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첩보전쟁 반세기(1)

박종혁2007.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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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보복전을 부른 공작의 세계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은 치열한 첩보전을 펼쳤다. 이 첩보전쟁은 그대로 남북 관계로 귀결되었다. 보복과 보복이 반복되던 남북 첩보전쟁은 74년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으로 일시 중단됐으나 북한은 이를 재개했다. 첩보전에 참여한 남북의 공작원들은 상상을 불허하는 힘과 기지로 난관을 돌파했다. 이러한 첩보원에 대해 북한은 벤츠를 제공하며 융숭히 대접하지만, 남한은 훈장 하나만 덜렁 준 후 내팽개쳤다.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에게는 거액의 보상비를 지급하면서도 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냉대하는 정부의 처사가 그들을 분노하게 했다. “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을 냉대하는 국가는 잘될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정훈 hoon@donga.com   

영어 단어 Operation은 퍽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가동·효력·조작·운영 등으로 번역되지만, 의학계 용어로 쓰일 때는 ‘수술’로 옮겨야 한다. 반면 군사 분야에서 쓰일 때는 ‘작전’으로 번역해야 하고, 첩보나 수사 세계에서 사용되면 ‘공작’으로 바꿔야 그 뜻이 통한다. 한국말 ‘공작(工作)’은 음습하고 뭔가 모략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영어 단어 Operation에서는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첩보 세계 종사자들은 공작 대신 Operation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것은 정치자금의 유통과 Operation일 것이다. 정치자금 유통은 한보나 노태우 비자금 사건 등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대치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벌인 공작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례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2000년 하반기부터 북파 공작원 출신들에 대한 보도가 나오며, 말로만 듣던 북파 공작원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0년 11월3일 북파 공작원 출신들은 국군정보사령부 앞에 모여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왜 시위를 벌였는가. 이들의 시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공교롭게도 보상을 요구하는 북파 공작원 출신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사선을 넘었다. 왜 박정희 대통령은 북파 공작을 강화했고 이들의 공작은 당시 남북한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가장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남북 첩보 전선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1968년 10월○○일 중동부 전선 비무장 지대에서는 하루종일 남북한 군이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다. 이유는 ‘편의대’로 불리는, 남쪽에서 파견한 특수공작대원들이 북쪽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북한군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동틀 무렵 시작된 교전은 온종일 계속되다가 해질 무렵에야 잦아들었다. 이 날 한국군은, 중동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선에서 전차와 장갑차를 빼내 남방한계선 바로 남쪽의 페바(FEBA:Forward Edge of the Battle Area의 약자로 ‘전투지역의 전단’이라는 뜻)에 집결시키고, 교통호에는 완전 군장한 보병들을 투입해 전면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교전은 이 날 새벽 북방한계선 북쪽에서 일어난 두 차례 폭음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만 20세였던 김철중씨(가명·52)를 비롯한 5명의 편의대원들은 북쪽에서 북한군을 교란하는 특수공작을 마치고 귀환하는 중이었다. 이들에게 부여된 특수공작 임무 중 하나는 북방한계선 너머 북한 땅에 있는 한 인민군 내무반 막사에 폭약을 설치해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날 새벽 폭약 설치를 끝낸 편의대원들을 시속 13㎞라는 ‘귀신 같은 속도’로 산을 타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충분한 거리를 도주했을 무렵 폭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편의대원 중 사진 촬영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잽싸게 카메라를 꺼내 폭풍이 올라오는 장면을 찍었다.

김씨가 속한 특수공작대는 왜 북한군 내무반을 파괴했는가. 김씨의 해석이다.

“완전 심리전이다. 당시는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침투 사건(1·21사태) 벌어진 다음이었다. 인민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근처까지 침입한 사실이 밝혀지자 국군 병사들은 크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인민군 특수부대원이 침입해 국군 내무반을 폭파하고 국군의 귀를 베어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자 우리 쪽에서도 북한군의 사기를 죽여 놓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국군 병사들은 3년간 복무했지만 인민군은 7년씩 복무했다고 한다. 우리 병사들은 빠르게 교체되므로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4∼5년이 지나면 잊혀지지만, 북한은 병사들이 오래 복무하는 관계로 그들이 당한 사건은 더 오래 구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고려해 특수공작을 벌인 것으로 안다.”

 

실물모형 놓고 침투路 연구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특수공작을 벌인 북한 땅이 정확히 어디인지, 그리고 그가 사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온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심지어 그가 한국군 어느 사단이 지키고 있던 곳으로 넘어왔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김씨가 속한 특수공작대(편의대·일명 ‘돼지’로도 불렸다)를 관리하던 육군 첩보부대 소속의 공작과장(소령)이 침투지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가 속한 편의대 5명은 강원도 춘성군(지금은 춘천시) ○면 ○○리 ○○산에서 훈련받았기에 ‘춘천대’로 불렸다. 춘천대가 있던 곳은 군부대가 아니고 화전민이 사는 산 속이었다. 이들은 일반 군부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지냈기 때문에 사단 마크를 구별할 줄도, 또 사단 마크를 볼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공작과장은 물론이고 이들에게 생필품을 전해주는 조교들조차 이들을 만나러 올 때는 계급과 명찰, 부대 마크를 떼놓고 왔다.

이렇게 산 속에서 지내다 침투 명령이 떨어지면 이들은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앰뷸런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비포장 도로를 달려 남방한계선 바로 남쪽에 있는 GOP 부대에 도착한다. 춘천에서 비포장도로로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김씨는 자신이 침투한 곳이 중동부 전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침투했던 북한 지역은 지금도 손금 보듯이 기억한다고 했다. 이유는 작전에 들어가기 전, 미 공군이 찍어온 항공사진을 보고 모래와 석회로 만든 ‘사판’으로, 수십 차례 침투로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사판이란 실제 지형과 똑같이 산과 계곡을 축소해서 만든 모형으로, 가로 세로가 약 4m쯤 되었다. 이 사판은 워낙 세밀해서 좌표로 삼아야 할 큰 산만 눈여겨 봐두면, 북한 땅 어디에서고 자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판을 보며 지형을 익히다가 공작 개시 3일 전이 되면 면도는 물론이고 비누 세수도 칫솔질도 하지 않는다. 자연 그대로인 비무장지대에서는 며칠 전에 사용한 비누와 치약 냄새가 의외로 멀리 퍼진다. 사람보다 더 예민한 짐승은 이 냄새를 맡고 부스럭거리며 도망칠 수가 있다. 짐승이 소리를 내고 도망치면 적군은 그곳을 주목하기 때문에 침투가 어려워진다(6·25전쟁 때 빨치산도 비누와 치약을 쓰지 않았다. 이들을 잡으러 가는 토벌대도 작전 며칠 전부터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남방한계선 남쪽의 GOP 연대에 도착해서는 긴장을 풀기 위해 연대 특등 사수와 사격 시합을 벌이곤 했다. 김씨는 당시 어린이들이 많이 가지고 놀던 구슬을 25m 거리에서 쏴 박살내는 실력이었기에, 연대 특등 사수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이 밝으면 최전방 실습을 나온 신참 소위로 위장해 남방한계선의 통문을 열고 트럭을 타고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아군 GP로 간다. 그리고 해질 무렵 GP 병사에게 이들이 입고 온 신참 소위복장을 입혀, 트럭에 태워 남방한계선 너머 GOP 부대로 보내는 것이다(야밤에는 아군은 물론이고 인민군도 긴장하기 때문에 GOP부대에서 GP소초로는 이동할 수가 없다).

 

“인민군을 납치하자”
   비무장지대에는 지뢰가 즐비하고, 아군과 인민군 수색대가 번갈아 설치한 부비트랩(boobytrap·엉뚱한 물건으로 위장된 폭발물)이 많아 길 아닌 곳으로 가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GP소초에서 휴식을 취한 춘천대는 수색대 매복조의 길 안내를 받아 군사분계선까지 접근한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다음부터는 지뢰와 부비트랩 그리고 각종 장애물을 알아서 통과한다. 춘천대는 이렇게 군사분계선 북쪽의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북한 땅에 들어간 후 인민군 내무반을 박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북방한계선 북쪽 산에는 지뢰가 별로 없어 뛰어도 된다. 사진 촬영을 끝낸 춘천대는 곧 북방한계선에 도착해 잠복에 들어갔다. 춘천대가 완전 군장을 꾸렸을 때의 배낭 무게는 약 45㎏이다. 여기에는 각종 폭약과 첩보 수집장비, 비상식량 등이 들어 있다. 작전에 들어갈 때는 군말 없이 이 배낭을 지고 들어가지만 돌아 나올 때는 어떻게 해서든 배낭 무게를 줄이고 싶어진다. 북방한계선에서부터 남쪽은 남북한군이 밀집해 있는 지뢰 지대이므로 야음을 틈타 조심스럽게 전진해야 한다.

춘천대는 이 날 다섯 번째로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한 땅에서 공작을 한 것이었다. 북방한계선을 넘지 않고 비무장지대 안에서 작전을 하고 나간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매번 작전에 들어갈 때는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에 긴장하지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횟수가 많아지자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쯤 폭약이 터진 인민군 부대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국군 소행으로 짐작은 하겠지만 섣불리 추적대를 보냈다간 또 다른 부비트랩에 걸릴 수도 있으니 법석만 떨 뿐 구체적인 작전은 돌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벌써 북방한계선에 도착한 우리는 귀신같이 비무장지대를 빠져 나간다’ 이런 생각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데 비무장지대 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 햇살이 밝아오는 오전 7시30분쯤이었다. 고개를 빼고 살펴보니 500m 전방쯤에 있는 인민군 GP에서 병사 10여 명이 부식을 수령하려는 듯, 지뢰가 없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이때까지 춘천대는 크레모어는 단 한 발도 사용하지 않은 채 짊어지고 있었다. 간이 커진 춘천대는 ‘남은 폭약을 갖고 가야 무겁기만 하니 다 쏘고 가자’고 합의하고, 앞에 오는 인민군 병사들은 크레모어로 사살하고 뒤쪽에 오는 인민군은 크레모어로 하체를 맞혀 쓰러뜨린 후 납치하기로 했다. 북방한계선 북쪽의 인민군 내무반이 박살나고 이어 비무장지대에서 크레모어가 터지고 인민군이 납치되면 휴전선의 전 인민군이 긴장해 이들의 생환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빨리 한 건 하고 돌아가 춘천 아리랑 홀(미군이 드나들던 맥주홀)에서 한잔 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한 것이다. 편의대원들은 인민군 병사들이 한꺼번에 사격권에 들어오게 10m 간격으로 4대의 크레모어를 설치했다. 이어 3명은 크레모어의 인계선을 끌고 언덕에 올라가 잠복했다. 언덕 아래에는 사격 솜씨가 좋은 김씨와 홍민수씨(가명·자살)가 숨어 있다가 부상한 인민군을 납치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부상한 인민군을 납치할 때 언덕에 숨은 3인조는 엄호 사격을 맡기로 했다.

잠시 후 인민군들이 사격권 안에 들어오자 엄청난 폭음이 터졌는데, 그 순간 김씨는 크레모어에서 나온 후폭풍으로 오른팔에 화상을 입었다. 폭음과 함께 김씨가 본 것은 온통 누런 세상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3인조는 4대의 크레모어를 차례로 누르지 않고 총의 개머리판으로 동시에 눌렀던 것이다. 그로 인해 흙먼지가 일어 잠시 후 세상이 황톳빛으로 변한 가운데 폭풍에 밀려 하늘로 치솟았던 나뭇가지와 칡덩굴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어 낙엽들이 팔랑거리며 내려왔는데, 한쪽에서는 후폭풍의 불꽃이 낙엽에 옮겨 붙은 듯 허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춘천대는 훈련중에 여러 차례 크레모어를 터뜨려 봤기 때문에 이때 나오는 폭풍과 폭음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크레모어를 터뜨릴 때는 물안경을 써 눈을 보호하고 귓구멍에는 솜뭉치를 넣어 고막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병장에서 하는 훈련과 낙엽과 나무로 뒤덮인 현장에서 벌이는 실전은 큰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네 발을 동시에 터뜨렸으니, 한 발씩 터뜨리는 훈련 때보다 폭풍과 폭음의 강도가 훨씬 강했다.

폭음이 들리는 순간에 김씨가 쓰고 있던 물안경과 귀마개는 날아가버렸고, 김씨의 귀는 ‘먹통’이 돼버렸다. 김씨는 “크레모어 넉 대가 동시에 터지자 지진이라도 난 듯 옆산이 우르르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먼지가 걷히자 이곳저곳에서 뒹굴며 신음하는 인민군 병사들이 보였다. 김씨와 홍씨는 동물적으로 뛰쳐나가 이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김씨는 “온 세상이 고요한 가운데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총(無聲銃)을 쏘는 느낌이었다. 소리 없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확인사살을 하던 도중 김씨는 순간적으로 뭔가 햇빛에 반짝 하는 것을 느끼며 그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그 순간 왼팔에 큰 충격을 느꼈다. 그런데도 그는 반짝이는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햇빛을 반사한 것은 폭음에 기절했던 인민군이 깨어나 김씨를 향해 겨눈 총열이었다. 인민군은 정확히 김씨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김씨가 몸을 ‘획’ 돌리는 바람에 심장이 아니라 왼쪽 팔을 맞힌 것이다. 그러나 김씨의 총은 인민군을 즉사시켰다.

이러는 사이 언덕에 숨어 있던 3인조는 흙먼지 때문에 시야가 가려 엄호사격을 전혀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납치를 포기했다. 얼마 후 홍민수는 납치를 포기하고 ‘도망가자’는 뜻으로 김씨의 팔을 잡았다 놓고, 먼저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김씨는 살아서 끙끙대는 인민군을 전부 확인사살하고, 인민군이 갖고 있던 무기를 낚아 챈 후 홍씨를 따라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가 달려간 언덕에는 지난 여름 폭우 때 일어난 사태로 인해 황토가 드러나 있었다. 이 황토 언덕을 기어오르다 미끄러진 김씨는 무심결에 왼팔로 나무뿌리를 잡았다. 그 순간 총에 맞은 왼팔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동시에 아픔이 밀려오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김씨의 말이다.

“그때부터 왼팔을 쓸 수가 없었다. 왼팔이 마비되자 황토 언덕을 기어오르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나는 세 번이나 미끄러진 다음에야 겨우 몸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언덕을 기어오르자 먼저 올라갔던 3인조 중 한 명인 이철수(가명·자살)가 돌아와 부축해주었다. 그런데 이철수가 하는 말이 ‘한참을 가도 내가 오지 않아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미끄러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잠시 기절했던 것 같다.”

 

필사적인 탈출
   김씨가 황토 언덕에 오를 때쯤 폭음에 놀란 인민군이 달려와 사격을 가했다.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지뢰지대여서 북한 GP에서 달려나온 인민군 병사들은 깊숙이 따라 들어오지 못하고, 정조준을 위해 무릎쏴 자세로 사격을 가해왔다. 이때 김씨는 왼쪽 복부에 또 한 발을 맞고 쓰러졌다. 이철수도 오른손 검지가 날아가버렸다. 특수부대원들은 동료를 사지에 두고 나와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상황이 다급했던지라 김씨는 이제는 죽었다 싶어, 이씨에게 자신의 총을 던져주며 “먼저 가라”고 했다. 총을 받아든 이철수씨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묵묵히 수풀 속으로 몸을 돌렸다.

천만다행인 것은 지뢰지대여서 인민군이 수풀 속으로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두 번이나 총격을 받은 고통 때문에 김씨는 혼절했는데, 이때 그는 가족과 친구·동료와 즐겁게 지내던 때의 잔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김씨를 깨어나게 해준 것은 더 높이 올라온 가을 태양이었다. 햇볕이 뜨거워지자 총격을 받은 부위가 심하게 아파, 김씨는 깨어났다. 총상 부위에서 큰 고통을 느끼며 깨어나는 순간 김씨는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는데, 이때 먹통이 됐던 고막이 뚫렸다. 그제서야 “따콩” “따콩” “드르르륵” “꽝” 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엄호를 맡았던 3인조 중 2명과 홍민수는 막 분계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김씨를 부축하다 뒤로 처진 이철수는 혼자 분계선을 넘어가다 이씨의 퇴각로를 예상하고 차단하러온 인민군에게 걸려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풀이 키높이만큼 자란 지뢰지대를 헤쳐가던 이씨는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유속이 빨라진 깊은 계곡에 빠졌다. 지뢰 때문에 빨리 따라오지 못하던 인민군도 이씨가 물에 빠지는 것은 목격했다. 그래서 이씨를 찾으려고 모든 병사를 풀어 계곡을 뒤지게 했다.

한국군은 인민군이 이씨를 추적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인민군이 흩어지는 쪽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이러한 국군 초소를 향해 인민군 GP는 제압 사격을 하고, 이에 맞서 국군도 인민군 GP 쪽으로 제압 사격을 가해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씨는 그제서야 ‘잘 하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교적 성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이용해 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갈대가 흔들렸다. 김씨가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사격을 멈췄던 인민군들은 김씨가 쓰러진 곳에서 풀숲이 흔들리자 다시 맹렬한 사격을 가해왔다.

이런 와중에 김씨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미끄러졌는데 이때 나뭇가지에 발이 걸려 버렸다. 부상과 탈진으로 지칠 대로 지친 김씨는 오랫동안 애를 써서 간신히 나뭇가지에 낀 발을 빼낼 수 있었다. 발이 빠지는 순간 그는 더 밑으로 미끄러졌는데 주위를 살펴보니 멧돼지 같은 짐승이 다녀서인지 풀이 죽어 있는 길이 보였다. 그는 이 길로 기어가면 풀숲이 흔들리지 않아 적의 사격을 받지 않고 분계선을 넘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열심히 기었다.

 

6·25 이후 최대의 남북 교전
   얼마 후 이제는 분계선을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김씨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살펴보니 ‘아뿔사! 남쪽이 아니라 군사분계선과 나란한 방향’으로 기어왔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GP에서 김씨를 발견하고 또 사격을 가해왔다. 적이 사격을 가하건 말건 확실하게 남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김씨는 조금 기다가 몸을 일으켜 제대로 남쪽으로 가고 있는지 살피고 풀숲으로 푹 쓰러지고, 잠시 기다가 또 일어나 살피고 푹 쓰러지며 남쪽으로 접근했다.

인민군 쪽에서는 총을 겨누고 있었던 듯 풀숲에서 김씨의 머리가 올라올 때마다 요란하게 사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용케도 김씨는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풀숲을 기는 도중 그는 지뢰를 발견하고 손으로 쓱 밀었는데 다행히 한 발도 터지지 않았다. 이 무렵 춘천대를 관리해온 첩보부대 공작과장은 GP에 들어와 포대경으로 과연 김씨가 분계선을 넘어올 수 있을지 초조히 지켜보고 있었다.

탈진한 김씨는 나무등걸을 발견하고 몸을 기댔는데, 그때 풀숲 사이로 GP에 걸린 태극기가 보였다. 얼마나 보고 싶던 태극기인가. 그는 오른손으로 흰 러닝을 찢어 나뭇가지에 걸고 힘없이 흔들었다. 이것을 GP에 있던 공작과장이 보고 대기시켜 놓았던 다른 공작대원들에게 김씨 구출을 명령했다. 극적으로 이들에게 구출된 김씨는 아군 GP에 도착하는 순간 또 한 번 기절했다.

얼마 후 그가 정신을 차리자 공작과장이 “이철수는 어떻게 됐나?”라고 물었다. 김씨는 “나보다 앞서 갔는데…”라는 말을 하고 또 혼절했다. 얼마 후 그는 지프에 실려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직 땅거미가 가시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를 태운 지프는 남방한계선의 통문을 향해 질주했다. 그 순간 북한군이 포 두 발을 쐈으나 지프가 워낙 빨리 달려 맞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프가 하도 험하게 튀어올라 그는 큰 고통을 받았다.

GOP 부대로 빠져 나온 지프는 그곳에 와 있던 경비행기로 김씨를 옮겨 실었다. 이때 김씨는 수많은 장성들이 나타나 그를 근심스럽게 지켜보는 것을 목격했다. 완전 군장을 한 보병들이 교통호에 포진해 있고, 전차와 장갑차까지 출동한 것을 발견했다. 김씨를 태운 경비행기는 춘천의 육군 병원에서 내려 일차 응급조치를 받게 한 후 다시 이륙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이곳에서 김씨는 현재 국군기무사령부가 들어 있는 서울 삼청동의 ‘수도육군병원’으로 호송되었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춘천대원 이철수는 물고기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깊은 계곡에 빠진 이씨는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다 어딘가에서 몸을 세웠다. 그는 잽싸게 갈대를 꺾어 입에 물고 강한 물살 때문에 흙이 쑥 패어 들어간 곳에 숨었다. 그곳에서 이씨는 갈대로 호흡을 하며 밤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인민군은 날이 저물 때까지 이씨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때 이씨를 괴롭힌 것은 차가운 물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아닌 피라미떼였다.

이씨는 적탄에 오른손 검지가 떨어져 나갔는데, 손가락이 떨어진 곳에서 자꾸 피가 솟았다. 그러자 피냄새를 맡은 피라미들이 달려들어 톡톡 건드는 바람에 이씨는 큰 고통을 받았다. 이씨는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저녁 9시쯤 물 밖으로 나와 혼자 아군 GP로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매일밤 군부대에서는 암구호(암호)가 바뀌었다. 암구호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아군인지 적인지 식별하기 위한 암호다. 그날 밤의 암구호가 ‘대구청어’라면, 먼저 인기척을 발견한 사람이 ‘대구’를 외쳤을 때, 상대가 ‘청어’라고 대꾸하지 못하면 그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비무장지대에서 암구호도 모른 채 아군 GP를 찾아오면 총구멍이 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공작과장은 이씨가 살아올 것에 대비해 이씨 목소리를 아는 공작대원들을 배치했다. 인기척을 느낀 공작대원이 “누구냐”고 묻자 이철수는 “나야 나!” 하고 나타났다.

특수공작대가 갖고 있는 불문율 중 하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동료를 낙오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동료를 낙오시켰는데도 용서받은 공작대는 다시 적지에 들어갔을 때 적에게 투항하거나 반드시 와해된다. 그런 이유에서 동료를 낙오시킨 것은 크게 처벌한다. 먼저 분계선을 넘어온 3명은 이러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살아돌아온 이철수가 3명과 떨어지게 된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3명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다음날 이씨는 김씨가 누워 있는 병원으로 후송돼 함께 치료를 받았다. 그 후 김씨는 자신이 생환하던 날 벌어진 총격전이 휴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2의 6·25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왜 이렇게 위험한 업무에 참여하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