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야구장에 초대했다. 짐 버튼은 자신의 친구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소개시켜 주었다. 첫 눈에 반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클레어 호지슨의 어머니와 딸도 베이브 루스를 마음에 들어했다. 온기가 흘러 넘치는 가정은 베이브 루스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베이브 루스의 어머니는 병약한 체질이어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또한,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기에,
그는 어릴 때부터 생매리 보육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랑에 굶주린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의 홈런왕이 된 후에도 따뜻한 여성의 품을
찾아서 거리를 헤메고 다녔다. 클레어 호지슨은
사소한 부분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타입이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베이브 루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천생연분이었다. 클레어 호지슨은 아내가 아닌 어머니라도 된 듯이
명령하거나 잔소리를 늘어 놓거나 하면서 베이브 루스의
나쁜 점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클레어 호지슨의
스타일은 베이브 루스가 그렇게도 찾아 헤메던 세계였다.
만난지 6년이 지난 1929년에 시즌 개막일인 4월 17일 아침 6시 반이라는 이른 시간에 뉴욕에 있는 카톨릭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식이 끝난 후 그들은 보금자리인 아파트로 돌아왔고,
그곳에는 친구들과 극소수의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기자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고,
클레어 루스가 된 그는 "신혼 여행을 떠날 계획은 없다.
바로 일하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라고 대답하였다.
어쨌던 운 좋게도 비로 인해 개막전이 다음 날로 연기되면서,
결혼 축하연은 하루 종일 계속될 수 있었다.
다음날 개막전에 클레어 루스는 베이브 루스의
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야구를 보러 갔다.
그녀는 양키스의 덕아웃 근처의 자리에 앉아서
그녀의 남편인 베이브 루스를 응원하였다.
그녀의 응원 덕분인지 베이브 루스는 홈런을 기록했고,
3루를 돌아서 홈베이스를 향하던 도중에 모자를 벗고서
그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고, 덕아웃 안으로 사라지기
전에는 손키스를 보냈다. 베이브 루스의 뜻밖의 행동에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동료들로부터 놀림감이 될 수 있기에, 앞으로 손 키스는 하지 말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딸인 도로시와 줄리아와 함께 생활하였다.
법률적으로 완전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 클레어 호지슨은 도로시를, 베이브 루스는 줄리아를 각자의 양녀로 받아들였다.
또한, 클레어 루스는 베이브 루스의 부인인 동시에,
그의 [감독]이었다. 클레어 호지슨을 만나기 전까지 베이브 루스는 비싸지만, 동네 똘마니와 같은 화려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베이브 루스의 취향을 클레어 호지슨은 완전히 뜯어 고쳤고, 어느 순간부터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베스트 드레스라는 평판을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요리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는 하루 하루의 메뉴를 정해서 베이브 루스의
식사량과 주량을 컨트롤하려고 하였다.
육류와 야채를 중심으로 한 요리와 음료는 오렌지 쥬스를 권했다. 이런 시도에 처음에는 "이것은 소화 불량에 걸릴 것 같아서
도저히 마시지 못한다."고 베이브 루스는 불평을 늘어 놓았지만,
결국에는 아침에는 두잔의 오렌지 쥬스를 마시도록 되었다.
그리고 그의 무절제한 음주는 예전의 술친구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또한, 구단의 허락을 받고서 클레어 호지슨은 양키스의
원정 경기에 동행하였다. 구단의 입장에서도 클레어 호지슨을 통해서 베이브 루스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기 때문이었다.
35센트짜리 샌드위치를 사면서 팁으로 100달러를 줄 정도로
베이브 루스의 낭비벽은 유명하였다.
그런 베이브 루스의 흥청망청 무계획적인 낭비벽을 없애기 위해서 돈도 클레어 호지슨이 관리했다.
베이브 루스로서는 필요할 때마다 그에게 용돈을 타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저리그의 흥행적 성공으로 인해 막대한 연봉을 받으면서 생긴 베이브 루스의 졸부 근성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몇 백달러를 가지고 다니면서 호기롭게 돈을 뿌리고 다니던 습관만큼은 확실히 사라질 수 있었다.
두사람이 결혼했을 때에 베이브 루스의 연봉은 7만 달러였고,
후에는 8만 5천달러를 받는 등 7만달러의 연봉을 받던
당시 대통령인 후버보다도 많았다.
구단으로부터 원정 경기에도 동행하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클레어 호지슨 자신의 경비는 본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정 경기가 있는 도시에서는 중심부에서
떨어진 싼 호텔에서 머무르는 등 생활 자체는 검소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다."고 베이브 루스 자신이 말한 것처럼 홈런왕에게도 황혼은 찾아왔다.
베이브 루스는 은퇴한 후에 양키스에서 감독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하루는 베이브 루스 부부를 양키스의 구단주가 호출하였다.
양키스의 오너인 제이콥 루퍼트는 "개인적으로 루스를 매우 좋아한다. 자리가 빈다면 그를 감독으로 임명할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조 맥카티가 계속해서 있기로 약속했다."고
말하였고, 클레어 호지슨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졌다.
계속해서 루퍼트는 "조 맥카티는 매우 뛰어난 감독이기에, 그가 야구를 하는 한 계속해서 그와 함께 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하면서, 클레어 호지슨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묵묵부답이던 클레어 호지슨은 루퍼트의 뺨을 휘갈기면서,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는 말을 던지고 베이브 루스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베이브 루스는 1934년을 끝으로 금전 트레이드로 양키스를 떠나서, 보스톤 브레이브스로 이적하였다.
브레이브스에서 선수 겸 코치로 1년을 보낸 베이브 루스는 시즌이 끝난 후에 해고되었다.
베이브 루스는 클레어 호지슨과 그의 어머니와 함께 차로 뉴욕을 향해서 출발하기 전에, 1년 동안 여러가지로 신세를 졌던 구단의 비서에게 1백달러를 주면서 고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베이브 루스 일행을 친구들이 색종이 등을 던지면서 환송하였다. 이 모습을 본 클레어 호지슨은 "해고된 주제에 색종이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들이 처음일 것이다."고 말하였고, 베이브 루스와 클레어 호지슨은 얼굴을 맞대고 웃었다.
1948년 6월에 베이브 루스는 후두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 밤에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는 "내일이 오지 않아도 두렵지 않다. 이미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라고 클레어 호지슨에게 말했고, 8월 16일 아침 8시 1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왕도 죽음을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이후 클레어 호지슨은 1961년에 로저 매리스가 베이브 루스가 가지고 있던 한 시즌 최다 홈런을 깰 때에도 야구장에 있었고,
1974년에는 행크 아론이 베이브 루스를 넘어서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쓸 때에도 베이브 루스를 대신해서 그 자리를 지켰다.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정신 연령은 그대로 어린 아이에 머문 베이브 루스가 방탕한 생활로 인해 짧은 선수 생활에 그치지 않고 만 40세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었던 것은 클레어 호지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밤비노의 망령에 휩싸여서 로저 매리스와 행크 아론이 베이브 루스를 뛰어넘을 때에 그 기록을 폄하하기 위해서 난리 부르스를 출 때도 클레어 호지슨은 로저 매리스와 행크 아론 등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대단했던 시기를 보냈던 별들은 혼자서 그 빛을 모두 내는것은 아닌것 같다.
항상 주위에서는 그 빛을 더 멋지게 낼수 있게끔 도와주는
그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 뻘속에 묻혀있는 진주는 보석이 아니다. 단지 보석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뿐....
babe ruth의 부인 클레어 루스
베이브 루스를 아는가?
야구좀 해봤다면 누구나 알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부인이 누군지 아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모를것이다.
나는 지금 그 여인에 대해서 말할까 한다.
클레어 메리트 호지슨은 14살에 조지아 주에서
목화 사업을 하던 프랭크 호지슨과 결혼해서 줄리아라는
딸을 낳았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인 프랭크 호지슨과 사별한 클레어 호지슨은
대도시인 뉴욕으로 가서, 모델이나 배우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듀 드롭 인의 간판 스타인 짐 버튼이
그를 야구장에 초대했다. 짐 버튼은 자신의 친구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소개시켜 주었다. 첫 눈에 반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클레어 호지슨의 어머니와 딸도 베이브 루스를 마음에 들어했다. 온기가 흘러 넘치는 가정은 베이브 루스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베이브 루스의 어머니는 병약한 체질이어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또한,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기에,
그는 어릴 때부터 생매리 보육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랑에 굶주린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의 홈런왕이 된 후에도 따뜻한 여성의 품을
찾아서 거리를 헤메고 다녔다. 클레어 호지슨은
사소한 부분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타입이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베이브 루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천생연분이었다. 클레어 호지슨은 아내가 아닌 어머니라도 된 듯이
명령하거나 잔소리를 늘어 놓거나 하면서 베이브 루스의
나쁜 점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클레어 호지슨의
스타일은 베이브 루스가 그렇게도 찾아 헤메던 세계였다.
만난지 6년이 지난 1929년에 시즌 개막일인 4월 17일 아침 6시 반이라는 이른 시간에 뉴욕에 있는 카톨릭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식이 끝난 후 그들은 보금자리인 아파트로 돌아왔고,
그곳에는 친구들과 극소수의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기자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고,
클레어 루스가 된 그는 "신혼 여행을 떠날 계획은 없다.
바로 일하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라고 대답하였다.
어쨌던 운 좋게도 비로 인해 개막전이 다음 날로 연기되면서,
결혼 축하연은 하루 종일 계속될 수 있었다.
다음날 개막전에 클레어 루스는 베이브 루스의
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야구를 보러 갔다.
그녀는 양키스의 덕아웃 근처의 자리에 앉아서
그녀의 남편인 베이브 루스를 응원하였다.
그녀의 응원 덕분인지 베이브 루스는 홈런을 기록했고,
3루를 돌아서 홈베이스를 향하던 도중에 모자를 벗고서
그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고, 덕아웃 안으로 사라지기
전에는 손키스를 보냈다. 베이브 루스의 뜻밖의 행동에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동료들로부터 놀림감이 될 수 있기에, 앞으로 손 키스는 하지 말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딸인 도로시와 줄리아와 함께 생활하였다.
법률적으로 완전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 클레어 호지슨은 도로시를, 베이브 루스는 줄리아를 각자의 양녀로 받아들였다.
또한, 클레어 루스는 베이브 루스의 부인인 동시에,
그의 [감독]이었다. 클레어 호지슨을 만나기 전까지 베이브 루스는 비싸지만, 동네 똘마니와 같은 화려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베이브 루스의 취향을 클레어 호지슨은 완전히 뜯어 고쳤고, 어느 순간부터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베스트 드레스라는 평판을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요리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는 하루 하루의 메뉴를 정해서 베이브 루스의
식사량과 주량을 컨트롤하려고 하였다.
육류와 야채를 중심으로 한 요리와 음료는 오렌지 쥬스를 권했다. 이런 시도에 처음에는 "이것은 소화 불량에 걸릴 것 같아서
도저히 마시지 못한다."고 베이브 루스는 불평을 늘어 놓았지만,
결국에는 아침에는 두잔의 오렌지 쥬스를 마시도록 되었다.
그리고 그의 무절제한 음주는 예전의 술친구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또한, 구단의 허락을 받고서 클레어 호지슨은 양키스의
원정 경기에 동행하였다. 구단의 입장에서도 클레어 호지슨을 통해서 베이브 루스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기 때문이었다.
35센트짜리 샌드위치를 사면서 팁으로 100달러를 줄 정도로
베이브 루스의 낭비벽은 유명하였다.
그런 베이브 루스의 흥청망청 무계획적인 낭비벽을 없애기 위해서 돈도 클레어 호지슨이 관리했다.
베이브 루스로서는 필요할 때마다 그에게 용돈을 타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저리그의 흥행적 성공으로 인해 막대한 연봉을 받으면서 생긴 베이브 루스의 졸부 근성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몇 백달러를 가지고 다니면서 호기롭게 돈을 뿌리고 다니던 습관만큼은 확실히 사라질 수 있었다.
두사람이 결혼했을 때에 베이브 루스의 연봉은 7만 달러였고,
후에는 8만 5천달러를 받는 등 7만달러의 연봉을 받던
당시 대통령인 후버보다도 많았다.
구단으로부터 원정 경기에도 동행하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클레어 호지슨 자신의 경비는 본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정 경기가 있는 도시에서는 중심부에서
떨어진 싼 호텔에서 머무르는 등 생활 자체는 검소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다."고 베이브 루스 자신이 말한 것처럼 홈런왕에게도 황혼은 찾아왔다.
베이브 루스는 은퇴한 후에 양키스에서 감독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하루는 베이브 루스 부부를 양키스의 구단주가 호출하였다.
양키스의 오너인 제이콥 루퍼트는 "개인적으로 루스를 매우 좋아한다. 자리가 빈다면 그를 감독으로 임명할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조 맥카티가 계속해서 있기로 약속했다."고
말하였고, 클레어 호지슨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졌다.
계속해서 루퍼트는 "조 맥카티는 매우 뛰어난 감독이기에, 그가 야구를 하는 한 계속해서 그와 함께 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하면서, 클레어 호지슨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묵묵부답이던 클레어 호지슨은 루퍼트의 뺨을 휘갈기면서,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는 말을 던지고 베이브 루스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베이브 루스는 1934년을 끝으로 금전 트레이드로 양키스를 떠나서, 보스톤 브레이브스로 이적하였다.
브레이브스에서 선수 겸 코치로 1년을 보낸 베이브 루스는 시즌이 끝난 후에 해고되었다.
베이브 루스는 클레어 호지슨과 그의 어머니와 함께 차로 뉴욕을 향해서 출발하기 전에, 1년 동안 여러가지로 신세를 졌던 구단의 비서에게 1백달러를 주면서 고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베이브 루스 일행을 친구들이 색종이 등을 던지면서 환송하였다. 이 모습을 본 클레어 호지슨은 "해고된 주제에 색종이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들이 처음일 것이다."고 말하였고, 베이브 루스와 클레어 호지슨은 얼굴을 맞대고 웃었다.
1948년 6월에 베이브 루스는 후두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 밤에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는 "내일이 오지 않아도 두렵지 않다. 이미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라고 클레어 호지슨에게 말했고, 8월 16일 아침 8시 1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왕도 죽음을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이후 클레어 호지슨은 1961년에 로저 매리스가 베이브 루스가 가지고 있던 한 시즌 최다 홈런을 깰 때에도 야구장에 있었고,
1974년에는 행크 아론이 베이브 루스를 넘어서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쓸 때에도 베이브 루스를 대신해서 그 자리를 지켰다.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정신 연령은 그대로 어린 아이에 머문 베이브 루스가 방탕한 생활로 인해 짧은 선수 생활에 그치지 않고 만 40세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었던 것은 클레어 호지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밤비노의 망령에 휩싸여서 로저 매리스와 행크 아론이 베이브 루스를 뛰어넘을 때에 그 기록을 폄하하기 위해서 난리 부르스를 출 때도 클레어 호지슨은 로저 매리스와 행크 아론 등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대단했던 시기를 보냈던 별들은 혼자서 그 빛을 모두 내는것은 아닌것 같다.
항상 주위에서는 그 빛을 더 멋지게 낼수 있게끔 도와주는
그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 뻘속에 묻혀있는 진주는 보석이 아니다. 단지 보석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뿐....
-평론가인 이노우에 아츠오의 원문을 약간 편집한 글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