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첩보전쟁 반세기(2)

박종혁2007.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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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부대 물색조와의 만남
   이야기는 그로부터 1년 전인 67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고등공민학교를 중퇴한 채로 놀고 있던 김씨(당시 19세)는 친구 2명과 함께 서울 서대문 로터리의 적십자 병원에 입원한 친구 어머니 문병을 갔다가 운명의 지프와 마주쳤다. 이 지프는 첩보부대 장교를 태우고 온 것이었다. 지프에서 내린 장교가 볼일을 보러 간 사이 김씨는 지프 운전병에게 말을 걸었다. 당시는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은 터라 중앙정보부의 힘이 매우 셌다.

“끗발 센 데서 나온 차 같은데…, 중앙정보부 찹니까?”

“아니다. 어디 소속인지는 알 것 없고…, 너희들 군대 갈 때 되지 않았니?”

“그렇습니다. 내년쯤에 영장이 나올 것 같은데요.”

“그럼 우리 부대 한번 지원해 볼래?”

“그럴까요.”

이런 수작을 하고 있는데 장교가 돌아왔다. 장교는 운전병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더니 세 사람을 길 건너편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세 사람의 신원을 적은 장교는 “1주일 후 이 다방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1주일 후 다시 만난 장교는 “신원조사 결과 자네들은 완벽하다. 우리 부대에 지원해도 좋다”고 입을 열었다. 세 청년이 “도대체 어떤 부대냐?”고 묻자, 장교는 “아주 특수한 부대로 일본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와, 국가를 위해 아주 좋은 일을 하는 곳이다. 임무를 다 마치면 군대를 마친 것으로 해주는데, 장사밑천 700만원 정도는 마련해 줄 것이다. 원하면 경찰이나 특수한 수사기관에 특채되도록 해주겠다”고 대답했다.

장교는 세 청년에게 각각 2만원과 함께 명함 크기의 신분 증명서를 내주었다. 신분 증명서에는 ‘이 사람은 체포 또는 구금할 수 없다’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장교는 세 사람에게 “1주일 후 서울 남영동의 시립노동복지회관 4층 강당으로 오라”고 했다. 1주일 후 회관 강당으로 가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청년 1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특히 부산 사투리를 쓰는 청년들이 많았는데 전부 김씨처럼 육군 첩보부대 물색조의 권유를 받고 온 것이었다. 이들 중에는 물론 건달 출신이 많았지만, 변호사 아들도 있었고 한국전력에 다니다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위장간판 ‘대한축산연구소’
   이곳에서 청년들은 신체검사를 받고 80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버스를 타고 남산을 한 바퀴 돌아 강변도로를 달린 후 지금의 영등포구 양평동 해태제과 자리로 갔다. 그곳에는 ‘동북산업사’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민간복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간단한 환영식을 거친 후 80명은 머리를 박박 깎고 군복과 총을 지급받았다. 총은 은박지에 싸여 있는 신품이었다. 동북산업사에서 제식훈련과 기초사격 훈련을 받은 이들은 4주 후 수료식을 하고 다시 짐을 싸들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들이 간 곳은 지금 경부고속도로 판교 톨게이트에서 가까운 서울 서초구 원지동의 청계산이었다. 청계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한축산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김씨는 육군 첩보부대 출신을 ‘돼지’라고 하는 것은, 이들을 훈련시킨 청계산에 대한축산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이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6명씩 한 조가 돼 산 속에 흩어져 있는 안전가옥에 수용되었다. 이 날 이후 6명은 독도법·산악행군·돌연사격·지향사격·생식법(生食法)·비트 구축술 등 공작원으로 갖춰야 할 기술을 익혀갔다.

그런데 훈련을 맡은 교관이나 조교는 전혀 강요를 하지 않았다. 교관이 이렇게 해봐라 하고 동기를 부여하면 6명이 스스로 강도 높은 목표를 정해 이를 달성하는 식이었다. 김씨는 “적지에 들어갔을 때 6명이 투지를 일으켜 사선을 돌파하려면 자율적으로 목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훈련 단계에서부터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선정하고 목표를 이루게 한 것 같다. 우리는 목표를 차츰 상향 조정하고 이를 달성해 나갔다”고 말했다.

자율적인 훈련이지만 너무 강도가 세다 보니 탈영자가 속출했다. 김씨도 탈영을 시도했으나 청계산 외곽을 경비하는 첩보부대원들에 붙잡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조원이 발등을 크게 다쳤다. 한국전력에서 일하다 온, 김씨보다 6살이 많은 조원이었다. 이 상처로 인해 그는 더 이상 산악행군을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아 청계산을 빠져나갔다. 김씨는 그가 특수부대를 빠져나가기 위해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은 것으로 추정했다.

1960년대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전 휴전선에서 남북한 군의 충돌이 적지 않았다. 남북한은 특수부대를 상대 측에 투입해 내무반을 파괴하거나 병사를 암살했다.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이 나무꾼 복장을 하고 미 2사단이 지키는 문산 북방의 휴전선을 넘어와 문산 읍내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갔다” “인민군이 잠자던 국군 막사를 폭파하고 죽은 국군 병사들의 귀를 잘라갔다”는 소문이 떠돌던 시절이다.

이런 소문은 국군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북한은 이를 노리고 거듭해서 특수공작대를 파견한 것이다. 이러한 공작의 클라이맥스가 강추위가 몰아치던 1968년 1월21일 터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이다. 이때 청계산 ‘대한축산연구소’에서 훈련을 받던 김씨 조는 급작스레 출동해, 북한산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은 며칠 후 김씨 조는 강원도 춘성군 ○면 ○○리 산속에 있는 안전가옥으로 이동했다.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실전배치된 것이다.

김씨 조에는 조원 전체가 북한 지역에 들어가 북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특수 공작 임무가 부여되었다. 반면 다른 곳으로 흩어져간 조는 단독으로 북한에 들어가 첩보를 수집해오는 단독 수집 임무가 부여됐다고 한다. 김씨 조는 대한축산연구소 출신으로는 특수 공작을 처음 감행했기 때문에 ‘목장 1기’로 불리고 그 다음조는 ‘목장 2기’로 불렸다. 김씨와 함께 휴전 이후 최대 교전을 벌이게 한 이철수씨가 바로 목장 2기였다.

 

모래장애물 통과법
   이씨는 김씨 조원 중 한 명이 체력이 약해 고민하다 면담을 거쳐 단독 수집조로 빠져 나간 후 결원을 메우려고 들어왔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전쟁기념관을 찾은 김씨는, 단독 수집조로 빠져나간 동기가 71년 전사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춘천대는 자율적으로 훈련하다 이따금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잠복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러다 68년 6월 드디어 김씨 조에 북한 지역으로 침투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처음 북한 땅에 들어간 김씨 조는 사진 촬영만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 침투에서는 인민군 탄약고와 유류탱크에 폭약을 설치하고, 폭약이 터져 탄약고와 유류탱크가 폭발하는 장면을 찍고 돌아왔다. 세 번째 침투에서는 옥수수 수거 작업을 하는 인민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옥수수단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빠져나왔다. 인민군이 이 옥수숫단을 트럭에 실으려고 들어올렸을 때 부비트랩이 터졌음은 물론이다. 네 번째 때는 시끄럽게 대남방송을 쏟아내는 인민군 스피커를 향해 유탄발사기를 쏘고 돌아왔다.

한국군이 남쪽 비무장지대에 북한 공작원 침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듯이 북한도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다. 이러한 장애물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지뢰지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주의가 필요하다. 북한 침투시 처음으로 만나는 장애물은 철조망이다. 철조망은 넘어서기 좋은 곳을 골라 간단히 우회 통과하면 된다.

두 번째는 마른 나뭇가지를 쌓아 올린 녹색 장애물인데, 이 장애물을 잘못 건드리면 마른 나뭇가지들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녹색 장애물 부근에는 반드시 인민군 매복조가 있으므로 매우 주의해야 한다. 녹색 장애물도 건드리지 않고 통과하면 세 번째로 15m 폭으로 고운 모래를 깔아놓은 모래 장애물이 나온다. 이 모래 장애물은 절벽이나 강을 제외한 전구간에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우회할 방법이 없다. 김씨는 모래 장애물 통과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리 고운 모래라도 비를 맞으면 조금씩 단단해진다. 주의깊게 손바닥으로 두드려보면 모래가 단단하게 굳은 곳을 찾아낼 수가 있다. 이러한 곳을 골라 1m 앞쯤에 배낭을 멜빵이 하늘로 향한 자세가 되도록 올려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 동료의 배낭을 받아 다시 1m 앞에 같은 방법으로 놓는다. 이런 식으로 배낭을 징검다리처럼 깔아 놓고 건너가고, 마지막에 오는 사람은 배낭을 걷어 하나씩 앞으로 전해준다. 이런 방법을 쓰면 자국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모래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실 장애물이다. 실 장애물이란 국방색의 가느다란 끈을 사람 발목 높이쯤 되는 나무 사이에 묶어 놓은 것이다. 한밤중에 이 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예민한 공작원조차 실을 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무장지대에는 이 실을 끊을 수 있는 멧돼지도 있고 고라니도 있다. 실을 끊었을 때는 네 발 짐승이 끊은 양 위장한다. 두 발 짐승(사람)은 보폭과 보조가 일정한 편이지만, 네 발 짐승은 뛰었다 걸었다 보폭과 보조가 일정치 않은데다 가는 방향도 마구 바꾼다. 실을 끊었을 때는 네 발 짐승의 소행으로 보이게끔 불규칙하게 이곳 저곳에 있는 실을 함께 끊어 놓는다.

마지막으로 고압선이 나오는데, 고압선을 통과할 때는 1m쯤 되는 호스 두 개를 사용한다. 호스를 갈라 아래 위쪽의 고압선에 덮어 씌운 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사람이 통과할 만큼 들어올리면 감전되지 않고 고압선을 통과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장애물을 통과가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목적지까지 접근해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68년 10월, 휴전 이후 최대의 남북 교전을 일으키며 살아 돌아온 김씨와 이씨는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병장으로 전역했다. 민간인 신분으로 온갖 작전을 수행하던 이들은 작전에서 해방되는 날 처음으로 군인이 되고 그 날로 전역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러한 신분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北, 울진·삼척 사태로 보복
   꽤 오랫동안 회자될 만한 두 사람의 무공은 약 보름 후 터진 울진·삼척사태에 덮여 잊혀져버렸다. 울진·삼척사태는 중대 규모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내려와 울진과 삼척 일대의 화전민촌을 습격하며 분탕질을 친 대형 유격전이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특전대와 해병대를 동원했다.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공비를 소탕하는 데는 거의 두 달이 소요되었다.

당시 병상에 있었던 김씨는 육군 첩보부대 장교로부터 “너희가 북한에서 한 공작에 대한 보복인 모양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김씨는 1·21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침투하고, 북한은 김씨 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울진·삼척 사태를 일으키고…. 6·25전쟁 이후 남북 관계가 가장 긴장됐던 1968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미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납치된 것은 1·21사태 다음날이었고, 69년 4월15일에는 미군 첩보기 EC-121이 북한 청진 앞바다에서 북한의 미그-21기의 공격을 받아 격추되었다. 권투에서 홀딩을 한 채 주먹으로 상대의 뒷머리를 때리는 것은 반칙이다. 휴전선 비무장지대로 무장한 병력을 집어넣거나 상대 쪽으로 무장 병력을 집어넣는 것은 모두 정전협정 위반이다. 남북한은 휴전선에서 서로를 ‘홀딩’한 채 끊임없이 상대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일반인들은 1·21사태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울진·삼척사태, EC-121 격추사건 등에 시선을 뺏겨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조차 모르고 살았다.

 

50년대의 첩보전
   대북공작대의 뿌리는 6·25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10월 편성된 국방부 제4국은 대북공작과 한국군 내부로 침투한 북한 간첩을 잡던 곳이다. 그러나 국방부 4국은 49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국측의 요구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육군본부 정보국. 육본 정보국은 48년 10월에 터져나온 여순반란 사건에 관여한 군내 좌익분자를 척결하면서 위상을 굳혔다. 이때 명성을 떨친 이 바닥의 장교가 김창룡(金昌龍)씨였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군의 첩보 및 방첩 조직은 일시에 무너졌다. 이 시기 북한을 상대로 첩보 공작을 벌인 것은 미 극동군 산하 한국인 첩보부대 KLO였다. 49년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하며 ‘한국(Korea)에 연락사무소(Liaison Office)’를 두었는데 이것이 KLO다. KLO는 북한의 정보를 구하기 위해 이북에서 내려온 한국인 청년들을 고용해 대북 첩보원으로 활용했는데 이들을 가리켜 속칭 ‘켈로(KLO) 부대’라고 했다.

KLO 부대는 활동지역과 활동무대에 따라 ‘고트(goat·염소)대’ 따위의 암호명이 붙은 분견대로 나뉘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한국군이 정보부대를 재건한 것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할 때인 1950년 10월21일로, 이 날 기무사의 전신인 육군 방첩대가 창설되었다. 1951년 1·4 후퇴로 다시 밀리면서 일단의 한국군 패잔병이 황해도 구월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구월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령도에 포진한 미군(당시는 KLO 부대 고트대가 주둔하고 있었다)의 지원을 받으며 유격전을 펼쳤다.

구월산 유격대로 불린 이들은 53년 정전을 앞두고 백령도로 철수했는데 미군은 이들을 모아 ‘동키(donkey·당나귀) 부대’를 창설했다. 인천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동키부대는 곧 북한에 들어가는 첩보부대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이북에는 한국에서 투입한 고정간첩이 있었다.

이창훈씨(70·가명)는 50년대 HID로도 불리던 육군 첩보대에서 장교로 대북 공작을 하던 사람이다. 속초에서 배를 이용해 원산 쪽으로 대북 공작대를 파견하는 일을 하던 그는,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을 경험했다. 속초 HID에서는 Q보트라고 하는 배를 이용해 공작대를 투입했다. Q보트가 북한 해안 가까이 가면 Q보트에 붙어 있던 VP배를 내리고 이 배에 인민군이나 이북 어민 복장을 한 공작원을 태워 북한 해안에 상륙시키는 것이다.

그 날 흥남에 있는 에이전트(고정간첩)가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와 선박대장 ㅂ소령이 지휘하는 Q보트가 출항했다. ㅂ소령은 해안에서 7㎞쯤 떨어진 지점에서 Q보트를 세워 VP를 내리고 ㄱ중위가 지휘하는 공작원을 옮겨 태웠다. 공작 세계의 불문율 중 하나는 계급의 고하에 관계없이 공작대장이 선박대장보다 높다는 점이다. 선박대장 ㅂ소령이 배를 대고 뺄 때는 반드시 공작대장인 ㄱ중위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속초 HID의 작전 실수
   공작대원들이 VP로 옮겨탈 때가 Q보트에 탄 사람들로서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사지로 들어가는 공작원들이 마음을 바꿔 총부리를 돌려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VP로 옮겨타는 공작원의 총에 꽂아주는 탄창의 맨 위 총알은, 격발되지 않도록 항상 거꾸로 넣어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갖고 내리는 총의 방아쇠 부분은 실로 묶어 두었다. 공작원이 탄창을 빼 총알을 바로 넣고, 방아쇠의 실을 풀어야 총을 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공작대원을 태운 VP가 막 출발할 무렵 북한 쪽에서 함정이 나타나 사격을 가해왔다. 우리가 심어 놓은 에이전트가 북한 쪽에 붙어 배신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Q보트는 반드시 VP를 구해 함께 도주해야 하는데, ㅂ소령은 그냥 Q보트를 몰고 달아나버렸다. 그날 밤 VP는 용케 이북의 추적을 따돌리고 속초로 돌아왔다. Q보트가 그냥 달아난 것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ㄱ중위는 도착하는 즉시 ㅂ소령의 숙소를 찾아가 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ㅂ소령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몸을 피한 다음이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대북 첩보부대에서 부대원끼리 갈등을 빚어 사고가 일어나고, 또 첩보부대원들이 술집에서 행패를 부린 이야기는 숱하게 전해온다. 김씨가 활동하던 60년대 후반의 첩보부대도 그랬을까. 김씨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우리가 GP에 들어가면 수색대 병사들은 안절부절못한다. 초소장은 연신 연대로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대로 원칙이 있었다. 즉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 다음에는 꼭 죽더라’는 징크스 같은 것이 있었다. 춘천대에서 자율적으로 훈련할 때도 공작과장은 ‘XX대 애들이 ○○에서 술을 마시고 깽판을 쳤는데, 작전에 들어가서 다 죽었다더라’라는 말을 해 이런 원칙을 지키도록 유도했고 또 우리는 그것을 따랐다. GP에 들어갈 때 탄창에 총알을 거꾸로 넣은 적도 없고, 방아쇠를 묶어 놓은 적도 없다. 우리는 너무 어렸고 또 살고 싶었다.”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이유
   비교적 괜찮은 사람들로 구성되던 대북 공작부대의 물이 흐려진 것은 70년대 들어서다. 이때부터는 군에 들어올 나이의 비교적 순수한 젊은이를 뽑지 않고, 군에서 사고를 쳐 ‘남한산성’으로 불리던 군 형무소에 수감된 자들을 대북 첩보부대 요원으로 뽑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실미도 부대였다. 실미도 부대는 공군 부대가 경계 근무만 섰을 뿐 실제로는 육군 첩보대 산하의 분견대였다. 당시 해군과 공군은 대북 첩보부대를 운영하지 않았다.

첩보부대 요원들의 자질이 떨어지자 덩달아 이들에 대한 후생도 나빠졌다. 비인간적인 대우에 혹독한 훈련이 겹치자, 그렇지 않아도 거친 이들이 공군 경계 병력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빠져나왔다. 버스를 탈취해 서울 노량진까지 들어온 이들이 진압부대에 걸려 몰사한 것이 1971년 8월23일 발생한 실미도 사건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남북 관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특수공작대를 보내 상대를 가격하던 남북한은 전쟁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특수공작대를 유지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고민하다, 74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를 자제하기로 타협했다. 남한의 이후락(李厚洛)과 북한의 김영주(金英柱)가 발표한 이 공동성명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제2항인데, 2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쌍방은 남북 사이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 도발을 하지 않으며…’ 남북 양쪽은 거듭되는 보복전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공동성명 이후 한국은 정전협정 위반인 북한 공격을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들어서는 대북 공작대 파견을 아예 중지한 것으로 보인다(했더라도 그 규모가 훨씬 축소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80년대 들어 북한에 들어가 테러와 폭파 납치 등 특수공작을 했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데서 간접 확인된다. 여기에는 남북한의 거듭된 정전협정 위반에 불안을 느낀 미국이 한국을 강력히 단속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은 미국이 찍어오는 항공사진과 통신감청 자료, 그리고 증가 일로에 있었던 북한 귀순자를 중심으로 대북 첩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북한은 계속해서 과거처럼 정접협정을 위반하는 방법으로 첩보를 수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78년 10월 일어난 ‘광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충남 홍천군 광천읍으로 상륙한 인민군 특수부대원이 주민 신고로 쫓기게 되자 예비군으로 변장하는 등 갖가지 위장술로 군경 방어선을 뚫고 김포반도에까지 올라온 다음 한강 하구를 건너 북한으로 돌아간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