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上 - MBC 청룡 타자가 아웃되자, 안타까운 나머지 김동엽 감독이 3루 코치 박스에서 엎드려있다. 일으키는 사람은 이광은 선수(前 LG 감독). 사진 中 - MBC 청룡의 잠실 홈경기 시작 전에 치어리더와 함께 그라운드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김동엽 감독. 옆에서 같이 춤추는 사람은 김용수 선수(現 LG 코치) 사진 下 - 김동엽 감독이 심판에게 눈을 부릅뜨며 항의하고 있다. 그의 손에는 늘 저렇게 빨간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김동엽 감독은 바로 저 어필로 유명했다. 프로야구가 전반기를 끝마치고, 잠시 동안의 휴식에 들어갔다. 17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리는 올스타전 이후 이틀을 더 쉰 후, 금요일부터 후반기 레이스에 들어간다. 올 시즌 프로야구는 흥행 면에 있어서 과거의 인기를 어느정도 회복했다. 1996년 이래 11년만에 최단 기간 200만 관중 기록을 세운데 이어, 300만 관중 돌파를 목전에 앞두고 있으며, 3만명 수용 규모의 대형 야구장을 갖고 있는 서울 잠실구장, 인천 문학구장, 부산 사직구장은 나란히 평균 관중 1만명 이상의 높은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 흥행의 키워드는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가미된 스포츠, 즉, 스포테인먼트의 성공이다. 지난 5월 26일, SK 이만수 수석코치는 문학구장의 관중 만원사례에 감사하는 뜻으로 3만 관중이 보는 가운데, 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었다. 이 일은 국내는 물론, 해외토픽에 소개가 될 정도로 모든 이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부산에서는 롯데의 정수근 선수가 우천 취소 경기 세레모니로 마스코트를 쓰고 나와서 비 때문에 아쉬워하는 부산 팬들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이미 예전에도 이만큼 아니 더 뛰어난 쇼맨십을 가졌던 분이 야구계에 계셨다. 야구 인프라가 낙후되던 그 시절... 한국프로야구의 발전을 주도하시던 그 분... 바로 "빨간 장갑의 마술사" 故 김동엽 감독이다. 김동엽 감독은 황해도 사리원 출신의 실향민이었다. 6.25 전쟁 때 혈혈단신 남쪽으로 피난 온 그는 부산 토성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여 경복중-경복고-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해군-조흥은행 야구단에서 현역 선수 생활을 했다. 조흥은행 야구단이 해체되자, 그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대한체육회 심판 연수과정을 거쳐, 2년간 야구 심판을 했다. 1971년 건국대학교 야구부의 창단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김동엽 감독은 1974년 공군 야구부 창단 감독, 1975년 실업야구 롯데제과 자이언트의 창단 감독을 지냈으며 1978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감독과 성균관대학교, 한양대학교 감독을 역임했다. 그가 이처럼 감독직을 여러 번 옮겨다녔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화법과 특유의 다혈질 성격이라고 한다. 김동엽 감독의 자서전인 '그래 잘라라 잘라' 를 보면 그가 얼마나 직설적인 사람이었는지 나온다. 김동엽 감독은 생전에 잘못된 일이 자신의 앞에 오면, 위아래 상관없이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 일화 한 토막... 김동엽 감독이 실업 롯데 야구단의 감독 시절이던 1977년, 실업 연맹전에서 라이벌 한국화장품을 누르고 롯데를 실업야구 정상에 올려놓은 그는 롯데그룹 고위급 인사들과 만남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우승 보너스를 요구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정 상, 보너스라는 개념이 전무했고, 특히나 그가 요구했던 보너스 금액이 파격적이었다고 한다. 김동엽 감독의 심각한(?) 요구에 롯데그룹 왈... "그 많은 금액은 우리 그룹 전체 여공들이 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 껌을 만들어 팔아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이니 주기 힘들다." 이에 열이 받은 김동엽 감독은 이런 말을 던지고 만다. "그럼 그 여공들을 데리고 야구하면 될 거 아니오!!" 결국 김동엽 감독은 얼마 후 롯데 지휘봉을 놓아야 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까지 그는 야구보다 방송에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MBC 라디오의 대표적인 아침 프로그램이었던 "홈런출발, 김동엽입니다." 를 진행했고, MBC TV를 통해서는 "김동엽과 함께" 라는 토크쇼도 진행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종종 출연했고, 드라마, 퀴즈쇼까지 나간 적이 있다고 한다. 이쯤하면 강호동, 강병규보다 훨씬 이전에 방송의 맛을 알았던 스포츠 스타였던 셈이다. 호탕한 성격과 시원한 마스크로 여성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김동엽 감독은 이 땅에 프로야구가 탄생할 수 있도록 노력했는데, 그가 방송 일을 하던 MBC가 창사 20주년을 맞았던 1981년, 프로야구단 창단을 기획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김동엽 감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동엽 감독은 곧 MBC를 떠나게 되었고,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해태타이거즈의 창단 감독에 취임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될 당시에는 "선수와 코칭스탭은 해당 연고지 출신이어야 한다." 라는 명문화된 규칙이 존재했다. 광주를 포함한 호남지역 연고의 해태타이거즈는 당초 "호남야구의 대부" 김양중을 창단 감독으로 점찍었으나, 김양중 선생이 극구 고사하면서, 암초에 부딪혔다. 결국 광주 또는 전라도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이북 출신의 김동엽 감독이 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구단주인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과의 친분이 작용했다. 김동엽 감독은 해태타이거즈에서도 얼마 못 가 쫓겨났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성적 부진이었지만, 당시 코치였던 유남호-조창수 코치가 팀을 이탈하는 등 팀의 화합에는 마이너스 요인이 많았던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해태에서 공적을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해태타이거즈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공포의 붉은색 유니폼이 김동엽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많은 팬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소문난 주당으로 알려진 김동엽 감독이 광주의 어느 바에서 유남호 당시 플레잉코치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때 마셨던 술병에 그려져 있던 영국 근위병의 그림이 꽤나 멋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술은 해태음료에서 판매하던 "런던 드라이진" 이었다. 평소 빨간색을 좋아했던 김동엽 감독은 이 근위병 그림을 토대로, 해태의 유니폼을 디자인했고, 그 디자인이 바로 그 공포감이 선명한 붉은색 상의에 검은색 하의의 독창적 구조의 유니폼이다. 게다가 자신의 등번호는 늘 38번을 썼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38선을 넘어온 "삼팔(38) 따라지" 기 때문에 무조건 38번을 써야된다는 엉뚱함에서 비롯됐다. 다시 방송으로 잠시 돌아왔던 김동엽 감독은 1983년, 백인천 감독의 해임으로 공석이 된 MBC 청룡의 2대 감독으로, 그가 일하던 MBC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MBC에서 그는 청룡을 그 해 프로야구 후기리그 챔피언으로 올려놓는다. 절친한 후배이자 같은 실향민이었던 김응룡 감독의 해태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단연 MBC가 우승에 가까웠다. 그러나, 신은 청룡에게 운이라는 여의주까지 주지는 않았다. 버마(미얀마) 수도 랭군에서 일어난 북한의 아웅산 테러로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를 국빈 방문했을 때, 북한 공작원들이 아웅산 묘지에 설치했던 시한폭탄이 터지면서 먼저 아웅산 묘지에 가 있던 정부 관료들이 모두 순직했던 사건. 전두환 대통령은 안타깝게도(?) 변을 면했다.) 한국시리즈 개최가 연기되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실업 롯데 감독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우승 보너스 문제가 불거졌다. 이번에는 시리즈 시작 때에 문제가 터진 것이다. 결국 김동엽 감독과 선수단의 사기는 떨어졌고, 단 1승도 올리지 못하고, 1무 4패로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다. 김동엽 감독은 그렇게 다시 MBC를 떠나고 말았다. 다시 방송으로 돌아간 김동엽 감독은 1985년 후기리그에 다시 MBC 청룡 감독으로 돌아간다. 국가대표 감독 출신이었던 어우홍 감독이 부진하자 한국시리즈 진출 경험이 있는 김동엽 감독을 다시 부른 것이다. 그는 수많은 방송 출연 경력을 밑거름 삼아서 프로야구에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했다. 이 시절이 바로 그 때이다. 특히나, 구단의 모기업이 방송국이라는 점을 잘 살려서 TV 중계가 있는 날이면, 심판에게 어필을 더 크고 화려하게 했다. 어떤 날에는 심판과 언쟁을 벌이다가 그라운드에 큰 대자로 누워 버리거나, 땅바닥에 뒹굴기도 했고 (물론, 그 어필은 김동엽 감독이 일부러 뛰쳐 나간 것이고, 경기 시작 전에 심판실에 들어가 심판들에게 "오늘 TV 중계가 있으니 좀 심하게 해도 봐달라." 라며 애교 섞인 양해를 구한 후 나온 어필들이다.)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3루 코치 박스에 손수 나와서 손짓 발짓 다 써가며 현란한 사인을 내기도 했다. 카메라에 빨간 불(녹화 사인)이 들어오면 그의 몸짓은 더 화려했다. 그게 다가 아니다. 팬 서비스의 일환이라면서, 선수들을 그라운드로 끌고 나와 관중석을 향해 웃기는 표정을 짓게끔 했고, 위의 사진처럼 치어리더들과 춤을 추며 놀기도 했으며, TV 뉴스 인터뷰 때는 강렬한 화법과 표정으로 시청자들을 재미있게 하기도 했다. 용병술은 또 어떤가? 1985년 삼성과의 잠실 홈경기에서 1사 만루 위기에 몰리자 유격수 김재박(LG 감독)을 대뜸 마운드로 올려 공 2개만으로 상대 타선을 병살로 틀어막고, 자신은 10회말 공격 때, 끝내기 안타를 터뜨리면서 김재박을 유일무이한 승리투수-승리타점 선수로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아마 감독 시절과는 달리 프로에서는 단 한 번의 우승도 해보지 못하고, 프런트와 매번 불화를 일으키면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하지만, 김동엽 감독은 그 누구보다 팬들과 호흡할 줄 알았고, 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또 체면불구하고 팬들을 위해서라면 망가질 줄도 알았고, 야구가 아닌 다른 방면에서라도 팬들을 즐겁게 할 줄 알았다. 20년 전, 이미 그는 스포테인먼트를 구현하고 있던 셈이다. 비록 김동엽 감독은 10년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생전에 남긴 거친 쇼맨십과 뜨거운 열정은 후배 야구인들이 이어받아, 스포테인먼트로 실현하고 있다. 이제 시작될 후반기 프로야구에서는 멋진 경기도 좋지만, 진정으로 팬들을 위하는 팬 서비스가 우선 되는 야구를 야구장에서 보길 바랄 뿐이다.
20년 전, 스포테인먼트를 실천했던 故 김동엽 감독
▲ 사진 上 - MBC 청룡 타자가 아웃되자, 안타까운 나머지
김동엽 감독이 3루 코치 박스에서 엎드려있다.
일으키는 사람은 이광은 선수(前 LG 감독).
사진 中 - MBC 청룡의 잠실 홈경기 시작 전에 치어리더와 함께
그라운드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김동엽 감독.
옆에서 같이 춤추는 사람은 김용수 선수(現 LG 코치)
사진 下 - 김동엽 감독이 심판에게 눈을 부릅뜨며 항의하고 있다.
그의 손에는 늘 저렇게 빨간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김동엽 감독은 바로 저 어필로 유명했다.
프로야구가 전반기를 끝마치고, 잠시 동안의 휴식에 들어갔다.
17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리는 올스타전 이후
이틀을 더 쉰 후, 금요일부터 후반기 레이스에 들어간다.
올 시즌 프로야구는 흥행 면에 있어서
과거의 인기를 어느정도 회복했다.
1996년 이래 11년만에 최단 기간 200만 관중 기록을 세운데 이어,
300만 관중 돌파를 목전에 앞두고 있으며,
3만명 수용 규모의 대형 야구장을 갖고 있는
서울 잠실구장, 인천 문학구장, 부산 사직구장은
나란히 평균 관중 1만명 이상의 높은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 흥행의 키워드는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가미된 스포츠,
즉, 스포테인먼트의 성공이다.
지난 5월 26일, SK 이만수 수석코치는
문학구장의 관중 만원사례에 감사하는 뜻으로
3만 관중이 보는 가운데, 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었다.
이 일은 국내는 물론, 해외토픽에 소개가 될 정도로
모든 이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부산에서는 롯데의 정수근 선수가
우천 취소 경기 세레모니로 마스코트를 쓰고 나와서
비 때문에 아쉬워하는 부산 팬들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이미 예전에도 이만큼 아니 더 뛰어난
쇼맨십을 가졌던 분이 야구계에 계셨다.
야구 인프라가 낙후되던 그 시절...
한국프로야구의 발전을 주도하시던 그 분...
바로 "빨간 장갑의 마술사" 故 김동엽 감독이다.
김동엽 감독은 황해도 사리원 출신의 실향민이었다.
6.25 전쟁 때 혈혈단신 남쪽으로 피난 온 그는
부산 토성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여
경복중-경복고-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해군-조흥은행 야구단에서 현역 선수 생활을 했다.
조흥은행 야구단이 해체되자, 그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대한체육회 심판 연수과정을 거쳐, 2년간 야구 심판을 했다.
1971년 건국대학교 야구부의 창단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김동엽 감독은
1974년 공군 야구부 창단 감독,
1975년 실업야구 롯데제과 자이언트의 창단 감독을 지냈으며
1978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감독과
성균관대학교, 한양대학교 감독을 역임했다.
그가 이처럼 감독직을 여러 번 옮겨다녔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화법과 특유의 다혈질 성격이라고 한다.
김동엽 감독의 자서전인 '그래 잘라라 잘라' 를 보면
그가 얼마나 직설적인 사람이었는지 나온다.
김동엽 감독은 생전에 잘못된 일이 자신의 앞에 오면,
위아래 상관없이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 일화 한 토막...
김동엽 감독이 실업 롯데 야구단의 감독 시절이던 1977년,
실업 연맹전에서 라이벌 한국화장품을 누르고
롯데를 실업야구 정상에 올려놓은 그는
롯데그룹 고위급 인사들과 만남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우승 보너스를 요구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정 상, 보너스라는 개념이 전무했고,
특히나 그가 요구했던 보너스 금액이 파격적이었다고 한다.
김동엽 감독의 심각한(?) 요구에 롯데그룹 왈...
"그 많은 금액은 우리 그룹 전체 여공들이 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
껌을 만들어 팔아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이니 주기 힘들다."
이에 열이 받은 김동엽 감독은 이런 말을 던지고 만다.
"그럼 그 여공들을 데리고 야구하면 될 거 아니오!!"
결국 김동엽 감독은 얼마 후 롯데 지휘봉을 놓아야 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까지
그는 야구보다 방송에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MBC 라디오의 대표적인 아침 프로그램이었던
"홈런출발, 김동엽입니다." 를 진행했고,
MBC TV를 통해서는 "김동엽과 함께" 라는 토크쇼도 진행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종종 출연했고,
드라마, 퀴즈쇼까지 나간 적이 있다고 한다.
이쯤하면 강호동, 강병규보다 훨씬 이전에
방송의 맛을 알았던 스포츠 스타였던 셈이다.
호탕한 성격과 시원한 마스크로
여성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김동엽 감독은
이 땅에 프로야구가 탄생할 수 있도록 노력했는데,
그가 방송 일을 하던 MBC가 창사 20주년을 맞았던 1981년,
프로야구단 창단을 기획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김동엽 감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동엽 감독은 곧 MBC를 떠나게 되었고,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해태타이거즈의 창단 감독에 취임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될 당시에는
"선수와 코칭스탭은 해당 연고지 출신이어야 한다." 라는
명문화된 규칙이 존재했다.
광주를 포함한 호남지역 연고의 해태타이거즈는
당초 "호남야구의 대부" 김양중을 창단 감독으로 점찍었으나,
김양중 선생이 극구 고사하면서, 암초에 부딪혔다.
결국 광주 또는 전라도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이북 출신의 김동엽 감독이 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구단주인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과의 친분이 작용했다.
김동엽 감독은 해태타이거즈에서도 얼마 못 가 쫓겨났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성적 부진이었지만,
당시 코치였던 유남호-조창수 코치가 팀을 이탈하는 등
팀의 화합에는 마이너스 요인이 많았던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해태에서 공적을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해태타이거즈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공포의 붉은색 유니폼이 김동엽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많은 팬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소문난 주당으로 알려진 김동엽 감독이 광주의 어느 바에서
유남호 당시 플레잉코치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때 마셨던 술병에 그려져 있던
영국 근위병의 그림이 꽤나 멋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술은 해태음료에서 판매하던 "런던 드라이진" 이었다.
평소 빨간색을 좋아했던 김동엽 감독은
이 근위병 그림을 토대로, 해태의 유니폼을 디자인했고,
그 디자인이 바로 그 공포감이 선명한
붉은색 상의에 검은색 하의의 독창적 구조의 유니폼이다.
게다가 자신의 등번호는 늘 38번을 썼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38선을 넘어온 "삼팔(38) 따라지" 기 때문에
무조건 38번을 써야된다는 엉뚱함에서 비롯됐다.
다시 방송으로 잠시 돌아왔던 김동엽 감독은
1983년, 백인천 감독의 해임으로 공석이 된
MBC 청룡의 2대 감독으로, 그가 일하던 MBC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MBC에서 그는 청룡을
그 해 프로야구 후기리그 챔피언으로 올려놓는다.
절친한 후배이자 같은 실향민이었던
김응룡 감독의 해태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단연 MBC가 우승에 가까웠다.
그러나, 신은 청룡에게 운이라는 여의주까지 주지는 않았다.
버마(미얀마) 수도 랭군에서 일어난 북한의 아웅산 테러로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를 국빈 방문했을 때,
북한 공작원들이 아웅산 묘지에 설치했던 시한폭탄이 터지면서
먼저 아웅산 묘지에 가 있던 정부 관료들이 모두 순직했던 사건.
전두환 대통령은 안타깝게도(?) 변을 면했다.)
한국시리즈 개최가 연기되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실업 롯데 감독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우승 보너스 문제가 불거졌다.
이번에는 시리즈 시작 때에 문제가 터진 것이다.
결국 김동엽 감독과 선수단의 사기는 떨어졌고,
단 1승도 올리지 못하고, 1무 4패로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다.
김동엽 감독은 그렇게 다시 MBC를 떠나고 말았다.
다시 방송으로 돌아간 김동엽 감독은
1985년 후기리그에 다시 MBC 청룡 감독으로 돌아간다.
국가대표 감독 출신이었던 어우홍 감독이 부진하자
한국시리즈 진출 경험이 있는 김동엽 감독을 다시 부른 것이다.
그는 수많은 방송 출연 경력을 밑거름 삼아서
프로야구에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했다.
이 시절이 바로 그 때이다.
특히나, 구단의 모기업이 방송국이라는 점을 잘 살려서
TV 중계가 있는 날이면, 심판에게 어필을 더 크고 화려하게 했다.
어떤 날에는 심판과 언쟁을 벌이다가
그라운드에 큰 대자로 누워 버리거나, 땅바닥에 뒹굴기도 했고
(물론, 그 어필은 김동엽 감독이 일부러 뛰쳐 나간 것이고,
경기 시작 전에 심판실에 들어가 심판들에게
"오늘 TV 중계가 있으니 좀 심하게 해도 봐달라." 라며
애교 섞인 양해를 구한 후 나온 어필들이다.)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3루 코치 박스에 손수 나와서
손짓 발짓 다 써가며 현란한 사인을 내기도 했다.
카메라에 빨간 불(녹화 사인)이 들어오면 그의 몸짓은 더 화려했다.
그게 다가 아니다.
팬 서비스의 일환이라면서, 선수들을 그라운드로 끌고 나와
관중석을 향해 웃기는 표정을 짓게끔 했고,
위의 사진처럼 치어리더들과 춤을 추며 놀기도 했으며,
TV 뉴스 인터뷰 때는 강렬한 화법과 표정으로
시청자들을 재미있게 하기도 했다.
용병술은 또 어떤가?
1985년 삼성과의 잠실 홈경기에서 1사 만루 위기에 몰리자
유격수 김재박(LG 감독)을 대뜸 마운드로 올려
공 2개만으로 상대 타선을 병살로 틀어막고,
자신은 10회말 공격 때, 끝내기 안타를 터뜨리면서
김재박을 유일무이한 승리투수-승리타점 선수로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아마 감독 시절과는 달리
프로에서는 단 한 번의 우승도 해보지 못하고,
프런트와 매번 불화를 일으키면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하지만, 김동엽 감독은 그 누구보다
팬들과 호흡할 줄 알았고, 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또 체면불구하고 팬들을 위해서라면 망가질 줄도 알았고,
야구가 아닌 다른 방면에서라도 팬들을 즐겁게 할 줄 알았다.
20년 전, 이미 그는 스포테인먼트를 구현하고 있던 셈이다.
비록 김동엽 감독은 10년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생전에 남긴 거친 쇼맨십과 뜨거운 열정은
후배 야구인들이 이어받아, 스포테인먼트로 실현하고 있다.
이제 시작될 후반기 프로야구에서는
멋진 경기도 좋지만, 진정으로 팬들을 위하는
팬 서비스가 우선 되는 야구를 야구장에서 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