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여러 도시 가운데에서도 이스탄불만큼 영욕이 교차한 도시가 있을까. 동서양 문물 교류가 시작된 이후 실크로드 상인들이 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이스탄불은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리이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스탄불의 역사가 증명한다. 기원전 657년 그리스의 비자스(Byzas)에 의해 정착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딴 비잔티움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다 서기 196년 내란으로 도시가 재건설되었고, 330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콘스탄틴의 도시라 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했다.
그리고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이 무너진 후 술탄 메멧 2세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스탄불은 6세기에 이미 인구가 50만 명, 9세기에는 1백만 명이 넘었던 거대도시였다. 지금의 인구도 1,200만 명에 달한다. 수많은 문화유산이 있는 곳이다 보니 관광객도 많다. 지난해 터키 관광객은 2,130만 명이었다. 이스탄불은 골든 혼(Golden Horn)과 보스포루스(Bosphorus)라는 만과 해협으로 나뉘어 있다. 골든 혼은 육지를 파고든 만이고, 보스포루스는 마르마라 해와 흑해를 잇는 유일한 해협이다. 바다가 만나고, 또 유럽과 아시아가 두 팔을 뻗어 맞잡은 곳이 이스탄불인 셈이다.
..이스탄불의 이름난 유적은 모두 도시의 서쪽, 유럽 쪽에 몰려 있다. 골든 혼을 감싼 곳에 토카프 궁전과 하기아 소피아 성당, 블루 모스크, 그랜드 바자르가 자리한다. 이곳만 돌아보아도 세계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던 이스탄불의 영화를 충분히 느끼고도 남는다. 토카프 궁전은 오스만투르크 시절에 술탄(황제)이 머물던 곳이다. 오스만투르크 시대의 절대 권력을 지닌 역대 술탄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토카프 궁전은 일단 크기에서 방문객을 압도한다. 5미터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궁전의 전체면적은 약 21만 평. 바티칸시국의 2배이며 모나코의 절반 크기 정도 되는 규모라고 한다. 토카프 궁전은 다양한 이슬람 양식의 건축법이 혼재하고 있다. 이유는 지진 때문이라고 한다. 지진이 나면 궁전 안의 건물들이 파괴되고, 파괴될 때마다 새롭게 복구하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니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다양한 건축양식이 공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토카프 궁전은 현재 대부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토카프 궁전에서 몇 걸음만 더 보태면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다. 이 성당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차례로 지배했던 터키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4세기.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플이란 이름으로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수도로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내부에서 볼 때 엄청난 규모를 실감하게 된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건물의 지붕에는 지름 33m의 돔이 씌워졌다. 바닥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56m. 이 돔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몇 아름도 넘는 4개의 큰 기둥을 세웠다. 비잔틴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1453년 이슬람교로 무장한 오스만투르크가 이스탄불을 함락시키면서 운명을 달리한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이 성당에서 밀려오는 투르크 군을 바라보며 화염 속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의 자살과 함께 비잔틴제국과 기독교의 운명은 종말을 고한다. 그 후 성당은 무슬림을 위한 사원으로 변신한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은 성당의 네 귀퉁이에 이슬람 사원의 상징인 미나레트를 세웠다. 또 성당 내부의 벽을 장식했던 성화들은 모두 회칠을 해버렸다. 지금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무종교다. 터키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박물관으로 바꾸면서 이 성당은 고난에 찬 종교의 시대를 마감했다. 성당 내부에는 코란의 경전을 새긴 금문자와 최근에 복원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성화가 있다. 그것들은 파란만장했던 이스탄불의 역사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과 마주 보는 곳에 꼭 그만한 규모의 이슬람 사원이 있다. 블루 모스크다. 오스만투르크의 위대한 지도자 메흐멧의 명에 의해 1609년부터 8년에 걸쳐 지은 사원으로 이 사원의 이름은 원래 임페리얼 술탄 아흐멧 모스크지만 사람들은 모두 블루 모스크라 부른다. 사원 내부를 푸른색 타일로 장식했기 때문이다. 블루 모스크에서는 지금도 이슬람교인들이 예배를 본다. 동서양 문명이 만나는 곳이라 큰 시장이 발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이 그랜드 바자르. 유적이나 역사에 별반 취미가 없는 이들에게도 그랜드 바자르는 솔깃한 곳이다. 바자르는 중앙아시아의 도시마다 있는 시장을 뜻하는데 이스탄불에 있는 그랜드 바자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바자르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물론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이 서는 것이 아닌 상설시장으로 변하기는 했다. 그랜드 바자르의 역사는 500년. 현재 무려 4,500개의 상점들이 몰려 있다. 보석과 장신구에서 화려한 터키의 그릇, 조명, 가죽류, 입맛을 유혹하는 터키식 젤리, 향신료, 액세서리 가게 등이 들어서 있다. 시장 곳곳에 먹을거리도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있고, 이스탄불에서 환율이 가장 좋은 사설 환전소도 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아직까지 흥정하는 맛이 남아 있다. 적정한 가격을 놓고 흥정을 하면 터키인들과 정도 들고 재미도 있다. 여행자들이 몰려들어 혼잡을 빚을 때는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이 구석구석에 상주하고 있어 안심하고 ‘바자르 탐험’을 할 수 있다. 《지중해 기행》을 쓴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콘스탄티노플에 가면 꼭 그랜드 바자르를 보고 와야 한다. 이 도시의 심장부가 거기 있다”고까지 했으니 이스탄불에서는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다.
..터키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에페소스와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을 돌아보아야 한다. 에페소스는 마리아, 사도 요한과 관련된 곳이다. 사도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스로 왔고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요한은 이곳에 머물며 요한복음을 썼다. 한때 교회가 번성하기도 했지만 7세기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커져 잦은 침략으로 피폐해 갔으며 이후에는 오스만투르크의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리우스의 목욕탕과 아고라(집회나 종교행사 등이 열리던 곳), 오데온(소극장)이 있다. 이 부분을 지나면 에페소스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현재 남아있는 에페소스의 유적은 알렉산더의 장수였던 리시마코스가 BC 3세기에 세운 도시의 흔적. 당시 25만 명이 거주했으며 ‘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불렸다. 에페소스의 번영은 수많은 대리석 기둥과 수레 두 대가 거뜬히 비켜갈 수 있는 넓은 길에서 짐작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의 문을 지나면 넓은 대리석 거리가 펼쳐진다. “이곳은 고급 상점과 주택이 늘어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목욕탕이 있던 곳으로 파이프를 통해 온수를 공급할 만큼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게다가 홍등가도 있었는데 입구에는 발바닥 문양이 새겨져 있었죠. 발을 문양에 대어 본 후 문양보다 발이 작으면 입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죠. ” 어떻게 한 도시의 역사를 가이드의 몇십 분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안내 자료로 받은 가이드북에 씌어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한 마디가 에페소스의 모든 것을 더 잘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panta borei kay aydem meneyi panta reyi’(항상 변하고, 항상 넘쳐나며, 결코 멈추지 않는 곳)
..에페소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유적은 켈수스 도서관이다. 서기 135년 이 지방의 총독이었던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었다. 에페소스의 여러 유적 가운데 전면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높이 16m의 건물에 1만 2,000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 사실이 놀랍다. 지금의 건물은 고트족에 의해 최초로 무너진 후 여러 차례 재건된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에페소스의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을 펼친 것으로 나와 있다. 사도 바울의 에페소스 방문 이후 교회가 부흥했고 사도 바울은 로마에 투옥된다. 그는 투옥중 에페소스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들이 바로 ‘에베소서’이다. 혹자들은 이 켈수스 도서관이 성경에 나오는 두란노 서원이 아니냐는 추측도 하곤 하지만 켈수스 도서관은 사도 바울이 에페소스를 방문한 시기보다 늦게 완성되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에페소스 출구 앞에 있는 원형극장은 ‘거대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파나이르 산의 경사로에 세워진 이 극장은 무대에서 맨 꼭대기 층까지 높이가 60m에 달한다. 2만 4천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소리가 가장 잘 들리도록 설계되었다는 가이드의 말에 너도나도 소리를 질러본다. 버스는 에페소스를 떠나 파묵칼레로 향했다. 하지만 오랜 여정 끝에 다다른 파묵칼레는 실망이었다. 엽서나 화보집에서 보던 하얀 석회 연못에 초록빛 온천수가 담긴 풍경은 볼 수가 없었다. 로마시대 온천으로 유명했던 이곳은 무분별한 개발과 줄어든 온천수로 인해 지금은 거의 말라버렸다. 그나마 물이 고인 부분도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맨발로 잠깐 동안만 돌아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오히려 더 관심을 끄는 곳은 온천 뒤에 있는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기원전 190년에 시작된 도시의 유적으로 1,200여 개의 석관묘, 1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히드리안 황제 시절의 원형극장 등이 남아 있다.
..만화 영화 를 보면서 만화가들은 참 상상력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버섯처럼 생긴 집을 떠올렸을까? 그런데 터키를 여행하다 딱 그런 집을 만났다. 바로 카파도키아 괴레메의 암굴집. ‘요정들의 굴뚝’이란 뜻의 페어리 침니(Fairy Chimney)라는 버섯바위인데 스머프의 집과 똑같다. 알고 보니 스머프의 작가도 이곳에서 영감을 받았고, SF영화 ‘스타워즈’의 우주계곡도 카파도키아 침식계곡이 모델이 됐단다. 카파도키아 지역을 벌룬을 타고 여행했다. 벌룬이 부풀어 오르고 허공에 뜬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옆에 선 스위스 관광객은 ‘울랄라’를 연발한다. 하늘에서 보는 카파도키아. 마치 화성의 어느 골짜기를 비행선을 타고 날아다니는 듯한 기분이랄까? 버섯을 닮은 바위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기도 하고 연노란색 바위들이 울퉁불퉁 수십 km를 이어지기도 했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 역시 경이로웠다.
카파도키아의 지명은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이라는 뜻이지만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기원전 1,200년경에는 히타이트 왕국, 리디아 왕국, 프리지아 왕국이 각축전을 벌였고, 이후 페르시아 왕국,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등 수많은 왕조들이 거쳐 갔다. 비잔틴,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도 카파도키아를 점령한 왕조였다. 주민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굴을 뚫었다.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람 한 명이 허리를 숙이고 겨우 지나다닐 만한 굴이 수십 km를 이어진다. 굴은 이어져 어느새 도시가 되었다. 1,200개 이상의 방이 있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나오는 연기가 지상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연기를 모으는 방을 따로 만들었다. 교회와 곡물 저장소, 동물 사육장, 포도주 저장실도 완벽하게 갖추었다. 약 3만 명의 사람들이 6개월을 살 수 있다. 여행객에게 개방되는 부분은 지하 8층까지인데 내려가는 쪽으로는 붉은 화살표가, 올라가는 방향으로는 푸른색 화살표가 벽에 그려져 있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를 벗어나 지상으로 나온 순간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현실도 실재한다. 여행은 그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작업이다.
터키, 지중해의 짙고 검은 눈동자 여행
그리고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이 무너진 후 술탄 메멧 2세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스탄불은 6세기에 이미 인구가 50만 명, 9세기에는 1백만 명이 넘었던 거대도시였다. 지금의 인구도 1,200만 명에 달한다. 수많은 문화유산이 있는 곳이다 보니 관광객도 많다. 지난해 터키 관광객은 2,130만 명이었다. 이스탄불은 골든 혼(Golden Horn)과 보스포루스(Bosphorus)라는 만과 해협으로 나뉘어 있다. 골든 혼은 육지를 파고든 만이고, 보스포루스는 마르마라 해와 흑해를 잇는 유일한 해협이다. 바다가 만나고, 또 유럽과 아시아가 두 팔을 뻗어 맞잡은 곳이 이스탄불인 셈이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과 마주 보는 곳에 꼭 그만한 규모의 이슬람 사원이 있다. 블루 모스크다. 오스만투르크의 위대한 지도자 메흐멧의 명에 의해 1609년부터 8년에 걸쳐 지은 사원으로 이 사원의 이름은 원래 임페리얼 술탄 아흐멧 모스크지만 사람들은 모두 블루 모스크라 부른다. 사원 내부를 푸른색 타일로 장식했기 때문이다. 블루 모스크에서는 지금도 이슬람교인들이 예배를 본다. 동서양 문명이 만나는 곳이라 큰 시장이 발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이 그랜드 바자르. 유적이나 역사에 별반 취미가 없는 이들에게도 그랜드 바자르는 솔깃한 곳이다. 바자르는 중앙아시아의 도시마다 있는 시장을 뜻하는데 이스탄불에 있는 그랜드 바자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바자르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물론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이 서는 것이 아닌 상설시장으로 변하기는 했다. 그랜드 바자르의 역사는 500년. 현재 무려 4,500개의 상점들이 몰려 있다. 보석과 장신구에서 화려한 터키의 그릇, 조명, 가죽류, 입맛을 유혹하는 터키식 젤리, 향신료, 액세서리 가게 등이 들어서 있다. 시장 곳곳에 먹을거리도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있고, 이스탄불에서 환율이 가장 좋은 사설 환전소도 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아직까지 흥정하는 맛이 남아 있다. 적정한 가격을 놓고 흥정을 하면 터키인들과 정도 들고 재미도 있다. 여행자들이 몰려들어 혼잡을 빚을 때는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이 구석구석에 상주하고 있어 안심하고 ‘바자르 탐험’을 할 수 있다. 《지중해 기행》을 쓴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콘스탄티노플에 가면 꼭 그랜드 바자르를 보고 와야 한다. 이 도시의 심장부가 거기 있다”고까지 했으니 이스탄불에서는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다.
게다가 홍등가도 있었는데 입구에는 발바닥 문양이 새겨져 있었죠. 발을 문양에 대어 본 후 문양보다 발이 작으면 입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죠. ” 어떻게 한 도시의 역사를 가이드의 몇십 분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안내 자료로 받은 가이드북에 씌어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한 마디가 에페소스의 모든 것을 더 잘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panta borei kay aydem meneyi panta reyi’(항상 변하고, 항상 넘쳐나며, 결코 멈추지 않는 곳)
..에페소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유적은 켈수스 도서관이다. 서기 135년 이 지방의 총독이었던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었다. 에페소스의 여러 유적 가운데 전면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높이 16m의 건물에 1만 2,000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 사실이 놀랍다. 지금의 건물은 고트족에 의해 최초로 무너진 후 여러 차례 재건된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에페소스의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을 펼친 것으로 나와 있다. 사도 바울의 에페소스 방문 이후 교회가 부흥했고 사도 바울은 로마에 투옥된다. 그는 투옥중 에페소스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들이 바로 ‘에베소서’이다. 혹자들은 이 켈수스 도서관이 성경에 나오는 두란노 서원이 아니냐는 추측도 하곤 하지만 켈수스 도서관은 사도 바울이 에페소스를 방문한 시기보다 늦게 완성되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에페소스 출구 앞에 있는 원형극장은 ‘거대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파나이르 산의 경사로에 세워진 이 극장은 무대에서 맨 꼭대기 층까지 높이가 60m에 달한다. 2만 4천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소리가 가장 잘 들리도록 설계되었다는 가이드의 말에 너도나도 소리를 질러본다. 버스는 에페소스를 떠나 파묵칼레로 향했다. 하지만 오랜 여정 끝에 다다른 파묵칼레는 실망이었다. 엽서나 화보집에서 보던 하얀 석회 연못에 초록빛 온천수가 담긴 풍경은 볼 수가 없었다. 로마시대 온천으로 유명했던 이곳은 무분별한 개발과 줄어든 온천수로 인해 지금은 거의 말라버렸다. 그나마 물이 고인 부분도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맨발로 잠깐 동안만 돌아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오히려 더 관심을 끄는 곳은 온천 뒤에 있는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기원전 190년에 시작된 도시의 유적으로 1,200여 개의 석관묘, 1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히드리안 황제 시절의 원형극장 등이 남아 있다.
..만화 영화 를 보면서 만화가들은 참 상상력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버섯처럼 생긴 집을 떠올렸을까? 그런데 터키를 여행하다 딱 그런 집을 만났다. 바로 카파도키아 괴레메의 암굴집. ‘요정들의 굴뚝’이란 뜻의 페어리 침니(Fairy Chimney)라는 버섯바위인데 스머프의 집과 똑같다. 알고 보니 스머프의 작가도 이곳에서 영감을 받았고, SF영화 ‘스타워즈’의 우주계곡도 카파도키아 침식계곡이 모델이 됐단다. 카파도키아 지역을 벌룬을 타고 여행했다. 벌룬이 부풀어 오르고 허공에 뜬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옆에 선 스위스 관광객은 ‘울랄라’를 연발한다. 하늘에서 보는 카파도키아. 마치 화성의 어느 골짜기를 비행선을 타고 날아다니는 듯한 기분이랄까? 버섯을 닮은 바위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기도 하고 연노란색 바위들이 울퉁불퉁 수십 km를 이어지기도 했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 역시 경이로웠다.
카파도키아의 지명은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이라는 뜻이지만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기원전 1,200년경에는 히타이트 왕국, 리디아 왕국, 프리지아 왕국이 각축전을 벌였고, 이후 페르시아 왕국,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등 수많은 왕조들이 거쳐 갔다. 비잔틴,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도 카파도키아를 점령한 왕조였다. 주민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굴을 뚫었다.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람 한 명이 허리를 숙이고 겨우 지나다닐 만한 굴이 수십 km를 이어진다. 굴은 이어져 어느새 도시가 되었다. 1,200개 이상의 방이 있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나오는 연기가 지상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연기를 모으는 방을 따로 만들었다. 교회와 곡물 저장소, 동물 사육장, 포도주 저장실도 완벽하게 갖추었다. 약 3만 명의 사람들이 6개월을 살 수 있다. 여행객에게 개방되는 부분은 지하 8층까지인데 내려가는 쪽으로는 붉은 화살표가, 올라가는 방향으로는 푸른색 화살표가 벽에 그려져 있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를 벗어나 지상으로 나온 순간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현실도 실재한다. 여행은 그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