 강철환씨와 친구는 함께 압록강에 목욕하러 간다며 비누와 수건을 들고 나갔다. 두 남자는 며칠 전 그녀에게 중국돈 환전을 부탁했다. 목욕하러 간다던 그들은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북한에는 목욕탕이 없어요. 그래서 강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봄이라곤 하지만 압록강엔 그때도 얼음이 송송했어요. 두 사람은 그 차가운 얼음물을 뚫고 북한을 탈출한 거예요』
보위부가 김미선씨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강철환씨 일행이 脫北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김미선씨는 바로 보위부 사무실로 연행됐다. 김미선씨는 아이를 업고 선 채로 다섯 시간 넘게 심문을 받았다. 보위부 사람들은 김미선씨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보위부 간부가 소리를 질렀다.
『그 반역자 새끼가 어디로 간 줄 알아! 남조선으로 갔어, 남조선! 그 반역자가 남조선에서 기자회견을 했어! 알어!』
김미선씨는 『지금은 북한 사람들이 「남조선에 한번 가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남조선은 적국이고 북한과는 아주 먼 나라처럼 여겨졌다』고 했다. 그녀는 결국 보위부 간부가 보는 앞에서 자기비판서를 써야 했다.
『보위부에서 너무 고생을 하다 보니 강철환과 친구가 너무 밉더라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려간 김에 가서 잘 살았으면 했어요. 요덕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남조선 가서는 잘 살아야지요. 지금 둘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참 좋아요』
큰일을 한번 치르고 나서 그녀가 시작한 일은 골동품 장사였다. 화가였던 아버지가 모아 둔 골동품을 중국에서 건너온 상인들에게 팔고, 그 돈으로 다시 다른 골동품을 구해서 파는 식으로 사업을 키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람을 얽매는 북한 사회를 싫어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주위에서 『반동』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을 참지 못하고 결국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당시 그녀는 열여덟 살이었다.
『처음엔 집에 아버지가 모아 둔 골동품들이 쌓여 있기에, 저게 돈이 될까 싶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하면 손 대기도 좀 죄송스러웠고요. 우연히 골동품 가격을 알아보니 중국 사람들이 가격을 제법 높게 불렀어요. 딱히 수입이 없었고 딸도 키워야 하고, 그래서 장사를 시작했죠』
그녀는 장사 수완이 좋았다. 그녀는 중국 상인 사이에서 금세 신용이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이후 중국 상인들은 그녀의 집을 은행처럼 이용하기 시작했다. 뭉칫돈을 그녀의 집에 맡겨 놓고 다니며 사업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투자자가 생긴 셈이다.
그녀는 외국인이나 당 간부들만 이용할 수 있는 열차 1등칸을 타고 환전을 위해 평양에 출장을 다녔다. 그녀는 『북한에서는 돈으로 안 되는 게 없었다』며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고 했다. 사업은 점점 커져 김미선씨는 북한 내에서 유명한 유통업자로 통했다.
김미선씨는 『내가 무엇을 구하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북한 내에만 있으면 다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당이 긴급 자금 조달을 요청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중고 승용차를 중국으로 밀수출해 자금을 대라는 명령이었다.
여섯 살 난 딸을 업은 채 압록강 건너
그녀가 처음 脫北할 당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1995년 겨울이었다.
김미선씨는 여섯 살 난 딸을 등에 업은 채 쏜살같이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은 꽁꽁 얼어 있었고, 빙판 위에는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눈이 쌓인 빙판은 미끄럽지 않았다. 그녀는 거래하던 조선족 상인이 사기를 치고 나타나지 않자, 상인을 찾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길이었다.
『정말 추운 날이었어요. 그래도 나한테 그 돈은 정말 큰돈이었어요. 사실 내 돈이 아니라, 당에 보낼 돈이었거든요. 이 돈을 못 받으면 당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뻔한 거예요. 당에서 돈이 없어 자동차를 팔게 한 건데, 거래처에서 자동차만 가져가고 돈은 주지 않았어요. 속이 타서, 어떻게든 그 사람을 찾아야만 했어요』
그렇게 압록강을 건넌 게, 김미선씨의 인생을 바꿔 버렸다. 북한 당국은 김미선씨가 당의 자금을 갖고 잠적했다고 생각해 바로 인근 중국지역에 수배령을 내렸다.
『평범한 사람 하나 탈북했다고 바로 수배령을 내리진 않아요. 누가 언제 없어졌는지 매일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압록강 건너자마자 얼마 안 돼서 바로 수배령이 떨어졌습니다』
중국에서 가이드를 맡은 조선족 남성이 『길거리 벽에 붙은 당신 사진을 봤다』며, 『당신 때문에 나한테도 화가 생길 것』이라며 신경질을 냈다. 이후 김미선씨는 길고 긴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저는 괜찮았는데, 혹시라도 어린 딸이 잡혀서 고초를 겪지 않을까 그게 항상 걱정이 됐습니다. 도망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도망가다 보니 어느덧 소련 인접 지역까지 갔다. 그녀는 『그 지독한 추위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게 얼어 버리는 동네였어요. 먼 친척집이라고 찾아갔는데, 영감 하나 사는 집이었어요. 수돗물을 틀어도 제대로 마실 수 없는 물이 나오더라고요. 아이도 계속 아팠어요. 피신해 온 주제에 불평을 할 수 없고, 결국 일주일 만에 너무 추워서 그 집을 나오기로 결심했어요. 3월이었는데 영하 40℃였어요. 아이의 눈가가 다 터졌어요. 바깥에서 눈을 감았다 뜨면 눈이 얼어 붙는 동네였어요』
도피생활 중 조선족에게 딸을 맡겨
도피생활 4개월이 지나자 갖고 있는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북한으로 돌아가자니 총살당할까 두려워 돌아갈 수 없었다. 딸은 당시 수두에 걸린 상태였다. 체온이 40℃를 넘고, 물도 제대로 못 넘겼다.
결국 그녀는 가이드 조선족의 친척집에 아이를 맡기기로 했다. 딸은 당시 일곱 살이었다. 친척집 아주머니는 크게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마침 아는 사람 중에 애가 없는 집이 있으니 그 집에 맡겨 놓겠다』고 했다.
『北에서 왔다고 하면 딸도 무조건 잡혀 가니까, 한국에서 온 아이로 위장시켜야 했어요. 아주머니 집에 딸을 눕혀 놓고 딸 머리를 만지면서 제가 그랬어요.
「엄마가 잠깐 돈 벌러 갔다올게. 엄마 올 때까지 아주머니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우리 딸이 원래 어릴 때부터 보채는 일이 없었어요. 근데 그때는 「엄마 꼭 빨리 와야 돼. 꼭 빨리 와」 그러면서 내 옷을 잡고 놓지 않더라고요. 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애가 걱정할까 봐 울지도 못하고 그렇게 나왔어요. 필요한 학용품과 간식을 많이 사다 놓고 집을 나섰어요.
다음날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애가 「엄마, 올 때 내 빨간 구두 사와야 돼」 하면서 전봇대 사이에 얼굴을 내밀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어요. 1995년 5월21일이었어요. 그게 갈림길이었어요. 그게』
딸과 헤어지던 때를 얘기하면서 김미선씨는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 후로 10년간 딸을 찾아다닌 김미선씨는 하루도 편하게 잠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김미선씨가 장롱 속에서 딸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딸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대한민국의 여느 학부모처럼 딸을 곱게 키우려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김미선씨는 딸을 맡겨 놓고 나와 다시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친척 할머니 집에 잠시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중국 公安에게 붙잡혔다.
公安에게 붙잡혀 강제 北送
중국 변방대와 공안, 군인들이 모두 출동해 할머니 집을 포위해 버렸다. 본능적으로 창을 넘고, 담을 넘자마자 뒤에서 『손 들어!』 했다. 당시 중국 군인들은 김미선씨가 대단한 무술을 연마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잡고 보니 연약한 젊은 여자임을 알고 『북조선이 왜 그리 큰일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이 『애는 어디 있냐』고 묻자 그녀는 『애는 도망가다 잃어버렸다』고 했다. 중국 공안들은 『우리는 네가 훈련받은 여자인 줄 알고 있었다』며 『6개월 넘게 너를 찾아 온 중국을 헤맸다』고 했다.
김미선씨는 「이제 북한으로 가면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워 물도 못 먹고, 밥도 못 먹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은 반드시 그녀를 살려서 북한에 보내야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김미선씨에게 『북조선으로 안 보내고, 중국 내 봉제공장으로 보낼 것이니 걱정 말라』며 그녀를 위로하고 밥을 먹게 했다.
며칠 후 승용차에 올라탄 그녀는 군용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긴 다리를 하나 건넜다. 다리를 건너가다 보니 「조중 친선은 하나다」라는 현수막이 보였다.
『왜 거짓말 했어!』 하며 중국 공안들에게 따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다리 끝에 보위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중국 공안들이 수갑을 풀고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보위부 외사과 과장이 뒷짐을 지고 나와 있었다.
다른 보위부 사람들이 그녀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중국이 북한보다 더 잘사는 나라라는 것이었어요. 중국 족쇄(수갑)는 깨끗한 스테인리스 족쇄였는데, 북한 족쇄는 시커멓게 녹슨 구리 족쇄였어요. 북한 족쇄를 차니 손이 많이 아팠어요. 일단 나를 북한 차량에 잡아넣더니, 중국 사람들이 트럭에서 소시지랑 중국 맥주를 엄청나게 많이 내려놓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이 고맙다고 하면서 소시지랑 맥주를 북한차에 실었어요.
저는 바로 감옥으로 갈 줄 알았는데, 호텔로 가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한테 접대하는 자리였어요. 북한이 의뢰한 사람을 잡아다 줘서 고맙다는 거겠죠. 저는 밑에서 지도원 두 명이 감시하며 밥을 먹었고요.
지도원 하나가 「그래도 내 조국이 좋지?」 하고 묻더라고요. 제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네」 하니까 지도원이 「그것 봐라. 장군님이 이렇게 좋은데, 왜 그렇게 나쁜 사상을 가져서 조국을 버리고 나쁜 길을 갔어」 하더라고요』
그녀는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백두산 근처였던 것 같다고 했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차에 올라타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어느 도시의 보위부 집결소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돈 감춘 데가 어디냐』는 추궁을 몇 주간 받았다. 그곳 감옥에서 3개월가량 갇혀 있었다.
『처음 탈북했다 잡혀 온 거라서 그때는 고문 같은 건 없었어요. 근데 강철환씨와 친구가 탈북할 때 관련된 일 때문에 내가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조사를 엄청 받았어요. 3개월 감옥살이 하니 집으로 보내 줬어요.
머릿속에는 딸을 찾아 다시 중국 갈 생각만 하고 있었죠. 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어요』
1995년 11월 출소한 그녀는 『무서워서 바로 강을 건너진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딸을 찾으려고 미국달러를 구해 중국 조선족들에게 돌렸다. 그녀가 뭉칫돈을 들고 딸을 찾는다는 소문이 돌자, 무수한 사기꾼들이 꾸며 낸 정보를 갖고 와 그녀의 돈을 가지고 잠적했다.
그렇게 3년 동안 벌어 놓은 돈을 쓰며 답답한 생활을 하다 그녀는 다시 脫北을 결심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정치범수용소 고문
1999년 2월 그녀는 두 번째 脫北했다. 그러나, 한 달도 못 돼 붙잡혔다. 두 번째 붙잡혀 들어간 감옥은 정치범수용소였다. 그녀는 이번에 간첩혐의로 수용소에 갇혔다.
『거긴 지옥이에요. 옷을 다 벗으라고 하더니 입속, 귓구멍, 아랫도리까지 다 훑어서 검사했어요. 감옥 입구가 좁아 게걸음으로 옆으로 들어가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에요. 거긴 간첩을 취급하는 감옥이었어요. 거기서 고문이 시작됐어요』
이곳에서 그녀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들어와도 6개월이면 백골이 돼서 죽어 나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곳에서는 밍밍한 시래깃국을 하루 세 끼 주고 잠을 재우지 않는다』고 했다. 조심스레 고문에 대해 물어보자 그녀는 『처음엔 여자로서 치욕을 느꼈지만, 나중엔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고 했다. 『죽어서 나간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
『손톱을 하루에 하나씩 뽑았어요. 매 맞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남조선 사람들이랑 내통한 일은 다 말하라면서 때렸어요. 죽을 것 같으면 잠깐 멈춰요. 24시간 양반다리로 앉아서 먹고 자야 돼요. 죽어도 앉아서 죽으라고 해요. 쓰러진 사람도 앉혀 놔요. 기대지도 못하게 하고 물도 안 줘요. 새벽엔 잠을 못 자게 계속 고문을 하니까, 잠을 아예 못 자고 사는 거죠. 밥은 시간 안에 먹어야 되는데, 급하게 먹게 돼요.
그 수용소에 여자는 저 혼자였어요. 남자들은 여러 명이 한방을 썼는데, 누가 규칙을 어기면 간수가 들어와서 같이 방 쓰는 사람들한테 그를 때리라고 해요. 남자들이 싫든 좋든 몽둥이로 동료를 때리는데, 그게 유일한 운동시간이에요. 그래서 더 열심히 때려요. 그때 팔 다리를 놀리지 않으면 팔다리가 다 쪼그라들어요.
그때 남자들이 온갖 춤을 추면서 온 몸을 움직이면서 한 사람을 때리더라고요. 그럼 맞은 사람은 며칠 못 가서 죽어요. 저는 거기가 어딘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제 한번 내 몸을 보니까 뼈랑 가죽만 남았더라고요』
세 번째 脫北
2000년 3월, 1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하고 출소했을 때 그녀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처음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집에서 어머니의 간호를 받으며 1년간 누워 지냈다. 화장실까지 걸어가질 못해 어머니가 대·소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딸을 중국에 두고 그녀는 누워 지낼 수 없었다. 2001년 6월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꿈에 딸이 나타났다. 그녀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세 번째 脫北했다.
『이번엔 예전에 같이 거래하던 조선족 언니를 찾아갔어요. 그 언니는 사업하다 실패해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비싼 물건을 들고 갔어요. 딸 찾으러 왔다고 했더니, 「잘 왔다」고 하더라고요』
―비싼 물건은 어떤 물건인데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핵물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금속이라고 했어요. 손바닥에 딱 잡을 수 있는 크기예요. 그거 하나 팔면 최소한 1만 달러는 돼요』
―그런 귀한 군사 물품은 어떻게 구하세요.
『제가 조선 전역에 인맥이 있었으니까요. 제가 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저를 믿고 물건을 구해다 주는 거예요. 저 때문에 돈번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한국 오니까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제가 북한에 그 인맥을 다 버리고 왔는데, 서울에서 장사를 하려면 최소 1억5000만원은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돈이 어디 있겠어요. 너무 답답해요』
―그래서 조선족 여성이 딸 찾는 데 도움은 주었나요.
『제가 그때 그 물건을 세 개 들고 갔는데, 조선족 언니한테 「내가 딸을 찾으러 왔는데, 돈이 필요하니까 이거 팔아서 반은 언니가 갖고, 반은 나에게 주라」고 했어요』
그녀의 물건을 전해받은 조선족 여성은 물건은 몰래 팔아 넘기고, 그녀를 중국 변방대에 신고해 버렸다. 그녀는 믿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세 번째로 붙잡혔다.
『공안들한테 막 악을 썼어요. 내 딸 찾고 가야 된다고, 내 딸』
그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은 내내 그치지 않았다.
김미선씨에게 저녁식사로 중국요리를 대접했다. 김미선씨는 『중국요리는 중국에서 먹어야 더 맛있다』고 했다. 그날 헤어지고 우리는 다음 날 다시 만났다.
『그때 북한으로 압송될 때는 무서운 게 하나도 없었어요. 이제 죽으면 끝이구나. 딸은 결국 못 찾았구나. 그런데도 후회가 되더라고요. 내가 어디서 긴장을 풀었을까. 내가 뭘 잘못 처리했기에 또 잡혔을까. 다 포기하고 나니 눈물도 안 났어요. 그냥 죽자. 고통만 없이 죽으면 됐다고 생각했어요』
네 번째 脫北 후 한국으로
2001년 7월 그녀는 다시 수용소에 갇혔다. 그녀는 2003년 3월까지 밖에 나오지 못했다. 출소하고 바로 다음 날 그는 네 번째로 脫北했다. 이때 그녀는 『조국을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확신이 섰다』고 한다.
중국 남부지방의 한 교회에서 생활하던 그녀는 2004년 3월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에 들어갔다. 그해 7월17일 그녀는 다른 400여 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한국行 대한항공 여객기에 올랐다.
다른 이들은 모두 길고 긴 여정을 끝냈다는 안도감에 기뻐했지만 김미선씨의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드디어 자유의 품에 안겼지만, 아직 딸을 품에 안지 못한 게 恨(한)으로 남았다.
김미선씨는 안동 金씨다. 할아버지가 안동 金씨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돈을 벌러 일본行 밀배를 타고 갔다가 일본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960년대에 할머니는 김미선씨의 아버지를 데리고 北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당시엔 남한보다 북한이 일본에 있는 조선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했어요. 그러나 할머니는 막상 와 보니 모두 거짓 선전이었다고 후회했어요』
김미선씨는 한국에 들어와서 많이 놀라지 않았다. 중국 접경지역에서는 중국 TV를 볼 수 있는데, 그곳에서 한국 드라마를 몇 편 보았다.
그녀에게는 민주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라는 구분이 의미 없었다. 그녀는 자본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녀는 오직 한 어머니이다. 그녀는 딸을 찾기 위해 북한에서는 간첩 취급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탈북자로 살고 있다.
2004년 11월18일 「하나원」을 수료하자마자 딸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 교회와 일본 시민단체의 지원으로 2005년 여름 중국行 비행기를 탔다. 딸과 헤어진 지 어느덧 10년. 그러나, 그녀는 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조선족들은 딸을 찾기 위해 도와 달라는 그녀에게 돈을 요구했다. 어렵게 찾아간 곳은 흑룡강성의 「감옥사」라는 곳이었다.
10년 만의 재회
『찾아갔더니 기숙사 학교더라고요. 교장선생 허락 없이 학생은 절대 밖에 나오지 못한대요. 도와 준다고 같이 간 분이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 허락을 받고 딸을 데리고 나왔어요. 호텔로 딸을 데리고 왔어요』
일곱 살이던 딸은 열일곱 살이 되어 있었다. 딸은 어머니를 알아봤다. 처음엔 둘다 아무 말이 없다가 김미선씨가 『엄마다』 하며 딸을 품에 안자 둘은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흐느끼던 두 사람은 잠시 후 목놓아 울었다. 母情(모정)은 10년이란 세월을 눌렀다. 2005년 11월29일. 그녀는 딸을 다시 만난 날짜를 정확히 기억했다.
그녀의 딸은 곧바로 그해 12월 캄보디아로 들어갔다. 2006년 6월 태국을 경유해 한국에 입국한 그녀의 딸은 국정원 조사를 받고, 하나원을 수료해 10월에 어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에 들어갔다. 김미선씨는 딸에게 강아지를 선물했다.
지난 12월 어느 일요일 오후 김미선씨 집을 찾았다. 하얀색 강아지가 정신없이 집 안을 뛰어다녔다. 그녀의 딸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해왔다. 김미선씨는 얼굴 표정이 환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딸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1989년생, 이제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 나이다.
그녀의 딸은 열여덟 살 또래 아이들에 비해 훨씬 작아 보였다. 키는 150cm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얼굴이 앳돼 보여 첫인상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처럼 보였다.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떡볶이집에가서 함께 떡볶이를 먹었다.
―서울 와서 보니 뭐가 제일 좋아.
『며칠 전에 롯데월드 갔다 왔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그녀의 딸은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질문을 하면 대답을 당차게 했다.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게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강아지 이야기, 고양이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