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길지 않은 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폭발적인 영향력은 주신 분들은 사실 백금산 목사님이 말씀하는 [어거스틴-칼빈-존 오웬-조나단 에드워즈-스펄전-마틴 조이드존스]의 계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읽은 책들 중 이들의 책은 몇 권 되지도 않으며 열거된 분들의 책을 다 읽어본 것도 아니다. 읽은 책의 권수로는 다른 분들의 책이 더 많으나 이들의 책은 내가 읽은 범주 안에서 언제나 폭발적이었으며 생각에 엄청난 변화를 주었고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듯한 새롭지만 바르고 본래 추구해야 할 시각을 가지게 해 주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나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사실 ‘이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너무 고상하다. 오늘날의 복음과 진리는 종교개혁 시기의 카톨릭과 그리 많이 달라 보이지 않으며 다만 그 침투된 사탄의 툴이 좀 더 교묘해지고 세련되어 졌으며 진리와 섞기에 더 좋아졌다는 차이가 생겼을 뿐이다.
오늘날 회개와 부흥을 논하는 구하는 회개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심리학이라는 과학을 가장한 종교를 이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피상적인 회개에 머물게만 만든다. 그래서 참 회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만이 있다. 그런데 참된 자신의 죄와 하나님 앞에 그리고 내 눈 앞에 있는 세상에서 나의 죄에 대한 무거운 짐을 느껴보지 않고서 어떻게 구원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지 나는 이제 와서 돌아보니 잘 모르겠다. 그저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로 인해 기분 좋은 것을 구원 받았다는 중생의 기쁨과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평가]라는 책이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은 내 삶에 참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직접 풀어주신 비유 이외의 비유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에 대해 매우 어려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기까지 하다.(이 말은 내가 성령님의 도우심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체험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유는 해석된 말씀이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긍정, 내적치유, 자아상 등의 심리학의 도구들을 가지고 말씀에 접근하다. 그리고 융의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고 그럴듯한 옷을 만들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입히고 그것에 만족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데카르트와 융의 이론(혹은 에릭 프롬이나 칼 로저스-이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을 가지고 교회를 세운다.
오늘날 많은 개혁교회들이 ‘복음주의’라는 간판을 내어걸고 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이기는 하나 ‘내가 하나님 앞에 그리고 내 눈 앞에 보이는 세상에서 처절한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이 시대에서 간판 말고 정말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는 어디란 말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최대한 긍정적 자아를 가지고 교회를 밝은 이미지로 꾸미려 한다. 복음은 죄에 대한 직시가 없이 바로 다음 단계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간다.
나는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입에서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빌1:21)이라는 말씀을 읽지만 자신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자녀였다는 고백을 들으며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 경험이 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요 마귀의 자녀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찌된 일인지 사랑만 있다. 그것도 아주 감정적이고 감미로운 사랑만 있고 나의 본질적인 죄악의 모습은 없다. 본래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우리의 본 모습은 없고 ‘나는 사랑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외침만이 남았다. 칼빈이 말하는 예정론과 인간의 전적 타락은 그저 그런 말일 뿐 ‘긍적적인 자아상’이나 ‘무의식과 긍적의 힘’ 같은 말들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입맛에는 더 잘 밎는다.
늦은 밤... 집 근처 대학에 가서 호수를 돌며 묵상을 했다. 그리고 점차 개혁교회의 교단에서 진리 아닌 진리가 외쳐지고 이미 심리학과 세상 가르침에 물들어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는 교회를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사실 그냥 눈물이 났다. 내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을 넘어서 내가 하나님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룩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냥 내 눈 앞에 펼쳐진 세계만 보아도 내 죄로 인해 눌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절망이었다.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은 비단 교회를 향한 외침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외침이었다. 나는 자기사랑을 우선에 두었었다.(결코 나 자신에게조차 노골적이거나 드러나지 않게) 그리고 죄의 무게 앞에 나는 절망했다. 절망이란 말로는 부족하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루터나 칼뱅 같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셔서 제 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한다.(그래서 나는 절대 무분별한 교회 비난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며 그런 사람들을 좋게 생각지도 않을 뿐 아니라 멀리하고 삼간다) 그리고 혼란스럽지만 교회의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참 성경의 순수한 진리가 선포되기를 간절히 정말 간절히 소원한다. 성경만으로 충분하고 성경만으로 완전하다. 하나님은 뭔가 부족하신 분이 아니다.
구원만으로는 모자라니 내적치유나 심리학적 툴을 이용한 교회 내에서의 적용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정말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사역으로 풍성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강단에서 자기개발 세미나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선포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들이 이 글에 대해 어떤 동조나(혹은 비난) 멘트를 다는 것조차 그리 달갑지 않다. 그냥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화롭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위해 비 진리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우직하게 진리만을 붙들고 천국을 향해 달음질 했으면 좋겠다. 문제는 결국 진리만 붙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비 진리를 같이 붙들려는 시도에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에서 벗어나는 기독교
그리 길지 않은 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폭발적인 영향력은 주신 분들은 사실 백금산 목사님이 말씀하는 [어거스틴-칼빈-존 오웬-조나단 에드워즈-스펄전-마틴 조이드존스]의 계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읽은 책들 중 이들의 책은 몇 권 되지도 않으며 열거된 분들의 책을 다 읽어본 것도 아니다. 읽은 책의 권수로는 다른 분들의 책이 더 많으나 이들의 책은 내가 읽은 범주 안에서 언제나 폭발적이었으며 생각에 엄청난 변화를 주었고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듯한 새롭지만 바르고 본래 추구해야 할 시각을 가지게 해 주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나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사실 ‘이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너무 고상하다. 오늘날의 복음과 진리는 종교개혁 시기의 카톨릭과 그리 많이 달라 보이지 않으며 다만 그 침투된 사탄의 툴이 좀 더 교묘해지고 세련되어 졌으며 진리와 섞기에 더 좋아졌다는 차이가 생겼을 뿐이다.
오늘날 회개와 부흥을 논하는 구하는 회개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심리학이라는 과학을 가장한 종교를 이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피상적인 회개에 머물게만 만든다. 그래서 참 회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만이 있다. 그런데 참된 자신의 죄와 하나님 앞에 그리고 내 눈 앞에 있는 세상에서 나의 죄에 대한 무거운 짐을 느껴보지 않고서 어떻게 구원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지 나는 이제 와서 돌아보니 잘 모르겠다. 그저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로 인해 기분 좋은 것을 구원 받았다는 중생의 기쁨과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평가]라는 책이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은 내 삶에 참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직접 풀어주신 비유 이외의 비유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에 대해 매우 어려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기까지 하다.(이 말은 내가 성령님의 도우심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체험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유는 해석된 말씀이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긍정, 내적치유, 자아상 등의 심리학의 도구들을 가지고 말씀에 접근하다. 그리고 융의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고 그럴듯한 옷을 만들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입히고 그것에 만족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데카르트와 융의 이론(혹은 에릭 프롬이나 칼 로저스-이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을 가지고 교회를 세운다.
오늘날 많은 개혁교회들이 ‘복음주의’라는 간판을 내어걸고 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이기는 하나 ‘내가 하나님 앞에 그리고 내 눈 앞에 보이는 세상에서 처절한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이 시대에서 간판 말고 정말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는 어디란 말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최대한 긍정적 자아를 가지고 교회를 밝은 이미지로 꾸미려 한다. 복음은 죄에 대한 직시가 없이 바로 다음 단계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간다.
나는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입에서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빌1:21)이라는 말씀을 읽지만 자신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자녀였다는 고백을 들으며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 경험이 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요 마귀의 자녀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찌된 일인지 사랑만 있다. 그것도 아주 감정적이고 감미로운 사랑만 있고 나의 본질적인 죄악의 모습은 없다. 본래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우리의 본 모습은 없고 ‘나는 사랑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외침만이 남았다. 칼빈이 말하는 예정론과 인간의 전적 타락은 그저 그런 말일 뿐 ‘긍적적인 자아상’이나 ‘무의식과 긍적의 힘’ 같은 말들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입맛에는 더 잘 밎는다.
늦은 밤... 집 근처 대학에 가서 호수를 돌며 묵상을 했다. 그리고 점차 개혁교회의 교단에서 진리 아닌 진리가 외쳐지고 이미 심리학과 세상 가르침에 물들어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는 교회를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사실 그냥 눈물이 났다. 내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을 넘어서 내가 하나님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룩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냥 내 눈 앞에 펼쳐진 세계만 보아도 내 죄로 인해 눌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절망이었다.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은 비단 교회를 향한 외침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외침이었다. 나는 자기사랑을 우선에 두었었다.(결코 나 자신에게조차 노골적이거나 드러나지 않게) 그리고 죄의 무게 앞에 나는 절망했다. 절망이란 말로는 부족하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루터나 칼뱅 같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셔서 제 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한다.(그래서 나는 절대 무분별한 교회 비난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며 그런 사람들을 좋게 생각지도 않을 뿐 아니라 멀리하고 삼간다) 그리고 혼란스럽지만 교회의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참 성경의 순수한 진리가 선포되기를 간절히 정말 간절히 소원한다. 성경만으로 충분하고 성경만으로 완전하다. 하나님은 뭔가 부족하신 분이 아니다.
구원만으로는 모자라니 내적치유나 심리학적 툴을 이용한 교회 내에서의 적용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정말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사역으로 풍성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강단에서 자기개발 세미나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선포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들이 이 글에 대해 어떤 동조나(혹은 비난) 멘트를 다는 것조차 그리 달갑지 않다. 그냥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화롭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위해 비 진리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우직하게 진리만을 붙들고 천국을 향해 달음질 했으면 좋겠다. 문제는 결국 진리만 붙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비 진리를 같이 붙들려는 시도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