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옷! 애가 나라사키 카이토구나! 최근에, 잡지나 버스 손잡이 같은 데서 자주 봤지. 안기고 싶은 남자 1위라던가 뭐라던가, 꽤 시끌벅적한 놈이지?]
[그런 거 같네] 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슈이치는 전혀 신경도 않는 눈치다.
[흠~. 이런 녀석 어디가 좋은 거지? 난 전혀 모르겠는데......나미도 이 녀석 괜찮다고 생각해?]
[자,잘 모르겠는데...... 아, 그러고보니 내일 일찍 일어나야 되지 않어? 드라마같은 거 볼 시간있으면 목욕하러 가는 게 어때?]
잘 모르겠다......인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 때의 카이토. 스크린 너머의 카이토는, 전혀 모른다. 그 때로부터 3년. 그렇게 확실한 약속도 아니었고, 카이토도 기억하고 있을 리 없겠지.
1년에 1번, 약속의 날에, 그 장소에서...... 아무 생각없이, 떠오른 말을 한 것 뿐이야. 매년 이 때가 되면, 얼마만큼 내가, 쓸데없는 일에 힘들어 하고 있다고 생각해? 남자란 정말 제멋대로라니깐. 아니, 남자중에서도, 카이토만은 특별한 건지도 모르겠다. 슈이치는 절대로 그런 말 하지 않는 걸. "운명"이라던가 "영원"이라는 말, 입에 담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난 보통 사람들처럼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면 그걸로 된거야.
[나미, 나, 역시 연설같은 건 무리인거 같애]
전화는 마이코로부터 였다.
[잠,잠깐만, 뭐야, 이제와서. 내 결혼식에서는 친한 친구 대표로 니가 한다고 옛날부터 입버릇처럼 애기했잖아]
[그건 그렇지만......회사 동기라던가, 그 외에도 많잖아. 신이는?]
[신부 친구 대표인데 어째서 남자가 하냐구. 마이코, 제발 해줘.응?]
[응...... 그건그렇고, 나미 결혼하는 거, 카이토씨는 알고 있어?]
홀 쪽으로 눈을 돌린다. 슈이치는 아직 나올 거 같지도 않다.
[글쎄. 신이가 애기했다면......]
하지만 애기하지 않았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안 부르는거야? 결혼식에 나라사키 카이토가 축하해 주러 온다는 건 정말 대단한거아냐! 내가 나미라면 반드시 부를텐데]
[정말, 쓸데없는 소리말고. 결혼식에 사겼던 남자를 부르라니, 그런 말 금시초문이라구]
[그것도 그렇네]
웃으며 말하자 마이코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내일이지, 나미, 가는 거? 올해가 마지막이 될거같네]
방금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얼굴로 애기를 꺼내는 마이코 앞에서, 왜인지 갑자기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이다.
[갈리가 없잖아]
[후회안해?]
[후회라니. 그것보다 연설 잘 해]
[알았어. 그럼, 어떻게든 해 볼게]
주전자가 슈우슈우~ 소리를 낸다. 신랑방에서는, 슈이치의 콧노래가 들려온다. 그리고, TV 화면에서는, 내가 모르는 [나라사키 카이토]의 모습. 무의식적으로, 채널을 돌리고는, 달력을 본다.
내일은 7월 21일......인가.
후회같은 거 할리가 없잖아. 후회따위.......
-2003년3월-
[아르바이트하는 선배랑, 이번에 술마시자는 약속 했는데, 나미도 안 올래? 선배도 친구 데려 온대!]
마이코가 했던 이 말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감싸는, 벗꽃이 필 무렵이다. 이전까지의 살을 에위는 듯한 추위는, 마치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어떡하지. 나 그런 건 익숙하지 않아서......]
아직도 료선배 일 때문에 그러는거야? 저기, 신타로라는 선배, 정말 좋은 사람인데, 4월달부터 취직한다고 지금 일 그만둔대. 그래서, 송별회하는 건데....... 괜찮지? 친구 데려간다고 벌써 애기까지해놨단 말야]
반강제로 마이코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새로운 만남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자신. 그렇게 두근거린다는 느낌을 요근래에 잘 느끼지 못했던 나였다. 생각해보면, 벌써 이 때부터, 뭔지모를 운명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진하게 칠한 치크에, 옅은 홍조를 띠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시부야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Dexee Diner는, 멋진 커플이나 외국인들로 꽉 들어차있는, 아무리 봐도 나에게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었다. 점원에게 안내를 받으며, 나선계단을 오르자, 마이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져서 미안]
[우리도 방금 왔어. 주문도 아직 안 했는 걸. 이 쪽은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신타로선배. 그냥 신이라고 불러도 된대. 이 쪽이 나미. 같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이젠 정말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끈끈한 인연이죠]
[잠깐만, 떼고 싶다니.......정말 마이코도! 아,안녕하세요, 나미라고 합니다]
[아, 신타로입니다. 친구는, 늦잠자버려서 1시간 정도 늦을거라는. 미안해요. 올 때까지, 3명이서 마시고 있죠뭐]
숏 헤어에, 미소가 상냥한 신이는, 얼굴에 정직이라고 써 있을 정도로 착했다. 마이코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게, 한눈에 알 것같다.
술도 어느 정도 들어오자, 금방 달아오른 우리들은, 어느샌가, 사랑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신이선배는, 여자 친구 있어요?]
마이코가 갑자기 나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윽, 아픈 곳을. 그것도 스트레이트로. 여자 친구는 항상, 모집중~!]
장난섞인 몸짓으로, 신은 머리를 긁적였다.
[에~, 이렇게 좋은 선배를. 여자보는 눈이 높으신 거 아니예요? 나미같은 애는 어때요?]
[갑자기 그렇게 물어오면 뭐라고 대답해야 될 지......하하하...]
테이블 밑으로, 마이코의 발을 가볍게 찬다.
[나미만큼 귀여운 애를, 안 좋아하는 남자는 없겠지. 아, 마이코도 그렇고]
수줍은 듯이 웃는 신. 이런 사람과 사귀게 된다면, 분명 행복하겠지.
[난 그냥 덤으로 갖다 붙인거지?!]
라며 장난스런 얼굴의 마이코가, 문득 카운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저 사람, 잘 생겼는데~]
마이코가 향한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복잡한 표정으로, 한 남자가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약간 긴 앞머리에 감춰진, 크고, 빨려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
이런 첫인상에는, 확실히 눈길이 가기마련이겠지만, 내 타입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 날라리같아서, 난 별로......]
다음 순간, 화제에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는 투로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신이가 갑자기 외쳤다.
[뭐야, 카이토! 왔으면 말을 해야지~! 너도 어서 일루 와!]
그러자, 그 남자는 매우 귀찮은 듯이 글라스를 든 채, 신이의 옆 자리에 앉으며 악수를 권해 왔다.
[날라리 카이토라고 합니다]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는 나.
[날라리는, 늦게 온 주제에, 근처에서 몰래, 다른 사람 애기하는
거나 듣는군요]
내민 손을 뿌리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올려고 할 때였다.
[기다려!]
내 손을 붙잡고 카이토가 말한다.
[농담이야, 농담. 내가 별로 관심없어하는 화제로 너무 재미있게 애기하고 있길래 끼어 들 타이밍을 놓친 거 뿐이야. 게다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애기하면 듣기 싫어도 들린다구. 들리기 싫다면, 이 애처럼 작은 목소리로 애기하든가. 어쨌든......화 풀고 마시자]
[나미, 나를 봐서라도, 용서 해 주라. 이 녀석, 좀 별난 구석은 있지만, 알고보면 꽤 괜찮은 녀석이야]
신이의 말을 듣고, 일단 잡힌 손을 푼 난, 의자에 다시 앉아, 글라스에 들어 있던 맥주를 단 숨에 마셔버렸다.
[이 애, 착한 애니깐, 너무 놀리지 말아주세요. 전 괜찮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필 해 주는 마이코였지만, 그 내용은 전혀 내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뭐야, 이 사람! 어디가 좋다는 건지! 엄청 열받는 구만.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야! 생각하면 할수록 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를려고 했다. 하지만, 방금전까지 강하게 붙잡혔던 손에서 전해져왔던, 카이토의 온기에, 이상하게도 심장박동이 가파져 왔다. 분명히 술때문에 이럴거야. 술때문에!
일단 애기를 해 보니, 확실히 날라리는 아닌 듯 했다. 어딘지 모르게 대하기 힘들었지만, 그건 아직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확실히 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카이토를 대하고 있자니, 만나서 아직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친하게, 최소한 주위에서는 그렇게 보일정도로, 과거의 연애담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까지 애기하고 있는 이 쪽이, 오히려 어떻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배우였군요! 그래서, 그렇게 분위기가 틀렸구나! 카이토씨는 여자 친구 있으세요?]
카이토가 오기전보다, 확실히 누가봐도 기분이 들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아진 마이코가 물었다.
[그런 걸 물어서 어쩔려고? 설마 나랑 사귀고 싶은 거야?]
퉁명스럽게 되묻는 카이토.
[어이, 카이토. 그렇게 말할 거 없잖아. 이런 술자리에서 당연히 물어 볼 수도 있는 말인데. 그래, 인사같은거야 인사. 그지? 마이코]
신이가 분위기를 흐트리지않기 위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건 안 물어봤으면 하는데. 사랑이라던가, 연애라던가, 나한테 있어선 지겨운 화제거리거든. 있든, 없든 상관없잖아. 정말 좋아한다면, 여자 친구가 있든, 결혼을 했든, 빼앗으면 되는 거지. 임자있다고 포기? 그래서 포기하는 거라면 처음부터 그 정도 레벨의 사랑밖에 안 됐다는거야. 그런 사랑 난 필요없네]
카이토는 점원에게 코로나를 주문한다.
[이 녀석, 여자 친구없어서 이런 소리하는 거니깐,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뭐라고?! 어이, 신! 너야말로, 없잖아! 나 참, 정말 너란 녀석은 여자란 존재에대해서 너무 약하다니깐. 도데체 넌 어느 편이냐? 요전번에 술마시고 뻗은 널 업고 집까지 바래다 준 사람은 누구였더라?]
카이토는 신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 음. 자,자 마시자. 나미는 뭐 마실래? 둘 다 술은 센 편이지? 나 같은 경우는, 너무 약해서. 벌써 얼굴 벌개졌네~]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신이. 정말 상냥한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친구란 카이토는 정반대에 마이페이스적. 그래서 마음이 맞는 걸까나. 왠지 모르게 좋은 콤비란 느낌이다. 그건 그렇다쳐도, 방금전 한 말. 외모는 놀기좋아하는 사람같아도, 사실은 꽤 생각이 깊은 사림일지도. "날라리"란 말해서, 상처받은 걸까......
[어?! 카이토?]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자, 훨친한 키에, 얼굴은 작은, 누가봐도 일반인과는 좀 다르다는 인상을 풍기는 여성.
[오옷! 미라이! 오늘 촬영아니었어?]
너무나 친하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두사람. 왠지 보고 있으면 실례일 거 같은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다.
[신도 있었네?!]라며 말을 걸었지만, 금방 카이토 쪽을 보고는, 대화를 계속한다.
[빨리 끝나서, 모델 동료랑, 스태프랑 마시러 왔어. 친구?]
라며, 우리들 쪽을 바라본다.
[아아, 방금 만났어. 신의 바이트 동료 마이코와, 그 친구 나미. 이녀석은, 내 쌍둥이 여동생같은 녀석으로, 미라이. 자주 잡지에 나오는데, 알아 보겠어?]
"Hey Mirai, where is the men's room?"(미라이, 화장실 어디야?)
"Over there."(건너편이야)
"Are they your friends? Everybody is waiting for you."(그들은 친구? 모드들 기다리고 있다구)
"OK, I'll go downstairs soon."(알았어, 금방 내려 갈게)
[미안, 모드들 기다리는 거 같으니, 난 갈게. 밑에서 마시고 있거든. 아, 그 전에, 나도 화장실!]
그렇게 말하고, 아무리 봐도 모델로 밖에 보이지않는 외국인남성의 뒤를 쫓는다.
[우리들, 슬슬 나갈까?]
방금 주문한 코로나를 한 번에 마셔버리는 카이토.
마이코와 신이 계산을 하는 동안, 카이토와 단 둘이 되어서, 용기를 내어 물어 봤다.
[저기, 날라리따위 말해서 미안]
[그런 거 신경 안 써. 정말, 나미는 재미있을정도로 진지하다니까]
라고 말하는 카이토의 미소는 부자연에다, 미라이에게 보여주었던, 환한 미소와는 완전 틀리다. 좀 더 억지 웃음이라도 환하게 웃으면 좋을텐데.
[정말 배우?]
[약소프로덕션 소속이고, 아직 전혀 좋은 역도 받지 못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달9의 주역을 할거야!]
카이토는 눈을 빛낸다. 미라이씨에게 지기는 싫은 거겠지.
[연극같은 데도 나와? 한번 보고 싶네]
[아아, 그럼, 안내장 보내 줄게. 한 번 연락줘]
테이블에 놓여 있던 페이퍼냅킨에, 핸드폰번호와 메일주소를 휘갈겨 써 주었다.
가게를 나오자, 마음 편한 봄의 밤바람이 소리를 내어, 우리들을 지나간다. 카이토와 신이 없어지자, 금방 마이코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엄청났었지! 예쁘고, 스타일도 좋고, 영어도 잘하고! 모델 미라이지? 나 알고 있었다고! 잡지에서 본 적 있지롱! 카이토의 여자 친구일까나?]
[글쎄. 하지만 여자 친구 없다고......]
카이토가 준 페이퍼 냅킨이 들어 있는 백을 바로 잡았다.
일단 한 번 연락줘......인가. 페이퍼 냅킨을 손에 쥐고, 휴대폰을 열고, 그리고 다시 닫는다. 이걸 몇번 반복한 건지. 그 후 바로, 연락처만 적고, 메일보내두었으면 좋았다. 전화하는 게 좋을 지, 메일이 좋을 지, 어떤 타이밍으로 연락하면 좋을 지, 망설이는 동안 3일이 지났다. 연락안 하는 건 오히려 실례이겠고, 앞으로 몇일 더 지나버리면 더더욱 연락하기 거북해 질것이다. 이제 너무 빨라서, "날 노리고 있어"같이 착각 받을 일도 없을테고, 오늘이 딱 좋을 때다. 마음을 먹고, 한 번 더, 휴대폰을 열고, 메일을 적기 시작한다.
나미입니다! 연락이 늦어져서 미안. 그 후 좀 바빠져서. 요전 번은 즐거웠어! 연극 할 때되면 가르쳐줘 [날라리]한테 가르쳐 주는 건 무섭지만.......농담(^^). 내 주소는 이거. 번호는080-XXXX-XXXX야. 언제라도 연락줘
이렇게 보내면, 너무 가벼운 느낌일까. 갑자기 사과하는 것도, 이상하고. 별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날라리"란 것도 농담으로 받아 들이면 되는 거지만, 집요하다고 생각 될 지도. 게다가, "언제라도 연락줘"같은 말 적어서, 연락을 가디라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싫고......
나미입니다. 이전 번은 즐거웠습니다. 연글 할 때 되면 가르쳐 주세요. 보러 가겠습니다. 제 메일 주소를 보냅니다. 번호는 080-XXXX-XXXX입니다.
조금 쌀쌀한 느낌도 들지만, 이 정도로 괜찮겠지. 정말 나란 애도 메일 하나 보내는 것 정도로 뭘 이렇게 고민한담. 바보같아.
[카이토, 방금 전화 안 울렸니?] 라고 신이 말하기에, 휴대폰을 꺼내 보자, 빨간 불이 점멸하고 있었다.
[정말이다. 메일 왔네. 그건그렇고, 너, 정말 잘 듣네]
화면에 눈을 옮겼다. 등록하지 않은 주소로부터의 메일.
[아아! 나미한테다]
[엣! 카이토, 어느새 나미의......]
놀란 목소리로, 왠지 모르게 동요하는 몸짓으로, 글라스를 입에 갖다댄다.
[저번에 마셨을 때, 가르쳐 줬어. 저기, 너희들이 계산하고 있을 때......뭘 그렇게 신경써? 앗! 라는 것은, 너, 나미를! 그런거야?]
[저번에 즐거웠으니, 또 다같이 마실까! 이번 토요일은? 넌 마이코에게 말 해놔. 나중에, 나미에게 메일 보내 둘테니깐]
신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는다. 알기 쉬운 녀석.
메일을 보낸 거 뿐인데, 큰 일을 치른 것같은 기분에, LUSH의 바스범을 넣고, 여느때보다는 천천히 목욕을 즐겼다. 목욕을 끝내고, 컨트렉스를 마시자, 몸 전체로 수분이 공급된다. 기분 좋구나!
문득 휴대폰을 보자, 빨간 라이트가 점멸하고 있다. 카이토일까...... 그렇게 빨리 답변할 타입은 아닌 거 같으니, 마이코일지도...... 두근두근거리며, 휴대폰을 연다.
이번 토요일, 같이 안 마실래? 19시에 저번에 마셨던 가게에서, 카이토
퉁명스러운 메일. 그렇게 고민해서 보낸 메일의 답장이 이거? 게다가 갑자기, 데이트 신청이라니, 역시 날라리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도, 신기하게도 몸이 달아올라왔다. 너무 해를 쬐인 걸까. 한 잔 더, 컨트렉스를 마시고, 한 번 더 메일을 읽는다. 이 쪽 사정은 묻지도 않고 시간, 장소를 지정하다니, 정말 마음대로구만. 하지만, 메일 보낸 거 괜찮았던 거 같아 안심. 역시 "날라리"라고 써 보내버리는 게 나았을까...... 바로 답장을 적었다.
응. 토요일 19시에 그 가게에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토요일의 시부야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치공원앞광장은 오솔길 옆으로, 스크럼블 교차점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섰다. 이만큼의 사람이 있으면, 지금 여기에 있어, 이 순간에는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끼리, 언젠가 만나, 사랑을 하고......같은 일이 일어날까. 보통때라면 질려 버릴 사람들의 물결에, 이런 생각이, 문득 머리속을 스쳤을 때, [술집은 어때요?]라며 캐치의 오빠가 말을 걸어 왔다. [약속 있습니다]라고 말 했을 때, 신호가 파란 불로 바껴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래, 약속 했어. 이제부터 카이토와 만날거야. 어째서 날 만나자고 하는 걸까. 뭔가 상담할 꺼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에게? 미라이씨의 일? 아니면, 신이 마이코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 일로 나에게 협력을 해 달라는 걸지도......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가게를 향하고 있자, 뒤에서 갑자기, [나미!]라는 많이 들었던 목소리. 돌아보자, 새로 산 원피스를 입은 마이코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왠일로 빨리 왔네]
[마이코! 어쩐 일이야?]
보이기 싫은 장면이라도 보여 버린 거 같은 기분에,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나야 항상 늦는 일은 없으니까~. 아앗! 이거? 어제 사버렸어. 어때?]
상황을 깨달은 난, [응, 어울려]라고 말했다.
확실히, 카이토에게 받은 메일에는 둘이서만이라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마이코나 신도 함께 할 꺼라는 건 당연한 거였다. 어째서 데이트라고 생각해버린걸까. 마음대로 착각해 있었던 자신을, 내심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게에 들어간다. 카이토도 신도 아직 오지 않았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평소의 자기 얼굴. 내츄럴 메이크에는 어울리지 않는, 산 지 얼마안되는 핑크의 옷이 두드러져 보인다.
자리에 돌아올려고 하자, 마이코 앞에 앉은 카이토의 뒷모습이 보인다.
[앗, 나미, 어서와~! 카이토도 이 원피스 잘 어울린대!]
[오! 왔냐?. 어울리니깐 어울린다고 말한 거 뿐. 신은 아직 안 온거 같아. 그 녀석, 지각같은 건 안 하는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안 되네, 안 받는다. 동횡선 쪽 운행 중지라도 된 건가? 기다리면 오겠지. 먼저 마시고 있자]
카이토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놓고, 생맥주를 마신다.
나에게는 아무말도 해 주지 않는다. 역시 이 옷, 안 어울리는 걸까.
[신이는, 동횡선 어느 쪽이었죠?]
마이코가 물었다.
[히요시 쪽]
[카이토씨도 동횡선?]
[아니, 난 시모기타]
[와~! 대단하다! 그 쪽 방세 비싸지 않아요?]
[비싼 곳도 많지만, 우리집은 전혀. 꽤 낡은 아파트니까. 두 사람은 어디 사는 데? 혼자서 사는 거야?]
[부모님이랑 같이 삽니다. 전 키코미에서, 나미는 우에하라]
[방금전부터 멍하게 있는데, 그렇게 신경쓰이니? 신이가]
장난끼스런 얼굴의 카이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엣! 아니 그런 거......]라며 얼버무리는 중, [미안-!]이라는 말과 함께 신이 달려 왔다.
[사고로 전철이 멈춰버려서......]
[늦잖아! 니가 빨리 안 와서, 나미가 아까전부터 걱정했었다구]라며 카이토가 말하자, 신은 부끄러운 듯이 내 쪽을 바라보며, [미안해]라며 손을 합장해 용서를 구해 왔다.
그 날밤, 마이코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미, 나, 카이토씨 좋아하게 된 거 같아]
[엣......]
[카이토씨를, 좋아하게 된 거 같다구]
[그.......그래?. 응. 보니깐 그런 거 같더라......]
[나미는 신이 좋아하는 거 같던데. 무슨 일에든지 열심에다, 성실하고, 나미가 좋아하는 타입이지? 신이도 나미를 좋아하는 거 같으니, 좋겠다. 분명 잘 될거야! 문제는 내 쪽. 카이토씨 인기 많을 거 같으니깐. 나미, 응원해야돼!]
[......]
[나미, 듣고 있어?]
[으, 응. 듣고 있어. 아, 맞다, 마이코, 내일 2교시말인데......]
마구 쏟아지는 비가 차갑게 살을 파고든다. 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려 오는 빗방울은 볼까지 타고온다. 항상 시끌벅적했던 거리는 어느새인가 소리 한 점없는 정적에 휘감기고, 내 주위는 빛바랜 사진처럼 물들어져 있는 듯한 신비한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빗소리를 없애버릴만큼 시끄러운 차의 경적소리도, 빗소리를 한 층더 시끄럽게 해 주는 듯한 사람들의 시끌벅점도, 여느때와 다를바없는데...
이번 오디션에는 자신이 있었다. 연기 심사에서는,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실력으로 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떨어질리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는 무참히 짚밟혔다. 애초부터 배우란 직업은 나에겐 맞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무력감과 권태감밖에 남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지자, 이 때까지의 피로가 한 번에 온 몸을 엄습해 왔다. 감기에라도 걸린 것인가, 몸이 내 몸같지 않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녹색등이 점멸하고 있다. 열어보자 거기에는 "나미"라는 문자가...
"무슨 일이야?"
전화를 하자, 놀란 목소리로 나미가 받았다.
"앗! 혹시 착신들어가있었어? 미안! 휴대폰만지다가 버튼을 잘못 눌러버려서...금방 끊었는데..."
"저...혹시 약 가지고 있어?"
"응?"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게...몸살감기같아..."
"괜찮아? 열은?"
"모르겠어..."
"병원은? 아직 안 갔지?"
"응..."
"그럼 안 되지! 집, 시모기타라고 했지? 금방 갈게!"
나미에게 집 주소를 메일로 보냈을 때는 완전히 의식이 희미해져오고 있었다. 나...어째서 나미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휴대폰을 쥔 채 잠에 빠져든다.
열쇠는 잠궈져 있지 않았다. 들어가보니,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온 몸이 비에 젖은 채 침대에 쓰러져 있는 카이토.
"괜찮아? 들어갈게"
내 목소리에 깼는지 카이토는 천천히 눈을 떳다.
"나미...와 줬구나..."
"와 줬구나가 아니잖아! 그렇게 젖은 채 자면 감기가 더 악화된다구!"
"아...갈아입고 올게"
카이토는 T셔츠를 손에 든 채 세면장으로 향한다.
처음 들어오는 카이토의 방. 건물자체는 확실히 낡았지만, 디자인이 독특한 카펫과, 파도 무늬의 벽지가 바다라는 이미지를 물씬 풍겼다.
진주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 큰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램프,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파이프형의 풍경(風鈴), 천정에 매달린 유목. 가구도 흰색과 푸른 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오렌지 색깔의 램프는 마치 태양같다.
"미안...정말 와 주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옷을 갈아입고 온 카이토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시선을 떨어뜨린 채 내 앞에서 말했다.
"으으응, 집이 먼 것도 아닌데 뭘...일단 푹 자둬, 그동안 뭐라도 만들어 줄게."
"독같은 거 넣는 건 아니지? '날라리'를 이 세상에서 없앨 수 있는 찬스잖아?!"
"농담할 기운이 남아있으니 아직은 괜찮은가보구나?!"
침대에 누워서, 부엌에 서 있는 나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 방에 나미가 온 것은 이게 처음일텐데,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분위기 탓인지, 예전부터 주욱 이렇게 해 왔었던 것같은 착각이 일었다.
냄비에서 뿜어져나오는 따뜻한 기운이 나미의 향기와 섞여, 온 방안을 휘감는 듯한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간병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약하다는 이미지의 자신을 들키는 것이 싫었기에, 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에게는 아파도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감기 걸렸다고 해서 놀란 나머지 와 버렸지만...마이코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위급했고 하니, 괜찮겠지... 마이코 집은 너무 멀고, 우리집은 전철로도 3분밖에 안 걸리는 걸. 지금 내 모습, 카이토가 보고 있을까? 하지만, 저런 상태니깐, 내 모습같은 거 볼 기운도 없을거야. 한 번 뒤돌아볼까... 역시 그만두자. 눈이 맞았을 때 어떤 표정지어야 될 지도 모르겠고. 그건 그렇고, 잔뜩 젖은 채로 쓰러지다니... 꽤 감기가 지독했나봐. 아니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제 1 장 -네잎클로버-
-2006년7월-
[나미, 애 누구야?]
순간, 머리 속의 영상이 들킨 줄 알고, 심장이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나라사키 카이토......인데......]
[오옷! 애가 나라사키 카이토구나! 최근에, 잡지나 버스 손잡이 같은 데서 자주 봤지. 안기고 싶은 남자 1위라던가 뭐라던가, 꽤 시끌벅적한 놈이지?]
[그런 거 같네] 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슈이치는 전혀 신경도 않는 눈치다.
[흠~. 이런 녀석 어디가 좋은 거지? 난 전혀 모르겠는데......나미도 이 녀석 괜찮다고 생각해?]
[자,잘 모르겠는데...... 아, 그러고보니 내일 일찍 일어나야 되지 않어? 드라마같은 거 볼 시간있으면 목욕하러 가는 게 어때?]
잘 모르겠다......인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 때의 카이토. 스크린 너머의 카이토는, 전혀 모른다. 그 때로부터 3년. 그렇게 확실한 약속도 아니었고, 카이토도 기억하고 있을 리 없겠지.
1년에 1번, 약속의 날에, 그 장소에서...... 아무 생각없이, 떠오른 말을 한 것 뿐이야. 매년 이 때가 되면, 얼마만큼 내가, 쓸데없는 일에 힘들어 하고 있다고 생각해? 남자란 정말 제멋대로라니깐. 아니, 남자중에서도, 카이토만은 특별한 건지도 모르겠다. 슈이치는 절대로 그런 말 하지 않는 걸. "운명"이라던가 "영원"이라는 말, 입에 담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난 보통 사람들처럼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면 그걸로 된거야.
[나미, 나, 역시 연설같은 건 무리인거 같애]
전화는 마이코로부터 였다.
[잠,잠깐만, 뭐야, 이제와서. 내 결혼식에서는 친한 친구 대표로 니가 한다고 옛날부터 입버릇처럼 애기했잖아]
[그건 그렇지만......회사 동기라던가, 그 외에도 많잖아. 신이는?]
[신부 친구 대표인데 어째서 남자가 하냐구. 마이코, 제발 해줘.응?]
[응...... 그건그렇고, 나미 결혼하는 거, 카이토씨는 알고 있어?]
홀 쪽으로 눈을 돌린다. 슈이치는 아직 나올 거 같지도 않다.
[글쎄. 신이가 애기했다면......]
하지만 애기하지 않았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안 부르는거야? 결혼식에 나라사키 카이토가 축하해 주러 온다는 건 정말 대단한거아냐! 내가 나미라면 반드시 부를텐데]
[정말, 쓸데없는 소리말고. 결혼식에 사겼던 남자를 부르라니, 그런 말 금시초문이라구]
[그것도 그렇네]
웃으며 말하자 마이코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내일이지, 나미, 가는 거? 올해가 마지막이 될거같네]
방금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얼굴로 애기를 꺼내는 마이코 앞에서, 왜인지 갑자기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이다.
[갈리가 없잖아]
[후회안해?]
[후회라니. 그것보다 연설 잘 해]
[알았어. 그럼, 어떻게든 해 볼게]
주전자가 슈우슈우~ 소리를 낸다. 신랑방에서는, 슈이치의 콧노래가 들려온다. 그리고, TV 화면에서는, 내가 모르는 [나라사키 카이토]의 모습. 무의식적으로, 채널을 돌리고는, 달력을 본다.
내일은 7월 21일......인가.
후회같은 거 할리가 없잖아. 후회따위.......
-2003년3월-
[아르바이트하는 선배랑, 이번에 술마시자는 약속 했는데, 나미도 안 올래? 선배도 친구 데려 온대!]
마이코가 했던 이 말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감싸는, 벗꽃이 필 무렵이다. 이전까지의 살을 에위는 듯한 추위는, 마치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어떡하지. 나 그런 건 익숙하지 않아서......]
아직도 료선배 일 때문에 그러는거야? 저기, 신타로라는 선배, 정말 좋은 사람인데, 4월달부터 취직한다고 지금 일 그만둔대. 그래서, 송별회하는 건데....... 괜찮지? 친구 데려간다고 벌써 애기까지해놨단 말야]
반강제로 마이코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새로운 만남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자신. 그렇게 두근거린다는 느낌을 요근래에 잘 느끼지 못했던 나였다. 생각해보면, 벌써 이 때부터, 뭔지모를 운명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진하게 칠한 치크에, 옅은 홍조를 띠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시부야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Dexee Diner는, 멋진 커플이나 외국인들로 꽉 들어차있는, 아무리 봐도 나에게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었다. 점원에게 안내를 받으며, 나선계단을 오르자, 마이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져서 미안]
[우리도 방금 왔어. 주문도 아직 안 했는 걸. 이 쪽은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신타로선배. 그냥 신이라고 불러도 된대. 이 쪽이 나미. 같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이젠 정말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끈끈한 인연이죠]
[잠깐만, 떼고 싶다니.......정말 마이코도! 아,안녕하세요, 나미라고 합니다]
[아, 신타로입니다. 친구는, 늦잠자버려서 1시간 정도 늦을거라는. 미안해요. 올 때까지, 3명이서 마시고 있죠뭐]
숏 헤어에, 미소가 상냥한 신이는, 얼굴에 정직이라고 써 있을 정도로 착했다. 마이코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게, 한눈에 알 것같다.
술도 어느 정도 들어오자, 금방 달아오른 우리들은, 어느샌가, 사랑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신이선배는, 여자 친구 있어요?]
마이코가 갑자기 나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윽, 아픈 곳을. 그것도 스트레이트로. 여자 친구는 항상, 모집중~!]
장난섞인 몸짓으로, 신은 머리를 긁적였다.
[에~, 이렇게 좋은 선배를. 여자보는 눈이 높으신 거 아니예요? 나미같은 애는 어때요?]
[갑자기 그렇게 물어오면 뭐라고 대답해야 될 지......하하하...]
테이블 밑으로, 마이코의 발을 가볍게 찬다.
[나미만큼 귀여운 애를, 안 좋아하는 남자는 없겠지. 아, 마이코도 그렇고]
수줍은 듯이 웃는 신. 이런 사람과 사귀게 된다면, 분명 행복하겠지.
[난 그냥 덤으로 갖다 붙인거지?!]
라며 장난스런 얼굴의 마이코가, 문득 카운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저 사람, 잘 생겼는데~]
마이코가 향한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복잡한 표정으로, 한 남자가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약간 긴 앞머리에 감춰진, 크고, 빨려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
이런 첫인상에는, 확실히 눈길이 가기마련이겠지만, 내 타입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 날라리같아서, 난 별로......]
다음 순간, 화제에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는 투로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신이가 갑자기 외쳤다.
[뭐야, 카이토! 왔으면 말을 해야지~! 너도 어서 일루 와!]
그러자, 그 남자는 매우 귀찮은 듯이 글라스를 든 채, 신이의 옆 자리에 앉으며 악수를 권해 왔다.
[날라리 카이토라고 합니다]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는 나.
[날라리는, 늦게 온 주제에, 근처에서 몰래, 다른 사람 애기하는
거나 듣는군요]
내민 손을 뿌리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올려고 할 때였다.
[기다려!]
내 손을 붙잡고 카이토가 말한다.
[농담이야, 농담. 내가 별로 관심없어하는 화제로 너무 재미있게 애기하고 있길래 끼어 들 타이밍을 놓친 거 뿐이야. 게다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애기하면 듣기 싫어도 들린다구. 들리기 싫다면, 이 애처럼 작은 목소리로 애기하든가. 어쨌든......화 풀고 마시자]
[나미, 나를 봐서라도, 용서 해 주라. 이 녀석, 좀 별난 구석은 있지만, 알고보면 꽤 괜찮은 녀석이야]
신이의 말을 듣고, 일단 잡힌 손을 푼 난, 의자에 다시 앉아, 글라스에 들어 있던 맥주를 단 숨에 마셔버렸다.
[이 애, 착한 애니깐, 너무 놀리지 말아주세요. 전 괜찮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필 해 주는 마이코였지만, 그 내용은 전혀 내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뭐야, 이 사람! 어디가 좋다는 건지! 엄청 열받는 구만.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야! 생각하면 할수록 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를려고 했다. 하지만, 방금전까지 강하게 붙잡혔던 손에서 전해져왔던, 카이토의 온기에, 이상하게도 심장박동이 가파져 왔다. 분명히 술때문에 이럴거야. 술때문에!
일단 애기를 해 보니, 확실히 날라리는 아닌 듯 했다. 어딘지 모르게 대하기 힘들었지만, 그건 아직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확실히 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카이토를 대하고 있자니, 만나서 아직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아주 친하게, 최소한 주위에서는 그렇게 보일정도로, 과거의 연애담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까지 애기하고 있는 이 쪽이, 오히려 어떻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배우였군요! 그래서, 그렇게 분위기가 틀렸구나! 카이토씨는 여자 친구 있으세요?]
카이토가 오기전보다, 확실히 누가봐도 기분이 들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아진 마이코가 물었다.
[그런 걸 물어서 어쩔려고? 설마 나랑 사귀고 싶은 거야?]
퉁명스럽게 되묻는 카이토.
[어이, 카이토. 그렇게 말할 거 없잖아. 이런 술자리에서 당연히 물어 볼 수도 있는 말인데. 그래, 인사같은거야 인사. 그지? 마이코]
신이가 분위기를 흐트리지않기 위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건 안 물어봤으면 하는데. 사랑이라던가, 연애라던가, 나한테 있어선 지겨운 화제거리거든. 있든, 없든 상관없잖아. 정말 좋아한다면, 여자 친구가 있든, 결혼을 했든, 빼앗으면 되는 거지. 임자있다고 포기? 그래서 포기하는 거라면 처음부터 그 정도 레벨의 사랑밖에 안 됐다는거야. 그런 사랑 난 필요없네]
카이토는 점원에게 코로나를 주문한다.
[이 녀석, 여자 친구없어서 이런 소리하는 거니깐,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뭐라고?! 어이, 신! 너야말로, 없잖아! 나 참, 정말 너란 녀석은 여자란 존재에대해서 너무 약하다니깐. 도데체 넌 어느 편이냐? 요전번에 술마시고 뻗은 널 업고 집까지 바래다 준 사람은 누구였더라?]
카이토는 신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 음. 자,자 마시자. 나미는 뭐 마실래? 둘 다 술은 센 편이지? 나 같은 경우는, 너무 약해서. 벌써 얼굴 벌개졌네~]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신이. 정말 상냥한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친구란 카이토는 정반대에 마이페이스적. 그래서 마음이 맞는 걸까나. 왠지 모르게 좋은 콤비란 느낌이다. 그건 그렇다쳐도, 방금전 한 말. 외모는 놀기좋아하는 사람같아도, 사실은 꽤 생각이 깊은 사림일지도. "날라리"란 말해서, 상처받은 걸까......
[어?! 카이토?]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자, 훨친한 키에, 얼굴은 작은, 누가봐도 일반인과는 좀 다르다는 인상을 풍기는 여성.
[오옷! 미라이! 오늘 촬영아니었어?]
너무나 친하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두사람. 왠지 보고 있으면 실례일 거 같은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다.
[신도 있었네?!]라며 말을 걸었지만, 금방 카이토 쪽을 보고는, 대화를 계속한다.
[빨리 끝나서, 모델 동료랑, 스태프랑 마시러 왔어. 친구?]
라며, 우리들 쪽을 바라본다.
[아아, 방금 만났어. 신의 바이트 동료 마이코와, 그 친구 나미. 이녀석은, 내 쌍둥이 여동생같은 녀석으로, 미라이. 자주 잡지에 나오는데, 알아 보겠어?]
"Hey Mirai, where is the men's room?"(미라이, 화장실 어디야?)
"Over there."(건너편이야)
"Are they your friends? Everybody is waiting for you."(그들은 친구? 모드들 기다리고 있다구)
"OK, I'll go downstairs soon."(알았어, 금방 내려 갈게)
[미안, 모드들 기다리는 거 같으니, 난 갈게. 밑에서 마시고 있거든. 아, 그 전에, 나도 화장실!]
그렇게 말하고, 아무리 봐도 모델로 밖에 보이지않는 외국인남성의 뒤를 쫓는다.
[우리들, 슬슬 나갈까?]
방금 주문한 코로나를 한 번에 마셔버리는 카이토.
마이코와 신이 계산을 하는 동안, 카이토와 단 둘이 되어서, 용기를 내어 물어 봤다.
[저기, 날라리따위 말해서 미안]
[그런 거 신경 안 써. 정말, 나미는 재미있을정도로 진지하다니까]
라고 말하는 카이토의 미소는 부자연에다, 미라이에게 보여주었던, 환한 미소와는 완전 틀리다. 좀 더 억지 웃음이라도 환하게 웃으면 좋을텐데.
[정말 배우?]
[약소프로덕션 소속이고, 아직 전혀 좋은 역도 받지 못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달9의 주역을 할거야!]
카이토는 눈을 빛낸다. 미라이씨에게 지기는 싫은 거겠지.
[연극같은 데도 나와? 한번 보고 싶네]
[아아, 그럼, 안내장 보내 줄게. 한 번 연락줘]
테이블에 놓여 있던 페이퍼냅킨에, 핸드폰번호와 메일주소를 휘갈겨 써 주었다.
가게를 나오자, 마음 편한 봄의 밤바람이 소리를 내어, 우리들을 지나간다. 카이토와 신이 없어지자, 금방 마이코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엄청났었지! 예쁘고, 스타일도 좋고, 영어도 잘하고! 모델 미라이지? 나 알고 있었다고! 잡지에서 본 적 있지롱! 카이토의 여자 친구일까나?]
[글쎄. 하지만 여자 친구 없다고......]
카이토가 준 페이퍼 냅킨이 들어 있는 백을 바로 잡았다.
일단 한 번 연락줘......인가. 페이퍼 냅킨을 손에 쥐고, 휴대폰을 열고, 그리고 다시 닫는다. 이걸 몇번 반복한 건지. 그 후 바로, 연락처만 적고, 메일보내두었으면 좋았다. 전화하는 게 좋을 지, 메일이 좋을 지, 어떤 타이밍으로 연락하면 좋을 지, 망설이는 동안 3일이 지났다. 연락안 하는 건 오히려 실례이겠고, 앞으로 몇일 더 지나버리면 더더욱 연락하기 거북해 질것이다. 이제 너무 빨라서, "날 노리고 있어"같이 착각 받을 일도 없을테고, 오늘이 딱 좋을 때다. 마음을 먹고, 한 번 더, 휴대폰을 열고, 메일을 적기 시작한다.
나미입니다! 연락이 늦어져서 미안. 그 후 좀 바빠져서. 요전 번은 즐거웠어! 연극 할 때되면 가르쳐줘 [날라리]한테 가르쳐 주는 건 무섭지만.......농담(^^). 내 주소는 이거. 번호는080-XXXX-XXXX야. 언제라도 연락줘
이렇게 보내면, 너무 가벼운 느낌일까. 갑자기 사과하는 것도, 이상하고. 별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날라리"란 것도 농담으로 받아 들이면 되는 거지만, 집요하다고 생각 될 지도. 게다가, "언제라도 연락줘"같은 말 적어서, 연락을 가디라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싫고......
나미입니다. 이전 번은 즐거웠습니다. 연글 할 때 되면 가르쳐 주세요. 보러 가겠습니다. 제 메일 주소를 보냅니다. 번호는 080-XXXX-XXXX입니다.
조금 쌀쌀한 느낌도 들지만, 이 정도로 괜찮겠지. 정말 나란 애도 메일 하나 보내는 것 정도로 뭘 이렇게 고민한담. 바보같아.
[카이토, 방금 전화 안 울렸니?] 라고 신이 말하기에, 휴대폰을 꺼내 보자, 빨간 불이 점멸하고 있었다.
[정말이다. 메일 왔네. 그건그렇고, 너, 정말 잘 듣네]
화면에 눈을 옮겼다. 등록하지 않은 주소로부터의 메일.
[아아! 나미한테다]
[엣! 카이토, 어느새 나미의......]
놀란 목소리로, 왠지 모르게 동요하는 몸짓으로, 글라스를 입에 갖다댄다.
[저번에 마셨을 때, 가르쳐 줬어. 저기, 너희들이 계산하고 있을 때......뭘 그렇게 신경써? 앗! 라는 것은, 너, 나미를! 그런거야?]
신의 어깨에 팔꿈치를 얹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아, 그치만, 뭐, 조금은 호감이 있다고 할까......그렇지만, 카이토가 휴대폰번호를 가르쳐 주다니, 새삼스럽네]
라며 신은 진토닉크를 한 번에 비울려고 하지만, 입에 너무 많이 넣어 옆으로 흘린다.
[왓, 미안미안. 취한 건가]
볼은 빨갛지만, 확실히, 술 때문은 아닌 거 같다.
[저번에 즐거웠으니, 또 다같이 마실까! 이번 토요일은? 넌 마이코에게 말 해놔. 나중에, 나미에게 메일 보내 둘테니깐]
신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는다. 알기 쉬운 녀석.
메일을 보낸 거 뿐인데, 큰 일을 치른 것같은 기분에, LUSH의 바스범을 넣고, 여느때보다는 천천히 목욕을 즐겼다. 목욕을 끝내고, 컨트렉스를 마시자, 몸 전체로 수분이 공급된다. 기분 좋구나!
문득 휴대폰을 보자, 빨간 라이트가 점멸하고 있다. 카이토일까...... 그렇게 빨리 답변할 타입은 아닌 거 같으니, 마이코일지도...... 두근두근거리며, 휴대폰을 연다.
이번 토요일, 같이 안 마실래? 19시에 저번에 마셨던 가게에서, 카이토
퉁명스러운 메일. 그렇게 고민해서 보낸 메일의 답장이 이거? 게다가 갑자기, 데이트 신청이라니, 역시 날라리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도, 신기하게도 몸이 달아올라왔다. 너무 해를 쬐인 걸까. 한 잔 더, 컨트렉스를 마시고, 한 번 더 메일을 읽는다. 이 쪽 사정은 묻지도 않고 시간, 장소를 지정하다니, 정말 마음대로구만. 하지만, 메일 보낸 거 괜찮았던 거 같아 안심. 역시 "날라리"라고 써 보내버리는 게 나았을까...... 바로 답장을 적었다.
응. 토요일 19시에 그 가게에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토요일의 시부야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치공원앞광장은 오솔길 옆으로, 스크럼블 교차점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섰다. 이만큼의 사람이 있으면, 지금 여기에 있어, 이 순간에는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끼리, 언젠가 만나, 사랑을 하고......같은 일이 일어날까. 보통때라면 질려 버릴 사람들의 물결에, 이런 생각이, 문득 머리속을 스쳤을 때, [술집은 어때요?]라며 캐치의 오빠가 말을 걸어 왔다. [약속 있습니다]라고 말 했을 때, 신호가 파란 불로 바껴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래, 약속 했어. 이제부터 카이토와 만날거야. 어째서 날 만나자고 하는 걸까. 뭔가 상담할 꺼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에게? 미라이씨의 일? 아니면, 신이 마이코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 일로 나에게 협력을 해 달라는 걸지도......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가게를 향하고 있자, 뒤에서 갑자기, [나미!]라는 많이 들었던 목소리. 돌아보자, 새로 산 원피스를 입은 마이코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왠일로 빨리 왔네]
[마이코! 어쩐 일이야?]
보이기 싫은 장면이라도 보여 버린 거 같은 기분에,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나야 항상 늦는 일은 없으니까~. 아앗! 이거? 어제 사버렸어. 어때?]
상황을 깨달은 난, [응, 어울려]라고 말했다.
확실히, 카이토에게 받은 메일에는 둘이서만이라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마이코나 신도 함께 할 꺼라는 건 당연한 거였다. 어째서 데이트라고 생각해버린걸까. 마음대로 착각해 있었던 자신을, 내심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게에 들어간다. 카이토도 신도 아직 오지 않았다.
[음? 나미, 평소랑은 왠지 느낌이 틀리네?]
[그래? 기분탓이겠지?]
마이코에게 주문을 부탁해두고, 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파운데이션으로 치크와 섀도우를 덮고, 글로스도 닦아냈다.
[그럴리가 없잖아......]
혼잣말을 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평소의 자기 얼굴. 내츄럴 메이크에는 어울리지 않는, 산 지 얼마안되는 핑크의 옷이 두드러져 보인다.
자리에 돌아올려고 하자, 마이코 앞에 앉은 카이토의 뒷모습이 보인다.
[앗, 나미, 어서와~! 카이토도 이 원피스 잘 어울린대!]
[오! 왔냐?. 어울리니깐 어울린다고 말한 거 뿐. 신은 아직 안 온거 같아. 그 녀석, 지각같은 건 안 하는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안 되네, 안 받는다. 동횡선 쪽 운행 중지라도 된 건가? 기다리면 오겠지. 먼저 마시고 있자]
카이토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놓고, 생맥주를 마신다.
나에게는 아무말도 해 주지 않는다. 역시 이 옷, 안 어울리는 걸까.
[신이는, 동횡선 어느 쪽이었죠?]
마이코가 물었다.
[히요시 쪽]
[카이토씨도 동횡선?]
[아니, 난 시모기타]
[와~! 대단하다! 그 쪽 방세 비싸지 않아요?]
[비싼 곳도 많지만, 우리집은 전혀. 꽤 낡은 아파트니까. 두 사람은 어디 사는 데? 혼자서 사는 거야?]
[부모님이랑 같이 삽니다. 전 키코미에서, 나미는 우에하라]
[방금전부터 멍하게 있는데, 그렇게 신경쓰이니? 신이가]
장난끼스런 얼굴의 카이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엣! 아니 그런 거......]라며 얼버무리는 중, [미안-!]이라는 말과 함께 신이 달려 왔다.
[사고로 전철이 멈춰버려서......]
[늦잖아! 니가 빨리 안 와서, 나미가 아까전부터 걱정했었다구]라며 카이토가 말하자, 신은 부끄러운 듯이 내 쪽을 바라보며, [미안해]라며 손을 합장해 용서를 구해 왔다.
그 날밤, 마이코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미, 나, 카이토씨 좋아하게 된 거 같아]
[엣......]
[카이토씨를, 좋아하게 된 거 같다구]
[그.......그래?. 응. 보니깐 그런 거 같더라......]
[나미는 신이 좋아하는 거 같던데. 무슨 일에든지 열심에다, 성실하고, 나미가 좋아하는 타입이지? 신이도 나미를 좋아하는 거 같으니, 좋겠다. 분명 잘 될거야! 문제는 내 쪽. 카이토씨 인기 많을 거 같으니깐. 나미, 응원해야돼!]
[......]
[나미, 듣고 있어?]
[으, 응. 듣고 있어. 아, 맞다, 마이코, 내일 2교시말인데......]
마구 쏟아지는 비가 차갑게 살을 파고든다. 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려 오는 빗방울은 볼까지 타고온다. 항상 시끌벅적했던 거리는 어느새인가 소리 한 점없는 정적에 휘감기고, 내 주위는 빛바랜 사진처럼 물들어져 있는 듯한 신비한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빗소리를 없애버릴만큼 시끄러운 차의 경적소리도, 빗소리를 한 층더 시끄럽게 해 주는 듯한 사람들의 시끌벅점도, 여느때와 다를바없는데...
이번 오디션에는 자신이 있었다. 연기 심사에서는,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실력으로 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떨어질리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는 무참히 짚밟혔다. 애초부터 배우란 직업은 나에겐 맞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무력감과 권태감밖에 남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지자, 이 때까지의 피로가 한 번에 온 몸을 엄습해 왔다. 감기에라도 걸린 것인가, 몸이 내 몸같지 않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녹색등이 점멸하고 있다. 열어보자 거기에는 "나미"라는 문자가...
"무슨 일이야?"
전화를 하자, 놀란 목소리로 나미가 받았다.
"앗! 혹시 착신들어가있었어? 미안! 휴대폰만지다가 버튼을 잘못 눌러버려서...금방 끊었는데..."
"저...혹시 약 가지고 있어?"
"응?"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게...몸살감기같아..."
"괜찮아? 열은?"
"모르겠어..."
"병원은? 아직 안 갔지?"
"응..."
"그럼 안 되지! 집, 시모기타라고 했지? 금방 갈게!"
나미에게 집 주소를 메일로 보냈을 때는 완전히 의식이 희미해져오고 있었다. 나...어째서 나미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휴대폰을 쥔 채 잠에 빠져든다.
열쇠는 잠궈져 있지 않았다. 들어가보니,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온 몸이 비에 젖은 채 침대에 쓰러져 있는 카이토.
"괜찮아? 들어갈게"
내 목소리에 깼는지 카이토는 천천히 눈을 떳다.
"나미...와 줬구나..."
"와 줬구나가 아니잖아! 그렇게 젖은 채 자면 감기가 더 악화된다구!"
"아...갈아입고 올게"
카이토는 T셔츠를 손에 든 채 세면장으로 향한다.
처음 들어오는 카이토의 방. 건물자체는 확실히 낡았지만, 디자인이 독특한 카펫과, 파도 무늬의 벽지가 바다라는 이미지를 물씬 풍겼다.
진주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 큰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램프,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파이프형의 풍경(風鈴), 천정에 매달린 유목. 가구도 흰색과 푸른 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오렌지 색깔의 램프는 마치 태양같다.
"미안...정말 와 주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옷을 갈아입고 온 카이토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시선을 떨어뜨린 채 내 앞에서 말했다.
"으으응, 집이 먼 것도 아닌데 뭘...일단 푹 자둬, 그동안 뭐라도 만들어 줄게."
"독같은 거 넣는 건 아니지? '날라리'를 이 세상에서 없앨 수 있는 찬스잖아?!"
"농담할 기운이 남아있으니 아직은 괜찮은가보구나?!"
침대에 누워서, 부엌에 서 있는 나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 방에 나미가 온 것은 이게 처음일텐데,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분위기 탓인지, 예전부터 주욱 이렇게 해 왔었던 것같은 착각이 일었다.
냄비에서 뿜어져나오는 따뜻한 기운이 나미의 향기와 섞여, 온 방안을 휘감는 듯한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간병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약하다는 이미지의 자신을 들키는 것이 싫었기에, 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에게는 아파도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감기 걸렸다고 해서 놀란 나머지 와 버렸지만...마이코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위급했고 하니, 괜찮겠지... 마이코 집은 너무 멀고, 우리집은 전철로도 3분밖에 안 걸리는 걸. 지금 내 모습, 카이토가 보고 있을까? 하지만, 저런 상태니깐, 내 모습같은 거 볼 기운도 없을거야. 한 번 뒤돌아볼까... 역시 그만두자. 눈이 맞았을 때 어떤 표정지어야 될 지도 모르겠고. 그건 그렇고, 잔뜩 젖은 채로 쓰러지다니... 꽤 감기가 지독했나봐. 아니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