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한복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입으신 노년의 신사가 연단 위에 오르신다. 안경을 쓰셔도 좋겠다.
연단 위에는 지금처럼 규격이 맞지 않는 예스러운 도안의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있다. 태극문양은 아마 빨강과 파랑이 좌우로 그려져 소용돌이치듯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그 할아버지는 한지에 정성스럽게 붓글씨로 길게 쓴 두루말이 하나를 가지고 올라가 읽으시려 하고 계셨다.
이윽고 그분은 감격에 겨운 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시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실 것이다.
"여러분, 이제 드디어 우리 민족은 오천 년 역사 이래 최초로
어느 한 사람이 왕으로 군림하여 지배하는 봉건국가를 청산하고,
백성이 주인된 국가를 선포하려 합니다.
이제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나라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주인이고 임금이며,
양반도 노비도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귀하고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눈시울이 한껏 붉어진 사람들의 감격에 겨운 박수를 받으며,
그분은 두루말이를 펴 조심스럽게, 그러나 힘차게 읽으실 것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때는 1948년 7월 17일,
혹은 임시헌법을 선포하던 1919년도 좋겠다.
(위 문장은 1948년 제헌헌법임)
아마도 이렇게, 민주공화국을 선언하는 첫 문장은 감동적인 장면과 함께 세상에 등장하지 않았을까.
1학년 헌법 첫 수업 시간에 백여 명이 모인 강의실에서,
교수님은 강단 위에서 마이크를 뽑아들고 자유롭게 거니시며
마치 꿈을 꾸듯 이 장면을 우리들 앞에서 묘사하셨다,
당신은 이 생각만 하면 감격스럽다면서.
우리도 교수님과 함께 덩달아 꿈을 꾸듯
수십 년 전 그 때 그 장소로 시간여행을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때는 손때 한 번 묻지 않은 새로 산 내 법전 첫 장,
"대한민국헌법"의 한 글자 한 글자가
그처럼 소중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흘렀다.
마지막으로 '빨간 날'로 지내는 제헌절이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너무 속상해서, 이 표현은 쓰기가 싫다.
차라리 "내년부터는 제헌절이 휴일이 아니라고 한다"라는 딱딱한 말로 정정하기로 한다.
나 또한 신앙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천주교인이지만,
헌법으로 정교분리를 선언한 나라에서 특정종교의 기념일을 두 개나 전국민이 쉬는 공휴일로 지정하고는,
공휴일이 너무 많다고, 일선 공무원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여 가장 '만만한' 공휴일을 빼기로 했다고 한다.
'설문조사'로 제헌절이 60여 년 만에 공휴일에서 빠졌다.
통탄스럽게도 그 '공무원들이' 뽑은 '만만한 공휴일'이 제헌절이었다.
물론 국경일은 법률로 지정하고 공휴일은 대통령령으로 지정하므로 서로 별개이고, 제헌절은 국경일로 남는다.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이란다.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
참 재미있는 말이다. 경축은 하고 태극기는 게양하라고 하면서 쉬는 날은 아니란다.
헌법의 최후의 수호자여야 할 대통령께서 "그놈의 헌법"이라는 놀라운 언사를 서슴없이 입에 담으시니, 이런 결과는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놈의 헌법'은 목숨과도 같다.
우리나라의 헌법이 비록 독재자의 집권연장의 도구로 사용된 슬픈 역사도 있었고, 한때 제헌절은 '유신헌법'이라는 개인의 장식품을 기념하는 날로 전락하기도 했으나, 위대한 국민들은 결국 1987년, 오늘날의 민주헌법을 피로써 쟁취해냈다. 나는 헌법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볼 때마다 앞서가신 분들의 핏방울들을 보는 것같아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그놈의 헌법'은, 신앙이고 종교이며 성경이다.
헌법은 나에게 내가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숭고한 뜻을 알려주었고,
헌법은 나에게 내 자손이 살아갈 나라와 내 자손이 지킬 규정을 내 손으로 더욱 정의롭게 만들라고 말하며, 인간이 그 어떤 것보다 존엄함을 알려주었다.
나에게 '그놈의 헌법'은 부모다.
헌법이 있기에 나는 자유로우며, 주장하며, 도전한다.
대한민국헌법은 나에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나에게 '그놈의 헌법'은 자식이다.
나는 헌법을 음해하고 헌법에 도전하는 자들로부터 헌법을 지켜내야 하며, 헌법의 불완전하거나 부적절한 부분을 손질하고 혹은 다듬어 해석하여, 가장 사람을 잘 위하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헌법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놈의 헌법'은 이런 존재다.
법학도에게 헌법이란,
목숨과 같이 소중하고 신앙이요 성경이며 부모요 자식이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공휴일과 국경일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왔다.
헌법 전문 첫머리에 국가이념으로 정의되어 있음에도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리저리 치이느라 실제 그정도의 대우를 받지 못했던 4.19를 '혁명절'이라는 이름의 국경일로 승격하여야 하고,
(그렇다면 4.19는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5대 국경일이 될 것이다. 한글날을 포함하면 6대 국경일.)
우리나라에 휴일이 너무 많다면 식목일처럼 휴일에서 제일 먼저 제외되어야 할 날은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 어이없게도 제헌절이 이들 종교기념일에 밀려 '공휴일 아닌 국경일'이 되고 말았다. 허울뿐인 국경일을 앞으로 누가 기억할까? 초등학생 대다수가 6.25를 조선시대에 일본과 싸운 전쟁으로 안다는데, 앞으로 아이들이 제헌절이 무엇인지, 헌법이 무엇인지나 알까?
아니, 지금은 알까?
자기들이 인터넷상에서 대통령도 자유롭게 욕하고, 나아가 갈아치울 수도 있는 것이 헌법 덕분임은 알까? 그리고 그 헌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까?
* 제헌절단상 - 나에게 "그놈의 헌법"은
하얀 한복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입으신 노년의 신사가 연단 위에 오르신다. 안경을 쓰셔도 좋겠다.
연단 위에는 지금처럼 규격이 맞지 않는 예스러운 도안의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있다. 태극문양은 아마 빨강과 파랑이 좌우로 그려져 소용돌이치듯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그 할아버지는 한지에 정성스럽게 붓글씨로 길게 쓴 두루말이 하나를 가지고 올라가 읽으시려 하고 계셨다.
이윽고 그분은 감격에 겨운 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시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실 것이다.
"여러분, 이제 드디어 우리 민족은 오천 년 역사 이래 최초로
어느 한 사람이 왕으로 군림하여 지배하는 봉건국가를 청산하고,
백성이 주인된 국가를 선포하려 합니다.
이제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나라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주인이고 임금이며,
양반도 노비도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귀하고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눈시울이 한껏 붉어진 사람들의 감격에 겨운 박수를 받으며,
그분은 두루말이를 펴 조심스럽게, 그러나 힘차게 읽으실 것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때는 1948년 7월 17일,
혹은 임시헌법을 선포하던 1919년도 좋겠다.
(위 문장은 1948년 제헌헌법임)
아마도 이렇게, 민주공화국을 선언하는 첫 문장은 감동적인 장면과 함께 세상에 등장하지 않았을까.
1학년 헌법 첫 수업 시간에 백여 명이 모인 강의실에서,
교수님은 강단 위에서 마이크를 뽑아들고 자유롭게 거니시며
마치 꿈을 꾸듯 이 장면을 우리들 앞에서 묘사하셨다,
당신은 이 생각만 하면 감격스럽다면서.
우리도 교수님과 함께 덩달아 꿈을 꾸듯
수십 년 전 그 때 그 장소로 시간여행을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때는 손때 한 번 묻지 않은 새로 산 내 법전 첫 장,
"대한민국헌법"의 한 글자 한 글자가
그처럼 소중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흘렀다.
마지막으로 '빨간 날'로 지내는 제헌절이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너무 속상해서, 이 표현은 쓰기가 싫다.
차라리 "내년부터는 제헌절이 휴일이 아니라고 한다"라는 딱딱한 말로 정정하기로 한다.
나 또한 신앙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천주교인이지만,
헌법으로 정교분리를 선언한 나라에서 특정종교의 기념일을 두 개나 전국민이 쉬는 공휴일로 지정하고는,
공휴일이 너무 많다고, 일선 공무원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여 가장 '만만한' 공휴일을 빼기로 했다고 한다.
'설문조사'로 제헌절이 60여 년 만에 공휴일에서 빠졌다.
통탄스럽게도 그 '공무원들이' 뽑은 '만만한 공휴일'이 제헌절이었다.
물론 국경일은 법률로 지정하고 공휴일은 대통령령으로 지정하므로 서로 별개이고, 제헌절은 국경일로 남는다.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이란다.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
참 재미있는 말이다. 경축은 하고 태극기는 게양하라고 하면서 쉬는 날은 아니란다.
헌법의 최후의 수호자여야 할 대통령께서 "그놈의 헌법"이라는 놀라운 언사를 서슴없이 입에 담으시니, 이런 결과는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놈의 헌법'은 목숨과도 같다.
우리나라의 헌법이 비록 독재자의 집권연장의 도구로 사용된 슬픈 역사도 있었고, 한때 제헌절은 '유신헌법'이라는 개인의 장식품을 기념하는 날로 전락하기도 했으나, 위대한 국민들은 결국 1987년, 오늘날의 민주헌법을 피로써 쟁취해냈다. 나는 헌법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볼 때마다 앞서가신 분들의 핏방울들을 보는 것같아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그놈의 헌법'은, 신앙이고 종교이며 성경이다.
헌법은 나에게 내가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숭고한 뜻을 알려주었고,
헌법은 나에게 내 자손이 살아갈 나라와 내 자손이 지킬 규정을 내 손으로 더욱 정의롭게 만들라고 말하며, 인간이 그 어떤 것보다 존엄함을 알려주었다.
나에게 '그놈의 헌법'은 부모다.
헌법이 있기에 나는 자유로우며, 주장하며, 도전한다.
대한민국헌법은 나에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나에게 '그놈의 헌법'은 자식이다.
나는 헌법을 음해하고 헌법에 도전하는 자들로부터 헌법을 지켜내야 하며, 헌법의 불완전하거나 부적절한 부분을 손질하고 혹은 다듬어 해석하여, 가장 사람을 잘 위하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헌법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놈의 헌법'은 이런 존재다.
법학도에게 헌법이란,
목숨과 같이 소중하고 신앙이요 성경이며 부모요 자식이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공휴일과 국경일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왔다.
헌법 전문 첫머리에 국가이념으로 정의되어 있음에도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리저리 치이느라 실제 그정도의 대우를 받지 못했던 4.19를 '혁명절'이라는 이름의 국경일로 승격하여야 하고,
(그렇다면 4.19는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5대 국경일이 될 것이다. 한글날을 포함하면 6대 국경일.)
우리나라에 휴일이 너무 많다면 식목일처럼 휴일에서 제일 먼저 제외되어야 할 날은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 어이없게도 제헌절이 이들 종교기념일에 밀려 '공휴일 아닌 국경일'이 되고 말았다. 허울뿐인 국경일을 앞으로 누가 기억할까? 초등학생 대다수가 6.25를 조선시대에 일본과 싸운 전쟁으로 안다는데, 앞으로 아이들이 제헌절이 무엇인지, 헌법이 무엇인지나 알까?
아니, 지금은 알까?
자기들이 인터넷상에서 대통령도 자유롭게 욕하고, 나아가 갈아치울 수도 있는 것이 헌법 덕분임은 알까? 그리고 그 헌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까?
밤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는데 이런 생각들이 자꾸 들어
욕실에서 가만히 제헌절 노래를 불렀다.
요즘 이 노래 아는 사람도 거의 없겠지.
더욱 슬퍼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예순 남은 일이 하늘 뜻 그대로였다.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언약 이루니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 맞추리라
이 날이 대한민국 억만 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 년의 터
(사진) 유진오 박사의 대한민국헌법 초안,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